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리스도냐(막14:53-65) 2014. 8. 17
미국의 복음적인 설교가인 존 파이퍼(John Piper, 1946-) 목사의 설교 중에 ‘번영신학을 경계하라’는 설교가 있다. 젊은이들을 일깨우는 설교이다. 그는 현대를 살아가는 미국인들을 향해서 “오늘 날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열방과 제 3세계의 어렵게 사는 이웃들을 외면한 채로 나만 좋은 집에서, 좋은 차타고, 노후 준비 잘 하여 조기 은퇴하고 휴양 도시가 많은 플로리다에 가서 노후를 지내며 아침에 일어나 바닷가에서 아름다움 조개껍질을 주어다가 아름다운 정원의 창가에 진열하는 기쁨으로 노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인생을 살지 말라”고 경고한다. 가난한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돼지가 병들지 않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당신의 아내가 유산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지금 가난한 당신의 아내의 손가락에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반지를 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위험한 복음 전파의 방법이라고 경고한다. 물론 병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당장 먹을거리와 건강 회복이 필요햐긴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 대답만은 아니라는 경고이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매사에 더 좋은 명품, 더 좋은 옷,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보약만 찾으며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세상에서 무엇 하다 왔느냐”고 질문 받으면 “벤즈 마이바흐 s650 리므진을 타며 플로리다에서 살면서 날마다, 아침마다 예쁜 조개껍질 주워 모으다가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젊은이들이 없기를 바란다.”며 설교의 목소리를 높였다. 존 파이퍼 목사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던 미국 청년들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돌며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결단하며 신앙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이 TV 화면에 들어왔다. 물론 신명기 28장 같은 곳에 보면 구체적인 이 세상의 번영을 복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젊어서 부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결단하여야만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 새워가며 새벽을 맞도록 기도하신 예수께서 그 다음 날 새벽에 붙잡히셨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칼과 몽치를 들고 와서 예수를 붙잡아 결박하여 끌고 갔다. 몽치란 몽둥이를 말한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를 붙잡으러 온 것이다. 갑작스런 일을 당하여 당황한 베드로는 평소에 옆구리에 차고 다니던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쳐 내렸다. 그 귀가 잘려서 땅에 떨어졌다. 예수께서는 그 귀를 만져서 고쳐 주시며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18:11)는 말씀을 하셨다. 누가복음의 같은 본문에 보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예수는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셨고 대제사장 가아바에게로 끌려 가셨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는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 현장에까지 저 만치 먼발치에서 예수를 뒤 따라 간 제자 베드로는 집을 지키는 아랫사람들의 사이에 끼어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어둠침침한 새벽이었다. 베드로는 그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였다.
대 제사장들과 온 공회 즉 산헤드린 의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증인들을 내 세우며 사형에 처하게 할 증거 자료들을 찾고 있었다.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된 것이다. 그 곳에 둘러섰던 무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예수는 손으로 지은 헤롯의 성전을 헐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지으리라고 하였다.”고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이런 저런 증언을 하려 하였지만 일치된 증언이 하나도 없었다. 그 이유는 무리들 중에 그 누군가가 하는 증언이란 그 내용들이 모두 다 거짓된 증언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대 제사장이 일어서서 물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그러나 예수는 계속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대 제사장은 다시 물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 "Are you the Christ, the Son of the Blessed One?")
그때서야 예수께서 한 마디 하셨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화가 잔뜩 난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더 이상 무슨 증인이 필요하겠소? 하나님을 모독하는 저 말을 여러분이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공회원들은 무리를 져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정죄하고 나섰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 침을 뱉기도 하였다. 예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선지자 노릇하라”고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하인들은 예수를 손바닥으로 치기도 하였다.
갑자기 분위기는 살벌해졌고 예수는 이미 형편없이 무시당하며 마구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이는 지난 칠월 첫 날 새벽부터 묵상해 온 마가 복음의 말씀의 오늘 분량 말씀이다.
오늘은 예수사랑교회가 이곳 새 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린 지 꼭 일 년이 되는 주일이다. 우리는 지난 4년 9개월 동안 참으로 다양한 신앙 체험을 하며 여기까지 나아 왔다.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뒤 돌아 보면 그 시작과 과정과 고비 고비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즉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과 섭리와 인도하심이 분명하였다. 우리에게 광야 생활이 있었다. 아니 아직도 광야 생활이 계속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아이 성 전투의 실패와 나중 승리를 경험하는 신앙생활의 과정과 간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 가나안 점령을 향한 영적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헤브론도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치도 요단강을 건넜으니 가나안 땅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의 가나안 점령의 사명이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며 방관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지난 1년 간 영적 자세와 태도가 해이해 져 버린 나 자신은 아닌가 하고 뒤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요셉의 자손들이 여호수아 앞에 불만을 쏟아놓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들의 지파 숫자에 비하여 분깃으로 주어진 땅이 너무 좁다고 불만을 말하였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말하기를 “너희가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출17:15)고 명령하였다. 여호수아가 가리킨 땅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저들은 이미 발전한 철기 문명 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요셉의 자손들은 그 사실을 언급하였다. “저들은 모두 다 철기를 사용하고 철 병거를 가진 이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점령한단 말입니까” 그 때에 여호수아가 요셉의 족속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다. 그러하니 한 분깃에 만족하지 말아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될 것이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출17:17-18) 격려하는 말과 용기를 갖게 하는 말을 해 준 것이다. 여호수아는 계속하여 이런 말도 해 주었다.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출17:18) 승리 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매사에 이기고, 범사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수치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고난의 가시관이 없이 쓰는 영광의 면류관이란 없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붙잡히시고 결박당하시고 끌려 가셨다. 예수를 향하여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리고 주먹으로 치고 눈을 가리고 가시관을 씌우고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치고 조롱하고 희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 앞에서 너무나도 초라하고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너무나도 보잘 것 없어 보였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심지어는 장담하고 큰소리치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조차도 나중에는 다 도망가고 숨고 말았다. 그런 철저하게 홀로 남으셨고 고독해 지신 그 현장을 뚫고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가 당하셨던 온갖 수모와 조롱과 멸시를 한 몸에 짊어지고 평화의 왕으로 부활하시고 승리의 왕으로 다시 살아 나셨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우리 가운데 계셨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앞으로 장래에도 영원히 우리 가운데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대제사장은 물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다. 그분 그리스도, 메시아가 나에게는 어떤 분이신가.
나와 그리스도와의 거리.
베드로는 이 역사적인 날, 역사적인 순간에 몹시 비겁해 져 있었다. 그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신 예수 곁에서 칼을 빼어 들고 혈기를 부린 것 말고는 붙잡혀 끌려가시는 예수의 뒤를 저 만치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 가고 있었다. 54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고 하였다. 평소에 큰 소리 치고 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비교하면 이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베드로의 모습인가. 베드로의 두 다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심장도 몹시 뛰고 있었다. 혈압도 많이 올라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여차하면 자기도 저들에게 붙잡혀 예수와 똑 같은 비참한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역사는 비겁한 사람들의 작품이 아니다. 역사를 이룬 사람들은 불 가운데도 뛰어 들고 물 가운데도 뛰어 든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지고 발전해 온 것이다.
노아 시대 때에 노아는 세상의 그 어떤 집 가장과 달랐다. 그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변심하거나 다른 일에 한 눈을 판 적이 없었다. 그는 방주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시작될 때까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순종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홍수 심판 앞에서 여덟 가족을 구원하는 가장이요, 순종하는 가장이요, 의로운 가장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가장이었다. 노아와 하나님과의 거리는 하루 한시도 멀어진 적이 없었다.
요즘 여성 신도들께서 주중에 교제하는 커피 브레잌 분량 중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거리, 아내 사라와의 거리에 문제가 발생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이는 75살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한 연세가 젊지 않았던 아브라함이지만 신중하지 못한 판단과 처세로 아내에게 조차도 신뢰 받지 못할 만큼의 나약한 심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붙들어 주셨다. 아브라함 편에서 보면 하나님을 멀찍이 대하며 인간적인 판단의 불행한 늪에 빠져 들어 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그런 나약한 모습의 아브라함을 위경에서 건지시고 위험에서 그와 그의 아내를 보호해 주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믿음이 약해지고 내 의지가 흐트러져서 하나님을 멀찍이 대하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언제나 주님은 나의 가까이, 내 곁에서 나를 붙들어 주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주님이시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 신 광야의 가데스에 도착하였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그곳에서 죽어 장례하였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 앞에 몰려 들었다. 특히 모세를 향하여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이 곳에는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고 불평하였다. 모세가 아론과 함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렸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지팡이를 가지고 형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모으고 그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는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고 하셨다. 백성을 불러 모은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말하고는 지팡이를 들어서 반석을 두 번씩 탁탁 쳤다. 그러자 반석에서 많은 물이 솟아 나와서 백성들과 짐승들이 충분히 마셨다. 하나님은 반석을 향하여 명하라고 하셨지 지팡이로 치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교만함을 보인 어리석은 지도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당시 그 순간 모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것이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여리고 성을 말씀대로 순종하며 돌아서 무너트리고 점령한 여호수아의 군대 중에 3000명의 선택받은 정예화된 군대가 아이성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중에 아간이란 군사도 뽑힘 받은 군사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전쟁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탐심에 마음이 가리어져서 전쟁 중에 시날 산의 외투와 금과 은을 훔쳐서 감춘 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한 전쟁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그 마음에 여호수아에게서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졌던 아간의 범죄가 모두 들어 나게 하셨다. 결국 아간은 전쟁 중에 가족이 몰살당하는 무서운 처형을 받고 말았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휘관이었던 여호수아를 멀찍이 대하며 불행한 판단으로 어리석은 탐심에 마음을 빼앗겼던 아간의 사건은 성경 역사에 두고두고 교훈이 되고 있다.
요즘 신문과 각종 언론에 도배를 하는 가슴 섬뜩한 사건들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멀찍이 하는 인생들이 저지르는 범행의 내용이 얼마나 끔찍한 지를 전하에 드러내고 있지 않나.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을 멀찍이 대하면 다윗이라도 솔로몬이라도 불행해지지 않았나. 하나님의 명령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찍이 떠나서 제 멋대로 행동할 때에 겪었던 요나의 이야기를 보라. 하나님을 멀찍이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멀찍이 하면서 잘 된 인생이 있는가. 지금 당장 잘되고 형통하고 번성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수를 멀리하며 번영하는 것은 참으로 번영하는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야 한다. 항상 예수를 가까이서 바짝 붙어 따라야 한다. 형식으로만 제자 되지 말고 삶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신분으로만 제자였을 뿐 그는 당시에 제자답지도 못했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인 것을 어쩌면 후회하는 비겁쟁이의 모습뿐이 아닌가. 대제사장의 뜰을 지키는 아랫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숨어서 어두운 새벽 불이나 함께 쪼이고 있는 초라한 베드로의 모습 말이다.
혹시 요즘 나 자신의 신앙생활 모습이 그러하지는 아니한가. 예배, 기도, 말씀, 전도, 봉사, 헌신과 섬기는 생활에 있어서 예수로부터 멀찍이 거리를 두고 숨어 지내고 있는 비겁해져버린 나는 혹시 아닌가. 교회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새 성전 시대를 맞아 지난 일 년을 지내 오면서 무슨 기도의 제목을 갖고 있는지 잘 알면서도 주님의 고통이나 주님의 마음이나 주님의 고민을 외면한 채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 채로 멀찍이서 예수의 당하시는 고난의 장면을 곁눈질 하듯 훔쳐보고 있지는 안는가. 그렇다고 아주 도망가거나 아주 숨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 뛰어 드는 것도 아닌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시대를 관망하며 세월만 보내고 있는 나의 모습은 아닌가. 요즘, 오늘, 지금 나의 신앙생활 형편 속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거리가 멀찍이 떨어져서 비겁한 모습으로 아랫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아 불이나 쪼이며 역사의 현장에 구경꾼으로 지내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언약.
대제사장 앞에서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권위가 다 들어 있다.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의 질문 앞에 그 동안 침묵하고 계시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주님은 그날 몇 시간 후에 당하신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내가 그니라.” 하고 자신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 이신 것을 대답하시고 나서 이 같이 선언하셨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을 것이다.”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이 말씀 후에 예수는 신성 모독하고 있다고 화를 내며 옷을 찢는 대 제사장 앞에서 사형 시켜야 한다는 무리들의 아우성 가운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셨다.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이들,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는 이들, ‘선지자 노릇하라’고 손바닥으로 치는 하인들 곁에서 예수는 온갖 수모와 모멸을 다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말씀하신대로 죽으셨으나 다시 사셨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수치와 조롱과 고난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 그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이 땅에 구름을 타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2009년 8월 5일,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북한 평양을 방문한 미국의 전 대통령 빌 클린턴은 당시 북한의 김정일을 만났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인 2명의 여기자를 석방시켜 데리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당시에 개성 공단에 억류되어 있던 현대 아산 직원 유성진 씨는 빌 클린턴이 평양을 다녀 간지 8일 후인 13일에 137일간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서 판문점을 거쳐서 남한의 품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만유의 대 주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주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고 환영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올리시는 그 영광스러움을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을 그 은혜로운 축복을 받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삼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비겁한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숨고 외면하고 거리를 뒤고 멀찍이서 주님의 당하시는 고통과 수모를 구경만 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베드로는 “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말씀 그대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말았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아 나가 울고 통곡하였던 베드로였다. 그러나 역시 도망가고 숨고 말았다. 골고다 언덕에 끌려가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거기 베드로는 없었다. 그런 베드로의 모습, 베드로의 처세 속에 나의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이 숨겨져 있지 않나.
조롱을 이기신 영광의 그리스도.
지금 내 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롱을 당하시고 계시다면 나는 예수께 대하여 어떠할까. 옷을 찢으며 화를 내며 신성 모독이라고 큰 소리 치는 대제사장들 앞에서 무리들은 예수를 사형 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침 뱉고 얼굴 가리고 주먹으로 예수의 얼굴을 쳤다. 손바닥으로 치면서 ‘네가 선지지 노롯하라’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처절하게 조롱당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끌려가서 매를 맞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장례가 끝난 무덤 속에서 삼일 만에 부활 하셨다.
오늘 우리는 조롱당하시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조롱과 멸시를 한 몸에 다 짊어지시고 부활 승천하셨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고 하였다. 할렐루야
지금 나의 모습, 지금 우리 가정의 모습,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승리하여 영원한 평화와 안식과 치유를 선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근히 하고 가까이 뫼시는 신자다운 삶을 살아가자.
주는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