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어머니가 없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마리아를 어머니로 해서 이 땅에 오셨다. 어떤 이들은 유복자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본 경우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있다. 때로는 혼잡한 생활 중에 미혼모에게서 태어나므로 아버지가 불확실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어머니는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영원한 고향과 같은 존재이다. 물론 창세기의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베들레헴 길가에서 동생 베냐민을 낳은 후에 곧 죽고 말았다. 난산으로 고생하며 아들을 낳던 중에 베노니라고 이름을 먼저 짓고 아들을 낳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창세기 35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베노니란 슬픔의 아들이요 베냐민이란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이다. 아버지 야곱은 열두 아들들 중의 막내아들이며 네 부인중에서 가장 사랑하던 부인 라헬이 나은 둘째 아들인 베냐민을 끔찍이 사랑했다. 길거리에서 태어난 베냐민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 같은 분이었다. 베냐민은 엄마 젖을 단 한 방울도 못 먹어 보고 자라났다. 유모들의 손길에 의해서 자라난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에게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더욱 더 가슴이 에리고 허전하고 쓰린 마음으로 자라나야 했다. 아버지 야곱은 어머니 라헬을 기념해서 베들레헴 길가에 묘비를 세웠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묘비를 ‘라헬의 묘비’라고 불렀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로 이어지는 언약의 가정사는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다.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은 배 다른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가는 불행한 날이 왔다. 그 이후로 가나안 들판에서 양을 치고 염소와 소와 약대를 치던 족장들의 후손들 중에서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 가는 경우가 흔했다. 400년 동안의 애굽 노예 생활 현장에서 온갖 고난과 핍박과 설움을 받는 민족으로 수를 더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던 모세의 때에는 무려 그 숫자가 어른 아이 남자여자를 포함해서 가히 200여만 정도에 이르렀다. 광야 40년을 거치고 모세는 죽었다. 대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앞장 선 광야의 민족 대 이동은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을 다시 체험했다. 모세 때에 홍해를 가르시던 하나님이 40년 만에 다시 요단강 앞에서 같은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가나안 정착 생활에 세월이 더해갔다. 여호수아 장군도 110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었다. 그 후로 사사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 사사시대 말기에 가나안에는 가뭄이 극심했다. 계속하여 흉년이 들자 먹고 사는 생존에 위기가 왔다. 베들레헴 마을에 살아가던 한 가족이 이민을 결심하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모압 땅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Elimelech)이다. 그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대개 아들들의 이름을 아버지가 짓던 전통을 생각하면 아마도 엘리멜렉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돈독했던 것이 분명하다. 엘리멜렉이란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거창한 의미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아들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줄 정도면 엘리멜렉의 아버지의 하나님 신앙이 짐작이 가지 않는가.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의 유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중에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의 부인 나오미가 시댁 고향 마을에 되돌아갔을 때에 온 성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 정도였으니 말이다.(룻1:19) 또한 베들레헴의 대지주이며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던 보아스의 친족이었던 점이 그러하다. 그런 가정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흉년을 피해서 선조들의 신앙이 배어 있고 유업으로 이어 받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먹고 살아 보겠다고 이웃 나라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엘리멜렉의 이름이 대단한 것처럼 그 부인 나오미의 이름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나오미란 ‘아름답다, 은혜롭다, 감미롭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 그들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네 가족이 이주하여 살아가던 모압 땅에서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에 두 아들들이 모압에서 결혼하여 살던 중에 자녀가 없이 차례대로 다 죽고 말았다. 흉년을 피해 잘 살아 보겠다고 이주했던 타국에서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마저 앞서 보내는 불운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두 며느리와 시어머니 세 식구만 달랑 남았다. 두 모압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나오미와는 외모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음식 먹는 문화도 다르고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잘 살아 보겠다고 나간 땅 모압에서 십여 년 만에 나오미는 너무나 불행한 여인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던 중에 이스라엘의 베들레험 지역에도 풍년이 들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댁 마을로 국경 넘어 되돌아가고픈 시어머니 나오미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탄식하듯이 두 며느리를 앉혀 놓고 말했다. “너희는 각기 너희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룻1:8) 셋은 순식간에 소리 높여 울며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시어머니 나오미는 울며 탄식하며 계속하여 두 며느리들에게 어서 네 동족들에게 돌아가고 네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 살아가라고 채근했다. 그 때에 두 며느리들은 합창이로도 하듯이 울면서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룻1:10)하고 말했다. 여기까지 셋은 하나였다. 그 후로도 시어머니 나오미는 기회만 되면 두 며느리들에게 어서 네 동족에게로 돌아가고 네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라고 성화를 했다. 사실 어머니 나오미의 본심은 저들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혹시라도 저 며느리들이 제 나라에서 홀로된 이 시어머니를 버려두고 제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떻게 할까하는 불안이 더욱 컷을 것이다. 어느 날 또 세 사람이 울며불며 신세타령을 하고 소리 높여 울고 있는데 “어서 네 어머니에게로 되돌아가라.”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작은 며느리 오르바가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께 작별하는 입맞춤을 하고 떠나가 버렸다. 울 때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작 작은 며느리 오르바가 친정으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말자 큰 며느리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와 단 둘만 남은 것이다. 네 식구로 출발해서 타국에서 남편 죽고 그 후에 두 며느리 맞아 들여 다섯 식구로 살던 나오미의 가정이 이젠 시어머니와 큰 며느리 단 둘만 남고 말았다. 텅 빈 것 같은 집안에 허전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당장 룻은 나오미에게 있어서 전부였고 당장 나오미는 룻에 있어서 전부와 같은 모습으로 지내야 했다. 집안은 춥고 허전하고 쓸쓸하고 허망했다. 나오미의 가슴에는 휑하게 찬바람이 지나가곤 했다. 저 남아 있는 큰 며느리마저 제 친정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정말 나이 들어가는 시어머니 나오미만 혼자 남게 되고 말 것이다. 그것도 말도 서툴고 여전히 모든 것이 서툰 땅 남의 나라 모압에서 말이다.
오늘 본문은 그런 어느 날 고부간에 있었던 대화로 시작된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얘! 큰 며느리야! 네도 네 작은 동서를 따라서 너희들의 백성에게로, 너희들의 믿는 신에게로 따라서 돌아가거라.” 그 때에 큰 며느리 룻이 대답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훨씬 실감이 난다.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시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룻1:16-17)
시어머니 나오미는 고맙기도 하고 믿겨 지지도 않고 실감이 나지도 않는 며느리 룻의 이 말을 듣고는 더 이상 할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 죽고 두 아들 마져 죽은 가정의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있어서 이런 마음씨를 가진 며느리 룻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선물이요 축복이요 전부와 같은 존재였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가슴 속에서는 연신 줄줄 뜨거운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또 흘러 내렸다. 잃어버리고 떠나 버린 가족들에 대한 허전함이 크거니와 지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모압 며느리 룻의 그 말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하기가 그지없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Where you go I will go,
and where you stay I will stay.
사람이 산다는 게 무엇인가. 이 같은 고백 위에서 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 머물겠다는 표현이 히브리말로 ‘룬’인데 그 뜻은 어떤 위험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함께 하겠다는 의지적인 선언이다. 18절에 보면 며느리 룻의 말을 들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의 굳은 결심을 보고 더 이상 말하기를 그쳤다고 했다.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우리가 소망하는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뿐만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 룻은 의지적인 여인이었다. 앞날이 묘연하고 딱하게 되어 버린 타국 땅의 불쌍해진 시어머니 나오미를 안심시켜 가는 며느리 룻의 심성을 보라.
룻은 의지적으로 시어머니 나오미와 가는 길을 함께 개척해 나갈 결심이 서 있었다. 또한 앞날에 저들이 고부간에 머무는 곳이 궁궐이든 초막이든 함께 하겠노라는 각오도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이스라엘 여인이고 자신은 모압 여자라는 민족적인 국적을 뛰어 넘는 동족애를 가지려는 넓은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또한 평생을 어머니와 운명을 같이 하고 어머니에게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온다면 함께 죽어 어머니의 묻히시는 땅에 함께 묻히겠다는 생사결단의 의지가 분명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족이든 세상의 그 어떤 관계이든 이런 관계로 만나 서로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우정을 키워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것일까. 혜화동 대학로에 가면 함석헌 선생의 ‘그대 이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큰 돌 위에 새겨진 시비(詩碑)가 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시작된 며느리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생애에 새로운 막이 열려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먼 길 걸어 도착한 땅은 시 아버지 엘리멜렉이 십 수 년 전에 고향 마을의 흉년을 피하여 처자의 손을 잡고 떠났던 그 마을, 베들레헴이었다. 저들 시대에 있어서 땅이란 그 의미가 대단한 것이었다.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을 거치고 가나안에 정착하며 분배받은 땅의 의미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유다의 후손이었던 엘리멜렉이 분배 받은 선조들의 땅 베들레헴을 떠나서 아르논 강과 세렛 강 사이의 요단 동편 넓은 들판에 자리 잡은 모압 땅으로 가기 위해서 그 인접한 르우벤 지파 후손들의 땅을 거쳐서 국경을 옮겨 가서 살려 했던 의도는 철저한 불신앙의 모습이었다.
그런 엘리멜렉의 두 아들이 이방 땅 모압에서 장가들었다가 다 죽고 큰 며느리 룻과 함께 도착한 땅 베들레헴에서 시어머니 나오미의 새 날이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문이 빠르기는 오늘 날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 온 베들레헴 도성 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오래 전에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이주했던 나오미의 가정이 부자간에 세 남자는 다 죽고 모압 며느리와 단 둘이 돌아 왔단다.”하는 소문 말이다. 소문보다 중요한 것은 닥친 현실에 대한 본인의 현실 분석이다. 오늘 본문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전능자 앞에서 살아가려는 신앙의 고백.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경우라면 몰라도 가난하고 초라하게 되어 돌아 간 고향 땅의 땅 밟기란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나 양처럼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착잡한 일일까.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고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라도 되돌아가는 것이 용기이다. 나오미는 자기에게 찾아 온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달라고 탄식했다. ‘나오미’란 아름답다, 향기롭다, 감미롭다는 뜻인데 ‘마라’란 '괴롭다. 쓰다. 쓰라리다‘는 뜻이다. 나오미의 말처럼 실로 어쩌다가 나오미의 운명이 마라와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시댁의 고향 마을 떠나기 전에는 꽤나 괞찮은 집안의 안주인이었던 나오미인데 지금은 아무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여인이 되어 풀이 다 죽은 모습으로 시댁의 고향 마을을 찾아 간 것이다. 그리고 찾아 드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전능자‘를 향한 신앙의 고백을 피력하였다. 그렇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민족이든 국가이든 전능자 앞에서 살아가는 이 겸허한 신앙이 있어야만 한다.
전능자를 마음의 고향이요 삶의 근본으로 삼고 모시는 그런 신앙의 고백 말이다. 내가 심고 내가 가꾸어 먹고 열매를 본다는 신앙을 가지면 어리석은 것이다. 내가 내 자식 낳아 내가 키우고 내가 가르쳐 내가 성공시킨다는 마음을 가지면 지극히 교만한 것이다. 내 직장 내가 선택하여 다니고, 내 사업 내가 알아서 잘 한다고 생각하면 미련한 것이다. 아마도 고향 마을 베들레헴을 떠나서 타국 땅인 모압으로 이주할 때에 엘리멜렉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내와 함께 두 아들 데리고 가서 살면 무슨 일이든 못하며 무엇을 한들 성공하지 못하겠나 하는 교만한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룻기를 대할 때에 1장 전반부에서 대하는 엘리멜렉의 모습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드렸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아쉬움이다. 국경을 넘어 남의 나라로 이주하는 일은 오늘 날로 쉬운 일이 아닌데 더군다나 3,200년 전인 당시 사사시대 말기에 그런 타국 이주 생활을 결정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흔적이 없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물론 기도하였겠으나 성경은 기도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므로 이주할 당시의 가장인 엘리멜렉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가정의 홀로 남아 타국 며느리 손을 잡고 되돌아 온 시댁의 마을 베들레헴에서 고백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백을 보라.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이 같은 고백을 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과 며느리 룻의 운명을 바꾸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재기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기도요 간구요 부르짖음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오미에게는 여호와는 왕이시라는 거룩한 이름을 가졌던 남편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도 죽은 채 홀로 남아 있다. 죽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왜 그 이름을 ‘병약하다, 쇄약하다’는 뜻으로 지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런 그의 곁을 젊은 타국 며느리 모압 여자 룻이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인생이 겪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모두 다 전능자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제 노력으로 제 성실로 가꾸어 가는 것이 인생인것 같지만 아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간섭하시는 손길이 반드시 있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개인이든 가정사이든 기업이든 나라와 민족이든 교회의 역사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전능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고 따르고 순복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괴로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수 있는 여호와이시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의 가사 중에도 보면,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 함없네.”
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과 흥망성쇠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나오미의 고백처럼 전능자께서 괴롭게 하시면 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재대신 화관(花冠)을 기도하고 간구하고 의지해야만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2-3)
모든 것이 주의 손 안에 있다는 믿음.
먹고 입고 거하는 삶의 필요와 영생을 알게 하는 진리의 발견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눈을 가리면 임금이라고 모르게 되고 그 진리의 눈을 열어 주시면 어린 아이라도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외쳐 선포하지 않으면 돌들이라고 소리 지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 누가 풍족하게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기를 원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나오미의 운명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쯤에 나오미의 말 속에 깨닫는 신앙의 고백이 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먹고 살아가는 물질의 풍요나 빈곤의 문제뿐만 아니라 남편과 두 아들의 운명을 뒤 돌아 생각해 보니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허송세월하지 말고 감사하며 정중하게 숙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병약해도 혹은 지금 풍족하지 못해도 혹은 지금 어떤 불행이나 어떤 재난 앞에 있더라도 말이다.
주어진 현실을 충실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
나오미가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 마을에 도착한 때는 마침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우리 계절로 하면 양력 3-4월경에 보리 추수가 시작된다. 그리고 보리 추수가 끝날 때 즈음에 밀 추수가 시작된다. 이때를 기념하여 지키는 것이 초실절(레23:9-14)과 칠칠절(레23:12-21)이다. 며느리 룻은 시어미니를 공양하기 위하여 날마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들판에 나가서 남의 밭에 보리 추수가 끝나고 나면 보리 이삭을 줍느라 하루를 온 종일 밭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 마을의 대 지주 보아스의 눈에 맞아 그의 아내가 되었다. 한끼 끼니를 걱정해야 하던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바뀌고 말았다. 룻은 베들레헴에서 가장 유력하고 능력 있는 마을의 유지 중의 한 사람인 보아스의 아내가 된 것이다. 룻은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으므로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역사적인 축복의 조상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고백하고 위로했던 룻의 나중은 아름다워졌고 나오미의 노년기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났다. 복된 나중을 꿈꾸며 오늘도 여전히 주어진 운명의 새 길을 향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실 미지(未知)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축복의 주인공! 간증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기를 소망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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