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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감사제를 드리라(시107:10-22) 2014.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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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1-09 23:21 조회 18,652 댓글 0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목적과 그 목적에 따른 제사의 종류와 제물의 종류, 그리고 제사의 방법과 제사의 절차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그 모든 제사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제사의 목적에 따라서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의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제사의 방법에 따라서 구분하면 크게 네가지다. 흠 없는 수소와 암소, 수양이나 암양, 수 염소나 암 염소 그리고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혹은 고운 곡식 가루와 기름과 유향 등을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을 화제(火祭)라고 한다. 그리고 화목제 희생 제물의 가슴이나 첫 곡식의 단이나 첫 이삭의 떡을 제물로 삼아서 제단 앞에서 흔들어 드리는 것을 요제(搖祭)라고 한다. 화목제 제물의 우편 뒷다리나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든 가루 떡이나 타작마당의 곡식이나 십일조나 포도주나 기름들을 높이 치켜들어서 드리는 제사는 거제(擧祭)라고 한다. 그리고 포도주나 독주를 다른 제물과 함께 제단에 쏟아 부어 드리는 전제(奠祭)라고 한다.


본문 22절에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씀하는‘감사제를 드리라’는 말씀은 ‘화목제’를 말씀하는 것이다. 화목제는 가정의 형편에 따라서 수소나 암소, 수양이나 암양 혹은 염소를 제물로 삼았다. 화목제를 감사제로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과 예배자의 화목과 화친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제는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 가정에 내려 주신 은총과 은혜와 구원의 축복을 감사하는 제사이다. 감사제인 화목제의 제물의 피는 제단의 사면에 뿌렸다. 제물의 내장에 덥힌 기름과 내자에 붙어 있는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을 제단에 불살라야 했다. 그리고 요제로 드려진 제물의 가슴살과 거제로 드려진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과 그 가족만이 먹을 수 있었다.  나머지 부분은 그 감사제에 참여한 모든 백성들이 다 같이 그 당일에 모두 다 나누어 먹어야 했다. 감사제로 드린 제물은 당일에 먹고, 서원제나 화목제로 드린 제물을 그 다음 날까지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감사제의 방법 중에 불로 태워 드리는 화제는 예배를 드리는 경배자가 자신이 가져온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제단의 북편에서 그 제물을 잡아야 했다. 그 후에 그 제물을 제사장이 받아서 제물의 피를 성막의 기구에 뿌리거나 바르고 제단의 주위에 뿌리거나 제단 밑에 쏟았다. 그리고 제사장이 그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서 불  살랐다. 제물은 소, 양, 염소, 비둘기 모두 흠 없는 것으로 하여야 한다. 곡식으로 드릴 때에도 고운 것으로 드려야 한다. 제사를 드리면 그 불에 태운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는 제사를 드리는 경배자와 제사장의 영육이 하나님께 헌신됨을 상징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려 죽으심을 예표하고 상징하는 제사인 것이다.(마26:28, 히9:12-14)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생명을 다 내어 주셔서 희생되는 것을 의미한다.(마27:27-50, 엡5:2) 에베소서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고 하였다. 제물의 가슴 부위를 흔들어 드리는 요제는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 중에서 일부를 제사장이 하나님께로부터 되돌려 받는 것을 상징한다.(민18: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이처럼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어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요6:33-58, 롬8:32) 제물의 오른 쪽 뒷다리를 높이 치켜들어서 드리는 거제는 제사를 통해 받으신 제물 중에서 일부를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상징한다.(레7:31-34)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생명의 약식이 되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거제는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의 우편 뒷다리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만든 떡과 타작마당의 곡식과 십일조와 포도주와 기름 등으로 드렸다. 그 외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왔을 때에 전리품 중에서 이처럼 구별하여 드리는 제사도 거제로 드려야 했다.


하나님은 아론의 후손이며 레위인인 제사장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이 요제와 거제로 드린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 그리고 그 떡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저들의 몫으로 구별하여 주셨다. 이와 같은 화목제를 감사제로 드릴 때에는“노래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라고 하셨다. 찬송하란 말씀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감사의 달에는 매 시간마다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교회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는 감사의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지금 형편이 어떠하든 감사제를 드리는 경배자, 예배자의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왜일까. 지금 내게 생명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제를 드릴 이유가 충분하지 않나.

시편 107편 말씀의 일부분인 본문에 보면 감사제를 드리는 성도의 생활 태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교과서가 있듯이 인생에게도 교과서가 있다. 그 인생의 교과서는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으로 깨달을 수도 있지만 희로애락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달아 아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교과서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성경을 인생의 교과서로 여기지 않고 참고서 정도로 여긴다. 혹은 어쩌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는 백과사전이나 옥편 정도의 수준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없지 않다.

오늘 날 우리들의 신앙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달면 삼키고 쓰면 입 안에서 밀어내고 뱉어 버리는 수준의 신앙생활에서 맴도는 것이다. 더군다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타성에 젖어서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에 붙잡혀서 신앙생활의 별 큰 기대감이나 설렘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없지 않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부자들이었다. 저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에게 “그러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책망하셨다. 뿐만 아니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고 하셨다. 심지어는 계속하여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게 미지근한 상태로 살아가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는 무서운 심판과 경고의 말씀도 하셨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고 책망하시며 새로운 신앙생활의 변화를 촉구하셨다. 반면에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2:19)고 칭찬해 주셨다. 물론 두아다라 성도들도 책망 받은 부분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말씀으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이제는 부활 승천하여 우리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신 주님을 문 밖에 서성이시도록 문전박대하지 말고 내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마음에 모셔 드려야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함께 대화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 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535장)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오소서 주여 환영하오니 오소서 오소서
생명 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 알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534장)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입에는 감사의 찬양과 기도가 계속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선포하고 전파하는 전도생활과 간증생활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10절의 말씀대로 어찌하여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는가”그 다음 절인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포로 생활의 고난을 마치고 선조들의 땅과 언약의 도성인 예루살렘 성에 돌아 와서 감격 가운데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고백한 회개의 고백이며 지난 날 선조들 때로부터 내려온 우상 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였던 죄악을 시인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고통을 주셔서 인간의 마음이 겸손해 지도록 만드신다. 그러나 회개 하지 아니하면 12절 후반절의 말씀처럼 인생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게 하신다. 솔로몬 임금의 나중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난 타락한 인생을 살았다. 솔로몬은 20살에 왕이 되어 40년 후인 60살에 죽었다.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 아버지 솔로몬의 대를 이었으나 나라는 남북으로 나누이고 말았다. 그 원인이 교만에 있었다.


“나의 새끼 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왕상12:10-11)

교만하면 개인도 망하고 나라라도 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성도들에게 고통을 주어서라도 겸손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가신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엎드러지는 일이 생길 때에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나에게 돕는 손길을 예비해 주시기를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던 백성들이 겸손하게 회개하고 돌아와서 말씀 따라 살아가면 그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밝고 광명한 곳으로 인도하여 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14절이 그러한 고백이 아닌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10절 후반절의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 있던 백성들을, 14절 후반 절에 보시면,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어” 자유하게 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20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우리를 병약한데서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신다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나라가 구한말 흑암과 사망의 그늘이 온 나라를 덮고 곤고와 쇠사슬이 온 나라 백성들의 운명을 옥죄어갈 때에 서재필,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고당 조만식,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과 같은 이들이 반만년 우상의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알고 믿고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귀하게 여기며 기독교 지도자의 길을 걸어간 그 바탕에는 “하나님의 말씀”신앙이 있었지 않나.


구한말 여성들은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 받고 남존여비 사상의 그늘에 가려져서 지내야 했다. 그런 시절에 선교사 스크랜턴 여사를 비롯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화 학당을 통해서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개화 시대 여성 지도자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중앙대학교의 전신인 중앙여자대학의 설립자인 임영신을 비롯하여 삼일 운동의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관순은 그녀를 양녀 삼은 공주 영명 여학교의 엘리스 샤프 (Alise J. Hammond Sharp 사애리시)선교사에 의해서 역사의 중심인물로 자라났다.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로부터의 독립 운동에 앞장서다가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18살 나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심훈의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이화여대의 초대 한국인 학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 인덕대학교 설립자인 박인덕 여사, 신광여고와 절제운동의 창시자 손정규(메레) 여사 등 수많은 여성들이 배출되었다.


방애인(1909-1933)은 황해도 해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의 여학교에서 공부하고 1926년에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이화 학당에 유학하여 더 공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18살에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전주에 내려 간 그녀는 곧 서문밖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녀는 21살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눈과 같이 깨끗하여라. 아아! 참으로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날이다.”그녀의 6년여에 걸친 전주에서의 생활과 행동 및 신앙 태도는 뭇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청순한 자태로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생활을 하였다. 당시에 이미 천명 이상이 모이던 전주 서문 밖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배은희 목사와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모범적인 청년 교사였다.


그녀의 별명은 참으로 많았다. 금식기도를 비롯하여 날마다 기도를 열심히 하였기에 ‘기도의 사람’이라 하였고, 굶주린 걸인을 먹이고 치료받게 하여 ‘걸인과 병자의 친구’라고도 불렸다. 가난한 자를 긍휼로 돌보아 주었기에 ‘가난한 자의 천사’라고도 불렸다. 당시에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거리의 성녀’라고까지 불렀다. 그녀는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지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연세가 많은 노인들도 언제나 깍듯하게 그녀를 “방애인 선생님”이라고 부르고는 하였다. 1931년에 전주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과 고아가 많이 발생하였다. 그녀는 3명씩 조를 짜서 8,000여 가구의 전주 시내 모든 가정을 다 찾아다니며 고아원 건립 기금 모금을 호소하게 하였고 그 기금으로 전주 서문밖 교회 곁에 기생집이었던 가옥을 사 들여서 그 곳 지역 최초로 전주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방학 중에도 친척과 친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뛰어 다녔고 여름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건강이 약해서 요양이 필요한 몸인데도 쉬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매진하다가 1933년 가을 학기가 개강 된 9월 1일 곧 전주 예수 병원에 입원한 채로 보름을 지내야 했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한국 기독교 역사가들은 그녀를 ‘성녀 방애인’으로 기록해 왔다. 당시의 담임 목사였던 배은희 목사는 그에 대한 사료를 정리한 글에서, “그녀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요,  형제의 발아래에 엎드려 겸손히 섬기는 성자이며,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였다.”고 썼다. 그녀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방중일씨가 황해도 황주에서 재산 많은 부호로서 세례는 받았으나 첩을 두고 생활하며 가산을 모두 다 탕진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날마다 아침을 먹지 않고 금식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고아들은 그녀를 선생님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여겼다. 길거리에서 놀림 받는 행려병자인 정신 병 할머니를 집안에 모셔다가 함께 지냈다. 나병 환자들의 환부를 어루만지며 눈물로 기도하였다. 주일이면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병자 방문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사역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을 집례한 전주 서문밖 교회의 배 은희 목사는 수백 명의 학생들의 울음소리가 전주 시내에 울려 퍼지는 장례를 집례한 후에 이런 글을 남겼다.
 
“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쌓이고 쌓인 일거리를 두고 어떻게 차마 가셨는가,
그대의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던 전주를 그렇게도 쉬이 떠나시었는가,
고아를 업어주던 그대의 등에 짐이 무거워 가셨는가,
정신병자를 쓸어안고 울던 그대의 가슴의 심장이 터져 가셨는가,
문둥병자를 어루만지며 울던 그대의 눈에 눈물이 다하여 가셨는가,
옷 벗어 걸인주고 추위를 못 견디어 가셨는가,
남의 짐을 들고 가다가 팔이 아파 잠깐 쉬려고 가셨는가,
쌓이고 또 샇인 일을 누구에게 맡기고 가셨는가,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오오 ! 조선의 청년들이여, 그대들이 하는 일이 그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면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겸손한 인격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면 20절의 말씀처럼 그 말씀이 나의 전 존재와 전 인격인 영, 혼, 육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짐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섬기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하신다.



여호와께 부르짖는 기도.
13절과 19절에 보면 환난과 고통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그 환난과 고통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신다고 하였다. 13절과 14절에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백성들을 고난에서 건지시고 얽어 맨 올무의 줄을 끊어 자유하게 해 주시는 전능하신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심판 하실 때의 하나님은 16절 말씀처럼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장을 꺾으셨던 하나님이신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회복시키실 때의 하나님은 어미 닭이 새끼 병아리를 품에 안의시듯 품으시고 인도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 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생활하는 노예 생활이 점점 극심해져서 바로 임금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께 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지내던 모세를 부르셨다. 그 때에 모세에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었다. “네 동족들의 부르짖음을 내가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에게 학대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고통의 장면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근심을 아실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에 내려 오셔서  애굽인의 압제로부터 건져 내시고 인도하셔서 아름답고 광대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땅으로 데려 가려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다.(출3:7-8) 부르짖으면 주께서 들이신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유월절의 체험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하게 애굽을 벗어나서 홍해 앞에까지 도착하였다. 앞에는 도도하게 흐르는 홍해이다. 뒤에서는 애굽의 바로 임금의 군대가 철병거를 타고 추격해 오고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출14:10) 사실 그 부르짖음은 기도라기보다는 모세를 향한 원망이 가득하였다. “왜 애굽에 그냥 내 버려  두지 않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어내서 여기서 죽게 하느냐 애굽에 매장지가 없느냐 차라리 애굽에 남겨 두었으면 거기서 애굽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 여기서 죽는 것 보다는 낳지 않았겠느냐”이런 투로 불평해 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나. 그 때에 모세는 다급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타나 기도에 대한 응답의 말씀을 말씀해 주셨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14:15-16)


마태복음 9장 2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 두 맹인이 따라 오면서 소리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큰 소리로 소리쳐 부르짖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시고 어느 집으로 들어 가셨다. 그 두 맹인은 그 집 안에까지 가까이 곁으로 찾아 들어 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저들 두 맹인에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에 저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오이다.”그 때에 예수께서 저들의 눈을 마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자 그 두 맹인의 눈이 모두 다 밝아졌다. 그 일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예수님의 이와 같은 치유 소식은 점점 퍼져 나갔다. 그 두 맹인이 세상에 다니면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치유 사실을  온 땅에 퍼트려 소문 낸 것이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 살아가든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의 역사와 기적을 의지하고 간구하고 부르짖으면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당시에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두 번째로 갇혀 있던 형편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장차 죄를 용서받고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회복된 축복의 삶을 살면서 감사제를 드릴 날이 올 것을 예언하시면서 부르짖는 기도 생활을 강조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그리고 하나님은 이어서 축복을 약속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3:11)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적을 찬송.
15절과 21절에 반복되는 강조는 무엇인가.“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자.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기적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누가 연세 많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의 태에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였는가.  

누가 애굽에 팔려간 요셉으로 하여금 에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였는가.
누가 홍해를 건너게 하였는가.
누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배부르게 하였는가.
누가 광야 길 40년 동안 입고 신을 것을 주었는가.
누가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같은 기둥으로 가리어 주고 덮어 주었는가.
누가 불 뱀과 전갈이 우굴 거리는 땅에서 생명을 보존 받게 하였는가.
누가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였는가.
누가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하였는가.
누가 아이 성 전투에서 이기게 하였는가.
누가 헤브론 산지라도 점령할 수 있게 하였는가.
누가 가나안의 포도와 감람나무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하였는가.
누가 가나안의 내 손으로 파지 아니한 우물의 물을 마시게 하였는가.
누가 가나안의 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집에 거하게 하였는가.
누가 한나의 태중에 사무엘이 자라나게 하였는가.
누가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될 수 있게 하였는가.
누가 베들레헴의 소년 다윗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의 왕이 되게 하였는가.
누가 바벨론의 포로 생활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과 유다 땅의 각 고을로 되돌아가서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에서 살 수 있게 하였는가.
누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였는가.
누가 불에 타고 폐허가 되어 있던 예루살렘 성곽을 다시 쌓게 하였는가.
누가 한나의 태에 사무엘이 태어나게 하였는가
누가 모압 땅에서 남편 잃고 불행해진 이방 여인 룻을 다윗의 증조모가 되게 하였는가.
누가 다윗의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게 하였는가.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크고 새로운 기적을 행하시고 또 행하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찬송하고 찬송하며 감사제를 드리고 또 드려야만 할 것이다. 615장 찬송의 가사처럼,


         “그 크신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이 세상을 사랑해 주 오셨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사 저 영원한 생명 문 여시었네 
우리 주 높이세 귀한 말씀 듣고 우리 주 높이세 모두 기뻐하며 
주 예수님 힘입어 하나님께 그 행하신 큰 역사 찬양하세”



이와 같이 찬송하며 경배하며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드높이고 우리 가운데에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다시 또 찬송하며 감사제를 드리고 또 감사제를 드리는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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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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