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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욥4:12-21)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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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11-11 22:19 조회 22,702 댓글 0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존재이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질그릇같이 빚어 사람을 만드셨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生靈)이 된 것이 인간이다. 그 생기라는 것이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기운이다. 사람은 그 어떤 인생이든지 하나님이 내시는 것이다. 어려서 세상을 떠나든지 혹은 무드셀라같이 31살이 모자라는 천세수를 하던 인생이든 그 어느 누구나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다루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와 복도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18세기의 독일이 낳은 작곡가요 피아니스트인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아버지인 요한 판 베토벤(1740-1792)은 어릴 때부터 좋은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12살 무렵에는 교회의 성가대에서 활동하였고 16살 때부터는 급료도 받을 정도였다. 그 후에 궁정 음악가가 되어 테너 가수로 일했는데 본에서 비교적 훌륭한 음악 선생으로 인정을 받아 귀족 자녀들의 성악과 피아노 교습을 꽤 많이 하였다. 평소에 성실하고 모든 일에 철저하던 그가 안타깝게도  나중에는 술 중독증에 걸려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아들 베토벤이 22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1747-1787)는 궁정 요리사의 감독관이었던 하인리히 케베리히의 딸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났다. 그녀는 원래 시종 무관이었던 요한 라임과 16살 때에 결혼했는데 이년 만에 첫 남편이 숨지는 바람에 홀로 된지 이년 뒤에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과 재혼하였다. 마리아는 요한과 결혼한 뒤 일곱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네 자녀는 어려서 숨지고 세 아들만 무사히 자랐으며, 그 중에 장남이 바로 베토벤이었다. 마리아는 아주 친절하고 착하고 부드러웠지만, 한편으로 상당히 우울해하곤 했다. 남편 요한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다. 어린 베토벤은 엄하기만 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더 깊은 사랑을 느끼며 자랐어요. 그러나 결핵을 앓았던 마리아는 40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베토벤의 나이 17살이었다. 베토벤의 조상들 가운데 음악의 역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음악가는 없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음악적인 소질이 유전돼 그가 훌륭한 음악가로 자라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요한의 술 중독증은 나중에 베토벤조차도 술을 가까이 하게 만드는 악영향을 미쳤다. 베토벤은 귓병으로 고생하다가 나중에는 전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마음속에 사랑하던 연인과 결국은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에 사랑의 실패에 대한 상처를 평생 동안 안고 살아갔다. 알골 중독자요 일설에는 매독 환자였던 아버지와 결핵 환자였던 어머니 아래서 위로 줄줄이 네 형들이 죽은 아픔 가운데 태어난 베토벤의 탄생은 가정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신비한 선물이었다.
본문의 주인공인 욥은 140년을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의 생애에 극복하기 어려운 최악의 고난이 찾아 왔다. 하루에 큰 아들의 생일날 집안에서 생일잔치를 벌이던 집에 광풍이 불어 무너지면서 일곱 아들과 세 딸이 한 자리에서 다 죽었다. 만 마리가 넘던 양과 낙타와 소와 당나귀들도 다 죽었다. 그 많던 종들도 다 죽었다. 욥 자신도 몸에 심한 병이 들어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단 한곳도 없었다. 깨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어대는 신세가 되었다. 부인조차도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며 욥의 당한 형편을 저주하였다. 욥은 말로 더 이상 설명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처참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한 때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재산가요 거대한 축산업자요 동방에서 존경받고 훌륭한 자라고 인정받던 욥이 하루아침에 인생 중에 가장 불행하고 가장 곤고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본문은 욥이 당한 재난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온 세 친구들 중에서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위로한답시고 전해준 말들 중의 일부이다. 성경을 보면 어느 날 가느다랗고 조용한 목소리로 엘리바스의 귀에 들리는 영의 음성이 있었다. 15절과 16절에서 말씀하는 ‘영’이란 성령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엘리바스가 전한 위로의 말은 성령의 음성으로 듣고 전한 말씀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엘리바스가 깊이 잠이 들려고 하는 어느 날 밤에 임한 이 같은 환상의 경험은 생각이 번거롭고 두렵고 떨리고 모든 뼈마디가 흔들릴 정도의 무서운 경험이었다.  온 몸의 털이 주뼛하게 설 정도의 신비한 영적 체험이었다. 그의 환상 중에 또렷하고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온 한 형상의 조용한 음성 내용은 너무나도 분명하였고 엘리바스는 그 내용을 욥에게 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훨씬 의(義)로우시다.
욥은 친구 엘리바스를 통해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욥4:17)는 질문을 들은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인생이 있겠느냐는 비교급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인생이 있겠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이 어찌 영원하고 그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는가. 이 말 자체는 옳다. 그러나 지금 극심한 슬픔과 참담한 비극을 겪고 있는 욥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을 말이다. 욥은 지금 엄청난 정신적인 충격 앞에 거의 자기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가까운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참고 소화하고 견뎌 낼만한 극한의 재난 앞에 던져진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엄청난 재난 앞에 자신이 태어난 것조차를 저주하며 정신적 방황을 겪고 있는 욥에서 친구랍시고 엘리바스가 해 주는 말은 전혀 도움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적절한 대화 내용일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같은 전달 내용들이 엘리바스의 생각이 아니라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이 조용하게 들려준 음성이라는 데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께는 인간의 그 어떤 도움도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그 분 스스로 하나님이실 뿐이시다. 그렇다. 하나님은 본래 의로우신 분이시고 영원히 의로우신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의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 완전하고 영원하고 부족함이 없으신 의의 원천이신 주님이시다.

지금 욥의  생각 속에 꽉 찬 질문은 “왜 어찌하여 인간에게 이처럼 참담한 비극이 찾아 왔느냐”는 것이다. 욥 자신도 일찍부터 이미 잘 알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의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욥은 지금 그러한 문제로 인해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이런 재난이 하필 나에게 찾아 왔느냐는 원초적인 질문을 고통 가운데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찬양한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 다면 어떤 역경(고난)도 이길 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 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그 어느 누구가 욥이 겪는 재난의 현장에 찾아가서 감히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 말이다.

왜 하나님의 성령은 욥이 이처럼 처절한 재난 앞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며 탄식하고 이 세상에 자신이 태어난 것조차를 저주스러워하고 있을 때에 친구 엘리바스를 보내서 하나님의 의의 문제를 거론하게 하시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그 어느 누구나 다 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부정할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맞다. 그러나 지금 욥이 겪는 이 비통한 재난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의의 문제를 갖고 설왕설래 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친구 엘리바스는 이런 문제를 갖고 욥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물론 우리는 피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다. 이것이 현실이요 이것도 역사의 한 장면이니까 말이다.  의(義)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인가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완전한 의의 근원이신 전능자이시다. ‘일대일제자양육성경공부’의 암송 성구 중에 역대상 29장 11절의 말씀이 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의란 광대하시고 그의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은 모두 다 주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천지 만물은 모두 다 주의 것이다. 모든 것의 주권이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다 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욥이 재난을 당하기 이전으로 하면 일곱 아들들과 세 딸들을 욥의 가정에 자녀들로 주시고 만 마리가 넘는 양과 소와 낙타와 당나귀가 산허리를 뒤 덥게 하신 분이 축복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욥이 우상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외하며 온전하고 정직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 올수 있도록 악에서 멀리 떠난 인생으로 붙들어 주시고 은혜를 알게 해 주시고 존귀하게 붙들어 주셨던 분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신가 말이다. 욥에게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는 평판이 따라 다니도록 존귀하게 드높여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재난을 당하시 이전에 욥이 누려온 삶의 축복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축복 아닌 것이 없고 그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이 극심한 재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문제를 거론하시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이시니 말이다. 하나님은 아침에도 의로우신 분이시고 저녁에도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기쁘고 즐거울 때도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내가 슬프고 괴롭고 마음 아파하고 답답해하고 비참한 고통 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때에도 홀로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 안에서 의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된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의이다. 로마서 3장 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다. 의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사는 죄인된 인간들에게 깨달아 알고 믿도록 선물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 예로 든 인물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이다. 아브라함이 어느 날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저의 의로 여기시는 순간이 있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임하는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인 것이다. 로마서 4장 19절에서 25절까지를 같이 읽어 보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義)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義)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보다 더 완벽한 설명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잘 묵상하여 보라. 왜 재난 앞에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탄생조차 저주하는 욥 앞에 하나님은 친구 엘리바스를 보내서 ‘하나님의 의’의 문제를 거론하게 하시는 지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훨씬 성결(聖潔)하시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하여야 할 점이 있다. 인간의 어떤 과분한 축복 가운데 살아가든지 혹은 어떤 극심한 고통과 재난 앞에 직면할지라도 내가 그 동안 믿고 섬기며 예배하고 따르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전혀 변함이 없으시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하나님의 깨끗하심’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의 믿음의 주님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깨끗하고 완전하고 순결하고 순수한 영이시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창조자이시다. 그러므로 진흙이 어찌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욥이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고 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위대하시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던 믿음의 사람 욥 또한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던가. 욥기 1장 8절을 보라. 하나님도 사탄 앞에서 욥의 탁월함을 인정하시는 발언을 대단하게 하신 적이 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이 얼마나 대단한 칭찬인가. 이는 마치도 예수님께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 왔던 백부장이 받은 칭찬과도 같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7절의 이 말씀을 예전의 성경 번역인 개역한글에서는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고 말씀했다. 그렇다. 성결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성결하지 않다. 사람은 깨끗하지 않다. 사용하는 책상 위에 유리가 깔려 있다. 창문을 여닫으며 혼자 사용하는 책상인데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책상 유리 위에 얼마나 먼지가 많이 앉는지 모른다. 닦아도 금방 먼지가 쌓이고 또 쌓인다.

인생이 바로 그러하다. 심지어는 히브리서 11장에 소개 된 믿음의 선진들조차도 하나님보다 더 의롭거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더 성결하지는 못하다. 이런 면에서는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 여호수아, 갈렙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그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성결’이란 죄의 문제이다. 이것은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의의 문제와 성결의 문제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인 것이다. 욥 자신도 그런 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욥기 9장 2절에 보면 욥의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의 말을 듣던 욥이 대답한 말 중에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고 말했다.

그렇다. 인생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도 못하고 하나님보다 더 성결할 수 없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편51:7)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항상 자신 앞에 그림자처럼 앞서 가고 있는 죄의 실체를 갖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라고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 임금은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에 자신의 죄악됨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훨씬 지혜(知慧)로우시다.
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3:18)고 했다. 하나님 안에서 유한한 이생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사람들은 대개가 자신이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욥4:19)라는 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3,000 가지 잠언을 말하였고 1,005가지의 노래 가사를 썼던 솔로몬(왕상 4:32)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지 못했다. 솔로몬은 풀과 나무와 꽃과 심지어는 담장에 나는 우슬초와 들의 모든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는 것들과 공중의 새와 물속에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지혜롭지 못했다. 그래서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이방 여인의 품에 누웠고 이방 여인들의 믿고 섬기던 우상을 예루살렘 안에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어찌 솔로몬을 지혜롭다 하겠는가.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다.(왕상 11:3) 솔로몬의 나중은 아버지 다윗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다. 그는 말년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들을 사랑하였다. 하나님의 책망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섬겼다.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랐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왕상11:6)고 했다. 솔로몬은 학교생활로 하면 수석으로 입학하였다가 성적이 꼴찌요 품행이 악하고 나빠서 되 돌이키지 못하고 퇴학당하고 만 인생이다.

열왕기 상 4장 29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지혜를 선물로 받았던 인생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심히 많은 지혜와 총명을 주셨다. 또 넓은 마음도 주셨다. 당시 솔로몬의 지혜는 주변 국가의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모은 것들보다 더 지혜로웠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 아는 지혜가 없었다. 그래서 교만하고 어리석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결국 나라는 두 동강이 났고 솔로몬의 나중도 불행해 지고 말았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말년에 나타나셔서 준엄하게 그를 책망하셨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모압의 정복자란 뜻을 가진 전쟁의 신인 그모스(Chemosh) 신을 섬기는 산당을 짓고 암몬 자손을 위하여 어린아이들을 불에 태워 제사하는 몰록(Moloch) 신을 위하여 산당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앞장서서 그 우상의 산당에 가서 분향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솔로몬은 영적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고 말았다. 어느 날 나타나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게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왕상11:11)

욥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온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생활을 잘하던 중에 이런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 그래서 욥은 더 괴롭고 힘들어 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경거망동하며 막 살아온 인생이었다면 당하는 재난 앞에 감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동방의 훌륭한 신앙의 거장이었다. 그러나 열왕기 상에서 예를 드는 솔로몬의 나중은 달랐다. 60살에 죽은 솔로몬의 나중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며 출발하던 20살 때의 청년 임금의 때와 너무나도 달랐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욥4:8)로 막 사는 인생의 내리막길로 치달아 화와 심판을 자초한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인생의 표상이 되고 말았다. 

참다운 지혜는 나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와 뜻을 헤아려 알고 평생토록 겸손하게 믿고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가였던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책에서 ‘새사람’이란 주제의 묵상을 하면서 “새사람이 되는 일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변형(transformation)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약속이며 영원한 축복의 시작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해 주신 말씀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욥은 열 자식을 다 잃고 모든 짐승과 종들까지 다 잃고 자신의 건강마다 죽음의 위기 앞에 서기까지 다 잃은 후에 하나님을 다시 체험한 특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욥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5)

욥기의 묵상과 함께  그 어떠한 고난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을 다시금 새롭게 체험하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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