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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전7:15-29) 2014.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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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0-18 16:12 조회 18,110 댓글 0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전7:15-29) 2014. 10. 12
 
 
 
전도서의 반복되는 강조는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의 허무를 지적한다. 인본적인 삶의 나중은 후회뿐이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다고 했다. 15절의,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라는 말은 너 댓 살 먹은 어린아이가 “내가 옛날에 어쩌고저쩌고”하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세상을 삼사년 살아 본 경험을 갖고 옛날 운운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네 살짜리 남자 아이가 세 살짜리 여자 아이와 소꿉장난을 하다가 손을 잡으려고 하니까 여자 아이가 뿌리쳤다. 이 여자 아이는 부모에게서 “함부로 아무에게나 손을 내어 주지 말라”고 배운 모양이다. 그러자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에게 하는 말이 “얘 왜 그래 너 한두 살도 아니잖아.”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전도서 기자가 말하는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라는 고백은 인생을 살만큼 살아 온 늘그막에 고백하는 그런 고백이다. “내가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에”라는 표현을 예전 성경 번역에서는 “헛된 날을 사는 동안에”라고 했다. 영어 성경에 보면, ‘meaningless life.' 즉 ‘별 의미 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고 의롭게 살아 보고자 하는데도 큰 불행을 당하거나 멸망해 버리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며 사는데도 장수하며 온갖 복을 다 누리며 사는 이들이 있더란 말이다. 16절에서 말씀하는 내용은 오해하면 안 된다. 지나치게 의롭게 살려고 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지혜롭게 살려고 하지도 말라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자기(自己) 의(義)’와 ‘자기(自己) 지혜(知慧)’를 내세우며 사는 그런 편협적인 의나 절대자의 지혜에 비교하면 지혜라고도 할 수조차 없는 인간적인 어리석음을 지혜인양 자랑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조이다. 반면에 의와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조를 바탕으로 하고 교훈하는 전도자의 권면이다. 17절의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고’라는 말은 세상을 적당히 죄를 지으며 살되 너무 지나친 악을 행하지는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을 적당히 악하게 살든, 적당히 어리석게 살든 나중에 보면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의롭게 살든 악하게 살든 별반 차이가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악을 피하며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가고자 씨름해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시쳇말로 하면 “죽으려면 무슨 짓은 못해”정도로 이해하면 적당할 표현이다. 즉 15절에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라고 했다. 악인도 저렇게 누릴 것 다 누리고 장수한다면 적당하게 악을 행하며 세상을 되는대로 막 살아도 상관없다고 가르치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아무리 악인이 장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는 강조이다.
 
자 그러면 이 의(義)와 불의(不義), 선(善)과 악(惡), 참과 거짓이 뒤 섞여 있는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인가. 전도자는 인간은 인간의 모든 모순과 죄에 대한 고민을 모두 시원하게 해결하는 길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28절이 그런 내용이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해가 쉽다.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대답을 찾으려고 하지 아니하면 천명의 남자나 나서서 그 대답을 찾으려 해도 쉽지 않다고 하였다.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하다고 하였다.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는 말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뱀을 만나 인생의 대답을 찾으려던 하와가 아담보다 먼저 타락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란 재미있는 해석도 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멀찍이 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 앞에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딸의 마음가짐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공경이며, 경배며, 찬양이며, 섬김이며, 드림이며, 좋아하고 의지하고 따르고 매사에 인정하고 높여 드리는 진심이 담긴 그 모든 것이다. 그것은 예배를 통하여, 찬송과 경배와 기도와 예물 드림을 통하여 나타날 수도 있지만 나의 전 인격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성경에 ‘경외’라는 표현이 처음 나온 곳은 창세기 22장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의 장성해 가는 사랑스런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들은 것이다. 어떻게 나은 아들인데 달라고 하시나.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삼일 길을 갔다.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눕혔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가 나타났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은 대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천사가 말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여기 ‘경외’(敬畏)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늘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던 믿음의 사람이요 언약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었다. 천사는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을 지목하셨고 그 숫양으로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도록 하셨다. 이 때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여호와께서 준비 하신다’는 뜻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며, 새로운 날의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참 자녀인 것이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것을 경배하는 동방의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려서 경배하였다. 진심으로 그리한 것이다. 멀고 먼 길을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서 그리한 것이다. 산을 넘고 들을 지나고 밤의 추위와 낮의 뙤약볕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저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들을 만나서 경배할 수 있다는 기대와 소망이 넘쳤다. 멀고 먼 길을 이상한 ‘별’의 움직임을 따라서 가고 또 갔던 동방 박사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젠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고 그분께 경배드릴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한 발걸음을 옮기고 또 옮긴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이것이 믿는 자의 일상이 아닌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그러므로 일상생활이 다른 것이다. 세상 중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생각이 다르고, 꿈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고, 입의 말이 다르고, 생활의 범사가 다르고 그 출입이 다른 것이다. 시간을 쓰는 것도 다르고 재물을 사용하는 것도 다르고 취미 생활도 다르고, 가는 곳, 만나는 사람, 심지어는 먹는 음식과 마시는 음료도 다르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매사가 다르고 다른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장가들어 고단하고 힘겨운 처가살이를 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장인 라반의 곁을 떠나 아버지 이삭의 집을 향해 출발할 날이 왔다. 야곱은 장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귀향길에 올랐다. 이 사실을 삼일 후에야 뉘 늦게 알게 된 장인 라반이 일행들을 이끌고 뒤쫓아 가서 야곱과 그의 아내들과 아들들과 종들과 모든 짐승 떼를 만나게 되었다. 장인 라반도 흥분했고 야곱도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은 특별한 상황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야곱은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20년을 가슴에 묻고 지내던 감정도 밀어 올랐다. 야곱은 화가 난 목소리로 장인 라반에게 평소에 말 못하고 지내던 생각들을 쏟아 놓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이십 년이나 저는 장인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 동안 장인의 암양과 암염소 가운데 한 마리라도 유산한 일이 있었습니까? 저는 장인의 양떼 가운데 숫양 한 마리도 잡아먹은 적이 없습니다. 양이 맹수에게 물려 죽어도 그것을 장인께 가져가지 않고 제가 물어냈습니다. 또한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장인께서는 그것을 저한테 물리셨습니다. 저로 말하면 낮에는 더위에 허덕였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저는 장인 댁에서 이십 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십사 년은 장인의 딸들에게 장가를 들려고 장인의 일을 도와드렸고 육 년은 장인의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저에게 주기로 한 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 하셨습니다.”(창31:38-41)
 
그리고 이어서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敬畏)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입니다.”(창31:42)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믿음을 회상하며 “나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는 지금 쯤 빈털터리로 장인의 집을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브라함이 경외하고 이삭이 경외하고 야곱이 경외하던 하나님, 그 하나님 아버지가 지금도 내가 경외하고 나의 경외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말이다.
 
전도서 또한 절대로 인생의 허무만을 이야기 하는 책이 아니다. 전도서 5장 7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고 하였다. 전도서 8장 12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잘 될 것이요” 그 다음 절인 13절,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라는 강조가 아닌가. 그러므로 12절의 말씀처럼 “죄인이 백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라는 그런 기이한 현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잘 경외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전도서의 결론은 무엇인가. 마지막 장인 12장 13절에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선언하였다.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사람.
또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다. 참 지혜자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다.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지혜자에게 지혜를 공급하시되 성읍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20절에 보면, 세상에 전혀 악을 행하지 않는 온전한 의인이란 없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대하여 말하는 이웃의 말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 빼앗기며 살지 말라고도 하였다. 21절,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고 했다. 요즘 소위 악성 댓글 같은 것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 그 누구인들 견뎌 낼 장수도 없고 이겨낼 용사도 없지 않나. 그러므로 참다운 지혜자는 25절의 말씀처럼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도 다 해결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이니 말이다. 얼마나 답답하며 전도자는 25절에서 그렇게 까지 말했을까. “악한 것, 어리석은 것, 미친 것”이란 표현을 통해서 아무리 지혜와 명철을 동원해서 살피고 연구해도 인생의 시원한 답을 찾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란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사람을 말한다. 인간이 겉 치례로 하나님께 좋게 보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과 생각을 모두 다 아시기 때문이다. 26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해가 분명해 진다. “나는 또 여자란 죽음보다도 신물 나는 것임을 알았다. 여자는 새 잡는 그물이다. 그 마음은 올가미요, 그 팔은 사슬이다.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사람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죄인은 잡히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인생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
 
 
하나님을 정직(正直)하게 대하는 사람.
평생을 살면서 이러 저러한 인생의 우여곡절을 다 겪어 보고 인생이 헛되며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 전도자는 27절 이하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시원한 인생의 대답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천명의 사람들이 찾으려고 찾아 나섰어도 찾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다”는 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가장 아름다운 창조요 가장 완전한 창조요 가장 거룩한 창조이고 가장 정직하신 창조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인생의 길을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드셨고 단순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수 많은 꾀가 들어와서 인간을 점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뻔뻔하게 행동하는 가인의 모습을 보라. 인간이 무섭지 않나. 들판에서 만난 동생 요셉을 옷 벗겨서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팔아 버리고 그이 옷을 찢어서 짐승 잡을 붉은 피를 범벅을 해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던져 버리던 10명의 배 다른 형제들의 모습을 보라. 얼마나 잔인한가. 얼마나 교활한가. 얼마나 거짓되었다. 아버지 야곱이 통곡을 하면서 그렇게 슬퍼하고 그렇게 긴긴 세월 20년 동안을 아들 요셉이 짐승에 잡혀서 물려 찢겨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던 긴긴 세월을 야곱의 열 명의 아들들은 한 결 같이 입을 꼭 다물고 거짓말로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살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이란 이처럼 무서운 악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거짓과 악이 들어오면 전쟁 중에 동료가 죽어 가는데도 아이 성 전투의 현장에서 시날 산 외투를 빼 돌리고 금과 은을 덩어리 채 훔쳐다가 자기 집안에 감추는 그런 행동이 어디서 나온 걸까. 아간은 여호수아를 속이고 동료들을 속이고 동족들을 속이고 더 크게는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죄가 들어나고 아골 골짜기에 가족 모두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고 불에 태워 가족이 몰살 당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았나.
 
하나님 앞에서 정직이 떠난 자의 최후는 그런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예수님과 한 떡 그릇에 손을 넣으면서도 뻔뻔하게 감쪽같이 예수님을 속이고 팔아 버린 그런 비겁한 행동과 반역자의 행동이 어떻게 가능하였겠나. 마귀에게 사로잡히고 인간의 마음에서 정직의 영이 떠나면 이처럼 죄가 죄로 보이질 않는 것이다.
 
성령 받고 한창 모든 성도들이 받은 은혜가 충만하여 서로 좋고 서로 감사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유무상통하며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초대 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저지른 일을 보라. 베드로 앞에서 차례대로 죽어 나간 저들에게 베드로가 책망한 내용은 무엇인가. “너희가 성령을 속였다. 하나님께 거짓말 하였다. 주의 영을 시험하였다.”고 말할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부가 세 시산 간격으로 베드로 앞에서 영이 떠나고 죽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차례대로 저들의 시체를 내어다가 장례 하였다.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이는 것은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시간과 재물과 각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입의 말과 범사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정직하게 대하며 살아가는 일상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내용의 강조가 바로 이것이다.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7-10)
 
예수께서 강조하신 천국의 교훈도 마찬가지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15-21)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는 결실의 계절에 자연의 교훈과 삶의 이치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믿음의 삶을 가꾸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올 2014년 노벨 평화상을 탄 두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하는 것은 왜일까. 올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파키스탄의 17살 소녀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0대 초반 때부터 날마다 쓴 일기문에 세상에 알려 지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권의 여성 불평등이나 아동 학대의 사실을 세상에 고발하는 용기 있는 소녀로 성장해 왔다. 학교를 운영하는 교육 운동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 13세 소녀 말랄라는 2009년 영국 공영방송 BBC의 블로그에 탈레반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올리며 여자도 학교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끔찍한 총알이었다. 2012년 10월에는 “여자는 학교에 다니지 말라”며 그녀를 죽이려는 탈레반에 피격돼 머리와 목에 총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후에 6일간의 혼수상태에서 대 수술을 받고 생명을 건진 그녀는 지금은 영국에 정착한 후로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가냘픈 소녀 말랄라의 용기와 의지는 전 세계에 감동을 주었다. 지난해 미국 유명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인물’에 선정되어 이미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되기 시작했었다. 지난 7월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초청을 받아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연설할 기회도 가졌었다. 그녀는 "한 명의 어린이가, 한 사람의 교사가, 한 권의 책이, 한 자루의 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며 세계 지도자들에게 어린이 무상교육 지원을 호소했다. 인도 사람이며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자인 60세의 카일라시 사티아르티는 1980년부터 아동 노예 관행과 착취적인 아동 노동의 종식을 위한 세계 운동의 선봉에 서 왔다. 당시 전기 엔지니어였던 사티아르티는 이를 위한 풀뿌리 운동에 나서 8만 여명의 아동 노예를 해방시키는 데 앞장섰다. 해방된 아동들의 교육과 사회 복귀에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사티아르티 역시 여러 차례 암살 위험에 놓인 바 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아버지이시다. 이 땅의 그 어디에서 살아가든지 하나님 앞에서 신앙양심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앞날을 하나님은 축복하여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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