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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지금 행할 일(왕상 6:1-13, 마12:42-45)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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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1-17 23:44 조회 21,817 댓글 0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지만 특별히 인생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가 있어 왔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돌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곳에 임재 하셔서 말씀하시고 혹은 응답하시고는 했다. 이 같이 하나님께 돌단을 쌓고 제사하는 일은 이삭과 야곱에게까지도 이어졌다. 형 ‘에서’의 살기 가 등등한 원한이 무서워 아버지로부터 축복 기도를 받던 날 멀리 도망가기 시작하던 야곱에 루스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잠을 청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할 때에도 베고 자던 돌을 세워 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기도하는 돌단  앞에서의 기도행위를 계속하였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벗어나서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에게 그 곳에서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하나님은 원주민의 대적을 피하여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던 이삭에게 르호봇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르호봇이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26:22)는 뜻이다. 이삭은 그 곳에서 브엘세바를 향하여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 밤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그 곳에 돌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 생활을 이어갔다. 이 같은 하나님의 임재는 모습은 아들 야곱에 이십여 년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가던 때에 얍복강 저편에서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할 때에도 나타났다.

모세 때에는 성막을 건설하게 하셨고 지성소와 법궤 앞에서 임재 하셨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모세 때에도 애굽의 고난 받는 백성들이 탄식하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과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우셨던 언약을 기억하셔서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돌보시고 그들의 고난과 아픔을 기억해 주셨다. 그런 모세를 호렙산의 불붙는 떨기나무 환상 가운데서 부르셔서 민족을 영도하는 지도자로 쓰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과 동행하심으로 애굽의 바로 임금 앞에서도 전능하신 여호와이셨고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출애굽을 시작하여 육지처럼 둘로 갈라진 홍해 물 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셨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광야 길의 모세로 하여금 시내 산 정상에 오르게 하셨고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 성막 건설의 사명이며 언약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신 일이었다.

그러한 모세의 광야 시대와 성막 제사 시대를 거쳐서 다윗 임금의 간절한 소원을 따라 아들 솔로몬의 때에 세워진 것이 성전이다. 성막(聖幕)은 들판에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을 덮어 만든 하나님의 집이었다면 성전(聖殿)은 예루살렘의 시내산 언덕 자락에 백향목과 잣나무와 감람나무로 짓고 금으로 아로새겨 입힌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예배당은 아브라함 시절의 돌단이요 모세에게서 다윗시대까지 이어지던 성막이요 솔로몬 시대 이후 오늘 날까지 이어지는 성전 신앙을 대신하는 처소인 것이다.

아버지 다윗의 간절한 소원을 응답하신 하나님은 아들 왕 솔로몬의 때에 성전 건축이 가능하게 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로 하면 출애굽 한지 480년이 되던 때였다. 이는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가 되던 해였다. 이는 솔로몬이 왕이 되던 해가 BC 970년이므로 BC 966년이란 계산이 나온다. 또한 열왕기상 6장 1절에서 말씀하는 ‘시브월’이란 오늘 날 4-5월경을 말한다. ‘시브’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지우’라는 말인데 이는 ‘광채’라는 뜻으로 꽃이 가장 화려하게 피는 5월경을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역대하 3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던 곳은 모리아 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라고 했다. 그 곳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명령에 순종하여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창22:2) 그 곳은 또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을 때에 하나님께 회개의 제단을 쌓던 곳이기도 하다.(삼하24:16-25, 대상21:15-27)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터는 역사적으로 헌신과 용서와 화해와 긍휼과 자비의 처소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돌단을 쌓던 제단 시대에도 계셨고, 성막 시대에도 계셨고, 성전 시대에도 또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본문에 보면 다윗 임금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소원하던 성전의 건축이 아들 왕 솔로몬의 때에 이루어지고 있다. 성전 건축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호와에 의한, 여호와를 위한 성전건축.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다윗에 의한 것도 아니고 솔로몬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 시작과 완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다. 성전의 식양과 좌우의 규모와 높이와 재료와 그 구조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건축은 솔로몬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한 것이었다.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그렇다. 성전의 건축은 여호와를 위한 것이다. 즉 돌단이나 성막이나 성전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돌로 쌓았든 짐승의 가죽으로 짓고 황금으로 만들었든 혹은 백향목을 잘 짓고 금으로 아로새겨 장식했든 그 것은 눈에 보이는 상징물이지 그것 자체가 신격화된 그 무엇은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가령 갈멜산 꼭대기에 쌓았던 엘리야의 돌단과 그 위에 각을 떠 놓았던 송아지 제물은 그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제단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서 제물과 제단의 나무와 돌과 흙과 고랑의 물을 태우고 핥아 버리며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를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모세 시대의 성막 중심의 번제를 비롯한 재사 신앙도 마찬가지요 솔로몬 성전에서의 제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성전의 건축은 철저하게 여호와에 의한 여호와를 위한 건축이어야 한다. 결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백화점이나 호텔이나 컨벤션 홀이나 체육관이나 박물관이나 음악당이나 미술관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2절에 보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라고 하였다. 오늘 날 우리들의 때에 지금 건축되고 있는 예배당의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위한 것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가 믿고 섬기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집을 건축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집을 짓는 행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배고파하는 무리들에게 어린 아이가 들고 나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시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가 차도록 남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그 다음 날의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갈릴리 호수 저편에 까지 예수님을 찾아 따라 나선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문안 할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이하여 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 때에 무리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고 묻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고 하셨다. 그 때에 무리들이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하고 물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대답해 주시기를 “모세가 광야 백성들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 것이다.”라고 설명하시면서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3)고 설명해 주셨다. 그 때에 무리들이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6:34)하고 요청하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는 유명한 말씀을 여기서 해 주셨다.

하나님의 집 즉 돌단과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요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곳이다. 요한복음 6장의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생명의 떡을 먹는 곳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 집이라면 결코 성막일 수 없고 성전일 수 없다. 솔로몬의 성전이 이렇게 어렵게 지어졌으나 영원하지 못하고 나중에 무너졌다. 열왕기 하 25장 8절 이하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때에 그의 신복인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 들어왔다.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제 9년(BC 588)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쳐들어 온 후에 2년이 지난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해 버렸다. 그리고 솔로몬이 지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모조리 다 불살라 버렸다. 예루살렘 성 안의 모든 집들이 귀인의 집까지 다 불타 버렸다. 온 도성이 다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성벽도 헐리고 쓸 만한 젊은이들을 모조리 다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 성전 안의 그 귀한 금 그릇들을 모조리 다 가져가고 성전의 두 놋 기둥 까지 다 뽑아서 가져갔다. 심지어는 불 옮기는 그릇과 주발까지 금 그릇과 은그릇을 닥치는 대로 다 가져갔다.

우리나라도 평양과 원산과 신의주와 개성의 그 많던 교회들이 언제 다 무너졌는가. 6. 25 전쟁이 벌어지고 100만 명의 중공군이 남북한의 산과 들과 도시를 초토화 하면서 그 많던 예배당들이 다 무너지고 다 불탔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은 성전을 잘 짓되 그 성전 안에서 사람을 위하지 말고 ‘여호와를 위한’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성전 시대가 오래 가는 것이다. 

금과 은과 백향목과 잣나무와 감람나무로 정교하고 아름답고 공교하고 향기롭게 잘 지은 성전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우상 숭배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중심의 삶을 살아야 그 성전 시대가 오래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본문 말씀의 제목을 ‘지금 행할 일’이라고 정했다. 그와 같은 말씀 제목의 근거는 12절에 나온다. 솔로몬이 앞장서서 아버지 다윗의 소원대로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짓는 일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셨고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는 솔로몬 혼자서 건축하는 것이 아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담아서 솔로몬이 앞장서서 건축하는 것이다.

지금, 요즘 우리 교회는 성전을 건축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계신 것이다. 물론 건물이야 건축회사가 맡아서 짓고 기술자들이 나서서 짓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짓는 것이요 내가 짓는 것이다. 지금 지하 2층 지상 5층중에서 지하 공사가 끝나고 지상 3층의 본당 상층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 예배당의 건축, 하나님의 집의 건축, 성전의 건축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각 사람이, 각 가정이 그런 마음과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물론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성전이 건축되는 때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개인과 가정이 되어야만 한다. 마음이 문제다. 마음만 있으면 오리를 가자고 할 때에 십리라도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만 있으면 속옷을 달라고 할 때에 겉옷 까지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헌금 궤에 헌금을 넣는 홀로 사는 여인의 동전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면서 “그는 자기의 가진 전부를 드렸느니라”고 칭찬하신 적이 있다. 지금, 요즘은 성전 건축에 참여하여야만 할 때이다.
물론 내가 참여 못하고 우리 가정이 참여 못하여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참여하고 우리 가정이 참여 하면 나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

솔로몬 임금 때에는 왕이 앞장서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하였다. 오늘 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계시다. 지금(now)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동참하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내 집도 장만해야 하고 자동차도 유지해야 하고 아들딸들도 공부시켜야 하고 학원도 보내야 하고 과외 공부도 시켜야 하고 이것저것도 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하는 이때는 “내개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는” 건축자의 수고를 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래야 하나님이 만족해하시고 그래야 하나님이 축복의 하늘 문을 여신다. 

오늘 날 우리의 이 일은 사람이 시작한 일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 분명하다. 그러하다면 쓰임 받아야만 한다. 이는 다윗의 마음에 그런 감동이 있어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다윗의 때가 아닌 아들 솔로몬의 때에 완성하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의 때, 나의 때에 하나님이 이 일을 시작하셨고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 때의 광야 백성들처럼 드리는 복과 내려 주시는 복을 체험하고 간증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36장에 보면 모세의 때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앞장세우고 성막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저들 두 사람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신 사람들이었다. 성막 건설을 위하여 모세는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을 에물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침마다 백성들이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건축의 자재와 재료가 넘쳐 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막을 건설하는 이들이 모세 앞에 와서 부탁하였다.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출36:5) 그러므로 모세는 그만 가져 오라고 명령하였고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36:7)고 했다. 우리 교회의 건축 현장도 그런 주의 은혜와 간증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섬세하고 정교한 성전 건축.
사람이 자기가 사는 집을 지으려 해고 잘 짓고 싶은 열망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하니 하나님의 집을 짓는 성전 건축자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집을 잘 짓고 아름답게 짓고 은혜로운 공간으로 잘 지어 봉헌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를 날마다 풍성하게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은 어떻게 건축하였다고 하였는가.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께 재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출입하며 제사를 드리는 곳이지 오늘 날과 같은 회장의 집회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하면 길이가 27미터이고 폭이 9미터이며 높이가 13미터였다. 그리고 성소의 규모에 대하여도 말씀하였다.

성전 바깥의 골방 들보가 성전의 벽에 박히지 아니하게 지었다.
돌 뜨는 곳에서 다듬어 가져다가 지었다.
도끼나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신중하게 건축을 계속하였다.
나사모양 층계로 아름답게 지었다.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다. 성전의 지붕 공사를 어떻게 하였는가를 말한다.
성전 둘레에 돌아가며 다섯 규빗 높이(10.5m)의 다락방을 건축하였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자기가 사는 집을 짓거나 마련하는 것도 축복된 기회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기회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힘을 합하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을 완공하여야만 할 것이다.


말씀의 생활화를 위한 성전 건축.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마을마다에는 회당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제사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면 마을의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배우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배우고 가르치며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덧입는 예배의 처소요 찬양의 처소요 경배의 처소이다. 9절의 “성전의 건축을 마치니라.”는 말씀은 성전의 외모와 골격 공사가 끝난 상태를 말한다. 14절에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완성된 성전의 골격에 구석구석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는 내용이 소상하게 소개된다.

요한복음 12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가 향유 나는 나드 한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과 같이 그러한 향기가 나고 아름다운 미담의 간증을 이루는 주인공들이 넘쳐 나는 성전 건축의 기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마무리 해가는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성전 건축과 말씀 생활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12절에 보면,

첫째, 만일이란 조건이다.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이란 조건을 제시하셨다. 성막 시대를 접고 성전 시대를 여는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 건축을 마쳐 가는 것이 귀한 일이요 복된 일이요 잘 한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는 시작일 뿐 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말씀의 생활화를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안에서의 예배보다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거나 암송하거나 잘 알거나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고 암송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대로 지켜 행하는 생활이 천배 만 배 더욱 더 소중한 것이다. 건물 중심이 아니라 성경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배당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성령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저들이 가르치는 것은 따르되 행하는 것은 본받지 말라”고 교훈하신 적이 있지 않는가.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해 가던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그에게 임하는 관계였다. 그런 그가 나중에 잘못되고 타락하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성전 건축은 시작이요 과정일 뿐이다. 결코 신앙생활의 끝이나 완성이 아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한 과정이요 한 행위일 뿐이다. 그보다 천배 만 배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내게 임하는 긴밀한 관계를 늘 유지하는 것이어야 한다.(왕상 6:11) 또한 그 말씀의 내용을 잘 듣고 경청하고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며 그대로 지켜 행하는 순종의 신앙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축복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켜 순종하며 따르고 행하면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확실하게 이룰 것이라고 하셨다. 사무엘 하 7장에 나오는 유명한 언약의 말씀이다. 다윗이 어느 날 선지자 나단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7:2)

이 말과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다. 그 말씀을 하나님도 들으셨다. 우리가 기도의 말처럼 언제 어디서나 말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막이냐 성전이냐에 개의치 아니하는 분이시다. 즉 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지은 집이냐 혹은 백향목으로 짓고 잣나무와 감람나무로 지은 집이냐를 묻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의 표현에 쉽게 감동하시는 아버지이심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무엘하 7장 8절 이하에 보면 다윗을 향하여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쏟아 부어 주셨다.

아직 성전을 지은 것도 아니고 그런 마음을 선지자 나단에게 말한 것뿐인데 하나님은 감동하셨고 감격하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그런 아버지이시다.

8절,  다윗아 너를 양 치던 목동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자로 삼을 것이다.
9절, 너를 원수들 앞에서 함께 하여서 위대한 이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10-12절, 평안히 살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다가 데려 갈 것이며 네 자손의 나라가 점점 견고하게 될 것이다.
13절, 아들 때에 성전을 건축할 것이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할 것이다.
14절,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인데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다.
15절, 그러나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아주 빼앗지는 아니할 것이다.
16절,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 마지막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하신 약속이 이어지고 계승되어서 마태복음 1장 1절의 말씀처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대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언약이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열왕기상 6장 13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듯이 나의 삶의 한 가운데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듯이 나와 나의 가정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소원을 이어서 성전 건축은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신앙인생 건축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보다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다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12장 42절 말씀처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지어진 그 어떤 성전보다 더 크시며, 요나보다도 더 크시고 솔로몬보다도 더 크신 전능자요 대속자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 임마누엘이시다. 이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와 은총이 풍성하게 임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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