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의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제 말을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마침 상류에 많은 비가 와서 강물이 예전보다 잔득 불어 있었다. 강물의 깊이를 예측할 수 없었고 누런 흙탕물이 대단히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노련한 솜씨로 말의 고삐를 부여잡고 강물을 건너 강둑의 저쪽으로 건너갔다. 뒤 따라 강물에 들어선 아들이 강물의 중간에서 겁에 질려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도저히 더 이상 앞으로 못 가겠어요.”
아들을 태운 말은 제 잔등의 젊은 주인이 자신 없어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덩달아 겁에 질려 킁킁거리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에 강둑 저편에서 아버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당황하지 마라.
말고삐를 꼭 부여잡고 앞으로 세게 잡아 당겨.
절대로 물을 내려다보지 말고 이곳의 강기슭만 바라다 봐.
용기를 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 짧고 힘이 있는 몇 마디는 아버지가 살아온 그동안의 삶의 연륜의 전부를 담아낸 충고였다. 아들은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고함 소리를 들은 대로 안간 힘을 다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얼음처럼 차갑고 빠르게 흐르는 물결을 헤치고 아버지가 기다리는 강 둑 저편에 안전하게 올라 설 수 있었다. 그 때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네 곁에 가서 도와 줄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 하면 넌 늘 나 없이는 거센 물결을 스스로 못 건너는 나약한 마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아버지이시만 하나님이 나의 고난의 현장에 직접 뛰어 드시기 전에 전해 주시는 모든 말씀으로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지혜를 얻고 전력을 다 할 수 있기를 기대하신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사순절 새벽 기도 순례를 통해서 출애굽기의 말씀을 묵상해 왔다. 오늘 본문은 오늘의 묵상 분량이다.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과 고통의 세월이 가득차고 이제 하나님께서 저들을 애굽의 바로 왕의 압제에서 풀어 놓으셔서 출애굽에 성공하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뽑아내실 계획을 갖고 역사를 바꾸어 가시는 시작이다. 그러나 바로왕의 마음은 점점 완악해져 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 완악함도 때가 가득차서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일이 분명하게 들어나고 깨닫게 하신 후에 바로 임금과 애굽 백성의 장자를 하나님이 죽이는 재앙이 있기까지 그 완악함이 계속되리라고 하셨다.
이미 하나님은 모세를 형 아론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로 쓰시기로 작정하셨다. 모세는 점점 백성들 앞에 하나님 같은 존재로 존귀하게 쓰임 받기 시작했다. 출애굽기 4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모세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인생,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능력자, 하나님의 대행자로 쓰시려는 섭리는 밝히신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악한 애굽의 바로 임금 앞에서 하나님의 장자인 것을 드려 내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 내용을 바로 임금 앞에 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4;22)
하나님께서 장차 모세와 그의 백성들을 얼마나 존귀하게 높이시고 쓰시려는지를 보여 주신 말씀들이다.
하나님이 노예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하는 백성들로 삼으시려고 광야로 불러내신 것이다.(출4:23) 이는 마치도 이사야 43장 21절의 말씀과 흡사하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고, 제사를 받으시고, 기도를 받으시고,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저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광야로 이끌고, 장차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 맨 마지막 장면인 31절에 보면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론을 통해서 전해 듣고 하나님이 모세를 도우시려고 불러내신 모세의 형 아론을 통해서 보이신 각종 이적들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합해 져서 진심으로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동안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축 현장에서 고통 속에 학대를 받으며 중노동으로 시달리며 탄식 속에 지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이적을 보며 마음을 모아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택한 백성들을 통해서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 살아가든지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고난을 살펴보시고 택한 성도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한숨과 탄식과 어려움과 역경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세하게 헤아려 살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 합니다. 내 삶을 다해”
우리가 이렇게 찬양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고 살자. 때가 찬 경륜으로 역사하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사모하며 살아갈 때에 기적이 일어나고 이적이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인 사명을 받아들이고 쓰임 받기 위해서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애굽으로 향하던 모세에게 위기가 찾아 왔다. 미디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먼 길이었다. 당시에 마땅한 숙소나 잠자리를 마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는 길을 가다가 허름한 숙소에서 가족들과 함께 몸을 쉬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 이 곳 숙소란 당시에 애굽에 장사하려고 다니던 장사꾼들이나 무역업에 종사하던 카라반(Caravan)들이 묵던 허름한 여관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이 같은 숙소라는 것이 해와 비를 가릴 정도였고 식량이나 물이나 잠을 자기위한 침구류는 자신이 직접 챙겨서 짐승에 싣고 다녀야 했던 헛간 같은 열악한 환경이었다.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는 장면이다. 혹자는 이때에 애굽을 향해 먼 길을 가던 모세가 무슨 병이 걸려서 죽을 고생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모세를 쓰시기 전에 모세 자신의 가족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준비해 가시는 중요한 장면이 여기 소개되어 있다.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모세의 가족들을 통해서 온전한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
24절에 보면 모세가 길가의 숙소에서 죽을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 장면을 성경은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하나님의 모세를 놓아 주시니’라고 했다. 모세가 죽을 것만 같은 신체적인 연약함과 위험을 극복하고 건강이 잘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지난 월요일인 3월 5일이 경칩이었는데 아파트 단지 길 차로 위에 개구리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던 주민이 밤중인데 차를 세워 놓고 전조들을 비추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개구리는 경칩에 땅 위로 나오자마자 자동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죽음의 위험을 맞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고 봄이 오고 있다. 다시 꽃샘 추위가 온다지만 이런 추위도 지나가고 말 것이다. 그것이 계절의 변화가 아닌가. 역사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세계정세를 ‘냉전’(冷戰)시대란 표현으로 묘사하던 때가 있었다. 냉전 시대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평화의 시대도 영원하지 못하다. 역사는 바뀌고 또 다시 바뀌는 것이다. 그 중심에 역사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시고 경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 한 국가가 유지 되려면 나라의 안과 밖이 골고루 안정되어야 한다. 개인과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모세가 나이 80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향하고 있다. 동족 이스라엘을 바로 임금의 완악한 악정으로부터 구출해 내고 구원해 내기 위해서 사명을 갖고 가는 것이다. 애굽의 노예현장에서 탄식하며 고통당하며 고생 하던 백성들을 광야로 불러내서 예배자로 삼고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선민으로 이끌어 내시려는 하나님의 결심이 이미 있으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민족 구원의 사명자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 부름을 받은 모세의 가족들의 형편을 먼저 물으신 것이다. 사명자로 쓰임을 받지도 못하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죽어 버릴 것만 같은 남편 모세를 대하는 아내 십보라에게 불안한 생각이 엄습했다. 그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급하게 돌칼을 준비 해다가 어린 아들에게 할레를 행했다. 출애굽기 2장 22절에 보면 모세가 미디안의 장인 이드로에게 장가들어 십보라를 아내로 삼고 첫 아들을 낳아 ‘게르솜’이라 이름했다. 그 뜻은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언급되는 엄마의 손길에 의해서 할례를 받는 아들은 게르솜의 동생인 ‘엘리에셀’에 관한 내용이 분명하다. 성경은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장남 게르솜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한 아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채로 미디안을 떠나서 애굽을 향해 먼 길을 가고 있었다. 라우린슨(Rawlinson) 같은 성서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아마도 둘째 아들 엘리에셀이 이 먼 길 가기 직전에 태어났거나 가는 노중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런 어수선하고 복잡한 와중에 할례를 행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문제 삼고 계신 것이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칠대 후손이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셨다.(창15:13-16) 그 중의 하나가 할례에 관한 언약이다.(창17:9-14) 창세기 21장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은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했다. 누가복음 1장 59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들 요한을 낳은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했다. 누가복음 2장 21절에 보면 예수님도 태어난 지 팔일 만에 그 이름이 예수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하며 할례를 받으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조상 아브라함 때에 맺으신 언약의 성취자로 부르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400년 만에 불러내시는 목적도 단 이것 한 가지이다. 언약을 계승하는 하나님 백성으로 하나님을 잘 예배하고 경배하는 백성들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 구원하는 거창한 대업 이전에 그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책임지는 영적 가장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가족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준수하고 하나님 앞에 성결한 가족들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신 장면이다. 그와 같은 가족 신앙을 지켜가는 상징이 할례다. 그런데 그 할례를 모세 대신에 미디안 출신 부인인 십보라가 직접 행한 것이다. 특별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거창한 민족적인 일에도 기대가 크시지만 이처럼 한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게 영적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의 징표를 갖고 할례 받은 자로 살아가고 오늘날로 하면 세례 받은 자답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섬세하고 준엄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같은 할례 방법은 여호수아 5장 2절에도 나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서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신 적이 있으시다. 요단강은 건넜지만 광야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세대들 중에 할례 받지 못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들이 할례를 받게 됨으로 아내 십보라와 함께 다 같이 온 가족의 온전한 경배가 이루어졌다.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딸인 십보라가 그 동안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가 아닌 아내 십보라가 나서서 아들 엘리에셀에게 그 어려운 할례를 행하므로 명실공이 모세의 온 가족이 모세가 받은 부르심처럼 하나님 앞에 부르심에 순종하는 온 가족으로 준비되게 된 것이다. 미디안 여인인 십보라는 아들에게 남편 모세를 대신하여 할례를 행하고 그 표피를 베어 내서 남편 모세의 발 앞에 갖다가 대며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출4:25) 드디어 미디안 여인이었던 모세의 부인도 출애굽의 서막이 전개되는 이 장엄한 출발 앞에 온전히 하나님을 영접하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여종으로 변모해 가는 장면이다.
도움이 될 자를 예비하심으로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
이즈음이 하나님은 애굽에서 생활하던 83살 된 아론을 불러 내셨다. 출애굽기 7장 7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던 팔십 세 되던 해에 형 아론은 팔십 삼세였다. 그런 아론을 모세 곁으로 불러 내신 것이다.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출4:27) 40년 만에 형제가 만나게 되는 준비를 하나님이 친히 해 주신 것이다. 이 날 이후로 모세에게 있어서 아론은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 사역의 동반자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켜 광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조밀하신 계획을 갖고 쓰실 인물들을 이처럼 예비하신 것이다. 아론을 광야로 불러내시되 ‘하나님의 산’에서 만나도록 하셨다. 여기 하나님의 산이란 호렙 산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인 시내 산을 말한다. 그 곳은 나중에 하나님이 모세를 직접 만나 주신 산이며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두 돌 판을 기록해 주시고 계명과 율법을 주신 산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시내 산의 이름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40년 만에 서로 만난 형제 아론과 모세는 입을 맞추며 기쁨을 나누었다. 광야에서이지만 서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광야에서 모세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자세하게 안내 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자세하고 섬세하고 분명한 아버지이시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님의 섭리에도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인도해 주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부조하고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하시는 섭리와 경륜을 제대로 잘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
드디어 모세는 형 아론을 만나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해 주셨던 모든 말씀들을 자세하게 아론에게 설명해 주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출4:28)
여기서 모든 말씀이란 이 표현이 중요한 것이다. 28절과 30절의 ‘모든 말씀’이란 말씀에 주목해 보라.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그런 생활이어야 할 것이다. 대강 대강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철저하고 완벽을 기하고 온전한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겸허한 신앙생활의 태도 말이다. 그런 태도에서 나온 작품이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같은 역사적인 묵상집이 아닌가. 사람의 몸도 골고루 영영을 섭취할 때에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이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골고루 균형 있게 입체적으로 가감하지 말고 받아 들이고 행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든 말씀과 이적의 인물로 체험 시키셔서 쓰기 시작하신 것처럼 모세의 형 아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디 엘 무디의 시크릿 파우어>라는 책에서 D. L 무디 목사는 지식 없는 열정과 열정이 없는 지식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한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이 둘 중에 하나만을 택하라면 지식 없는 열정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참된 능력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도록 돕는 책이다. 사람은 진정한 힘의 근원을 발견할 때에 열정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주님의 사역을 이루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하나님의 예비하신 이적은 병행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이적 혹은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려는 모든 이적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 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바람이다.
지난주에 집사님의 가정에 이사 입주 예배를 드렸다. 장기범 집사와 한성혜 집사의 딸인 유치부의 장하영 어린이가 식탁 앞에서 식사 전에 성경 구절을 또박 또박 외웠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태복음 28장 6절 말씀을 큰 소리로 카랑카랑하게 잘 외우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분이 좋고 기뻤는지 모른다.
또 같은 속도원인 이재성 집사와 전영선 집사의 삼 남매 중의 첫째 딸인 이가은 어린이는 지난 3월 1일에 3월의 첫 새벽 기도회에 엄마를 따라 나오기 위해서 그 전 날 밤에 교회에 올 준비를 다 하고 털 코트를 입은 채 이불도 덥지 않고 잠바를 덥고 잠을 청하다가 새벽 기도회에 따라 나왔다고 했다. 어제토요일 새벽에는 장하영 어린이와 이가은 어린이 둘 다 외할머니와 엄마를 따라서 새벽 기도회에 나왔었다. 이 같은 작은 일들이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다. 모래알이 모이고 쌓여서 큰 바위가 되고 도랑물과 시냇물이 모여 흘러서 강물도 되고 바닷물도 되는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요 말씀도 마찬가지요 섬김도 전도도 봉사도 헌신도 충성도 선교도 다 마찬가지다.
말을 잘 못하겠다 입이 어물하고 뻣뻣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주저주저하던 모세는 결국은 침착하게 하나님의 모든 분부하신 말씀을 형 아론에게 차근차근 전달하였다. 그리고 지팡이가 뱀이 되었던 이적과 손에 나병이 생겼던 이적을 설명해 주었다. 심지어는 앞으로 바로 임금이 저들의 행할 이적을 믿지 않거든 나일 강의 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면 피가 되는 이적도 보여 주시겠다고 했다.
외롭고 고독하고 답답하고 망설임이 많았던 모세는 형 아론을 만나게 되면서 얼마나 힘이 되고 의지가 되고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이는 오래도록 함께 동역하게 된 형제간의 만남의 축복이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상한 섭리요 축복이었다.
백성들 앞에서
전해진 말씀과 행해진 이적으로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전해 듣고 이적에 대하여 전해들은 아론은 다시 모세와 백성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똑 같이 전하고 들은 그대로 행했을 때에 모세가 행한 것과 똑 같은 이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높여서 하나님의 출애굽의 역사를 성공시키시려는 섭리요 경륜이었다.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아론이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 모든 이적들은 배후에서 하나님이 직접 친히 행하시는 이적이었다. 지팡이가 뱀이 되고 꼬리를 다시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모세나 아론이나 그의 손을 품에 넣으니 나병이 번지고 다시 품이 넣으니 깨끗하게 나았다. 다시 품어 넣으면 나병이 번지고 다시 품에 넣으면 깨끗해졌다.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를 드러내시려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이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모세와 아론은 일약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저들을 찾으시고 그 고통을 살피시는 것에 대하여 감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다. 이는 땅에 몸을 대고 엎드려 경배하고 예배한 것이다. 애굽의 노예 생활 400년 만에 벌어진 놀랍고 감격스런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지금 어떤 형편 가운데 살아가든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우리의 삶의 중심에 찾아오시고 보살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을 믿고 절망하지 말자.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항상 기도에 힘쓰며 만군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주께서 우리 각 사람들에게 출애굽의 영광과 가나안의 축복을 모두 다 안겨 주실 줄로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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