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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온전한 예배의 회복(히10:1-10) 201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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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1-25 14:03 조회 18,783 댓글 0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 제사의 제물인 양과 황소와 송아지와 같은 제물로는 완성할 수 없던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율법의 제사로는 장차 올 ‘좋은 일’로 언급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온전한 구속을 절대로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절에서 말씀하는 ‘그림자’와 ‘참 형상’의 비교를 주목해 보라. 보고 싶은 그 누군가의 ‘사진’이 실물의 ‘그림자’라면 ‘실물’은 그 보고 싶은 사람의 ‘참 형상’이 아닌가. 그러므로 모세의 때에 말씀하셔서 계속하여 오던 짐승 제사 즉 동물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림으로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로는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법이다. 이는 히브리서 8장 7절에 보면, 모세 때에 시내산 언약으로 언약하셨던 ‘첫 언약’과 비교되는 ‘둘째 언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히브리서 8장 8절에서는 ‘새 언약’이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는 ‘제사’라는 용어를 단순히 ‘예배’라는 개념으로 좀 더 쉽게 생각하면서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로 오셔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룩하신 산 제물이시다. 이를 요한복음 6장 38절부터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그 곳에서 분명하게 알려 주시고 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8-40)
 
자, 그러므로 예배란 그 시대마다 나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제대로 찾아 가는 영적 순례의 행위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날 우리는 본문인 히브리서 10장에 근거하여 어떤 예배를 드려야만 할까.
 
 
죄(罪)로부터 정결(淨潔)하게 되는 예배.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셔서 제사를 드리게 하셨던 황소와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통한 제사로는 ‘죄를 깨닫게 하거나’, ‘죄를 기억하게 하거나’ 할 뿐 영원히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하는 제사’였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짐승 제사를 해마다 늘 드리고 또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단번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룩하신 대속의 은혜는 우리 인간을 죄에서 완전하고 온전하게 구원하시는 구원의 능력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으심은 죄와 악의 덩어리로 살아가던 인간을 그 씻을 수 없던 죄로부터 단번에 정결하게 하시며 단번에 거룩하게 하시는 온전한 구원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날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이와 같은 온전하고 완전하신 죄 사함의 은총과 은혜를 찬양하고 경배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인간을 그 자신의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히브리서 8장 6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좋으신 직분을 얻으신 분이시며,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모세 때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 레위인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루려 하셨던 하나님의 구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좋은 직분자로 오셨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예배는 율법의 완성이시며, 더 크고 좋은 장막으로 오셔서, 더 좋은 제물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이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경배하고 찬미하고 드높이는 것이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 성(城)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런 예배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녀는 지난 날 다섯 남자와 동거한 적이 있었고 지금의 남자도 제 남편이 아닌 그 어떤 남자와 여섯 번째 동거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의 열망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예배할 곳을 찾는 질문을 예수님 앞에서 한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예배의 장소가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이냐 혹은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2-23)는 예배에 대한 유명한 정의를 내려 주셨다. 이 여인은 자신과 대화하고 계신 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물동이를 버려 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서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를 만난 사실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예수를 만난 후에 과감하게 예수를 남에게 전파하는 예수 전도 부인이 된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수가성 마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 더욱 많아 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라”(요4:42)고 하였다.
 
이번에 지방 집회를 위하여 며칠 간 머물렀던 충남 논산군 강경읍에는 처음 가 보았다. 그러나 그 강경읍에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등의 교회 예배당이 온 읍내의 풍경을 상징하는 높은 종탑으로 한 눈에 들어 왔다. 강경에 기독교 복음이 처음 들어 간 것은 1895년에 강경에서 인천으로 배를 타고 다니며 포목 장사를 하던 지병석에게 침례교단의 선교사들이 세례를 준 것이 그 곳, 강경의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지병석 집사는 그 다음 해인 1986년 2월 9일에 강경의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강경침례교회’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 1901년에 감리교, 1918년에 성결교 등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누군가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죄 사함과 세례와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실천해 가는 예배자의 생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예수를 만나고 체험하며 예수를 통하여 죄 사함과 거룩함을 체험하고 나를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방에 증거하는 예배자요 전도자의 삶을 계속하여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몸을 드리는 예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인류 구원을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5절의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배하셨도다’라는 말씀의 원문의 뜻은 ‘당신께서 내 귀를 뚫었나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귀를 뚫는 행위는 주인이 노예의 귀를 뚫는 것을 말한다. 종의 귀를 뚫는 것은 영원한 주인의 소유임을 선언하고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나 자신을 노예와 같이, 종과 같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분이시다.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야산의 한 편 자락에 고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강재구 공원이 있다. 고 강재구 대위는 1965년 10월 4일, 그 곳에서 월남전 참전을 위한 마지막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때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쳐서 자신은 산산 조각이 되어 산화하고 부하들을 살려낸 일화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일화이다. 그 곳은 대경목재 김경황 사장이 그 주변의 땅 1만여 평을 기증하면서 고인의 숭고한 군인 정신을 추모하는 기념 공원이 조성되었다. 28살에 대위로 세상을 떠난 그에게 일 계급 승진을 추서하여 고 강재구 소령으로 불린다. 태릉의 육군사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후배 생도들에게 진정한 군인정신을 묵묵히 말하고 서 있다.
 
디모데 후서에 보면,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군인이 나라를 위하여 바치듯이 바치셔서 한 몸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온전한 구원을 완성하신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은총으로 덧입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 또한 자신의 몸을 주께 마땅하고 당연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는 제자를 우리는 기억한다. 의심이 많고 활달하며 이성적인 성격의 도마는 12제자의 한 사람이다.(마 10:3, 막3:18, 눅 6:15) 요한복음에는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고 하였다.(요 11:16, 20:24, 21:2) 헬라식 이름으로 ‘디두모’인 ‘도마’는 쌍둥이란 뜻이다. 도마는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찾아 가서 만나 주실 때에 그 현장에 없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그는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거나 옆구리의 못 자국에 직접 자신의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런 그에게 여드레 후에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도마의 손가락과 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의 흔적에 손가락과 손을 넣어 보도록 하셨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하셨다. 도마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메시아의 강림을 고대하던 중에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 받았을 것이다.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나 요한처럼 갈릴리 출신의 어부였던 도마는 열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예수님께 충성된 마음으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도마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방문하시려고 할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의 반대에 맞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선언할 만큼 담대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도마에게는 어떠한 난관이나 생명의 위협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사랑하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 원하는 도마의 마음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그 어떤 곳에라도 따라갈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확고한 도마의 헌신된 마음도 베드로나 그 어떤 다른 제자들처럼 정작 예수께서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던 그 날에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서 숨어 버리는 비겁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런 그가 사도행전 1-2장의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받던 자리에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이방 전도자요 순교자가 되었다. 인도 앞의 섬나라인 스리랑카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흔적이 있다. 여러 해 전에 그 곳에 가서 보니 ‘성 도마 기념 교회’도 있었다. 그런 그가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순교 당하였다. 인도의 동쪽의 야만족들이 살던 도시에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의 가증스런 우상 숭배의 현장과 이단들에게 들어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어리석은 신앙과 그 우상 숭배 신앙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에 그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그를 왕 앞에 고소하자 왕은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불에 시뻘겋게 달군 대형 팬 위에서 고문을 가했다. 펄펄 끓는 가마에 그를 던져 넣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참혹한 순교의 순간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붙잡았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의 몸을 불가마에서 건져내어 그 자리에서 죽여 장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 곳 스리랑카나 인도의 처처에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복음이 열매가 계속하여 풍성하게 맺혀 가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신앙은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할 만한 영원한 가치가 있다. 사람의 육체는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한번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정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라면 우리는 단순히 죽음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안에서 주님의 자녀답고 주님의 제자다운 삶과 죽음을 선택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금번에 강경에서 집회 중에 오후에 방문한 강경읍 가까운 곳의 논산시 성동면 개척 1리 병촌성결교회는 1950년 9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마을의 74명의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66명이 공산당들에 의하여 순교 당하였다. 그 66명 중에는 어린이와 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 39명, 남자 27명을 포함한 66명이 몰살을 당한 것이다. 공산당들은 칼과 몽둥이와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죽창으로 무참하게 예수 믿는 이들을 살해하였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어른 5명과 교회학교 어린이 3명이 마을을 지켰다. 오늘 날은 다시 300여명이 모여 예배하는 순교 성지가 되어 있었다. 감리교회의 순교자의 후손들 중에 장로가 된 이들이 금번 집회에도 매 시간마다 참석하는 것을 만나 보았다. 저들의 순교 사실을 알리는 안내 책자의 겉표지에는 예레미야 6장 16절의 말씀이 새겨 있었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예배란 무엇인가. 환난과 고난과 시련과 유혹과 미혹이 끊임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온전한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드리는 고백과 결단의 시간을 계속하여 갖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예배.
그렇다. 예배란 나 한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인신의 안일을 구하는 행위가 절대로 아니다. 예배는 나 자신이 예배를 통하여 예배자의 가장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 분에게서 배워 가는 것이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한 삶을 초지일관(初志一貫) 살아가셨다. 본문의 5-7절은 시편 40편인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인용한 것이다.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라고 고백하였다. 본문 7절과 9절과 10절에 반복되는 표현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 뜻을 따라”라는 반복적인 강조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가신 분이 절대로 아니시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까지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묻는 생을 사시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시다.
 
그렇다. 하나님은 본문 9절의 말씀처럼 ‘첫째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시었다. 여기서 말씀하는 ‘첫째 것’은 모세 때에 제정하신 동물 제사를 말한다. 그리고 ‘둘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몸을 단번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 이룩하신 영원한 대속의 은혜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배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질문 즉,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 대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어야만 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에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반복하여 물으시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나.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여기서 말씀하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성도들의 예배는 철저하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대답을 성경적으로 찾아 나서는 경건한 순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는 나의 시간, 젊음, 경험, 재물, 심지어는 취미를 비롯한 나의 그 모든 것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분의 뜻 안에서 나를 겸손하게 내어 드리며 그 분의 다스림을 받는 나날이 되어야만 온전한 예배자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로마서 12장 2절이 말씀하는 말씀대로 말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언제나 예배자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의 매 순간의 고백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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