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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13;1-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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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8-26 00:14 조회 26,470 댓글 0
 
회개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살던 인간이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헬라어로 ‘메타노에오’인데 이는 ‘생각을 고친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생각을 고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받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선언을 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이다. 성령 받은 베드로의 설교 강조도 ‘회개’였다.(행2:36-37).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다메섹에 예수 믿는 이들 잡아 죽으려고 가던 사울이 길에서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회개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전도자이 이방 선교사가 되었다.(행9:1-9) 이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예수님께로 돌아 오는 것이 회개다. 회개는 성경에 100번 이상 반복되는 핵심적인 강조이다. 예수님도 40일 금식하신 후에 하신 첫 설교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다. 제자들을 내 보내 복음 전하게 하실 때에도 “회개하라”(막6:12)고 전파하였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 설교를 할 때의 내용에도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라고 선포하였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삼년 반 동안 에베소 선교 마치고 작별할 때에 한 말도 이것이다. “유대인과 헬리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1)고 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한 디모데 후서 2장 25절의 내용에 보면 회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셔서 진리를 할게 하시는 방편이며 특권이며 축복의 수단인 것을 알 수 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고 했다. 이처럼 주님은 때때로 책망하거나 채찍질하여서라도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르므로 회개는 단순히 죄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버리고 멀리하고 영원히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회개하면 하늘에서 잔치가 열리고(눅15:7,10) 사죄의 은총이 주어지고(사55:7, 행3:19) 성령을 받게 된다.(행2:38)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으로 죄 사함을 받고 회개하여 영생을 선물로 받고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믿음을 말한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바탕이다. 이는 노아 때에 방주에 들어가는 사건이요. 아브라함 때에 할례를 행하는 거룩한 사건이다. 모세 때로 하면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잡아서 그 피를 번제단에 바르며 불로 태워 번제를 드리는 신앙을 말한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유월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유월이란 뛰어 넘었다는 뜻이다. 'PASS OVER' 즉 죄와 악과 결박의 노예 사슬을 끊고 해방의 감격을 경험하는 출애굽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를 급하게 구워 먹고 그 날 밤으로 애굽의 종살이 하던 현장을 벗어나서 홍해를 건넜다. 아니, 건넌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건너게 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유월절의 축복이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 보면 그 출애굽의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사도 바울은 세례(洗禮)라고 했다. 200만의 히브리 민족이 민족적 세례를 경험한 것이다. 그 뒤를 쫓아 달려들던 애굽의 군대는 그 홍해 물이 다시 합쳐지므로 다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구원과 심판은 언제나 동시적인 사건인 것이다. 한 쪽은 다 살고, 다른 한 쪽은 다 죽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이것이 심판인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 했을 때에 임금부터 어린 아기까지 금식하고 모두 다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 이런 것이 회개의 사건이다.

광야에 나가면 못 살 줄 알았는데 반석에서 물아 터져 나왔다. 회개하면 이런 은혜가 임한다. 애굽의 고기 가마와 마늘과 파와 향료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고 반석의 물을 마시며 살면서 가나안의 축복의 땅을 바라보는 것이 회개한 성도의 믿음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이런 것을 깨달아 알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안 믿어지면 구원이 없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해야 성도가 된다. 회개를 경험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고민하는 무리들에게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라고 선포했다. 그 때에 그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고 믿게 된 무리들이 3,000명이 동시에 세례를 받았다.

이 세상에 의와 불의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가. 아니다. 선과 악이 뒤 섞여 공존하는가. 그렇다. 참과 거짓이 서로 따로 있는가. 아니다 진리와 거짓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들판의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에덴동산에도 뱀이 있었다. 뱀은 뱀이 아니라 악과 거짓과 불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에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으면 뱀을 잡아 먹지 왜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였겠느냐”고 말한다.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주인이 다시 돌아 올 날을 생각하여 졸거나 잠들어 버리지 말고 깨어 주인의 올 순간을 기다라고 준비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이 오늘 어떤 두 사람의 시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는 질문 앞에 대답하신 교훈의 말씀이 본문의 요지이다. 사건과 사고는 언제 어디나 있다. 예수님 때에도 빌로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성전 제사를 핍박해서 몇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 갈릴리 사람들의 피가 성전의 제물이 섞인 참담한 사건이 있었단 말이다. 또한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의 선량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도 있었다. 요즘도 처처에 사건과 사고가 계속되지 않는가. 산업 현장 사고, 교통사고, 삼척 가스 폭발 사고, 물에 떠내려가고 익사하는 사고, 국립 현대 미술과 화재로 인한 사망 사고와 상해 사고 등 날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얼마나 처처에 사고와 사건이 많은가. 그런 세상 사건을 가지고 인간의 죄와 심판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죄와 벌의 상관관계에 대한 오해.
유대인들은 벌과 재난은 죄의 결과라는 신념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어떤 어려움들이나 사건들과 재난들이 이유 없는 재난이란 전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벌은 죄의 결과라는 생각에 붙들려 있었다. 물론 성경에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게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질병이나 환난이 생길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잘못을 하였거나 무슨 죄를 범해서 이런 벌을 받거나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면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말했다. 욥기에 보면 동방의 우스 땅에 살던 훌륭하고 의로운 부자요 의롭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잘 믿고 모든 악에서 떠나 생활하던 욥이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 7남 3녀 즉 10남매가 모두 다 한 잔치자리에서 죽고 그 많던 짐승과 재산 다 날아갔다.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 때에 비보를 듣고 욥을 찾아 온 친구 엘리바스가 한 말 중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4:7) 설령 친구 엘리바스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지라도 이건 위로하기 위하여 조문 간 자리에서 했어야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그런 말을 쏟아 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나 그런 생각이 보편적으로 있었다. 죄와 벌의 인과응보설을 믿으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3절과 5절의 ‘이와 같이’라는 말씀으로 심판의 보편성에 대하여 언급해 주셨다. 그 어느 누구라도 죄를 회개 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죄의 크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죄의 많고 적음도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죄에 대한 관심은 죄는 반드시 회개하여야만 한다는 강조이신 것이다. 예루살렘은 A. D 70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이 쳐들어감으로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이라도 망하고 그 누구라고 망하고 언제라도 망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신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세상 끝 날에는 예루살렘이냐 사마리아냐의 구분이 없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날이 다가 온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리라.”(계20:12, 15)고 하였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각 장애인을 만났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그 때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고 대답해 주셨다. 그리고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고 말씀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서 그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앞 보는 사람은 눈꺼풀에 뭍은 진흙을 실로암 못을 찾아가서 씻었을 때에 깨끗이 나았다. 그 때에 눈이 밝아져서 광명한 세상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께 찾아 와서 보여 드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금방 소문이 확 퍼졌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누가 이 앞 못 보는 거지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 자기를 고쳐 주었노라고 간증하기 시작했다. 그가 고침 받은 날은 안식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같은 기적 사건의 소식을 듣고 나서 끝까지 예수님을 괴롭히고 비난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도대체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을 못 믿는 불신앙이 죄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내가 심판을 받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내 죄는 작고 가벼워서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빌라도가 죽여서 성전 안에서 제사하다가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나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18명보다 내가 더 의롭고 잘 나고 깨끗한 자이기 때문에 잘 살아가고 있고 더 오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란 말이다. 그러면 죄란 무엇이고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悔改)를 촉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온 목적은 회개의 촉구였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물세례를 행하던 세례 요한과도 상관없고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강조하시던 예수님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빌라도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제사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들의 피가 성전의 제물에 섞인 사건에 대하여는 성경의 다른 곳에도 더 이상 자세하게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언급으로 보아서 이 같은 빌라도의 만행 사건은 이미 예루살렘 성민들과 유대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학살 만행 사건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의 역사학자였던 요세프스의 역사 연구 자료에 의하면 빌라도의 학정에 의하여 어떤 해의 유월절에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3,000명의 시체가 널려 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또 어떤 해에는 2만 명도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 당시 로마에 의해서 압제받던 유대 사회와 예루살렘의 참혹한 현실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해 온 것이다. 빌라도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만행 사건에 대하여 입장을 밝혀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빌라도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무슨 자기들의 숨겨진 죄가 많아서 그런 죽음을 당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언급하셨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18명의 희생자들에 대하여도 인용하셨다. 당시에 실로암 망대란 기혼에서 예루살렘 시내까지 공급되는 물의 수로에 있는 저수지를 지키기 위해서 세운 망대를 말한다. 빌리도가 성전 자금을 갖다가 세워 놓았던 망대이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안전사고로 18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드시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5)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회개를 촉구하셨다.

최근 호주 정부가 앞장서서 금연 홍보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담배 갑 경고 사진 게시에 대한 뉴스가 전해졌다. 담배 갑을 품위 있고 고상하게 만드는 대신에 담배로 인해서 치아가 흉측하게 썩어 들어가는 사진이나 폐가 썩어 들어가는 암 덩어리 사진 등의 흉측한 사진 자료를 담배 갑 겉면에 싣기로 했다는 강력한 홍보 전략이다. 막연히 괜찮겠지 라고 여기며 되는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물론 담배 사업을 하는 사업가들은 반가워 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 경고 사진의 내용은 사실이고 옳다. 사람들은 담배가 얼마나 몸에 해롭고 건강에 위협적인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여 흡연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과거에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죽어가면서 금연 운동 벌이던 때를 기억해 보라.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말은 달라진 다는 말이다. 회개란 끊고, 버리고, 해결하고,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말이다. 로마서 8장 말씀에 의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하여 행방된 상태를 말한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한 사람과 회개의 경험이 없이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차이가 명확하다. 로마서 8장 5절과 6절의 말씀대로 진단하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고 하였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신비가 있다. 믿음의 거룩함이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고 했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육신의 삶에서 영의 삶으로 돌이켜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달라지고 새로워진 척 하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예수님의 강조가 무엇인가. 망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죽는다 말이다. 우리말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우리의 안전 불감증과 대강 대강 혹은 설렁 설렁 되는대로 적당히 살아가는 생활 태도가 인생을 병들게 하고 망하게 한다.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이란 책 97면에 보면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잘 설명한 내용을 대하게 된다. “지옥은 ‘아차!’하는 간발의 실수로 가는 곳이 아니다. 인간은 털끝 하나 차이로 천국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고 피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로 놓치는 것이다. ‘바깥 어두운 곳’의 심판의 처소는 결과적으로 원하는 자가 가는 곳이다. 삶의 방향 전체가 천천히 그러나 확고부동하게 하나님과 어긋나는 쪽으로 굳어진 자가 가는 곳이 지옥이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방향을 돌이켜서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며 천국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처럼 내 속에 있던 사탄 마귀가 청소되어 쫓겨났는데 나중에 가만히 와서 보니 집이 비어 있는지라 다른 일곱 친구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거하게 되면 그 나중 형편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셨다. 그렇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영적 사건은 그냥 한번 기분 내키는 대로 “잘 못했습니다. 잘 못 살아 왔습니다. 새로워지고 싶습니다. 후회가 많습니다. 달라지고 싶습니다.”하는 감정적인 후회와 뉘우침 정도에서 맴돌다 마는 정도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 정도의 심경의 변화를 갖고 회개라고 할 수는 없다. 회개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완전히 다 달라지는 것이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회개란 옛사람은 완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의 상태로 완전히 변하는 것이다.

436장 찬송 1절 가사 그대로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이와 같은 상태가 오늘도 내일도 매 순간마다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영원히 계속되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열매가 있는 성도의 생활.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의 산상수훈에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하였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다. 포도나무에는 포도가 풍성하게 열려야 한다. 무화과나무도 마찬가지다. 열매로 그 나무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가시나무나 엉겅퀴 밭에 열심히 거름을 주면 가시나무가 점점 무성해지고 엉겅퀴가 점점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수님께 접붙임이 되어야만 한다. 먼저 내 마음 밭에 우거진 가시나무를 뿌리 채 뽑아 버리고 엉겅퀴를 거두어 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을 받으면 내 안에서 포도열매가 맺고 무화과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되는 것이다.

6절 이하의 비유의 말씀에 나오는 주인은 하나님이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다.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회개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하여야 한다. 회개하는 행위 자체가 열매 풍성한 삶의 시작이다. 그러면 무엇을 회개하여야 할까.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지금 무슨 회개할 기도 제목을 회개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며 하나님이 눈 감아 주시길 바라는 대단히 미온적이고 우유부단한 모습이 내 안에 뱀처럼 도사리고 앉아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에 보면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타국에서 돌아 왔다. 마을 어귀에 도착한 둘째 아들의 남루한 모습을 먼저 알아 본 것은 아버지였다. 그 많던 유산을 허랑방탕한 생활로 모두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신을 아버지의 집에 종으로라도 받아들여진 다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극진한 사랑으로 둘째 아들을 환영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서 제일 좋은 새 옷을 준비하고 손에 가락지도 끼워 주고 새 신발도 신겨 주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해서 잔치를 벌였다. 먹고 즐기자고 했다. 아들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은 아버지였다. 이 때 둘째 아들이 자신을 스스로 여전히 아버지 집의 종의 신분으로 머물기를 원하고 있다면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온전한 회개가 아니다. 타국에서 돼지우리에 누워서 주엄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가졌던 생각에 붙들려 있다면 몸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 왔으나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못된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이렇게 말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얻어먹으며 종으로라도 살아 갈 수 있게 된다면 남의 나라에서 빈 털털이가 되어 돼지우리에 누워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낳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회복을 꿈꾸는 것이라면 이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다시 아들이 되어야 한다.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그래야 잃어버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란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대를 깨달아 알고 그 뜻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그럴 때에 열매 있는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이긴 한데 한해, 두해, 세 해를 지켜  보아도 여전히 열매가 전혀 없다면 주인이 그 무화과나무를 도끼로 찍어 보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3장 8절과 9절에서 말씀하시는 포도원 지기이신 예수님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내 가슴에 절절히 들려와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게 된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이 열매를 맺히는 행위가 곧 회개인 것이다.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나의 게으름, 충성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이중인격적인 모습, 주님을 만홀히 여기는 간계한 마음, 주저주저 하며 망설이며 주님께 회개 하려 하긴 하지만 내 안에 내가 너무나 커서 주님을 모실 마음의 빈 방을 준비하지 못하고 주일 예배 후에 다시 세상 탐심에 꽉 찬 자신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안고 집으로, 직장으로, 일터로, 학교로 되돌아가는 나의 습관적인 일상을 과감하게 박차고 엎드려 참된 회개를 경험해야만 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풍성한 열매를 맺는 회개에 합당한 성도가 되어야만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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