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공존한다. 에덴동산에도 악은 있었다. 뱀으로 묘사된 그 악 앞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무너지고 말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의와 불의, 빛과 어두움 앞에서 선택의 자유 의지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 가운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세상에는 진선미를 추구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속에는 꺼지지 않는 인간의 죄악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그 악을 불태워 없앨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밖에는 없다. 기독교 지성의 대가였던 C. S. 루이스는 이 같은 악을 “교만, 시기, 분노, 호색, 탐식, 게으름, 탐욕”의 7가지로 구분하였다. 또한 성도가 추구해야 할 7가지 선을 “분별, 정의, 용기, 절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정리해 주었다. 제라드 리드의 <C. S 루이스의 일곱 가지 악과 선>이란 책에 보면 그 자세한 묵상이 나온다.
과연 인간을 악으로부터 건져 내고 지켜내고 보호해 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걸까.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뉴욕시 맨하튼 남부에 있는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의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일순간에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공격에 의하여 불타고 무너져 내린 날이다. 미국 경제의 자존심과 같은 두 빌딩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항공기납치자살테러방법으로 자행된 이 테러 사건은 110층짜리 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 D. C에 있는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2999명이 일순간에 죽었다. 6291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날 테러에 납치된 4대의 항공기에 탑승했던 모든 사람 265명도 다 죽었다. 구조를 위해 뛰어 들었던 경찰과 소방관들도 적지 않게 죽었다. 물론 테러범들 자신도 자살 테러이니 다 함께 죽은 것이다.
이 같은 살인음모와 테러와 방화의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간은 개인이든 나라이든 민족이든 그 누군가의 손길이 지켜 주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어는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는 악의 소굴에서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이 있다. 1950년대 초에 발간되었으나 꾸준히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이다. 그 책의 실제 주인공인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노인은 자녀와 아내를 잃은 불행한 모습으로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황량한 들판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는 그 삭막한 들판에 매일 하루에 100개씩의 도토리를 심기 시작했다. 우연히 그를 만난 젊은이는 제 1차 대전이 끝난 후인 5년 만에 그 노인을 방문해 보았다. 여전히 노인은 날마다 도토리를 심고 있었고 이미 그가 심은 나무들은 거대하고 울창한 숲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곳은 이전의 황무지에서 푸르고 푸른 거대한 도토리나무 숲이 10킬로미터 이상 이어지는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가 버려진 땅을 지키고 가꾸어 나간 결과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도 일정하게 환경이나 자신을 지켜 가는 이런 능력이 어느 정도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상상을 초월할만한 무한한 능력으로 우주와 지구와 인간을 보존하시고 지켜 주신다.
이 세상의 우주 삼라만상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주나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자연 발생론이나 우연론이나 진화론을 믿는 이들은 이런 설명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의 세계를 질서 있게 지켜 주시고 보존해 주시는 창조주이시다. 뿐만 아니라 지구 위에 있는 하늘과 땅과 바다의 새와 짐승들과 기는 것들과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손길에서 벗어나서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계절의 변화와 낮과 밤의 질서를 주관하시고 지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모든 풀과 나무와 온갖 채소와 과일 나무들마다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손길에서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단 한 가지도 없다. 심지어는 땅 속의 광물질 하나에도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은 인간을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물론 세상에는 여러 가지 질병과 별의 별 사고로 인해서 고생하거나 생각보다 일찍이 세상을 떠나거나 고난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그 모든 형편과 상황 가운데에서 인간을 섬세하고 지키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보존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오늘 말씀인 시편 16편은 여전히 다윗의 시편 중의 하나이다. 이 시편은 ‘메시야 예언시’라고 구분되는 시편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와 죄 사함과 영생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이 담겨 있는 참으로 은혜로운 시편 중의 하나이다.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언젠가 다윗이 매우 위급하고 다급한 위기와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 말씀의 1절이 주는 교훈이 그러하지 않는가.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5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일들과 사건을 체험하게 된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인간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자라도 두려움은 있다. 사담 후세인 같은 장기 독재자라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피하고 숨는 것이 아닌가. 범정에 나올 때에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쇠창살에 닭장처럼 가리어진 채 출두하는 이집트의 전 대통령이었던 무바라크의 모습을 보라. 그의 얼굴에 평화와 안정이 있는가. 아무리 국가 경제를 움직이는 경제인이라도 염려나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젊고 씩씩한 청년의 때에라도 위험한 순간이나 불안한 위기는 언제라도 있을 수 있다. 그 모든 형편과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며칠 전 늦은 밤 시간에 김덕영 집사를 문병하였다. 암의 말기에 온 몸에 구석구석 암세포가 퍼져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기가 어렵고 이제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밤에 만난 그는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는 모습이 전혀 없이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고 안정되어 보였다. 미소 짓는 그 모습이 천사와 같았다. 비록 그의 몸은 심히 쇠약한 상황이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 말로 3절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땅에 있는 성도의 존귀한 모습이었다. 또한 9절에서 말씀하는 마음의 기쁨이요 영의 즐거움이 육체의 병마로 인한 고난과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전히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요 신앙으로 살아가는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오늘 말씀을 메시야 예언시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절과 11절에 보면 그러한 고백이 절정에 이른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스올이란 지옥을 말한다. NIV 영어 성경에서는 ‘grave' 즉 무덤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존귀하게 지키시되 그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자, 그러면 영원히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주께 피하는 신앙생활.
사람이 어려울 때, 불안할 때, 두려울 때에 어디로 피하느냐 혹은 누구에게로 피하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의 영혼과 삶을 지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구약 시대에는 도피성으로 피할 때에 잘못하여 남의 목숨을 앗아간 죄인이라도 그의 생명을 보존 받을 수 있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로 피하는 생활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천사 두 사람을 미리 그 성에 보내셔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롯의 사위 두 사람은 롯을 통한 하나님의 사자들이 전한 말을 농담처럼 여기고 따라 나서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천사의 말을 무시하고 유황불의 심판을 받게 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오며 뒤를 돌아다 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피하여야 할 때에 피하는 것은 축복이다. 피하여야 할 때에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요 용기 있는 신앙생활이다.
우리나라가 1945년에 해방되고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북한은 김일성이 앞장 선 공산주의화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1950년에 6. 25 전쟁이 일어났다. 한 마을에서도 공산당에게 피한 이들이 있었고, 국군에게로 피한 이들이 있었다. 서로 피하는 길과 선택이 달랐다. 공산당을 환영하며 나선 이들이 있었고 죽을 각오를 하고 피난길을 거쳐서 국군에게로 피하고 유엔군에게로 피한 이들이 있었다. 그 순간의 선택이야 자기 자신의 선택이지만 60년이 지난 오늘 날의 상황은 무엇을 교훈해 주는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질 때의 장면이 그러하였다. 서로 목축업이 잘 되어 짐승 떼가 늘어나자 삼촌의 종들과 롯의 종들 간에 다투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결국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지게 되었다. 롯은 요단 지역의 소알 땅에 물이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먼저 택했다. 아니 택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곳이 좋게 여겨서 피해 간 것이다. 그 당시에 그 곳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었다. 그러나 그런 풍요로워 보이는 땅으로 피한 롯의 앞날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엉켜 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곳으로만 피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따라 갈 줄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로 피하는 신앙인 것이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너는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장막을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옮겨서 그 곳에 거하면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예배를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피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의 천년 후손인 다윗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다윗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베들레헴 그의 고향 마을 집에 찾아 온 사무엘 선지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의 앞날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임금 사울에게 알려진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쳐서 이긴 후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소년이 되었으나 그의 일상생활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사울 임금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사위까지 되었지만 사울 왕은 다윗을 늘 대적이요 경쟁자로 여겨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또 다시 블레셋이 쳐 들어오자 다윗이 전쟁의 일선에 나서서 싸웠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겼다. 그 후에 왕궁에 있는데 단창을 들고 있던 사울 왕이 악령의 부림을 받아서 다윗을 찍어 죽이려 하였다. 사울의 던진 단창은 다윗을 피하여 벽에 박히고 말았다. 다윗은 손으로 수금을 타다 말고 사울 왕이 던진 단창을 피하여 그 밤에 도피생활을 시작하였다.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을 받아 밤중에 창문으로 줄을 달아 내리고 피신하여 도망하였다. 다윗은 라마에서 지내던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 갔다. 사울 왕의 근황과 기도 제목을 사무엘에게 전한 다윗은 사무엘과 함께 얼마동안 나욧이란 곳으로 가서 살았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왕인 사울에게 전했다. 라마 나욧은 이 날 이후로 유명한 지명으로 전해 오고 있다.(삼상19:19) 다윗은 불안했으나 언제나 하나님께로 피하고 또 피하고는 하였다. 다윗은 십년 이상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다. 들판에서 눕고 바위 틈 동굴 속에서 잠을 청한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께로 피하는 자에게는 복이 임한다. 다윗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분명하였다. 2절을 보라.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이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의 신앙인가.
주께 아뢰는 기도생활.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밤과 낮 언제나 늘 기도하며 지냈다. 2절에서 6절까지가 그런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윗의 기도 내용은 너무나 명쾌하고 분명하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주님 밖에는 자신의 복이 없다고 고백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미 성도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땅에 있는 성도란 이 땅의 빈부귀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도됨으로 인하여 존귀와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인가.
그리고 우상 숭배의 위험을 경고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우상들은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의 신앙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기도 내용도 그의 그러한 신앙에 근거한다. 다윗은 쫓기는 신세였고 숨고 피하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한 기도 제목과 신앙의 고백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산업과 그의 잔의 소득이시라는 고백 말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삶의 분깃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그의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다. 마치도 레위인들처럼 다윗의 고백은 철저하였다. 다윗과 같은 기도와 신앙 고백 속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분명한 응답을 선물해 주실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1절과 2절에 보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물론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줄로 재어 주신 아름다운 구역은 예루살렘 성이다. 후대는 그 곳을 다윗성이라고 이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땅의 예루살렘은 영원한 곳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하고 새로운 성 예루살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지키시되 이 땅에서 줄로 재어 주신 곳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새 예루살렘으로 우리의 영혼은 지켜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주를 송축하는 믿음생활.
그러므로 다윗은 7절에서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양심을 심장(heart)이라고 했다. 우리말 성경에도 이전에 보던 개역 성경에서는 ‘심장’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를 훈계하시고 내 심장이 나 자신에게 교훈하는 데로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송축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송축하라 내 영혼아 송축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송축하라.”
이렇게 말이다. 여호와를 송축하며 산다는 것은 8절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며 살아가는 증거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다윗은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항상 나의 든든한 우편에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이요 고백인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불 말과 불 병거를 성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 주신다. 하나님은 부름 받은 성도들을 천군천사를 보내셔서 동행하시고 지켜 주신다. 그러므로 찬양하고 송축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장 46절 이하에는 마리아의 찬가가 나온다. 천사 가브리엘의 예수 수태고지를 받은 후에 두려운 마음으로 유대 산골 마을에 있는 친족인 엘리사벳의 집으로 피신했던 마리아는 그 곳에서 삼 개월 정도를 머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 때에 고백한 찬양이 바로 그것이다.
“내 영혼이 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1:46-48)
라고 찬미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는 생활인 것이다.
다윗은 주를 모시고 사는 자의 이 같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늘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간 찬미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주께로 피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서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의 위협과 죽음의 위기 앞에서 늘 이렇게 기도하며 찬양하며 살아간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게 피하나이다.”
다윗의 이 같은 고백과 감사와 찬양은 끝없이 이어졌고 주께서는 그의 영혼은 스올 즉 지옥에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다. 다윗의 신앙고백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늘 그런 길로 지켜 주셨다.
11절을 다시 보라.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항상 이와 같은 고백과 찬양과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 가운데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만을 송축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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