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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예수의 손(막8:22-26) 2014.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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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2-10 20:46 조회 18,811 댓글 0
 
어느 개척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배 시간에 기도드릴 교인이 적당치 않아서 목사님이 새 가족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시작된 기도가 좀처럼 끝나질 않자 이곳저곳에서 ‘주여, 주여’하고 염려하는 탄식 소리가 들려 왔다. 끙끙대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하는 기도 마무리 방법이 통 생각이 안 나서 안절부절 하던 그 새 가족은 “그 때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그 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고 겨우 기도를 마무리 하였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늘 마무리 하던 기도의 표현은 아니었지만 그 예배에 참석한 모든 교우들은 오히려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믿고 우리가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듣지 못하던 이가 듣게 해 주시고, 말하지 못하던 이가 말하게 해 주시고, 걷지 못하던 이를 걷게 해 주시는 치유의 주님이 아니신가.
 
물론 주를 믿어도 평생을 이런 장애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이 말씀에 거부감과 저항감을 크게 갖겠으나 강영우 박사, 실로암 안과 병원의 김선태 원장, 헬렌 켈러, F. J 크로스비 여사, 레나 마리아, 닉 브이치치 등이 만난 하나님은 저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감사를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벳새다에서 만난 앞을 못 보는 한 사람을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께 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구하자 그를 마을 밖으로 따로 데리고 가셔서 눈에 침을 뱉으시면서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에 그가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입니다.”하고 말하자 또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실 때에 완전히 밝게 보게 된 치유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손! 이 시간 그런 제목으로 본문을 묵상하자.
 
예수의 사랑의 손.
앞 못 보는 그 사람을 다른 여러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손을 대 주시기를 구하였다. 영어 성경에 보면 “begged Jesus to touch him.” 즉 그 앞 못 보는 사람을 예수께서 ‘touch’ 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다.
 
왜였을까. 우리가 다른 여러 장면에서 보듯이 예수의 곁을 찾는 무리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예수께서 자신의 어린 아들딸이나 혹은 자기 자신을 만져 주시고 안수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예수의 손은 사랑의 손이시다. 사랑이 담긴 손길은 그 온정이 다르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사랑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 직접 만지시거나 안수하셔서 고치신 경우가 여러 번 있다.
 
마태복음 8장 3절에 보면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병자의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또 같은 마태복음 8장 15절에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을 때에 그 집에 찾아 가셔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까 그 순간에 열병이 떠나갔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가 건강해져서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었다. 마태복음 9장 27절 이하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의 곁에 맹인 두 사람이 따라 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때에 예수님은 어느 집으로 들어 가셨는데 그 곳까지 저들 두 맹인이 찾아 갔다. 저들에게 예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시자 “주여 그러하오이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저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치유 사건이 마태복음 20장 29절 이하에 다시 또 나온다.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가실 때에 맹인 두 사람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소리쳤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 때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저들 두 맹인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 때 저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눈을 만져 주셨다. 그리하자 곧 저들 맹인 두 사람의 눈이 떠져서 그 후로 저들이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경우에 사용된 예수의 손은 사랑의 간절함을 담은 손인 것이다.
 
누가복음 7장 11절 이하에만 나오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유일한 기적도 있다. 한번은 예수께서 나인 성으로 지나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동행하였다. 성문에 가까이 갔을 때에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왔다. 장례 행렬이었다. 어느 홀로 살던 여인의 외아들이 죽은 것이다 불행한 장례식을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돕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어머니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울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관에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관 안에서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살아난 아들을 그 청년의 어머니께 돌려주시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말하며 주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17장 7절에는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신 후에 변화 되셨다.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예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만나서 대화하셨다. 베드로가 너무 좋아서 그 산 꼭대기에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 말 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땅에 엎드려서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 제자들의 곁에 다가 가셔서 저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눈을 들고 예수를 바라보았는데 예수 외에 엘리야나 모세는 보이지 않았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제 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고 말하며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치유와 회복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 장면에 보면 물론 베들로가 그에게 선포한 메시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베드로가 평생 40여 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 걸어 본 적이 없는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거기 오른 손으로 상대방의 오른 손을 붙잡아 일으키는 그 믿음의 행위가 기적을 낳은 시작이었다. 그 때의 베드로의 오른 손에는 그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나 걷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랑의 마음,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그 사랑의 마음이 손 끝에 전달 된 것이다.
 
‘엘 샤다이’의 작곡가요 가수요 기독교 작가인 마이클 카드(Michael Card)<땅에 쓰신 글씨>(Scribbling in the Sand)라는 책에 보면 예수께서 엎드려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땅에 글씨를 쓰시는 그 순간에 예수님 주변의 모든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마치도 예수님 주변의 시간은 멈추어 선 것과 같았다. 얼마간의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에 허리를 펴고 일어서신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짧은 대답을 해 주셨다. 더 이상 무리들은 아무 질문도 던지지 못했고 한 사람씩 흩어져 그의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혀 끌려 나왔던 여인을 심판하려고 돌을 치켜들었던 남자들이 제 각기 뿔뿔이 해산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중요한 표현이 있다.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여기서 “하나씩 하나씩”이라는 말씀의 강조가 있다. 우린 사회적으로 집단행동에 의한 시위나 농성이나 데모대의 큰 힘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씩 하나씩” 즉, 각 사람의 모습으로 하면 누가 감히 누구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혹은 망치질을 할 것인가. 손에 돌을 드는 유대인의 문화적 기준은 남을 판단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땅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시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은 그 어떤 대화로도 막을 수 없는 분노한 무리들의 판단의 돌과 심판의 돌을 일일이 한 사람씩 땅 바닥에 내려놓게 하고 저들이 각자 뿔뿔이 그 현장을 떠나가 버리도록 하시는 위대한 힘이 있으셨다. 이것이 예수의 손의 위력이시다. 땅에 글씨를 쓰시던 예수의 손은 사랑의 손이요, 화해의 손이요, 용서의 손이요, 죄 사함의 손이며, 비판과 판단과 폭력을 멈추게 하시는 신비의 손이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손길로 혹은 어린 아이들을 안수하고 축복하시는 손길로 분주하셨다. 성전의 장사꾼들을 내어 좇으시던 예수의 손은 정의와 공의와 성전 제사의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한 손길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까지도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도록 하시며 마지막으로 사랑의 만찬을 함께 하시던 사랑의 손길이셨다. 그 밤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신 것도 예수의 의미심장한 섬김의 손길이셨다. 다음 날 새벽에 붙잡힌 예수의 그 양 손에 대못이 박혔고 그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참담하게 매달려 죽으셨다. 예수의 마지막 양 손에는 화해와 용납과 용서와 죄 사함을 위한 피 흘림의 손으로 양 편의 두 손을 죄악에 가득 찬 인간을 위하여 다 내어 주신 희생과 섬김의 손길이셨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빈 배로 새벽을 맞은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손수 해변에서 그 못 자국 난 두 손으로 친히 불을 지피우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제자들에게 먹이셨다. 예수의 손길은 죽음 이전이나 부활 이후나 한결 같은 사랑의 손길이요 격려의 손길이요 용서와 용납의 손길이셨다. 또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의 손은 이 땅에 재림 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천국을 건설하시는 목수의 손이요 건축가의 손이요 인생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고 온전하게 고치시는 의사의 손이요 인간을 죄와 악으로부터 건지시는 영원한 사랑을 베푸시는 구원주의 손이시다.
 
 
따로 데리고 가시는 예수의 손.
예수께서 그 앞 못 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따로 데리고 마을 밖의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에게 무엇인가 어떻게 해 주시려는 생각과 계획을 갖고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무리 가운데서 앞 못 보는 그의 손을 잡고 따로 데리고 가시는 것은 그에 대한 인격적인 배려요 사랑이요 관심이요 격려요 친절이요 연민이요 불쌍히 여기는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사랑의 표현의 극치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 주님은 나 한 개인을 그렇게 따로 대해 주시며 손을 붙잡고 사랑으로 대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시다. 그 주님은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때에, 체험하게 될 때에만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구주, 나의 영원한 인도자요 안내자요 지도자요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 동네 밖에서 따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셔서 그에게 안수하여 주셨다.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다. 밖에서 놀다가 눈에 무엇이 들어가서 너무 아프고 견디기 어려웠다. 울면서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달리 어찌 방법이 없자. 엄마는 나의 눈을 혀로 핥아서 눈 속에 들어간 티가 빠져 나가도록 해 보시려고 도와 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수께서 앞 못 보는 이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눈에 침을 바르시며 안수하시는 장면은 마치 그런 것이다. 그에게 예수께서 표현하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 최고의 애정, 최고의 연민, 최고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담은 사랑의 표현이 그의 눈에 침을 바르시며 안수하시며 기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 때에 그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인가. 예수께서 그를 따로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개인적인 배려와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그를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따로 데리고 동네 밖의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고쳐 주셨다. 오늘 날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이시다. 나를 따로 만나 주시길 원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 나의 사랑의 주님이시다.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여 치유하시는 예수의 손.
여기, 예수님의 손에서 기적이 나오거나 예수님의 침에 무슨 치료의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병자에게 손을 대시거나 안수 하였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요 사랑을 담은 행위를 하신 것이다.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셨다는 것은 그 앞 보는 병자와 예수님 자신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일체의 표현이다. 우리가 어찌 남에게 함부로 침을 바르거나 침을 남의 신체에 뱉을 수 있는가. 우리가 급하면 자기 몸의 상처 난 부위나 피가 나는 부위에 침을 바르지 않는가. 그건 내가 내 몸에 침을 바르거나 침을 묻히는 나를 향한 나 자신의 내 몸을 보호하고 내 몸을 사랑하는 자기표현이요 자기 응급처방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부로 남에게 침을 바르거나 침을 뱉을 수 있는가. 오히려 남에게 침을 뱉는 다는 행위는 오히려 남을 조롱하거나 남을 비난 할 때에 하는 무례한 행동이 아닌가.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붙잡히시고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심문을 당하셨다. 그 때 예수를 조롱하는 무리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런 경우에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상대방을 모멸하고 조롱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침을 바르신 경우는 다르다. 인간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상대방의 신체 부위에 침을 바르는 것은 상대방과 내가 하나가 된 일체감을 표현하는 사랑의 극치이다. 예수께서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처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사람의 눈에 침을 바르시며 안수하신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치유 행위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지 않고 마치도 그 앞 못 보는 사람이 자기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눈에 침을 발라 주며 고침 받기를 원하는 상황처럼 예수님의 이 같은 특이한 치유의 과정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 묵상하지만 침을 바르고, 침을 뱉는 행위를 통해서 안타깝게 여기고, 불쌍하게 여기고, 민망하게 여기고, 고침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치료되고 회복되고 건강해 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랑과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 침을 바르는 치유 행위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베스트 닥터>라는 책이 있다. 동아일보 의학담당 이성주 기자가 발로 뛰며 쓴 책이다. 동아일보에서 200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실시한 베스트 닥터 설문조사와 1999년 월간 신 동아에 실린 한국의 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39개 분야 450명의 베스트 닥터를 소개하였다. 3년 동안 각 분야의 전문의 2,000 명의 답변을 토대로 선정하였다. 이 책은 환자의 알 권리와 의사를 선택할 권리를 행사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한 책이다. 명의를 찾기 위해서 많은 환자와 가족이 겪어왔던 시간적이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자료집이다.
 
가령 간담췌장질환 전문의로 유명한 이는 강남세브란스 병원의 윤동섭 박사이다. 그의 간증에 보면 수술 성공률이 높지 않은 췌장 분야의 전문 치료, 전문 수술 의사로 경력을 쌓아 오고 환자를 대해 오면서 그는 마음속에 간절하게 환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환자가 병을 이기고, 암을 이기고 고침 받고 회복하고 생명이 연장되고 하는 회복을 보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의사로서 환자에 대하여 연민의 정으로 느껴지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며 환자를 대하는 것을 고백하였다.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물론 우리의 몸에 어딘가가 병들면 그 분야의 권위 있는 의사를 만나는 것이 급선무이긴 하지만 매 순간 하루, 하루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는 참 의사 중의 의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의 손길, 예수께서 침을 바르시는 그런 개인적이고 특별한 관계의 은총을 경험하여야만 한다. 그리할 때에 내 안에서 나도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께 대답이 있다. 예수 만나 영 혼 육을 고침 받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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