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보라 그가 오시나니(막:1-18) 2014. 12. 7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4-12-09 17:54 조회 18,880 댓글 0
 
1923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사문제에 대해 체계적이고 간결하며 잘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는 주간 잡지를 만들고자 했던 미국의 두 젊은 신문기자가 있었다. 헨리 R. 루스(Henry Robinson Luce, 1898-1967)와 브리턴 해든은 잡지의 이름을 무엇이라 정할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된 것이 ‘TIME'이란 잡지다. 그해 3월 3일 첫 창간호가 나왔다. 브리턴 해든은편집장으로, 헨리 루스는 경영자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 기사들은 내신·외신·경제·교육·과학·의학·법률·종교·스포츠·서적·음악과 미술과 연극과 오페라 등과 같이 모든 분야를 짧고 간결하게 총 망라한다는 목표였다. 함께 시작한지 6년 후에 브리턴 해든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헨리 루스는 1964년까지 41년 동안이나 타임지의 발전의 중심인물로 뛰었다. 나중 그의 역할a은 편집국장이었다. 헨리 루스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장로교 선교사인헨리 윈터스 루스( Henry Winters Luce)의 아들로 중국에서 태어났다. 10살 때에 중국 연타이의 영국계 학교에 다니다가 영국으로 가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미국에 건너가서 공부하고 예일대학교를 졸업했다. 학생시절에 교지를 만드는 편집일을 하기도 했다. ‘타임’지를 함께 시작한 브리턴 해든은 예일 동창생이다. 헨리 루스는 나중에 ‘포츈’(Fortune), ‘라이프’(Life)같은 잡지도 만들어 냈다.

그 시간이란 것이 무엇인가. 올해도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요즘은 ‘지금 몇 시나 되었나요?’하고 물어 오는 이들도 거의 없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묻는 경우도 거의 없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핸드 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그렇게 시간을 알리는 장치가 거의 누구에게나 들려 있긴 하지만 그 시간이란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서나 일정하게 주어지고 또한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다. 시간과 인물은 역사 속에 흘러가고 사라져간다. 그러나 역사와 시간 속에 점점 보석처럼 빛이 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하나님이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라와 세계와 역사는 그 시대마다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서 각 분야에 역사적인 공헌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어떤 분야에 자기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그를 높이기보다는 짓 밝으려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수탈당한 가난이 계속되고 있었고 정치적인 압제가 심각하였다. 백성들은 심신이 지친채로 그들의 삶을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구출해 줄 위인이 탄생하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당시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을 내려서 로마의 권력 아래 있는 모든 백성들은 제 고향에 가서 호적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호적 명령은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으로 있던 때에 처음으로 시행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기 위하여 제각각 일손을 놓고 고향을 찾아가서 호적하여야 했다. 그 때 마침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남편될 요셉을 따라 부른 배로 나사렛 동네에서 베들레헴까지 나귀를 타고 가서 호적을 하게 되었다. 마침 그 곳,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에 산통을 겪고 아기 예수를 낳았다. 머물 곳을 미리 예약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을 받아 주는 집이 없어서 말들이 머무는 곳인 마구간 한 귀퉁이에서 아기를 낳았고 말이 풀을 먹는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강보에 싸서 뉘었다.

오래도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마태는 1장에서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길게 썼고 누가도 누가복음의 시작부터 예수님이 탄생하기까지의 배경을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요한도 깊이 있는 신학적인 설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을 써 내려 갔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전혀 달랐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마가복은 제 1장 1절의 선언은 마치도 창세기의 시작과도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 말이다. 여기‘ 시작’이란 단어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이다. 이것은 예사롭거나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의도된 일치인 것이다. 헬라어로 ‘아르케’(archae-)란 ‘시작’을 말한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고고학(archaeology), 시조새(archaeopterix)같은 용어들이다. 이는 ‘원시. 최초’의 뜻이며 철학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해서 ‘원리, 원인’등을 설명하기도 한다. 창세기의 ‘태초’라는 ‘베레슈트’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진리와 복음의 말씀으로 오셔서 새로운 재창조의 시작을 알리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음의 시작이신 것을 신학적으로 논증하는 유명한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시며 그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마가복음의 시작이다. 그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으로 보냄을 받은 인물이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요, 그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자로 오신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나 스스로 겸손하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였다. 대강절에 묵상하는 오늘 본문에는 세례 요한을 말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의 길을 준비하고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이로 와서 그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였던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과 더불어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대강절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성탄트리나 크리스마스선물 박스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공이시다. 이사야서 40장 3절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예언의 주인공으로 오신 그는 과연 누구신가.


회개와 죄 사함을 이루실 이.
이 세상은 죄의 감옥과도 같다. 날마다 신문과 TV와 인터넷 실시간 뉴스에 도배하는 사건들이 죄와 관련된 소식들로 넘쳐 난다. 대학의 교수를 지낸 이가 어째다든지, 어느 도시에서는 여성의 시체를 토막살해하고 장기를 모두 없애 버렸다든지 하는 끔찍한 소식들이 이 대강절기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 처처에서는 전쟁과 테러의 소식과 수 십 만 명의 사망자와 수백만명의 난민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아직까지 4년째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으로 죽은 사람만 20만 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그 중에는 삼분의 일이 일반 시민들이라고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간의 가자지구의 불화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물론 들려오는 소식들 중에는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미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소식은 천한 만민들에게 좋은 소식 즉 복음이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2장 16절 이하에 보면 불안해진 헤롯왕은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긴장하여 베들레헴 근동의 두 살 미만의 어린 남자 아이들을 다 죽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앞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서로 미워하고 남을 미워하고 자기 스스로를 미워하며 사는 것이 죄다. 믿음의 원천이신 하나님 앞에서 의심과 미혹의 영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것이 죄다. 소망으로 가득하여야할 세상에서 절망과 낙담과 불안과 초조와 무기력과 답답함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 죄다. 기쁨으로 가득하게 살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 우울과 슬픔과 죽음의 영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것이 죄다. 화평한 관계 속에 살고 평화를 이루며 살며 화목한 서로의 삶을 가꾸어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화를 조성하고 원만한 관계를 깨트리며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죄다. 오래 참고 인내하며 길이길이 참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급하고 참지 못하고 그래서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죄다. 자비하지 못하고 착하게 살지 못하고 충성스럽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며 절제 하지 못하는 그 모든 삶의 모습이 죄 투성이의 상태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 사건 이후로 인간은 악을 길을 걸어 왔다. 아담이 하와를 통하여 낳은 아들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쳐 죽였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첫째 아담에게서 시작된 이 죄와 악의 문제를 해결할 분으로 오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사함 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게 되는 것이다.

죄는 죄를 낳고 사망은 사망을 낳는다. 뱀 알을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뱀이 태어나는 법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6:23)고 하였다. 왜 회개하여야 하는가. 왜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가. ‘죄사함’,‘거듭남의 법칙’을 갖고 자신들에게로만 와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온 서울 장안을 시끌법적하게 하던 이단의 앞잡이가 사기 횡령 혐의를 받고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나.

기독교와 복음을 악용하면 그 끝은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에는 모두가 다 죄의 종이었으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는 로마서 6장 18절의 말씀의 주인공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물 세례는 죄가 무엇인지, 회개가 왜 필요한 지를 깨우쳐 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물 세례는 마치도 유대인들에게서 행해지던 할례와 같은 것이다. 할례를 통하여 유대인임을 증거 하듯이 물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물 자체가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인간에게 저절로 회개의 열매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물로 세례 받고, 죄사함을 위하여 물로 세례를 받지만 그에 합당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야만 회개와 죄 사함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이다. 세례 즉 침례란 물속에서 나의 자아가 죽고 새롭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고백이며 선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새 생명을 선물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롬6:4-5) 이것을 로마서 6장 5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설명하여 주었다.


세례 요한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과 천배, 만 배, 억만 배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죄의 짐이다. 인간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왕궁에서 잠을 자도 편하지 못하고, 상아궁에 눕고 보석으로 만든 침상에 누워도 편하지 못하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니까 불안하여 견뎌 하지 못하는 장면이 창세기 4장에 자세하게 나오지 않나. 그 죄라는 것은 누가 무어라고 하지 않아도 죄가 스스로 죄인을 목 조이는 것이다. 그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죄와 악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죄를 해결하는 힘은 법이 아니다. 이 세상에 육법전서가 없어서 죄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법은 죄를 죄로 정하는 것뿐이다. 성경대로 하면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뿐이다. 율법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 로마서 7장 13절 말씀처럼 ‘계명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도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던 사도 바울인데도 그는 로마서 7장 14절에서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말한다. 악을 행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라고 말이다. 그렇다. 인간의 속에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행위 속에 계속하여 악을 행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바울의 고민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려 하는 그것이었다. 그 바울의 고민이 지금 나의 고민이며 우리의 고민이 아닌가.

잘 살게 된 것과 이 문제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처처에 어디를 가나 자리 잡고 살고 잘 적응하며 잘 산다. 몇 해 전 미국의 일간지 중의 하나인 시카고트리뷴지(誌)에서 미국에 살고 있는 49개 소수민족(Minority Group)을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가 있다. 그 조사에 의하면 49개의 미국 내 소수민족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정착하는 민족이 코리안(Korean)이라고 한다. 우리 국민들의 근성(根性)이 총명하고 끈기가 있기에,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다. 한국인은 미국 사회에서 가장 적응력이 우수하고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해 가는 민족들 중의 하나이다.
또한 지난 해 4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한국은 왜 강한가?"란 제목의 특집을 실은 적이 있는데 3가지 점을 들었다. 첫째가 한국인 특유의 ‘헝그리 정신’(Hungry Spirit)이다. 둘째가 한국인들이 좁은 국내시장을 극복하기 위하여 세계로 뻗어나간 ‘세계화 정신’(Globalism)이다. 셋째가 한국인들의 뛰어난 ‘유연성’(flexibility, 적응성, 융통성)이다. 

이런 국민적 자질과 특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분출해 나갈 때에 대한민국은 열방 중의 강인한 나라로 성장해 갈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교회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민족에게 가난을 극복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살줄 아는 힘이 있는 것 귀하지만 이젠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복음 회복 운동을 벌여야 한다. 진정한 인간의 능력은 학업 능력이나 경제능력이나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연구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믿고 섬기는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여야만 한다.

1885년 4월 5일, 감리교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부부와 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두가 한 배를 타고 인천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29년 세월이 흘렀다. 내년 4월이면 한국 교회는 개신교 선교 130주년을 맞게 된다. 그 130여 년 동안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가 주목하는 괄목할만한 경이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요즘 한국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점점 잃어 가는 것에 대하여 우려 하는 목소리가 높아만 간다. 이는 너의 문제만도 아니고 나의 문제만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숙제이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외관이 크고 화려하여도 그 엔진과 연료와 전기 장치와 타이어의 상태 등이 다 제대로 되어야만 원하는 곳을 향하여 질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보이지 않는 자동차의 기계 구조와 기능 중의 그 어느 한 가지만 이상이 생겨도 자동차는 꼼짝 달싹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원래 창조 받은 그 원 상태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재창조의 경험을 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CCC 사영리에 나오는 전도의 교훈처럼 도덕이나 윤리나 학문이나 수양으로 되지 못한다. 오직 복음으로 거듭나야만한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지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떠나가 버리지 않았나.

그러므로 능력 많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야만 한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주만물 삼라만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이다. 인간의 몸은 ‘탄소, 나트륨, 인, 철 등의 원자의 결합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원자, 인간을 완성하다>(Your Atomic Self)라는 책을 쓴 커트 스테이져는 인간을 양자물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이처럼 주장한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맞다. 때가 되면 인간의 육신은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물리학자의 눈으로 분석하면 그러할지라도 인간 그 자체에 엄청난 신비와 능력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겨 들어야만 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딸로 영생하는 존재들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이.
예수님은 이 땅에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보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한복음 3장에 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 갔다가 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거듭남에 대하여 못 알아 듯던 니고데모에게 좀 더 해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 너무 복된 절기이다. 교회만 다니지 말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와 더불어 ‘보혜사 성령이신 진리의 성령’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신 내용이 바로 이 ‘진리의 성령’에 관한 말씀이시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 가고, 명문 대학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 받아야 한다. 우리 성인들도 사회생활 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요즘 수요일 밤마다 남성제자 훈련학교에 수요일 밤 기도회를 마친 남성들이 몇몇 함께 모여서 밤 10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씨름하고 있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꽤나 잘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조금만 깊이 들어 가 보아도 나의 신앙상태가 얼마나 부실한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교회에 등록한 등록 교인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길을 그리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세례 요한에게서 물 세례를 받았던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나 씩 둘씩 세례 요한의 곁을 떠나서 예수님께로 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12제자들을 부르셨고 나중에는 70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물론 제자로 부름을 받고도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의 곁을 배반하고 떠나가 버린 불행한 제자도 없지는 않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신자가 되기 위해서도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리의 성령이신 그 성령에 항상 충만한 주님이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요단 강에서 물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충만하게 그에게 임하였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기뻐하시는 아들이셨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실 때에도 시작부터 끝까지 항상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사역들이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상태이셨다. 누가복음 4장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라고 하였다. 이는 사십일 금식 기도를 마치고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후에 곧 이어진 사역의 장면을 설명한 내용이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생활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셨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구하면 받을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교훈해 주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의 공식이다. 기도의 원리이다. 구하고 찾고 문 두드리는 이들에게 그런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될 것이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1-13)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 예수님께 임하신 그 성령을 우리 각 사람에게도 물 붓듯이 부어 주시고 불처럼 임하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 성령 충만한 가정, 성령 충만한 직장과 일터, 성령 충만한 교회 생활이 되기를 소망하자. 누가복음 10장 17절 이하에 보면, 한 번은 칠십인의 제자들이 기뻐하며 예수님께 돌아 왔다. 저들을 자기들끼리 나가서 돌아 다미며 사역해 보았는데 귀신이 항복하는 것을 체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그렇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우리의 생각과 입의 말과 세상 중에서 행하는 우리의 범사를 주님께서 모두 다 곁에 계신 것처럼 자세하게 헤아려 아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나 혼자 외롭게 살아가듯이 살아가지 말고 항상 언제 어디서나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생각하고 더불어 대화하고 주께 기도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성령 세례 받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능력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따뜻한 물로 목욕하면 우리의 몸이 따뜻하고 깨끗하여 지듯이 이 좋고 복된 계절 대강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부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한 삶을 살자.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자손에게 가르치라(신..최고관리자
"하나님의 열심"최고관리자
"나는 비록 약하나"최고관리자
"자손에게 가르치라"최고관리자
"너 예수께 조용히 ..최고관리자
외쳐 말하라(렘31:..최고관리자
"주의 진리 위해 십..최고관리자
"한달란트"최고관리자
"외쳐 말하라"최고관리자
"생명의 주께 면류관..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