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노예를 해방시킨 믿음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평소에 늘 유머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그는 젊은 날 교통비가 없어 자주 걸어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하지만 그는 가난할지라도 위축되거나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진 사람에게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정직과 여유와 유머가 있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믿기에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소화하고 미래에 대하여 늘 낙관적으로 희망을 품고 살아갔기 때문이었다. 추운 어느 겨울날, 링컨은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먼 길을 교통비가 없어서 걸어가야만 했다. 돈을 주고 역마차를 탈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 곁을 역마차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링컨은 지나가는 그 역마차를 세우고 마부에게 말했다.
"스프링필드까지 제 이 낡은 코트 좀 운반해 주십시오."
마부가 걱정스레 말했다.
“젊은이, 무겁다고 그 코트를 벗으면 더 추울 터인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오!”
그러자 링컨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기왕이면 이 코트 속의 제 몸도 함께 넣어 운반해주시지요.
하하하!"
마침 손님이 한 사람도 없던 빈 마차를 몰고 가던 마부는 아브라함 링컨과 함께 둘이 웃으며 추운 겨울 먼 길을 따뜻하게 환담을 나누며 같이 달려 갈 수 있었다.
미국 역사의 가장 존경 받는 통치자요 역사적인 난제였던 노예의 해방의 문을 열어 놓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새로운 한 시대를 준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난하던 아브라함 링컨이 젊었을 당시에 장차 30여년 후에 그가 거대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요 역량이 넘치는 지도자가 될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아브라함 링컨에게 있어서 켄터키 주의 하딘 컨트리의 방 한 개뿐인 비가 새는 통나무집에 태어나서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과 새 어머니 아래서 자라나는 외로움과 고독과 가난 속에서도 처절한 청년기를 보내고 역사적인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기까지에는 그만의 어린 시절과 배고프고 가난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야 하는 쓰라린 날들이 있었지 않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바로 그러하다. 찰스 스윈돌(Charles R. Swindoll) 목사의 <예수, 가장 위대한 생애>라는 500여 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아이 예수, 랍비 예수, 대속자 예수 그리고 왕 예수로 구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복음을 심도 있게 전개해 주었다. 그렇다. 우리가 성탄절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아기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예수는 아기로 오셨으나 그는 장차 영원한 평강의 왕이 되실 분이셨다.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 모습으로 탄생하였다. 그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날 당시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부활의 왕이시며 경배 받으실 왕이요 다스리시는 왕이요 목자이신 왕이신 것을 알아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다시의 헤롯 왕 조차도 시대적으로 베들레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는 과연 어떤 왕이신가.
경배(敬拜)를 받으실 왕.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의 유대 근동을 다스리는 로마의 왕은 헤롯이었다. 그는 가이사 즉 시저의 휘하에서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역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헤롯은 주전 37년에 왕이 되었고 주전 4년에 죽었다. 그러면 과연 예수께서 태어난 때가 언제냐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헤롯이 죽기 몇 달 전이므로 주전 5년말경이나 주전 4년 초에 태어 나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당시의 왕이었던 헤롯은 언제나 유대인들로부터 큰 반감을 받아 왔다. 그런 그가 주전 20년에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제 3성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다. 자기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철저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지어 준 경우이다. 이 사람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으로서 이두메 사람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의 아들이다. 우리가 성경을 잘 보아야 하는 것은 마태는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히 강조한 후에 그 당시의 정치적인 시대 배경을 언급한 것이다. 당시에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원한 왕이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열망하고 있었다. 소위 ‘메시아 대망 사상’이 가득했던 때였다. 그런 시대의 압제자 헤롯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냐”는 질문을 받고 어리둥절해 지고 말았다. 자기가 왕인데 왕이 새롭게 태어났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대 백성들은 결코 헤롯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전하는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는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의 말에는 역사적인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천하 만만의 경배를 받으실 왕으로 오신 영원한 왕이시다. 세계 역사에 그 어느 나라의 어느 왕조이든지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경배를 받은 왕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 어떤 뛰어나고 선정을 베푼 왕일지라도 항상 정적들로부터는 대적을 받고 못마땅해 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천하 만민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왕으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계신 동안 뿐만 아니라 지난 이천년 동안 그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 마다 냉대를 받고 핍박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리란 언제나 진리를 모르는 이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정의는 언제나 불의로 인하여 곤경을 겪게 되어 있다. 선은 언제나 악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마련이다. 진실은 언제나 거짓으로부터 박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봄이 오면 겨울이 지나가고 새벽이 오면 밤의 어둠이 사라지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그가 이 땅에 경배를 받는 왕이실 뿐만 아니라 그만한 권위와 권세가 있는 영원한 왕이시다.
가령 다윗 같은 왕을 보라. 그도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맨 발로 왕궁에서 벗어나 피신한 적이 있다. 시므이 같은 비류가 언덕 꼭대기에서 피신 다니는 다윗 왕에게 흙을 집어 던지며 조롱한 적도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왕이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고 일개 백성이 흙을 뿌리며 조롱해도 내 버려두는 왕이 있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그런 별의 별 수모와 수치를 다 당해야만 했다. 세상의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누구이신지 알고 깨닫고 믿고 따르는 이들에 의해서 진정으로 경배를 받으실 만한 왕이셨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경배를 받으시는 왕이시다.
물론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이들에 의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부끄러움도 당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그가 진정으로 누구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영원히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왕이시다.
11절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며 경배하고 제 나라로 되돌아갔다. 여기에 드린 예물이 “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냐”는 것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황금은 귀하고 값지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향은 그 당시 최고로 향기로운 향품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몰약은 죽은 자의 시체를 염할 때에 사용하는 부패 방지용 장례향료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죽으실 수난과 대속의 죽으심을 상징한 예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아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영원한 왕이시며 경배 받을 왕이시다.
평화(平和)롭게 다스리는 왕.
역사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인류의 평화를 깨트리는 왕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만만들 가운데 특별히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평화의 다스림이요 화목의 다스림이요 화평한 다스림이셨다. 이는 과거나 오늘 날이다 다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 고 하셨다.
올 한 해 동안에 동서양의 장기 집권을 하던 독재자들 여럿이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Hosni Mubarak, 1928-2011) 와 리비아의 카다피((Muammar Abu Minyar al Gaddafi, 1942-2011)에 이어서 우리 가까운 불운한 현장의 독재자도 결국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36년간이나 독재 통치를 계속해 왔었다. 시리아의 카다피는 40년이 넘는 독재 정치를 불행한 죽음으로 마쳤다. 1965년부터 24년간 독재 정치를 시도하던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수크(Nicolae Ceauşescu, 1918-1989)가 1989년 12월 25일에는 군사재판으로 총살형을 당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도피를 시도했으나 결국을 붙들려 호송되고 특별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내린 그 날로 총살당하고 말았다.
역사에 히틀러나 뭇솔리니나 스탈린이나 모택동이 영원히 살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1945년 4월 30일에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숨어 있던 베를린의 지하벙커 밖에는 러시아의 포탄이 빗발치고 있는데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 곁에서 함께 4월 29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 날 권총으로 서로 자살하고 말았다.
히틀러의 동료였던 이탈리아의 독재자 뭇솔리니(Benito Missolini, 1883-1945)는 1943년에 권좌에서 쫓겨난 후에 감금되었고 히틀러가 보낸 특공조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1945년 4월 27일에 독일군 상사로 위장하고 애첩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독일군 심복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로 도주하려 했다. 결국은 꼬모 호수 주변에서 이탈리아의 공산당 빨치산에게 체포되었다. 폭도들의 돌팔매와 발길질로 처참해 졌다. 저들의 시체를 주유소 빌딩에 정육점의 갈고리로 거꾸로 매어 달았다. 애첩 클라라 페타치의 시체도 치마를 입은 채 거꾸로 매다는 바람에 지나가는 시민들의 마음을 더욱 더 참담하게 하였다고 한다.
3,000만 명 이상을 죽였다는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1879-1953)도 결국은 죽었고 1,000만 명 이상을 죽였다는 모택동(毛澤東,1893-1976)도 결국은 죽었다.
이 세상에 평화로운 통치와 평화로운 다스림이 어디에 있는가. 시편 2편에 보면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벌이는 분노와 간계함을 하늘에 계신 주께서 보고 웃으신다고 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라고 했다. 왜 하나님이 웃으시기도 하고 혹은 비웃으시기도 하는 걸까. 세상의 그 어느 왕이나 절대 권력을 주창하는 권세자의 권력이라도 주께서 보시기에는 우습기 짝이 없는 소행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이어야 복을 받게 된다. 인간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시편 2편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아니하는 민족은 하나님의 급하신 진노하심 앞에서 망하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2:12)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이 땅의 천하 만민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이들에게 그 분의 평화가 먼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는 천사의 선언은 영원하신 성탄의 메시지이며 축복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412장 찬송에 보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같은 평화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영원한 평화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함께 하시기를 사모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자.
목자(牧者)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왕.
예수는 이 땅에 그 분을 목자 삼고 살아가기를 고백하는 모든 인생들의 목자이신 왕이시다. 일찍이 다윗은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의 고백은 늘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자기 자신은 양과 같은 인생임을 고백하는 겸손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의 시작이 그러하지 않은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이신 왕으로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 아니고 무엇인가.
4절에 보면 헤롯왕조차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는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 벌어졌다. 그리스도란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인 메시아인데 헤롯 왕 자신이 “어디서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나겠느냐”고 물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절과 4절을 비교해 보면 결국은 왕 헤롯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유대인의 왕이요 그리스도인 메시아의 탄생 소문으로 인해서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을 갖고 착잡하고 집요한 마음으로 계속하여 누구에겐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실을 확인해 보려고 추궁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목자로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양떼와 같은 인생들에게 보내 주신 목자요 그리스도이시다.
서두에서 소개한 찰스 스윈돌 목사의 <예수, 가장 위대한 생애>에 보면 목자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왕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안식(安息)을 주시는 주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한 밤중에 예수의 탄생 소식을 천사들에게서 전해들은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 자신은 두렵고 놀랍고 기쁘고 흥분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탄생하신 마구간을 찾아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다. 그 천사들이 전하여 준 소식이 무엇인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목자란 양떼들에게 어디 가야 맑은 물이 있고 어디에 가야 푸른 풀밭이 있는지 좋은 소식을 계속하여 전하여 주는 책임과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만 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목자로 믿고 따르는 모든 인생들에게 영원한 목자요 그리스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목자인 왕이시다.
능력이 있는 왕은 백성들에게 평안과 쉼과 안식과 행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경배를 받으실만한 왕이요 백성들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평강의 왕이요 영원한 목자이신 왕이시다. 동서고금의 그 어느 시대이든지 왕은 백성들에게 풍요한 생의 필요를 공급하고 보장하고 유지하고 발전 시켜 나길 만한 능력과 역량이 있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의 배만 채우고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며 백성들을 배고프게 하고 굶주리게 하고 학대 받고 억울하고 괴롭고 우울하게 방치하는 왕이라면 무능력한 왕이며 배척 받는 왕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요 목자이신 왕이요 영원히 경배 받으실만한 왕 중의 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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