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자의 기도(막11:20-33) 2014. 8. 3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는 예수의 그 유명한 교훈의 말씀이 본문에 나온다.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어떤 종교, 어떤 신앙을 갖고 있든지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란 없다. 21세기의 문명 시대에도 옷도 입지 않고 사는 부족들이 있다. 저들 중에는 문자도 없이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도 기도라는 행위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하여 “기도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좀 다르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인간의 기도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구속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따르며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란 그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호흡은 인간이 살아 있는 증거다. 죽음이란 것은 육체의 숨을 멈추는 순간이 아닌가.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사건 앞에서 생명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기도도 그러하여야 한다.
이번 가자 지구에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은 수많은 이들이 숨졌다. 1,700여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그 중에 23살 된 샤이마 후세인이란 이름의 임산모가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가던 중에 숨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숨진 산모의 뱃속에서 8개월 된 아기기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서둘러 제왕절개 수술을 마치고 숨진 엄마의 태속에서 한 시간 만에 아기를 꺼냈는데 아기가 살았다. 아기의 이름은 죽은 엄마의 이름을 붙였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서 인큐베이터에서 보호 받았으나 5일 만에 숨지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두 주전 일간 신문에는 중국의 인민일보 기사를 인용해서 중국에서 최 장수하는 122살 된 투루프 아이마이티라는 이름의 할아버지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그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위구르 족인데 1892년 2월 5일에 태어났다. 그는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에 대하여는 소개 되지 않았으나 80이 넘은 후에도 남매를 더 낳아 키울 정도였다고 한다. 장수 비결에 대하여 “규칙적이고 부지런히 살며 날마다 호주머니에 호두와 아몬드를 넣고 다니며 수시로 먹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양을 키우고 잡초를 뽑으며 농사일을 즐겨 한다. 그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채소는 직접 농사해서 먹고 고기를 좋아하지만 살코기만 주로 먹는다. 그는 소원이 뭐냐고 묻자. 북경에 한 번도 못 가봤는데 북경에 가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는 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차이는 이처럼 숨을 쉬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를 사느냐 보다 천배 만 배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영생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범사가 하나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셨다. 마가복음 11장은 그 한 주간의 모습을 기록하는 시작이다. 그 한 주간의 월요일 아침에 길을 가시던 예수께서 길 가의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열매를 구하셨으나 열매가 없자 저주하셨다. “앞으로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보니 그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어 있었다. 그 때 동행하였던 제자 베드로가 예수께 그 사실을 언급하였다. “랍비여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어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이어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생활의 중요성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기도란 어떤 기도인가를 교훈하신 유명한 본문을 대하게 된다.
생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도.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공중의 참새 한 마리라도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셨다. 공중의 새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먹고 사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 들의 백합화가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벌과 나비가 날아 들 만하게 하나님이 한 계절 화려하고 아름답게 입히시고 향기 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솔로몬이 임금 다윗의 아들인 왕자로 자라났고 20살에 왕이 되어 60에 세상 떠나기 까지 화려하게 입었던 왕자의 옷과 40년간 입었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왕의 옷들이 이 들 꽃인 백합화 한 송이만 못하다고 하셨다.
공중의 참새와 같은 한 마리 새의 일상이나 들의 백합화 한 송이의 아름다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거늘 하물며 인간이겠는가.
무화과나무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듯이 인간의 매사가 다 그러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하셨다. 이는 마태복음 6장의 산상 수훈 중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 아닌가. 내일 일을 미리 앞 당겨서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지 말고 그 날 그날의 희로애락을 소화하며 사는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지 않았나.
보물을 땅에다만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마6:19-20)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법이라고 하셨다.(마6:24)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런가. 먹고 마시는 음식과 음료와 몸에 입는 의복보다 중요한 것이 목숨이며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의 출발 선상에서 누구나가 이걸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생활신앙’을 가져야 한다. 믿음생활 그 자체로 만족해하지 말고 믿는 바를 의심하지 말고 생활 속에 실천하고 드러내고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베드로가 예수의 ‘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물 위를 걸을 때에는 믿음으로 걷기 시작하였으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의심이 생기는 순간에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생활의 사차원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생각과 말과 믿음과 꿈’(thinking, word, faith, vision)이 그것이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는 생각을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고,
그 말한 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때가 되면 이루어지리라는 꿈을 갖고,
기도하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며 살아가다 보면,
그대로 되는 날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것은 생의 원리이다.
이것이 기도의 사차원이다.
가을이 너무나 아름다운 미국의 버몬트 주에 이민 가서 ‘델리 퀸’이라는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는 한인이 있었다. 그 가게에 거의 날마다 점심을 사 먹으러 오는 단골이 있었다. 그 손님이 깔끔하게 정돈하고 친절하게 장사하는 그 주인에게 물었다. "건물 위탁 경영을 해 보지 않겠는가?“ 그 손님은 은행 직원이고 파산한 건물의 시설 관리는 맡은 이였다. 한 두 개의 건물 관리를 맡아 하면서 자신이 붙었고 그의 탁월한 성실성이 인정받게 되었다. 나중에 은행은 그에게 호텔 관리도 맡겼다. 나중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퀄러티 호텔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왔다. 재정 여건이 되면 인수해도 좋고 어려우면 대출해 주겠다고 했다. 50불짜리 숙소가 150불짜리 숙소로 격상 되었다. 인근에 항공모함이 귀항했다가 수리 기간이 늦어지면서 6개월간 장기 투숙객이 넘쳐 났다. 호가에 호텔을 판매하였다. 자동차 도시였던 디트로이트의 번성기 때에 도산 위기의 힐튼 호텔을 인수했다. 300명의 상대를 제치고 4000만 달러짜리 호텔을 450만 불에 인수했다. 비행기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대화하다 보니 그는 힐튼 호텔 채권 은행 부동산 담당 부사장이었다. 그와의 우연한 만남이 일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런 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1974년에 미국에 간 그는 30년 만에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등의 6개 중에서 호텔과 리조트 등을 운영하는 자산 규모 5억 불이 넘는 부동산 투자 그룹인 ‘레이니어 그룹’(Rainier Group)의 홍성은 대표이다. 그의 미국 생활 시작은 남의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부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선하고 성실하게 벌어 하나님의 나라에 보물을 쌓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4년 전 이 맘 때 쯤 우리는 손에 든 것 아무것도 없이 이 땅을 계약해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5년 전 이 맘 때인 2009년 여름으로 하면 귀로 들은 적도 없고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마음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들이 우리들에게 현실의 열매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한해 두해 세월이 지났고 기도의 수위가 쌓여져 왔다. 그리고 때가 되니 일 년 전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현실로 주어진 것이다. 이제 앞으로 이곳에서의 일 년, 이년, 삼년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도의 열매들을 보게 하는 기도 응답 중심인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도의 사차원의 원리는 개인, 가정, 기업, 일터, 직장, 학업 모두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설명이 필요 없는 예수의 말씀 그대로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용서하는 자의 믿는 기도.
기도 새활 중에 반드시 기도하여야 하는 기도가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기도이다. 최근에 여름 전교인 캠프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서 주변의 자연을 둘러보다가 어떤 이웃을 만났다. 그는 오빠가 평생 남미 선교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수 믿는 생활과 거리가 먼 환경에서 그저 열심히만 살아 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하는 잠시 잠깐의 말 중에 “목사님 제게 그 동안 해를 입힌 남이 용서가 되지 않는데 어쩌면 좋으냐”며 긴 한 숨을 내 쉬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는 의외로 서로 용서하지 못해서 원한 관계를 갖거나 화병이 나거나 복수의 칼을 갈거나 증오심에 불타는 악한 감정을 갖고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교도소 선교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특히 여성수형자들이 모여 있는 교도소의 경우에 살인죄를 지은 여성들의 대 부분은 곁의 가까운 이들을 살해한 경우가 거의 다 라고 한다. 그가 남편이든 그 누구이든 자신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용서하기 힘겹게 한 주변의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지내던 중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갇혀 지내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주변 사람의 혐의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나 자신도 용서 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 갈 수 있는 법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의 내용 그대로가 아닌가. 어제 어느 교회에 결혼 축하하러 갔다가 그 교회의 주보 한 장을 집어 왔다. 그 주보에 이런 읽을거리가 실려 있었다. 남미에 있는 우루과이의 어느 농촌의 작은 교회 벽에 걸려 있는 액자의 내용이라고 한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우리들의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하는 묵상이 아닌가.
예수의 권위를 믿는 기도.
예수는 인간이면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이시다. 며칠 전에 백성들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전폭적인 환호를 받으면서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는 무리들의 한 가운데에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소문이 처처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팔고 양을 사고파는 이들 곁에 다가 가셔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또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 때에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와서 질문하였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그 때 예수께서는 대답하는 대신에 다시 질문하셨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 질문에 대답하면 예수께서도 대답하시겠다는 당당한 태도를 보이셨다. 저들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겨우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저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는 이처럼 매사에 그 말씀과 대답을 비롯하여 행하시는 각종 기적들 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가 대단하셨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유월절을 마치고 고향으로 가던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사흘 만에 겨우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찾았다. 그 때 예수께서는 12살 때인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의 랍비들과 신앙적인 논쟁을 벌일 정도의 영적 권위가 넘쳐 났다. 예수의 권위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요, 하나님의 말씀만을 비유로 전하는 진리에 근거한 권위였다. 예수는 비유가 아니면 천국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신 바가 없으시리 만큼 비유로 전하는 말씀전파에 탁월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뿐만 아니라 각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하게 명령하시고 수많은 배고픈 무리들을 배 불리 먹이시고 풍성하게 남게 하시는 현장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백성들이 그를 당장 임금 삼자고 할 정도였다.
앞 못 보던 이들이 보고, 못 듣던 이들이 듣고, 말 못하던 이들이 말하고, 걷지 못하던 이들이 걷고, 손 오그라져 있던 이가 펴지고, 나병에서 고침 받고, 들것에 네 사람에 의해서 실려 왔던 중풍 병자가 일어나 제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12해 혈루병 여인이 나았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환자도 고침을 받았다. 심지어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12살짜리 외동딸이 살아났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고 장례가 끝났던 나사로가 살아났다. 그 모든 예수의 가시는 곳곳마다 예수의 권위는 고을마다, 마을마다, 성마다 소문에 소문으로 예수 소문이 갈릴리 넘어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경에까지 펴져 나갔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권위가 주변에 번져 가는 나날을 살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