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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요20:19-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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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4-08 07:51 조회 22,303 댓글 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론이나 개념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부활절은 성경의 중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부활은 능력이다. 부활은 권세다. 부활은 영원한 승리요 기쁨이요 감격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를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을 깨트려 버리셨다. 그러므로 성탄절도 기쁘고, 추수 감사절도 감사하지만, 부활절이 모든 절기의 으뜸이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이 기뻐하고 소리 높여 찬송하고 경배하고 감사하며 증거하고 또 증거 해야 하는 영원한 즐거움이요 영원한 소망이요 영원한 축복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서 유월절 때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유대 땅 각처에서 올라온 백성들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영원한 유월절 희생양이 되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놀라운 영광이여 감격이며 은총이며 축복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려는 일을 모두 다 온전하게 성취하신 주님이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에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영광을 칭송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상속자(相續者)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世界)를 지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의 광채(光彩)이시다.
예수님은 그 본체(本體)이신 하나님의 형상(形相)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能力)의 말씀으로 만물(萬物)을 붙들고 계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생들의 죄(罪)를 정결(淨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높은 곳에 계신 지극(至極)히 크신 이의 우편(右便)에 앉아계신 분이시다.(히1:2-3)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단번에 드린바 되셨다.
예수님은 그를 구주로 믿는 인생들에게 구원(救援)을 주시려고 죄와 상관없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히9:28)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성도들의 믿음의 시작이다.(히12:2)
온갖 고난과 부끄러움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축복이다.(히12:3)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和平)함과 거룩함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히12:14)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사모하여야 한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마음에 쓴 뿌리가 나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더럽힘을 받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한다.(히12:15)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죄의 종이었던 인생들을 죄 가운데서 불러내시고 죽음 가운데서 이끌어 내셔서 죄 용서 받은 자의 기쁨과 자유와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 중의 하나가 옥에 갇히는 고통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의 천국 비유 말씀에서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 보았느냐”고 상급을 주시기 전에 물어 보신 것이다. 만약에 가족이 감옥에 갇혀 있다면 나만 봄이 왔다고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놀러 다닐 수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가족 중에 그 누군가가 병든 자가 있는데 나는 내 몸 건강하다고 이리 저리 활보하며 세상으로 자유롭게 나 다닐 수 있을까. 사람은 죄 때문에 매이고 갇히며, 질병 때문에 매이고,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초조와 의심 때문에 스스로 매이고 갇힌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무덤 돌을 밀쳐 내고 부활하시듯 그 모든 억압으로부터 건져 내시고 강건하게 해 주시고 살려 주시고 자유하게 해 주시는 것이 부활의 능력이며 은총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축복이란 구체적이다.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질병에서 건져 내서 강건하게 되는 것이 당장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부활의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이런 내용을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선언했다. 가난과 궁핍 가운데 연명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풍요로운 삶이 구원이며 부활이며 축복이다. 감옥에 갇혀 지내던 자가 그 형량을 다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때의 감격과 자유로움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선물로 받은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정도의 영광이 아니라 완전한 영광이요 영원한 영광이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벧전1:4) 영광이다.

사람은 죄에 갇히고, 악에 갇히고, 미움이 갇히고, 시기심에 갇히고, 지나친 경쟁심 때문에 갇히고,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까다로움 때문에 갇히고,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과 불안과 초조한 것에 갇힌다. 그러는 동안의 그 동안에 있던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과 삶의 활력이 일순간에 싹 살아지고 만다. 빛이 그 기능과 능력을 잃으면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북한은 광명성 3호 미사일을 쏘아 올리려고 하는데 그 예산이면 북한의 굶주리는 백성들 일 년 간 먹을 식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그 죄를 이기는 능력인가. 예수님의 부활이란 구체적인 것이다. 그 부활의 복음이 들어가면 땅이 변하고 인생이 변하고 일상의 생활이 변한다.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죽음이 그런 것이었다. 그 두려움에 미리 휩싸인 제자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팔아 버렸고 스스로 ‘아겔다마’라는 피밭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두려워서 베드로도 도망가고 안드레, 야고보, 빌립, 도마... 제자들마다 다 도망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죽으신지 삼일 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그 두려움과 공포와 죄와 사망의 어두운 영을 순식간에 삼키신 영원한 능력이 되셨다. 할렐루야!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오신 것이 복음의 시작이지만 부활이야말로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인류 구원의 대업을 성취하신 가장 장엄하고 놀라운 은총의 순간이다.

자,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해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

평강(平康)의 선포.
“너희에게 평강(平康)이 있을지어다.”
무섭고 두려워서 문을 굳게 닫아걸어 잠그고 한 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 가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이시다. 평강을 선포하셨다. 평강이 무엇인가. 평강과 행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의 어떤 구성원이든 나라이든 민족이든 행복과 평강을 원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복과 평강이다. 신명기 33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고 선언해 주신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엇을 보고 행복한 자라고 하셨을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 대답이 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분명한 행복의 선언이며 행복 보증의 약속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 지수는 얼마나 될까. 최근(2012. 4. 5)에 유엔에서 처음으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의 자료에 따르면 그 대상 국가인 156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는 56위라고 한다. 10점 만점에 5점이 조금 넘는 정도라고 한다. 미 컬럼비아대 지구연구소는 유엔의 의뢰를 받아 지난 5년 동안 매년 조사 대상 국가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가족 및 친구, 건강, 물질적 충족도, 자유, 사회국가에 대한 신뢰 등 다섯 부문에 걸쳐 국가별 편차를 감안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선정된 국가는 덴마크였다. 이어서 핀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에 올랐다. 이들 4개국의 평균 행복지수는 7.6점을 기록했다. 반면 행복도가 가장 낮은 국가들로는 국민소득이 낮은 토고, 베냉,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시에라리온 등의 아프리카 국가들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지진이 많은 이웃 나라인 일본이 44위로 가장 높았다. 그 다음이 한국이고 중국은 훨씬 낮은 112위였다.

행복과 평강은 마음속에 찾아 드는 심령의 선물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이 땅에 계실 때에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이런 축복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나라에 복음 성가가 보급되던 초기에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복음 성가가 대표곡이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와 긴장과 두근두근하는 모든 생각들을 떨쳐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축복하시는 이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와 같은 평강과 행복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길 소망하자.

사명자(使命者)의 파송.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사명자로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람은 세 번 다시 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 첫째가 육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통한 육의 탄생이다. 또 하나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사명자로 다시 나야 한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여야만 한다. 사명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만 한다. 로마서 8장 3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성도 들을 한 사람씩 일일이 정(定)하셔서 부르시고 의(義)롭고 영화(榮化)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구별하신다. 부르심이 소중한 것이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그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하나님이 일일이 부르셔서 사명자로 쓰신 것이다. 모세, 여호수아,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와 엘리사의 부르심이 마찬가지다.

사사시대에 보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신 장면이 자세히 나온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명자로 부르신 것이다. 사명자로의 부르심이란 가정의 배경이 중요하지 않다. 사사기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미디안에게 붙여서 칠년 동안이나 고생하고 있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저들을 구원하시려고 기드온을 먼저 부르셨다. 하루는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저들의 땅에 내려와서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 때에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식량을 마련해 보려고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그 때에 천사가 그에게 다가가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하고 문안했다. 그 때에 기드온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들이 미다안 세력에게 이 고생을 하고 있느냐”
그 때에 하나님이 직접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6:14)

그 때에 기드온이 이런 대답을 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그 때에 즉시 하나님이 대답해 주셨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6)

그 때에 기드온이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 주신 것을 확인하려고 표징(標徵)을 요구했다.

기드온은 염소 새끼를 잡은 고기와 무교병을 갖다가 바위 위에 놓고 양푼에 국을 끓여다가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지고 나갔다. 그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갖다 놓고 국을 그 위에 부으라고 명령했다. 기드온이 그렇게 순종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사자가 손에 지팡이를 잡고 그 끝을 고기와 무교병에 대는 순간에 바위에서 불이 나와서 그 고기와 무교병을 모두 불 태우고 천사가 사라졌다. 그 때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그 같은 체험 후에 기드온이 쓴 말이 ‘여호와는 평강이시라’는 뜻의 ‘여호와 살롬’(삿6:24)이란 말이다. 그 날 이후로 기드온은 32,000명 중에서 10,000명, 또 다시 그 중에서 뽑아낸 300명 용사들과 더불어 메뚜기 떼처럼 많던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세력들을 모조리 다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전쟁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다. 기드온의 군대 앞에서 동방 사람의 군대 십 이만명이 죽었다.(삿8:10) 기드온이 통치하는 40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다.(삿8:28)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부활절은 하나님께서 악한 영, 사망의 영, 저주의 영의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신 날이다. 이 같은 부활 승리의 영광이 계속될 수 있도록 영적 싸움에서 매 순간마다 승리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마태 등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초대 교회의 인물들이 한 사람씩 불러내신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사명자의 길을 갔던 신앙의 승리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 순간마다 나를 부르시고 파송하신 주님의 부르심 앞에 사명자 의식을 분명하게 갖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성령(聖靈) 받을 것을 분부.
“성령을 받으라.”
그 부르심과 사명을 평생토록 잘 감당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한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는 그 누구라도 주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는 법이다.

최근에 미국이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어디서나 전기 자동차의 충전이 가능하도록 충전소를 세워나가고 있다고 한다. 전기 자동차가 무공해 자동차 일수 있지만 전기 충전이 계속되지 못하면 앞으로 더 이상 못 나간다. 최근에는 하늘을 날아가는 자동차까지 등장하지 않았는가. 날아 갈 때는 날개를 펴고 지상에 내려 앉아 달릴 때에는 날개를 접는 식의 자동차가 이미 성공적으로 실험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상태이다. 그 모든 것이 과학의 힘이며 에너지의 힘이다. 그러나 에너지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날아가다가도 떨어지고 달려가다가도 멈춰 설 수밖에 없다.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 계속하여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은 철학이나 사상이나 개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신앙이다. 핵에너지를 잘 활용하면 운동장의 몇 배만한 거대한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이 몇 년 씩 에너지 공급을 전혀 따로 받지 않고 바다 위에 떠다닌다.

그러므로 신앙생활과 성령의 충만함은 절대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관계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그 중에는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던 날 그렇게 비겁하게 행동했던 베드로도 처절하게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서 말씀을 전파할 때에 하루에 3,000명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베드로 자신이 그런 성령을 체험 한 후에 성령 받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힘 있게 선포했다.(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민수기 24장의 선지지 발람은 성신을 충만히 받고도 잘 못된 적이 있다. 사무엘 상 10장의 사울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시적인 임재와 성령의 지속적인 내주(內住)하심의 상태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성령을 속이면 위선자(僞善者)의 마음속에서는 성령이 떠나시고 만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 병도 낫고 귀신도 떠나고 기적도 일어 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만족하고 자족하면 안 된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파송하셨던 칠십 인의 제자들이 귀신이 제어되고 나가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기뻐할 때에 심각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은혜(恩惠)와 성화(聖化)와 마음의 갱신(更新)과 거듭나게 하는 주인이 되셔야만 한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혼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상태이며 영원토록 동행하시는 상태이다.(롬8:26, 요14:16)

매튜 미드Matthew Mead(1626-1699)의 <유사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 Discovered이란 책이 있다. 17세기에 영국 남부에서 활동하던 비국교회의 목사이다. 영국 국교회와 뜻을 달리해서 추방도 되고 감옥에도 갔던 인물이다. 그런 그는 평생토록 꼼꼼히 성경의 진리를 연구해서 복음을 전했고 책으로 남겼다. 그는 73살에 하나님 앞으로 갈 때에도 “사명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담담히 외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성령을 받는 다는 것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성령께서 일시적으로 임하시지만 늘 거주(居住)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둘째, 성령을 보유 할 수 있지만 성령으로 태어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셋째, 성령을 양자(養子)의 영으로 받지 못하고 종(從)의 영으로 정도만 보유할 수        도 있다.
넷째, 자기 안에 성령이 역사하시지만 성령께 스스로 저항할 수도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다섯째, 성령을 받은 후에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을 수 있다.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난 성도는 육적인 죄를 다시 범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요일 3:9)라고 했다. 그러나 육적으로만 신앙을 고백한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죄를 다시 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령을 보유하지 못하고 육적이고 감각적인 상태에 머물기 때문이다. 성령을 맛보고도 타락하고 말면 그런 죄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히6:4-8)

매튜 미드 목사의 묵상을 빌리자면 이런 상태가 신앙의 위선자 상태다. 그런 자들은 성령에 참여한 자라고 말은 하지만 다시 또 성령을 거슬러서 죄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다. 그의 그런 묵상이 맞고 옳다. 그러므로 성령을 일시적으로 모셔 들이지 말고 성령과 동행(同行)하여야만 한다.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야 하고 성령으로 양자(養子)의 영을 받아야만 한다. 저항이 없이 성령께 순종(順從)하여야 하고 성령께 이끌려 다녀야 한다. 그래야 죄를 다스릴 수 있고 죄를 이길 수 있게 된다. 유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또 넘어지고 말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담대히 언제나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며 살아간다. 성령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모셔 들이고 성령과 함께 동행 하고 동거하는 성도라면 성령 받은 사명자답게 부활의 증인 답게 살아가게 된다.

당신에게 부활 신앙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체험이 빈 무덤 앞에서 부활 예수님 만나도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처럼 그런 활력이 있어야 한다.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로 내려갔던 제자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는 부활 예수님 만난 감격을 갖고 그 밤으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러 나섰다. 다른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급하게 올라가는 마음이 뜨겁게 불붙는 믿음이 있었다.

낯 설은 나라의 낯 설은 음식이나 과일 맛은 설명만 가지고는 안 된다. 먹어 보고 맛을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망고나 파파야나 과일의 여왕 두리안 같은 과일들은 현지의 잘 익은 제 철의 것으로 먹어 보지 않고는 그 맛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선교 초기에 한국에 와서 잘 익은 배 맛을 본 서양 선교사가 하는 말이 “한국의 배를 먹어 보지 않고는 천국 맛을 말하지 말라.”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1994년 1월 3일에 L. A의 선배 목사 댁에 가족과 함께 하룻밤 묵어서 필라델피아로 가기 위해 둘렀다. 그날 저녁에 먹어 본 캘리포니아 오렌지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요즘 F. T. A 시행 이후에 오렌지 값이 많이 내렸지만 그 맛은 현지에서 먹는 맛을 따라 갈수 가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성령 충만도 마찬가지다. 어설픈 체험으로 그것이 모든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제대로 믿자. 제대로 성령도 받자. 그리함으로 명실 공히 가짜 크리스천이 아닌 진짜 크리스천의 사명을 다하며 예수 부활의 증인답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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