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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출15:13-21)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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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4-15 07:52 조회 22,061 댓글 0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 자신 보다 내게 더욱 더 가까운 분이시다.”는 고백을 남겼다. 사순절을 지내고 수난 주간도 지내고 부활 주일을 지낸 일주일 후에 또 다시 주일 예배로 모였다.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얼마나 잘 알까. 또한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얼마나 잘 알며 믿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요한복음 20장 2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밤 시간에 제자들이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던 곳에 방문하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도마는 없었다. 그 도마는 나중에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이 다녀가신 말을 전해 듣고는 못 믿겠다고 했다.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직접 만져 보고 확인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여드레 후에 여전히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그 때에는 도마도 같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가셨다. 그리고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인사를 하신 후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 밀어 내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도마가 대답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도마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역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이시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역사는 제자 도마가 믿던 믿지 못하던 상관없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본질적으로 한분이시고 영원히 한분이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 삼라만상이 조성되던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함께 계시던 분이시다. 그러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적인 뿌리는 창세기 1장 26절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다.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여드레 후에 제자 도마로부터 신앙의 고백을 받아 내셨다. “네 손가락을 내 밀어 내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내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J.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책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내가 아는 하나님. 내가 믿고 순종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 아버지가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아브라함의 후손을 430년씩이나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그렇게 고통당하며 억울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도록 침묵하시고 계셨을까.

세상에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잘 먹고 잘 입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세상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신실하게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씨름을 하고 기도하고 간구하며 살아가는데도 여전히 어렵고, 여전히 힘겹고, 여전히 고단하고,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괴롭고, 여전히 고독하고, 여전히 병약하고, 여전히 별로 잘 되는 일이 없는 상태로 날이 가고 달이가고 해가 가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서 그렇게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날마다 천국을 비유로 말씀해 주시며 기회 있을 때마다 귀신을 내어 쫒아 불쌍한 인생들을 고쳐 주시고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해 주시고 부는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케 해 주시는 그 중심에서 늘 지내셨으나 여전히 주님은 대적하는 이들로 인하여 곤욕을 당하시고 죽음의 위기를 수도 없이 겪으시던 중에 결국은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으셨다.

예수님이 그렇게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올라 가실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당하시는 고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 큰소리치던 제자들마저 다 숨고 도망가고 사라져 버린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의 그 슬프고 비참한 죽음의 현장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이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뿐이었다. 요한복음 19장 27절에 보면 가장 젊은 제자였던 사도 요한 자신만은 그 십자가 처형장에 함께 있었다고 증언한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더럽힘을 당하시고 낮아지셨다. 버림을 받으셨다. 치욕을 다 당하시고 무능한 분처럼 보였다. 주님은 고독했고 외로우셨다. 주님은 그의 곁을 따르던 추종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역사 중의 완전한 실패자로 붙잡혀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끌려가고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 다니시며 죄 없으신 몸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 주님은 매 맞고 속옷과 겉옷 할 것 없이 다 벗겨 내는 로마 병정들 앞에서 부끄러움과 온갖 수치를 다 당하셨다. 침 뱉고 따귀를 때리고 조롱하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며 우롱하는 자들 앞에서 잠잠히 모든 고난과 고통과 수치를 다 당하셔야만 했다. 그 처절하게 죽어 가시는 현장에 하나님 아버지는 침묵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같은 관원이었던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자기의 묘실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고 큰 돌로 막고 인봉하여 로마의 병정들이 막고 서서 밤새 지키고 있던 그 무덤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 고백대로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실 왕. 영원한 평강의 왕이요 영원한 생명의 구주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의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믿는 각 사람의 영혼 속에 임재 하신다.

출애굽기 14장에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적인 장면이 소개된다.(출14:21-) B. C. 1,446년 아빕 월, 저들의 정월에 있었던 유월절의 장엄한 장면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시다. 처음과 나중이시다. 노아 때의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 나의 하나님이시다. 3,500년 전인 모세 시대의 하나님이 지금, 오늘 날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 하나님이시다.

지질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모세 당시에 홍해를 하룻밤에 건너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 200만의 통과 경로를 연구하고 추적하였다. 200만이 하룻밤에 뒤 따라 추격해 오는 애굽의 마병과 군사들을 피하여 안전히 홍해를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은 최소한 1.6km이상 폭의 거대한 물길이 나뉘었어야 그 나누어진 물 길 사이로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200여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물길 사이로 걸어서 다 건넌 후에 그 뒤를 추격하던 애굽의 600승의 병거와 마병들은 모조리 다 다시 합쳐진 물길에 휩싸여 죽고 말았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역사적인 일을 경험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칭송한 경배 찬양의 내용이다. 출애굽기 15장 1절부터 18절까지 전체가 그런 내용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하여 체험하며 알아가는 과정이다. 모세와 백성들은 노예생활의 고난을 겪고, 출애굽을 경험하고 나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졌다. 하나님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40년 후에 요단강도 건너게 하셨고 여리고 성도 무너지게 해 주셨다. 지금 당신의 홍해, 당신의 요단 강, 당신의 여리고 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과 땅과 바다에 그의 기운을 가득하게 불어 넣어 천지를 다스리시고 영원히 다스리시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능력이 많던 인간이라도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며 영광을 받으셔야만 할 주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정밀하시고 조밀하셔서 한 사람의 영혼 속에 찾아 오셔서 만나주시고 인도하시고 평생을 이끌어 가시는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며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정하시고 정의와 공의의 칼로 역사를 심판하시며 선과 악, 의와 불의, 참과 거짓 사이에서 인류의 역사를 제한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며 이끌어 가시는 전능자이시다. 지내 놓고 보면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시간과 세월과 역사와 사건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일마다 때마다 인생들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전능자이시다.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고 표징이 드러나고 역사에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의 <하나님께 가까이>(To be near unto God)라는 책이 있다. 110가지의 묵상을 모아 놓은 600여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 그는 네델란드의 신학자요 정치가였다. 국회의원도 지냈고 수상도 지냈다.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자유개혁교회란 교단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역량이 넘치는 신학자요 지도자였다. 왕성한 신학 책도 저술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책의 제목과 같은 내용의 분량을 읽어 보면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하여 암자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일상생활 중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친근하고 가깝게 만나고 체험하고 교제하는 생활을 권면하고 있다. 그 묵상 분량에서 인용한 시편 73편 28절의 인용이 그만 잘못 되어서 시편 73편 27절로 괄호 표기한 것은 오히려 다른 교훈이 된다.

시편 73편 28절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는 말씀인데 말씀은 제대로 적어 놓고 괄호 안에 성경 구절 인용을 잘못 적는 바람에 그 앞 절인 27절로 표기하고 말았다. 27절은,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두 구절의 내용은 복된 생활과 망하는 생활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강조하고 있다. 두 구절 다 교훈적이다.

그렇다. 모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신 손길에 의한 인도하심이 아니면  지난 430년간의 노예 생활에서 탈피할 수 없는 끝이 없는 고난 가운데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출애굽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처럼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후에 모세와 백성들이 함께 부르는 이 영광스러운 찬미의 가사는 구구절절이 은혜가 넘쳐 난다. 그 고백의 마지막 18절이 오늘 말씀의 제목이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시도다.”(출15:18)

찬송(讚頌) 받으실 하나님.
왜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셔야 하나. 1절과 2절과 21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전능자이시다. 1절에서 5절까지에 보면,

높고 영화로우심으로 찬송한다고 했다.
애굽 군대의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으로 찬송한다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힘과 노래이며 구원이시라고 했다.
모세와 백성들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고 찬송했다.

우리도 복음성가로 하나님을 그렇게 찬송하지 않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그렇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나의 하나님’이시며,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에게도 ‘나의 하나님’이시다. 즉 극히 개인적으로 내게 다가 오셔서 말씀하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힘을 주시고 능력 주시고 위로와 소망과 격려와 용기를 계속하여 공급해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전쟁이 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이름이 여호와이신 용사(勇士, warrior)이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실 전능자이시다. 생명의 삶 4월호에, 로버트 모건의 <홍해의 법칙>이란 책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 은혜롭고 유명한 찬송들은 대개가 가장 시련이 많고 어려운 시대에 그 가사가 쓰이고 찬송곡이 붙여진 경우가 많다. 우리 찬송가 66장인 ‘다 감사드리세’는 독일 찬송가인데 당시에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이었던 루터파 교회의 목사였던 마르틴 린카르트 (Martin Rinkart,1586-1649)목사가 작사한 것이다. 당시에 30년 전쟁이 계속되었다.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피난민들이 그의 마을로 쏟아져 들어 왔다. 그는 그의 고향인 아일렌부르크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린카르트 목사는 하루에 50번이나 장례식을 치룬 적도 있었다. 스웨덴은 전쟁이 끝나는 대신에 엄청난 종전 배상금을 독일에 요구하고 있었다. 린카르트 목사는 그 두 나라 간에 협상에도 앞장서던 인물이었다. 마침내 양국 간의 적대감은 가라앉기 시작했고 고통의 때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 66장 찬송의 가사는 그런 고통의 날들을 겪던 린카르트 목사가 쓴 감사의 시이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 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이와 같은 은혜와 감사가 늘 넘쳐 나기를 기도하자.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온 이스라엘 여인들이 소고 치며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출15:21)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높임을 받으실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높임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요한 계시록을 읽다가 보면 이보다 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일 수 있는 표현이 어디에 또 있을까 싶은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5:13),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계7:12)

이 모든 고백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이름을 높여 드리는 찬송이요 경배가 아닌가.

우리의 하나님은,
오른 손의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다.
대적자들 앞에서 큰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
원수의 욕망을 헛되게 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영광스러운 하나님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모세 때의 하나님이시며
오늘 날 우리 모두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구속(救贖)하신 백성을 인도(引導)하시는 인자(仁慈)하신 하나님.
그렇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질병과 전쟁과 가난과 굶주림과 사건과 불행과 두려움과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걱정 근심 불안 초조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건지시고 살려서 복되게 하시고 존귀하게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회복의 하나님이요 은총과 은혜의 하나님이요 구속의 하나님 아버지시다. 13절에 구속(救贖, Redemption)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은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힘으로 택한 백성들을 구속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주시기로 약속햐신 가나안 땅을 ‘주의 거룩한 처소’(출15:13), ‘주의 기업의 산’(출15:17)이라고 했다. 또한 17절에서 계속하여 ‘주의 처소’, ‘주의 예비하신 곳’,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라고 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430년간 고생하며 고통당하며 고난 속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며 살아가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의 인자하고 힘이 있는 손길로 인도하셔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거룩한 처소요 주의 기업의 산으로 인도해 주셨다. 지리적인 구속이 있다. 시간적인 구속도 있다. 일시적인 구속도 있고 영원한 구속도 있다. 우리가 성도로서 체험하는 구속은 완전한 구속이요 영원한 구속이요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 비교하고 설명할 수 없은 천국백성의 구속이다. 이 같은 구속을 체험하고 나면 283장 찬송의 가사가 가슴에 절절히 느껴지게 된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 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나 속죄 받은 후 나 속죄 받은 후 주를 찬미 하겠네
나 속죄 받은 후 주의 이름 찬미 하겠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민족적인 구속이요, 거룩한 구속이요, 구원의 축복이지만 애굽의 군대와 애굽의 바로 임금의 세력들에게는 죽음의 심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 숭배 가운데 살던 일곱 족속들에게도 심판이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았거나 소문에 들은 주변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놀라워하고 가나안 주민들은 다 낙담하였다. 저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십판의 팔은 크고 강하신 팔로 결국 대적자들은 돌처럼 침묵하고(출15:16) 돌처럼(출15: 5)납처럼(출15:10) 홍해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서 모세와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미리암과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소고 치며 춤을 추며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전능자시며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이고 분명한 구속과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며 영원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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