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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6) 201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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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1-05 07:54 조회 20,886 댓글 0
 
미국의 위스콘신 주에 사는 72살 된 헤럴드 스콧은 43년 동안 트럭 운전수 생활을 하였다. 그는 평생 벌어들인 소득 중에서 최근 2년 반 동안에 우리 돈 약 8억원을 들여서 30여 곳의 고속도로 주변에 대형 전도 광고판을 세워 온 사실이 최근에 언론에 보도 되었다. 스코트는 간판 전도 캠페인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트럭운전사로서 그의 생애를 통해 그는 고속도로 주변에 수많은 간판을 봤으나 복음을 전하는 간판은 보지 못했다면서 이것이 간판 전도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평생 동안 신앙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전부터 성경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죽으셨는지 깨달아 알고 믿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 앞에 엎드려 우리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사도행전 16장 31절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전도 광고 판 제작에 오직 전념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분명하였다. 전도 광고판은 그가 사는 위스콘신주 그린베이에 집중돼 있다. 미식축구팀 그린베이 패커스의 홈구장인 램보필드 인근의 41번 고속도로에도 역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thou shalt be saved.)는 전도문구의 광고판이 걸려있다. 스콧씨는 “미식축구 시즌에는 하루 7만5000명의 관중들이 광고판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예수님을 모르던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되고 알려지고 예수님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되는 전도의 열매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기독교 선교 129년째를 맞이하는 우리나라에 기독교에 대하여 상식이 없는 이들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가령 대구나 부산 같은 불교세가 강한 지역의 기독교 복음화 비율은 불과 7% 정도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때에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제대로 깨달아 알아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어야만 하는 신앙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 원어인 ‘카타노에오’(katanoevw)의 뜻은 ‘어떤 일에 몰두하라’ 혹은 ‘마음을 고정시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 말 해석은 그 뜻이 참으로 심오하다. 영어로도 ‘fix your thoughts on Jesus’ 즉 ‘예수께 생각을 고정하라’고 하였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한 가지 일에 골똘하고 집중하고 마음을 고정하면 분명히 그 하는 일에 좋은 결과를 맺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위대한 복음 전파의 공헌을 한 인물들을 연구해 보면 저들의 한결 같은 특징은 오직 예수 한 분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그 분에게서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의지하고 공급 받았던 분들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하여도 그러하고 복음 전파의 사역 그 자체로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가 유일무이한 진리요 복음이라고 하면 그 한 가지 일에 골똘하고 집중하여 복음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그 분으로부터 능력을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데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지 못할 인생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볼록 렌즈로 햇볕을 모으면 그 집광 효과를 불이 지펴 지는 것을 보라. 레이저광선으로 유리나 쇠를 자르는 힘을 보라. 레이저 치료 법과 레이저 수술법으로 인간의 몸 암에 있는 병든 부분을 수술하기도 하고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도 하는 것을 보라. 집중의 효과는 이처럼 놀라운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된 2014년! 올 한해 첫 날부터, 첫 주일부터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히브리서 본문의 이 말씀에 흠뻑 은혜를 받고 날마다 그런 은혜의 수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 과연 누가 예수께 생각을 고정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일까. 누가 예수만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일까. 본문은 그러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저들의 특징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함께’라는 표현이 예사로운 표현이 절대로 아니다. 노아의 7식구가 노아와 함께 방주에 들어가서 홍수 심판 때에 구원을 얻음과 같이 이 ‘함께’ 라는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대단히 의미 깊게 사용한 표현이다. ‘함께’라는 헬라어 ‘메토코스’(mevtoco")라는 말은 히브리서에서만 사용한 단어이다. 그 의미는 ‘나누는 자, 친구, 동반자, 동참자’란 뜻이다. 즉 여기서 ‘함께’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동참한 자들인 믿음의 형제들, 즉 성도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 되어 함께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헌신하고 함께 섬기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이야기 하고 함께 교제하는 그 모든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이며 은혜이며 은총인지 모른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표현 할 때에 ‘하나님’이란 호칭 대신에 ‘하늘’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겨 하였다.(6:4, 8:5, 9:23, 11:16, 12:22, 12:23)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들이다. 여기서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한 선물이다. 또한 ‘거룩한 형제들’이란 말씀은 성도란 모름지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자들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 마다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고 야고보는 ‘나의 형제들’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향하여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한 것은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호칭인가.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성도는 서로 간에 늘 이렇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자, 그러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이시기에 그분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使徒)이시며
대제사장(大祭司長)이신 예수.
‘믿는 도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고백하는’이란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전부이시다. 우리가 사도 신경에서 고백하는 사도들의 신앙 고백과 우리의 고백이 일치하듯이 말이다. 이 사도들의 신앙 고백에서 벗어나면 그 누구라도 이단이요 사이비이다. 그러므로 믿는 도리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인 우리가 믿는 믿음의 전부이시다. 이는 히브리서 1장에서 너무나도 명확하게 선언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얼마나 명쾌한 신앙의 고백이며 찬미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모든 믿음의 도리이시다. 영어에 ‘we confess’라고 했다. 즉 우리가 신앙의 고백으로 고백하는 그 분! 그 주님이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스스로 오신 아들이 아니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셔서 때가 찬 경륜으로 보내신 독생자이시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은 유언적인 기도를 드리시는 자리에서 그런 내용을 강하게 언급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셔서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내용처럼 포도원을 종들에게 맡기고 먼 나라에 떠난 왕이 다른 종들을 보내서 수확한 것을 계산하자고 할 때에 그 종들을 차례대로 때리고 죽이고 처치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궁금하고 답답해 진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내서 형편을 알아보려고 하자 아들마저 죽여 없애 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 보냄을 받은 아들을 죽여도 죽지 않는 아들이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 사망을 이기는 영생 그 자체이시며 그 영원한 영광의 본체이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종으로서 이처럼 구원을 이룬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백성들을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모세보다 신실하시고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가치가 넘쳐 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제사장으로 오시되 잠시 잠깐 반차를 따라서 성막을 섬기는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이요 온전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보내심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하는 유일한 성경이다.(2:17, 3:1, 4:15, 5:10, 7:26, 8:1, 9:7)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모세 시대부터 대제사장을 통하여 민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선민의 축복과 대속의 은혜를 베푸셨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보냄을 받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죄 사함을 단번에 이룩하신 번제물이 신 영원한 중보자요 영원한 대제사장인 분이시다. 히브리서 2장 17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셨다고 하였다. 맞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히 여기신 자비하신 대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신실한 대제사장이시다.
 
 
우리의 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무리 건물이 대단하고 아무리 집이 대단하여도 그 건물보다 존귀한 이는 그 집을 지은 이가 아닌가. 가령 설계가, 건축가가 존귀한 것 아닌가.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소망의 확신을 예수님께 두고 성도된 우리의 모든 자랑을 예수님께 두고 예수님을 굳게 잡고 살아간다면 곧 우리가 예수님의 집과 같은 인생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즉 집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이란 말씀이다. 우리가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의 확신과 성도된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곧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란 말이다. 즉 여기서 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다. 공동번역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사람들입니다.’라고 번역하였고, 표준 새번역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번역에 는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라고 잘 번역하였다. 어려운 말로 하면 “성도는 우주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성도된 자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면 이 땅의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은총과 평화와 축복을 영원무궁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자녀 된 아들딸의 축복과 권세를 가지고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며 춤추어 송축하며 천국 생활을 할 수 있는 영생의 특권이 이미 각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오늘 날 종합대학교가 된 목원대학교의 전신인 대전감리교 신학교의 학장을 지낸 신학자 이호운(1911-1969)목사는 평남 강동군에서 태어났다. 21살에 신학공부를 시작한 그는 25살 때부터 목회자로 여러 곳에서 목회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일제의 식민지에 반대하다가 일경에게 붙들려 곤혹을 치르고 석방된 후에 남쪽으로 내려 왔다. 서울에 월남해서 만난 쿠퍼(K. E. Cooper)선교사의 인정을 받고 그의 도움으로 십자군 장학금을 받아 들고 1949년 9월에 미국 게렛 신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전쟁 중이던 1952년 9월에 귀국하여 전쟁 중이었으나 감리교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4년 후인 1956년 9월에 대전감리교 신학교에 가서 가르치던 그는 나중에 학장으로 학교를 발전시켰다. 1965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신학교를 문교부 대학인가를 받아냈고, 오십 여만 평의 대전 계족산을 마련하고 거기에 35만 주의 낙엽송과 각종 나무를 심었다. 그는 13년간 1000여명의 목회자와 신학생을 배출하였다. 그가 작사한 찬송 436장 찬송을 4절까지 부르도록 하자.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그 모든 가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앙의 고백이며 이미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요,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있는 거룩한 천국 백성의 삶을 고백하고 찬송하는 찬양이 아닌가. 323장 찬송,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역시 그 분이 작사한 찬송으로 널리 알려 져 있다. 우리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로서 성도다운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말 한마디, 찬송 한 구절, 우리의 일상생활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할 것이다. 건강하게 주신 손과 발로 섬기고 봉사하고 땀 흘리고 수고하는 그 모든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의 아들 딸 다운 삶을 성숙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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