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믿음(막9:38-50) 2014. 7. 27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다. 그 이름 믿고 행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께서는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고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것은 잘하는 일이고 상 받을 일이라고 하셨다. 신자인 우리는 믿는 이들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영생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 답게 살아가야 한다. 서로 불화 하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마치도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서로 화목하여야 한다.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본문은 제자들 간에 서로가 누가 크냐는 쟁론이 있은 후에 이어진 내용이다. 어느 날 제자들 간에 서로 자기가 더 낳고, 더 크다는 식의 논쟁이 벌어졌다. 그 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 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
그 후에 요한이 예수께 질문하였다. 주님을 따르지도 않는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 이들이 있기에 그 현장을 목격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기에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금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39절과 40절을 쉬운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못하게 하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욕할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 편이다.”
그리고 이어서 영생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지옥에 던져 지는 것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다. 그리고 서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부탁하셨다.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도록 하자.
예수의 이름으로 상 받을 자.
이 땅에 사는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짐승의 이름을 지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었다. 창세기 2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런 특권을 주셨다. 그러나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이 지어 주셨다. 그 후로 인간의 이름은 대개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짓는 식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아들이 없었다. 아니 자식이 없었다. 그런 사가랴가 반차를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집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일 년 후에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정해 주셨다. 예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나사렛의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가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이라 하니라.”(마1:21)
그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귀신을 내쫓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의 제자들이 관찰하기에는 예수를 믿는 자 같지도 않고 예수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아닌 것 같은데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내쫓는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교훈해 주셨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 현장에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러한 기적을 보고도 예수를 배척하거나 욕하거나 반대할 이들이 있겠느냐는 설명이셨다. 그리고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 편이다”라고 하셨다. 심지어는 “너희가 내게 속한 자라고 여겨서 너희들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구라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 어느 누구라도 절대 실족하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 시켜 주셨다. 만일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 그 어느 한 사람이라도 실족시킨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어 바다에 던져 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무서운 경고의 말씀까지도 해 주셨다. 실제로 수리아나 헬라나 로마 시대에는 이와 같은 사형제도가 시행되었다. 나귀가 끄는 큰 맷돌의 구멍에 목을 달거나 그 구멍에 목을 끼워서 바다에 던져 죽여 버리는 형벌이었다. 아비를 죽인 원수나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한 범인을 처형 할 때에 이런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나약하고 미미한 신앙의 형제자매들을 미혹하거나 유혹하거나 배척하여 상처를 받게 한다든지 낙심하여 주저 않게 하면 육체적인 죽음 이상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씀을 반대로 해석하면 믿음이 연약한 이웃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자들이 실족하지 않고 믿음으로 뿌리를 잘 내리고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돕고 세워 가는 수고를 다하는 이들에게는 하늘의 상급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말씀이시기도 하다.
주변의 모든 영혼들이 귀신에게 매여 살거나 귀신에게 눌려 살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살아가도록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성령 운동을 하여야 한다. 성령 받으면 사람이 달라지지 않나. 성령 받으면 기뻐지고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회의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정해진 신앙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갈 줄 알게 된다. 최소한 쟁기를 잡고 뒤를 뒤 돌아 보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온 나라가 다 알고, 목사까지 된 연예인의 가정사에 벌어진 최근의 사건 뉴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나.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그런 교회적인 직분이니 직책이나 직임보다 백배 천배 만 배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 다워야 하지 않겠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자 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 예수님.”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송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 다운 영적 질서와 평안과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아들 딸 다운,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예수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면서 불쌍한 주변의 그 누구든지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며 물 한 그릇에라도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주변 사람을 대하는 그런 마음가짐 말이다. 주를 믿는 성도인 우리가 착한 일을 할 때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고 하였다.
성도들 간에도 먼데 있는 성도들이 아니라 곁에 있는 성도들 간에 착한 일을 서로 하며 섬기며 살아가라는 말이다. 교회도 멀리 남의 교회 아니라 내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소속한 교회 안에서 서로 간에 착한 일을 하란 말이다. 물론 교회란 내 교회 네 교회가 없이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하나의 교회이지만 말이다. 목회자들에 대하여도 TV에서 많이 만나는 유명한 큰 교회의 목회자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만 갖지 말고 내가 속한 내가 섬기는 제단의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갖고 살아가란 말이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다.
우린 마태복음 25장의 유명한 비유의 말씀을 잘 안다. 영생에 들어갈 축복과 상급을 받을 무리들을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구별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고 칭찬하셨다. 의아해 하는 양으로 구별된 의인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인 영생에 들어가는 자.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단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느냐 아니면 영원히 지옥의 고통 속에 심판을 받느냐의 문제이다. 48절에 예수께서 친히 묘사하신 지옥은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누가 지옥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에도 천국 같은 삶이 있고 지옥 같은 삶의 현장이 있듯이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죄 속에 나서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죄와 악을 멀리 하여야만 한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나. “만일 네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 버리라.”고 말씀한다. 손 발 찍어 버리고 눈을 빼 버리라는 강조가 아닌 것을 잘 알지 않는가. 지옥의 심판을 멀리하고 영생에 들어갈 자답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답게 살아가라는 주님의 강조가 아닌가. 43절과 45절과 47절에 ‘지옥’이란 말씀을 반복하여 언급하시면서 그 지옥이란 곳은“꺼지지 않는 불”(막9:43, 48)의 심판이 있는 곳이며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 66장 24절에 나오는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라는 말씀은 인용하신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세 번이나 비교급으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여 말씀하셨다.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나으니라. 지옥에 던져 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을 반복하여 하셨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떵떵거리는 것도 좋지만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영생할만한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란 말씀으로 지극히 천국을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곳에서 문을 통과하여 저 곳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실감나게 설명해 주셨다.
지옥을 불의 심판으로 말씀하시던 예수께서 49절에서는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다른 각도에서의 불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불과 소금은 부정한 것을 태우는 불이요 부패하고 썩는 것을 막는 소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불과 소금은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 믿는 신자와 믿지 않는 불신자를 구분하는 연단과 시험과 환란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리핀의 쓰레기 처리장인 마닐라 외곽에 있는 파야타스 지역 같은 곳은 그 곳이 곧 지옥과 같다. 20-30년간 쓰레기를 갖다 버려서 쓰레기 산이 된 곳이다. 과거에 난지도 쓰레기 처리장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2000년에는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려서 쓰레기 더미에 1000여명의 주민이 깔려 죽는 사고도 있었다. 그 곳은 범죄의 온상이고 어린이들을 납치 해다가 장기를 빼어 팔아먹기도 한다.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쓰레기를 뒤져서 먹고 사는 이들이 있다. 환경이 지옥과 같고 삶이 지옥과 같다.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역시 중국이다. 그 다음이 인도다. 인도 인구도 2009년 통계로 11억 9천 만 명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5천만 정도로 세계 인구 순서로 26번째이다. 세계 인구의 칠분의 일이 넘는 거대한 민족인 인도에는 카스트라는 계급제도가 있다. 승려 계급인 ‘브라만’과 귀족 계급인 ‘크샤트리아’와 평민 계급인 ‘바이샤’와 천민이요 노예 계급인 ‘수드라’가 그것이다. 인도에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라고 하여서 이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죽기까지 남의 죽은 시체를 태우는 화장을 주업으로 하면서 사는 이들이 있다. 다른 신분의 여성과 결혼 할 수도 없다. 그들의 신분을 평생토록, 자자손손 벗어날 길도 없다. 너무나 가난한 이들은 나무나 짚을 충분히 살 돈이 없어서 화장하는 장례 중에 가족의 시체를 태우다 말고 갠지스 강에 그냥 던져 서 장례를 마치기도 한다. 평생을 지옥과 같은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곳에서 나서 그 곳에서 살아다 그곳에서 죽어 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카스트 제도는 모한다스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의 노력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 평생 채식주의자로 살았던 그는 인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주인공이다. 그의 이름 앞에 ‘마하트마’라고 이름 붙이는 그 ‘마하트마’란 ‘위대한 영혼’이란 뜻이다. 그는 한 번도 공직에 나간 일도 없이 근대 인도의 창시자로 숭상되고 있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독립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한 변호사이기도 하다. 그는 불가촉민들을 처참한 삶에서 구출하기 위해 헌신했다. 간디는 이들을 '신의 아들'이라 부르고 카스트 제도 철폐에 앞장섰다. 또한 인도에서 끝없는 유혈 충돌을 벌이던 힌두교와 이슬람교도들의 평화 공존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광신적인 힌두교도들에게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지지로 오인되었다. 결국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79살에 힌두교 광신자의 흉탄에 맞아 암살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신의 자녀들’이라고 이름 하는 ‘하리잔’(harijan)에 대한 차별대우,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실생활 중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이 땅에 복음이 땅 끝까지 들어가야 할까. 우리나라도 구한말 남녀차별과 양반 상인의 차별이 극심한 시대였다. 그런 당시에 기독교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 온 것 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요 축복의 시작이었다. 성령이 임하시고 그 성령이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전파되어 나가야만 한다. 이 곳 주변에도 그 마음이 땅 끝과 같은 강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구원 받지 못한 이웃의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음에 불안과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면 그 순간 천국과 같은 행복과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순간적이고 감상적인 천국이 아니라 영원한 곳이며, 영생하는 곳이며,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면 누가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영생하는 믿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은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로 화목한 삶을 가꾸어 가는 자.
제자들 간에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논쟁과 불화가 일어났다. 그 때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안고 천국을 교훈 하신 후에 이어서 50절에 이 말씀을 다시 해 주셨다. 예수 당시에 팔레스틴 근동에는 암석이나 늪지대나 개펄 등지에 소금이 암염 상태로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석고 등의 이물질이 너무 많이 섞여 있거나 알칼리성의 맛을 잃어버린 상태의 소금 덩어리들이 발견되고는 하였다. 그러한 환경을 잘 아시던 예수께서 이런 교훈의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소금 없이는 어떤 음식이든지 맛을 낼 수 없다. 심지어는 과일에도 적당히 소금을 뿌리면 훨씬 맛이 더 좋은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만일에 맛을 잃는다면 무슨 맛으로 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서로 간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여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강조하신 교훈이다.
천사라도 하나님의 세계를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지려다가 사탄의 세계로 타락하고 말지 않았나. 34절처럼 스스로 높아지려하고 서로 자리다툼하면 제자들이라도 결국은 불행해 지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에서 벗어나면 지옥의 불행이 시작되고 만다. 그러므로 지혜롭고 순결하고 겸손하게 서로에 대하여 소금처럼 화목하게 하는 섬김의 노력을 서로가 진심으로 다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천국이 시작되고, 영생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박서양(朴瑞陽, 1887-1940)은 백정의 아들로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서양 의술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최초의 인물이다.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천한 직업이었던 백정(白丁) 박성춘(朴成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이었으나 의료선교사 에비슨(O.R. Avison:魚丕信)과 친교를 맺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후에는 은행가가 되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박서양은 에비슨이 맡고 있는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제중원은 오늘 날 연세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다. 1918년 이후 만주의 용정(龍井)으로 가서 구세의원(救世醫院)을 개업하였다. 또한 교회를 설립하였고, 소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독립군들의 의료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2008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신분과 배경과 출신과 환경만 탓하지 말고 예수 영접하고, 예수 사랑 실천하고, 예수 안에서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 신앙을 갖고 누구든지 예수 믿도록 권고하고 권면하는 전도자의 삶을 모범을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 서로 화목하여야 한다.
가족 들 간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형제자매들 간에, 동서들 간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회생활,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교회 생활도 보라. 스스로 잘 난체 하고, 스스로 교만하게 행동하고, 스스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말을 함부로 하고, 혼자만 의인인척 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면 결국은 때가 되면 불행해 지고 말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령 받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참 자녀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라면 서로에게 대하여 겸손하게 대하고 양보하며 덕을 세우는 인간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38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41절에 ‘그리스도께 속한 자’, 42절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다운 믿음의 표증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