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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그가 이루신 일(사53:1-6)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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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4-06 21:35 조회 22,531 댓글 0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어려움을 다 겪게 된다. 어떤 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장애 속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재난이나 사고나 사건이나 질병과 같은 불운한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이지선 양은 이화여자대학교 졸업반 때에 오빠가 운전하던 자동차 안에서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녀는 사고로 불타는 자동차 안에서 숯덩이처럼 목숨만 겨우 건졌다. 그의 온 몸은 화상으로 엉망이 되었고 곱던 얼굴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십 수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참담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한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송명희 자매는 1963년생이니까 올해 50살이 되었다.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쑤시어 오는 육체적인 고통과 손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뇌성마비 중증 장애 속에서도 아침 이슬방울처럼 영롱하고 맑고 맑은 찬송시를 써내려간다. 그녀의 마음을 붙드는 힘은 무엇일까. 무리한 활동으로 목 디스크가 심해져서 전신 마비의 상태의 극심한 통증으로 지내면서도 25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 놓았다. 그 극심한 고난과 장애 속에서도 그 곱고 맑은 영혼을 보존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녀는 가난했고 불운했고 목숨을 겨우 부지하면서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고백을 담은 시들은 대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하늘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시 중에 “그 이름 예수”라는 작품이 있다. 곡이 붙여져서 찬양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어머니가 임신 9개월 때에 양수가 터져서 세상에 남들보다 일찍이 태어났고 생후 일주일 만에 숨이 멈추어서 저녁 한 나절을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그는 평생을 뇌성마비의 극심한 중증 장애 속에서 연명하며 살아 와야 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미하는 은혜로 철철 넘쳐흐른다.

중학교 때 이후로 육신의 눈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각장애상태로 평생을 살면서도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 말과 글과 책을 유고집으로 남기고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하나님의 사람의 한 생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간 강영우 박사께서 평생토록 그의 눈에 희망만을 보게 하였던 원동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스웨덴의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상태로 태어난 레나 마리아가 정상인 이상의 왕성한 활동을 하며 세계를 날아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수영도 하고 운전도 하고 십자수도 놓고 피아노도 치면서 요리도 직접 하면서 기쁘게 감사하며 활력이 넘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는 그런 몸으로 세 살 때부터 수영을 하기 시작했고 세계 장애인 올림픽에 수영 선수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네 번이나 탔다.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그의 자서전은 세계인의 가슴 속에 진한 감동을 계속하여 남기고 있다.

양팔과 양 다리가 없는 몸뚱이뿐으로 태어난 장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세계를 날아다니며 하나님의 사람의 희망을 전하는 호주의 청년 닉 브이치치의 마음과 생각을 붙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사야서에서 말씀하는 그 분이 오셔서 이룩하신 세상의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회복(回復)이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에 묵상하며 고난 주간을 맞으며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주제는 회복이다. 예수님은 이 땅의 뭇 백성들을 죄의 심판과 허물의 부끄러움과 몸과 마음과 영혼이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참 자유와 회복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분이 오시면 개인에게 회복이 임하고, 가정에 회복이 임하고, 사회와 나라와 민족 위에 거룩하고 섬세하고 장엄한 회복의 대 역사가 임하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8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주전 739년에서 680년 사이에 남쪽 나라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 그는 특별히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메시아 예언을 한 선지자로 유명하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수난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예언을 따라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생들을 향하신 완전한 회복의 대 역사를 이룩하신 구세주이시다. 그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룩하신 일은 흠도 티도 없는 완전하신 일이시다.

오늘 말씀이 그런 예언으로 가득하다. 그는 멸시를 받으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다. 그는 간고(艱苦) 즉 고통을 많이 겪으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외면하였다. 그는 멸시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다 받으셨다.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다 겪으셨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벌여졌다. 그가 찔리는 것으로 우리의 허물이 가리어지고 해결되었다. 그 분이 징계를 받으시고 매를 맞고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씌우는 무리들이 따귀를 때리고 침을 뱉었는데 우리의 부끄러움이 치유되고 우리들의 병이 나았다. 그 분을 구주로 영접하고 모셔 들이는 이들마다 그 분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영혼의 구석구석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다.

그는 그 참기 어려운 굴욕 앞에서 한 마디도 더 하시려 하지 않고 모든 고난을 몸소 다 당하셨다. 그는 마치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았다. 양의 털을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암양과도 같았다. 그는 채찍질하는 자들 앞에서 저항하지 않았고 끌려 다니며 기진맥진 점점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거반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기를 메고 갔다. 그의 양팔과 양 다리에 큰 못을 박는 무리들에 의해서 그는 높은 나무 꼭대기에 매어 달려 죽으셨다.

본문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은 그가 이루실 일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는 그가 이룩하신 일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종 기도인 요한복음 17장 4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라고 고백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신 33년의 생애 중에서 특별히 나중 삼년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부탁하신 일들을 사명으로 짊어지고 온전히 다 이룩하시고 하나님의 곁으로 올라가신 부활의 주님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일이란 무엇인가.

약(弱)한 자로 오셔서 이루신 일.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시거나 권력 있는 가문에 오시거나 대단한 집안을 통하여 오시지 않으시고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 나셨다. 이사야 53장은 그의 그런 탄생과 특히 외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2절에서 언급하는 대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분으로 태어 나셨고 그렇게 자라나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약한 모습으로 태어 나셨다. 구라파의 미술가들은 지난 2,000년 동안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고 오뚝하고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릿결이 여성처럼 풍성한 외모의 예수님 상을 그림 그려왔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리 매력적인 외모가 아니셨다. 뉴욕의 한 컴퓨터그래픽 회사는 예수님의 시체의 얼굴을 감쌌던 천이라고 전해 오는 토리노 성당의 성의(聖衣)를 중심으로 그래픽한 예수님의 얼굴 형상을 세상에 공개하면서 예수님은 거무스름한 피부의 전통적인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 남성의 모습이며 서양화가들이 그려온 성화에서 그려져 온 금발머리나 파란 눈을 가진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외모가 구라파의 남성들처럼 그렇게 화려한 모습은 아니셨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던 당시의 유대 나라의 상황이나 나사렛의 형편이나 베들레헴의 모든 정황들이 그러하였다. 무너진 다윗의 왕가에서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연약한 뿌리처럼 시작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성장이었다. 그는 넉넉하지 못한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목수 요셉의 아내 될 마리아의 태를 빌려 태어 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실제 외모도 화려한 분이 아니셨다. 그 분은 늘 섬기는 자로 사셨고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올라 가셨다.

그는 시편 80편 11절 이하에 나오는 아삽의 시의 예언처럼, 그는 약해 보였으나 하나님이 심으신 백향목과 같아서 강과 바다 까지 뻗는 넝쿨이셨다. 그러나 반면에 숲 속의 멧돼지들과 들짐승들이 달려들어 상하게 하고 먹어 치우려 했던 연한 포도나무 같은 분이셨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주의 오른 손으로 심으신 포도나무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이 있게 하신 가지였기에 결코 더 이상 꺾이지도 않았고 더 이상 짓밟히지도 않았다.(시80:15) 만군의 하나님은 그 줄기를 소생하게 해 주셨고, 불이 타도 타지 않게, 베어 내어도 더 이상 베어지지 않는 남은자의 은총으로 역사하셨다. 그 약해 보이고 연한 가지와 같아 보이는 그는,

욱여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았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았다.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았다.(고후4:8-9)

그 연한 순, 그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그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그 분을 구주로 만나는 이들마다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랍비라고 불렀지만 그는 랍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 분은 그렇게 연하고 약한 순과 뿌리로 오셔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셨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다. 그 분이 말씀하시면 바람과 파도도 잔잔해 졌고 배고프던 광야의 무리들에게 먹을 것이 넘쳐 났다. 심지어는 그 분이 말씀하시면 죽은 자도 살아났다. 그 분은 그렇게 연하고 약한 자로 이 땅에 오셔서 엄청나게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고 오늘 날도 여전히 그를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그런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계시다.

고난(苦難)을 당한 후에 이루신 일.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설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민망하고 죄송하고 송구할 뿐이다. 그의 당하신 그 끔찍한 고난으로 우리에게 치유와 회복이 임하였다. 그가 당하신 슬픔과 징벌로 인하여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자유와 기쁨과 즐거움과 잃어버리고 살던 감사와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 선물로 임한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어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으로 인하여 화평과 화목과 평안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던 인생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해 주셨다. 또한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침을 뱉고 갈대로 치고 따귀를 때리고 희롱하는 무리들에게 온갖 고통과 수치와 고난을 다 당하셨다. 그런데 그 주님의 당하신 고난과 채찍에 맞으시는 것들로 인해서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나음을 입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했다.

예수께서 이른 새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고 몇 시간 만에 재판이 끝나고 오전 아홉 시에 십자가에 처형되셨고 여섯 시간이 지난 오후 세시에 운명하셨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속전속결된 사형 재판이란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말았다,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던 산헤드린의 니고데모와 같은 권력자들도 정작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외롭고 외로우신 혼자이셨다. 아무도 그를 변호해 주려고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예수님 자신조차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마저도 침묵하고 계셨다. 3년 전에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나타나셔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던 하나님 아버지조차도 아무 말씀이 없이 예수님의 당하시는 고난 앞에 침묵하고 계셨다. 광야에서 배고픈 무리들을 위하여 어린 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갖고 기도할 때에만 해도 풍성하게 먹고도 남는 기적을 응답해 주시던 하나님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없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의 현장에 방치하고 계셨다. 아니, 하나님은 아들 예수께서 당하시는 고난과 아픔을 함께 당하시며 함께 끌려가셔서 함께 못에 박히시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부활을 선물해 주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 고난에는 가치가 있고 고난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숨겨진 비밀스러운 뜻과 섭리가 분명히 있다. 상급이 없는 고난, 영광의 면류관이 없는 고난이란 없는 법이다.

No Cross, No Crown.
Know Cross, Know Crown.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억울하고 답답한 고난은 필요한 것이다.


회복(回復)과 부활(復活)을 통해 이루신 일.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평화,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게 임한 치유의 은총을 점검해 보라. 이사야 53장 5절의 ‘평화와 나음’이란 그 얼마나 놀라운 주의 업적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완전한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주신 구세주이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죄가 들어오면 평화가 금이 가고 깨어지고 불화하며 대화가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징계와 채찍은 완전한 평화와 치유와 회복을 위해 내어 주신 희생이셨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The Jesus I Never Knew라는 책에서

“만일 예수께서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나 솔제니친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희생자 정도였다면 역사 속에 그의 자취가 조금 남아 있기는 했겠으나 세월과 함께  퇴색되고 말았을 것이다.”

는 말을 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완전하게 죽으시고, 완전하게 부활하심으로 역사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구원을 완성하신 구세주이시다. 그 분은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시며 만민의 구원의 소망이시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평화와 치유를 선물해 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찔리고 상하심으로 우리의 허물이 가리어지고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분의 은혜를 입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해와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비추어 주시고 내려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제자 베드로도 빈 무덤 보고도 믿지 못하던 예수님의 부활,  만나보고 손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던 의심 많던 도마조차도 모두 다 순교자의 길을 가며 전파했던 부활하신 예수님 평화의 예수님 우리의 온 각 질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치유의 주님. 그 예수님이 선물해 주시는 평화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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