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으로(고전12:1-12) 2014. 6. 15
삼위일체주일
사람의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고, 정신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영, 혼, 육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다. 호랑이나 사자나 코끼리나 물개나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의 세계에는 육과 혼만 있다. 식물의 세계에는 육만 있다. 풀과 꽃이 피는 화초와 채소와 나무들은 육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지배하는 영적인 존재이다. 이 영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절에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편지한 것이다. 신령한 것 즉 영적인 분야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권면이 아닌가.
고린도는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당시나 오늘 날이나 기독교의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문화는 거의가 다 우상 숭배에 사로 잡혀서 살아간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왕실에서 조차도 수 없는 주술가와 복술인들을 왕궁에 들여서 고종 때 까지만 해도 온갖 국사를 무당들에게 묻고 매사에 대답을 찾으려 할 정도로 미신과 우상 숭배에 붙들려 있었다. 심지어는 최 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날로 미신에 사로 잡히고 굿하고, 점치고, 복술인들에게 찾아 가서 묻고, 부적을 품에 넣고, 지갑에 넣고, 이불 속에, 베개 속에 넣고, 자동차 안에도 부적 써서 매어 달고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린도 도시에도 그런 사람이 넘쳐 났다. 2절 끝에 보면 저들의 현상을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다.”고 하지 않나.
그러므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래서 3절에 ‘그러므로’라는 사도 바울의 반전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성령.
그렇다. 성령 즉 하나님의 영에 붙들린 성도라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다. “큐리우스 이에수스”라는 고백 즉 예수가 구주시며 우리의 구주는 시저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고백은 당시에 위대한 고백이요 죽기를 각오한 위험한 고백이었다. 가이사 황제가 유일한 절대 권력이던 당시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다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병 고치고 천국 전파하다가 붙잡혀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 하나님의 곁으로 승천한 예수를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위험한 신앙 고백이었다. 그런데 오늘 날 2000년이 지난 현재 어떻게 되었는가. 역사의 사실, 역사의 진실은 천년이 두 번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보석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진리는 세월이 흘러도 동서고금에 진리일 뿐이다. 왜 구주 예수는 이 땅에 길과 진리와 생명 즉 영생으로 오신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구주 예수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강조한 것이다.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의 장면이 마태복음 3장 13절 이하에 나온다. 물론 마가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도 나오는 말씀이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 위에 임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을 입체적으로 묘사한 장면을 보라.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 됨을 부인하거나 곡해 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인정받을 수 없다.
늘 소개하지만 <벤허>라는 영화는 미 육군 퇴역 장군인 류 월리스(Lew Wallace, 1827-1905)라고 하는 소설가가 53살 때인 1880년에 쓴 <벤허>라는 소설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 본래 그는 무신론자였다. 친구였던 봅 잉거졸이 예수를 소재로 소설을 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후에 그는 "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내 책의 중심이 되었고 내 마음의 중심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벤허의 마지막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변화의 역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 출신의 유다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우연한 실수로 지붕의 기왓장이 떨어지면서 로마의 병사들에게 붙들린 벤허는 억울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친구인 메살라에 의해서 겔리선의 노를 짓는 노예로 보내진다. 그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이에 의하여 그의 투쟁과 구원의 씨앗이 뿌려진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얻어 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투쟁을 계속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그의 구원 계획이 작품의 전체에 흐르는 역사적인 작품이 완성된다 소설 벤허는 1959년에 영화로 제작된다. 1899년부터 이미 연극 무대에도 수 없이 오르게 된다. 류 월리스 한 사람의 예수 발견과 고백과 작품이 한 시대, 그리고 오늘 날에 이르기 까지 얼마나 예수를 구주로 전파하고 고백하게 하는 일에 공헌하고 있는가 보라. 성경 안에는 인간을 변화시키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복음의 힘이 감추어져 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저자인 이어령 박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지성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그런 그가 스스로 책의 제목에서 밝히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던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실존적으로 찾아 들어오신 것을 시인하였다. 그는 세례도 받았고 가는 곳마다에서 자신의 영적 변화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자신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성령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성도의 사귐도 갖는데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이 고백 되지 못하는 누가 있다면 성령을 의지하여야 한다. 성령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유익하게 하시는 성령.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3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란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하는 자를 일컫는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영 안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 안에서 말하고 하나님의 영 안에서 범사를 행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생각과 감정과 판단과 말과 행동의 모든 것들을 다스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성도된 우리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다양한 것들을 서로 조화가 되게 하고 일치가 되게 하는 영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시다. 4, 5, 6절에 ‘성령과 주와 하나님은 같고’라는 말씀은 삼위일체 주일인 오늘 절기에 합당하게 묵상할 수 있는 너무나 분명한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 아닌가. 성도는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서로 다 다를지라도 성령은 그 모든 것을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매사에 범사에 유익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인간은 철저하게 영혼육이 하나로 되어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 말씀 그대로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앞에 12절부터 보아야 옳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2-22)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23절의 말씀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성도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온 영, 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보전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기도이다.
우리가 맑은 공기를 마셔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지 않나.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아도 공기가 중요하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중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황사 현상이나 최근 몇 년 째 심각해지는 미세먼지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오늘 날 이단이나 사이비를 중심으로 복음을 왜곡하는 이들의 잘못된 열심은 온 나라의 기독교계를 어지럽히고 혼탁하게 하고 있다.
‘미세먼지’(微細-, Particulate Matter, PM)는 분진(粉塵)이라고도 하는데 아황산가스, 질소 산화물, 납, 오존, 일산화탄소 등과 함께 수많은 대기오염물질을 포함하는 대기오염 물질로 자동차, 공장 등에서 발생하여 대기 중 장기간 떠다니는 입경 10㎛ 이하의 미세한 먼지를 말한다. 노인이나 임산부나 어린이에게 더욱 심각하다. 두통이나 천식이나 아토피 피부 질환에 더욱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자료를 대하게 된다.
성령은 마치도 최고로 말고 신선한 공기와 같아서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풍성하게하고 활력 얻게 하고 기쁨과 감사와 보람과 소망과 격려와 만족과 행복과 평강과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겸손의 영으로 똘똘 뭉치게 한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하나님스러워지고, 예수님스러워진다.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리틴어로 ‘Imago Dei'. 영어로 ‘Image of God'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 이르게 된단 말씀이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거룩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아닌가. 여러 가지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서로 다 다르지만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지체로서의 성도의 거룩한 연합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성숙한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가 아닌가.
4절의 은사(恩賜)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값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신 선물을 말씀한다. 내 수고 내 공로 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해 주신 그 좋은 모든 것이 은사이다.
5절의 직분이란 섬기고 봉사하는 그 모든 것을 말씀한다. 성도들인 우리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서로의 재주와 역량과 은사와 경험과 능력을 중심으로 누구에게나 무슨 일 앞에서나 서로를 섬기고 봉사하지 않나. 그 바탕은 한 성령, 한 주님, 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인 것이다. 6절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성령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6절의 사역은 앞서 언급된 은사와 직임이 어우러져서 그 활동의 결과와 열매로 보여 지고 결실로 들어나는 그 모든 것들이다. 직임과 사역의 원동력이 은사이다. 직임은 사역의 성격이고 사역은 은사와 직임의 활동 상황으로 드러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중심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은사와 직분과 사역 즉 일을 균형 있게 잘 활용하고 담당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모든 은사는 유익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 많은 은사 중에 9가지 은사가 본문에 언급되었다.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병, 방언, 방언 통역 이 모든 은사의 바탕은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성령에 근거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성도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은사와 직분과 사역에 있어서 서로에게 유익이 되면 되었지 서로에게 해가 되면 안 된다. 해가 될 수 가 없다. 만약에 서로에게 해가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 것은 성령으로 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결코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명예나 자랑이나 허영심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 안에서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건강하고 행복한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이 되어야 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성령.
성령으로 인한 은사와 직분과 그 사역은 서로가 다르다. 중복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골고루 감당하도록 하나님은 질서 있게 하시고 균형 있게 하신다. 이는 뒤에 설명하는 사도 바울의 명쾌한 설명에 잘 소개 되어 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12;17-21)
금번에 거북선의 실물을 처음 보았다. 길이가 20미터이 이른다. 실내 2층 구조이다. 좌우에 10개씩의 노를 젓게 되어 있다. 12구멍씩 총 74개의 포구가 있어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활과 포를 쏠 수 있다. 12cm 이상의 두꺼운 소나무 송판으로 덮개가 되어 있고 이순신 장군 때에는 갑판에 철판을 덮어 씌어서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바닥의 모양도 v 자형이 아니라 u 자형이어서 항해가 안전하고 갯벌에 진입할 때에도 용이하다. 전문 용어로는 u 자형의 배 바닥을 평저선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한선을 제조할 때에 주로 평저선을 선호하였고 그런 기술이 발전해 왔다. 서양의 배는 못을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배는 나무못을 써서 세월이 지나도 녹 날 리가 없고 물에 강한 장점을 살렸다. 나무못과 송판이 하나로 결합되고 문제사 생기면 나무 못만 뽑고 다시 수리하면 되기 때문에 매우 견고한 공법이었다. 노의 모양과 효율성도 서양식 노와 달라서 서서 좌우로 짓는 노 짓기의 탁월함이 있어서 효율적이다. 또 마치도 키와 같이 방향을 전환하기도 쉽고 뛰어나다.
임진왜란 7년 동안 26번의 해전에서 일본의 배 700척을 격침시키고 23척을 나포하였다. 거북선의 전투 손실은 한 척도 없었다. 우리 수군의 피해도 몇 십 명에 불과하였다. 연전연승이었다. 그 배후에는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지휘력도 있었지만 거북선과 같은 뛰어난 전투선을 제조하여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도 천지현황총통과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전쟁에 이길 수 있었다. 이는 이미 고려 말부터 개발한 무기 개발의 결과라고 한다. 일본은 당시에 서양식 개인 조총을 썼고 우리는 대포를 사용한 것이다. 배도 일본은 전나무나 삼나무로 제조된 반면 우리는 소나무로 만들어서 그 배의 견고성이 뛰어 났다. 기동력도 일본 전함은 개인이 노를 젓는 반면에 우리 노는 2-4명이 함께 노를 젓는 방식이어서 그 위력에 큰 차이가 났다. 돛도 우리는 둘을 달았고 일본은 돛 하나로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 차이가 컸다. 아랫 칸에는 사병과 장교와 지휘관의 휴식 공간과 의무실, 식당, 부식실, 무기실, 탄약실 등이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되어 있다. 윗칸에서는 5인 1개조로 노 젓기와 활과 포를 가지고 적을 공격하는 전투 시설에 과학적으로 구비되어 있다.
이제 거북선 이야기 그만하고 교회를 말하자.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은사와 직분과 사역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있어야만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원만하게 소임을 다하며 책임감 있게 은사를 활용하고 직분에 충실하고 사역에 열심을 다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대적하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길 자를 찾는 이 때에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대적하고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여야만 한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교훈하였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면 때가 되면 높이시리라고 하였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였다. 그가 너희를 돌보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삼 겹줄처럼 잘 연합하여 감당해 나가는 행복하고 간증이 넘치는 신앙생활의 주인공이 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