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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부부와 가정(고전7:1-7) 201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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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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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3-11-06 21:11 조회 19,850 댓글 0
 
나라도 안정되어야 하고 교회도 중요하지만 가정이 참으로 중요하다. 아니 교회와 가정이 모두 다 소중하다. 교회 생활이 올바르면 가정생활이 활력을 얻는다. 가정이 행복하면 교회 생활 또한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진다. 가정과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교회 보다 가정을 먼저 세우셨고 가정의 시작은 남편과 아내 즉 부부이다. 본문은 부부의 삶 즉 가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제 1장의 예수 탄생 족보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어 42대 만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나는 가정 이야기요 가문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낳았고 아들 ‘이삭’도 아들을 낳았다. 이렇게 42대가 이어졌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중에 아브라함의 이천년, 다윗의 천년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셨다. 예수는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잉태되고 탄생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태복음 1장 16절에 보면 예수는 단지 요셉의 아내 될 정혼자였던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이지 엄격하게 말하면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혈통이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를 아담에게까지 역으로 다루는 누가복음 3장 23절에 보면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고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헬리는 누구인가. 다시 마태복음 1장 15절과 16절에 보면 요셉의 할아버지는 맛단이고 아버지는 야곱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남편이다. 그런데 왜 누가복음 3장 23절은 요셉을 야곱의 아들이 아닌 헬리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성경역사의 해석은 이렇다.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이 헬리의 가정에 데릴사위였다. 당시에 데릴사위란 아들과 같은 법적 권한을 지녔다. 즉 사위이지만 아들인 것이다. 자, 그러면 헬리가 누구인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된 마리아의 친정아버지가 헬리이다. 그 헬리의 데릴사위가 요셉이다. 그러하다 보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요셉이 장인 헬리의 데릴사위로서 그의 아내 될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으니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아들이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요셉의 아내될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이 땅에 보내신 아들이지만 남편 요셉으로서는 족보상으로 결혼할 아내가 낳았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법적으로 요셉의 아들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이것을 누가복음 3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이 삼십에 가르치심을 시작하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위는 헬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애매한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대한 궁금증은 누가복음 3장 31절에 다윗의 아들이 나단이란 기록을 보면 분명해진다. 다윗은 알겠는데 다윗의 아들 나단은 누구일까. 사무엘하 5장 14절에 보면 다윗이 처첩을 통하여 낳은 아들들 가운데 세 번째 아들이 ‘나단’이다. 그러므로 헬리는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대를 이은 후손이 아닌 다윗이 세 번째 낳은 아들 나단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친정아버지인 헬리의 아들 요셉의 아내를 통하여 탄생하였다는 성경의 강조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사탄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겠다고 하였으니 신학적으로 옳은 족보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 또한 다윗의 후손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마태복음 1장 1절의 기록이 맞는 것이다.
 
자, 왜 이처럼 본문을 해석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길게 다루는가 하면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인 부부를 통하여 가정을 이루시고 가정을 통하여 아들딸을 선물로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겨갈 거룩한 믿음의 가정이 계승되어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본문에 돌아 와 보면 사도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했다. 즉 반드시 꼭 그렇게 결혼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7절에 보면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다가 순교당한 사도 바울은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는 말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권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사도 바울은 성경적인 일부일처에 근거한 결혼관의 소중함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욕 생활뿐만 아니라 독신 생활의 유익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뿐이다. 결혼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 개인의 의견일 뿐 6절 끝에 보면 명령은 아니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은 안 하거나 못하면 외롭고 결혼하게 되면 괴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가정은 부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도 처음에는 아담만 창조되었었다. 그러나 아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외로워 보이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옆구리에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돕는 배필인 아내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부부의 탄생이다. 그런데 저들 둘이 함께 모여 사는 에덴동산의 첫 가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남편에게 출입을 말하지 않고 에덴동산을 산책하던 하와가 뱀을 만나서 뱀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와 같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의 완전한 가정이요 거룩한 가정인 성가정(聖家庭)의 아담과 하와 부부는 타락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에덴에서 추방되는 심판을 받고 말았다. 이처럼 에덴을 떠난 아담과 하와의 가정사에 벌어지는 온갖 별의 별 문제들은 당시나 오늘 날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죄악의 문제들로 이어져 오고 있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서로를 위하여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
2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은 유혹이 많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다른 여성들이나 다른 남성들에게 유혹을 받거나 관심을 빼앗기지 말고 부부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라고 강조한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부부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며 살아가라고 하였다. 이는 일부일처의 부부 원리에 바탕을 두고 교훈하신 매우 소중한 말씀이다. 이 같은 교훈은 노아도 잘 지켰고 이삭도 잘 지켰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나이 여든 여섯이 되도록 아내 사라와 함께 자녀 없이도 잘 지내던 생활을 깨고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조급하게 곡해하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지 십 일 년 만에 아내사라의 요구를 따라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낳고 말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하갈도 인정하지 않으셨고 이스마엘의 탄생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탄생으로 여기셨다. 물론 나중에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열두 방백으로 번성하는 복을 주시기는 하셨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탄생한 이스마엘의 후손과 언약을 따라 탄생한 이삭의 후손간의 갈등은 사천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 계속되는 것을 보면 남편과 아내 즉 부부를 통한 가정의 생활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삶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다르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장가들었는데 자매간인 레아와 라헬 모두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두 여종 실바와 빌하를 통해서 네 아들을 더 낳는 과정에 네 명의 부인을 통하여 열두 아들과 외동딸 디나를 낳는데 까지 이르렀다. 네 부인, 네 여성과 더불어 살아가던 야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였다. 본문을 잘 보라. 2절에 보면 ‘자기 아내’, ‘자기 남편’이라고 했다. 왜 자기 아내와 자기 남편을 강조하는가. 그것이 가정이니까 그렇다. 3절은 남편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아내의 의무를 다하라고 했다. 4절에 보면 심지어는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말고 남편이 주장하도록 하고, 남편도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말고 아내가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즉 아내는 남편을 위한 아내요, 남편도 아내를 위한 남편이란 강조이다. 부부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서는 안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살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살아가라는 강조이다.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33절까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 됨에 대하여 훨씬 더 구체적으로 교훈해 주고 있다. 에베소서 5장 22절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고 25절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33절에 가서,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강조하였다. 다시 에베소서를 좀 더 보면,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3-24)고 하였다. 그리고 남편들에게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6-28)고 하였다. 남편은 아내에 대하여 사랑함으로 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복종함과 존경함으로 하라고 하였다. 다시 본문에 돌아와 보면 남편이나 아내는 남편이 아닌 남의 남자나 아내가 아닌 남의 여자에게 한 눈 팔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남편된 의무와 아내된 의무를 다하는 부부로 살아가라는 강조이다.
 
 
기도하는 남편과 아내.
5절의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강조를 하게 된 근거는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 지나친 종말론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하다 보니 결혼은 하였으나 지나친 금욕 생활로 말미암아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독신 생활을 하듯이 별거하는 가정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소식을 듣고 결혼한 부부가 결혼 하지 아니한 독신자들처럼 별거하는 지나친 종말 신앙에서 벗어나라고 권면한 것이다. 다만 부부라도 ‘합의상 얼마동안’ 서로 기도할 목적으로 분방하는 정도로만 분방하라고 하였다. 또한 ‘합의상’이라는 말씀은 일방적으로 분방하지 말고 남편과 아내가 기도 생활을 위하여 서로 의논하여 의견 통일이 된 상태에서 얼마 동안 분방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남편 없이 혹은 아내 없이 살아가는 경우에야 언제나 기도를 위하여 매진하는 생활을 그 누가 무엇이라 할 것인가. 마치도 누가복음 2장 28절의 시므온이나 36절의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밤낮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주를 섬기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전해 듣고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3:38)는 말씀처럼 말이다. 예수 탄생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던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는 너무나 은혜로운 평가를 받던 기도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던 성령 충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있는 부부라면 서로가 기도의 목적 이외에는 함부로 분방하며 살면 안 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러한 생활을 계속할 때에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을 경계한 것이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지만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고 부동산 투기에만 눈이 멀어서 사도들의 권위와 성령의 역사를 경솔하게 여기고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를 속이는 거짓된 출입을 하였다. 결국은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그만 부부가 차례대로 죽임을 당하여 초대 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던 불행한 부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그러나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달랐다. 바울이 만났고 바울 곁에서 선교를 위하여 헌신한 기도하는 부부 중의 대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니겠는가. 저들 부부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8장이다. 요즘 고린도 전서를 묵상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도 당시에 만났던 부부가 저들이다. 그 남편 아굴라는 본도라는 곳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할 때에 항구 도시 고린도에 가서 살던 부부였다. 그 아내 이름이 브리스길라이다. 저들의 직업은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저들 부부가 얼마나 소중한 선교의 동역자들이었나를 알 수 있다. 로마서 16장 3절 이하를 펼쳐 보라.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16:3-5)고 하였다.
 
여기에 보면 브리스가 즉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의 선교 동역자였다.
․사도 바울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 부부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려 할 정도의 헌신자들이었다.
․저들 부부의 헌신 생활은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여러 교회에 골고루 좋은 소문이 나 있어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이 늘 감사하게 여기는 부부였다.
․뿐만 아니라 저들 부부는 자기 집을 교회로 문 열고 주를 섬기던 가정이었다.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전에 생애의 마지막에 써서 남긴 편지요 성경 말씀인데 그 디모데 후서 마지막 장인 4장의 끝 부분인 19절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언급할 정도로 저들 부부는 평생토록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던 선교의 동역자요 평생의 동지였다.
 
이 정도 수준의 선교와 헌신 생활을 하는 부부들이라면 항상 합의하에 얼마동안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경건 생활을 계속하여 잘 유지해 나가라는 말씀이다.
 
 
사탄의 시험을 조심하며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
국가나 교회보다도 가정이 더욱 소중하다. 가정은 모든 것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가정을 사탄이 항상 시험하고 있다. 물론 국가도 안정 되어야 하고 교회도 든든하게 세워져 가야 하지만 가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교회도 무너지고 국가도 무너져 가게 된다.
 
다윗 왕을 보라. 당시의 큰 적국이었던 블레셋과의 싸움을 다윗의 이스라엘 군대는 연전연승하였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 즐겨 제사를 드리던 예배의 사람이었다. 그런 다윗이 부하 장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큰 죄를 저질렀다. 전쟁이 한창 중이던 때에 온 나라가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요압 장군을 비롯하여 군대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가 다 칼과 창과 활과 방패로 무장하고 최전선에 나가서 피를 흘리며 전쟁하고 있는 동안에 다윗은 어찌 된 일인지 예루살렘 성에 남아서 왕궁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늦게까지 낮잠을 자고 대 낮에 일어나서 저 만치 바라다 보이는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자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 낮에 남들의 눈에 띄게 목욕을 한 밧세바도 문제이지만 그런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고 결국은 범죄로 사건을 키워서 죄를 지은 다윗도 한심했다. 다윗은 그날 그렇게 해서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고 만 것이다. 다윗은 전쟁에는 능한 장수요 임금이었으나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에는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고 말았다.
 
공부 잘하고, 인물 좋고, 건강하고, 직장 생활 잘하고, 사업 잘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권력과 명예와 재물을 갖는 것이 다 나쁠 것이 없지만 사탄이 나를 시험하지 못하도록 사탄을 경계하여야만 한다. 과거에 불조심 표어 중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 깨나 불조심’이란 표어가 전봇대마다 나붙고 벽면마다 나붙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요즘보다 화재 사건에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산불도 훨씬 많았다. 요즘이야 산에서 불을 펴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든지 산행하다가 담배를 피운다든지 하는 일들이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 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그런 단속도 약했고 법으로 엄하게 규정하지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하다 보니 산불도 자주 났고 아까운 산과 아름드리 좋은 나무들이 산불로 모두 다 타 죽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작은 성냥 불 한 개 피가 엄청난 산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처럼 가정에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경계하여야 한다. 남편과 아내, 부부의 생활에 사탄이 시험하지 않도록 서로 서로 주의하여야만 한다. 과거에는 연탄불은 구들장 밑에다가 피우고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하다 보니 연탄가스로 사망하는 사고가 참으로 많았다. 나중에 새마을 보일러라는 온수 순환식 온돌 데우기 공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연탄가스로 아까운 목숨을 잃고는 하였다. 사탄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일단 사탄에 나게 들어오거나 나의 가정에 스미어 들어오면 연탄가스 때문에 사람이 죽듯이 사탄이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는 무서운 악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하여 사탄이 시험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삼가고 조심하지 않으면 피차 불행해 지고 말 것이다.
 
사도 바울은 독신의 은사가 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사도 바울처럼 독신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절의 말씀이 그런 내용이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 은사가 있으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라. 그러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별로 외롭지 않거나 불편이 없다면 구태여 반드시 결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사탄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 생활을 성실하게 하면서 주를 섬길 수 있는 길을 선택하라.
 
부부와 가정은 하나님이 이 땅에 자자손손 후손이 하나님의 언약 자손으로 번성해 가도록 만들어 놓으신 은혜와 축복의 우물과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축복의 우물 샘이 세상의 더럽고 추한 악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언제나 깨어 가정을 소중하게 지키고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부부된 의무를 성실하게 잘 담당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이요 뜻이기 때문이다.
 
가정을 제대로 꾸려 나가고 부부의 역할을 제대로 잘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공부 잘하고 직장 생활 잘하고 사업 잘하고 교회 봉사 잘하는 것 이상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다. 가정이 행복해야 교회 생활도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이 우선이다. 그 가정의 행복과 축복을 위하여 교회 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예배 생활과 기도 생활을 소중하게 여겨 나가라. 그래야 그 은혜와 축복의 강물이 내 가정으로 흘러들어 넘치게 되는 법이다. 매우 평범한 것 같은 부부의 행복 안에 평생이 담겨 있고, 세상살이의 그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가정은 하나님의 비밀이요 그리스도의 비밀인 것이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남편과 아내의 꿈을 키워 가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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