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동물이나 짐승들도 습관의 지배를 받으며 살지만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습관은 제 이의 천성이다.”라는 말도 있다. 예수님도 어려서부터 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손길에 의해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좋은 습관, 선한 습관, 거룩한 습관 가운데서 성장기를 보내셨다. 그리고 삼십 세가 되어서야 세례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어렸을 적에 나사렛 동네에서 신앙을 키운 곳은 회당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면 엄마 아빠와 함께 깨끗한 옷을 차려 입고 동생들과 함께 마을에 있는 회당에를 갔다. 오늘 날 우리들로 하면 주일날에 교회에 간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내는 습관, 마을의 회당에 출입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성경을 읽는 습관도 항상 일정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예수님은 거룩한 습관 가운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잘 살아가시고 그 사명을 완성하신 인류의 구주이시다.
역사 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가 출현 하신 분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후에 30년간을 거룩한 습관 가운데 성장기를 보내셨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한 아기가 태어나서 약육강식의 경쟁 사회 속에 건전한 인격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 개인만이 갖는 습관의 남다른 장점이 있어야만 한다. 요즘 서점에 나가 보면 ‘습관’을 주제로 한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우리가 흔하게 아는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비롯해서 별의별 책들이 다 많다.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하라,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라,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라, 먼저 경청한 후에 남을 이해시켜라, 시너지 효과를 활용하라, 심신을 단련하라”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해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여덟 번째 습관>이란 책도 있다. 그 여덟 번째 습관이란 것은, “내면의 소리를 찾아 내고, 남들도 찾도록 고무하라”이다.
<꿈꾸는 스무 살을 위한 101가지 작은 습관>이란 책도 있다. <백만불짜리 습관>이란 책도 있다. 왜 이렇게 습관을 강조하는 걸까. 거기에 큰 비밀이 있다. 사람은 습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습관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고 요즘의 습관이 장래의 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내일을 바꾸는 삼분습관>이란 책도 있다. <당신의 소중한 꿈을 이루는 보물지도>라는 책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꿈의 멘토인 일본의 모치즈키 도시타카가 쓴 책이다. 내일을 바꾸고 인생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3분 습관의 힘’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습관을 바꾸기 위해 반드시 새벽 5시에 기상할 필요도 없고 고행처럼 여길 필요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몸과 마음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좋은 때를 잘 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꾸준히’보다 ‘간편하고 쉽게’에 주안점을 둔 일곱 가지 습관의 힘이 성공적이고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가는 첫 걸음이라고 강조한다. 평범하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남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강조이다. “몸을 따뜻하게 하여라. 편안한 호흡을 해라. 하루 시간의 1%를 꿈을 키우는데 투자하라.” 즉 하루 15분 정도를 집중적으로 자신의 꿈을 세우고 그 꿈을 확인하고 성취해 나가는 데 투자하라는 강조이다. 기독교인인 우리들로 하면 최소한 하루에 15분 정도의 기도 시간만이라도 확보해 나가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도전이다. SAMTU의 대표이사인 전옥표 대표는 <이기는 습관>(Winning Habit)이란 책에서 이기는 습관 22가지를 제시한다. 그 중의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22번째 습관은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결국은 큰일을 이룬다.”는 인내와 끈기와 도전의 남다른 가치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본문을 22절까지 보았지만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 마을인 나사렛의 회당에서 배척을 받으신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마음이 답답해지신 예수님은 두 가지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들었다. 그 첫째가 엘리야 선지자 때의 일화이다.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적이 있었다. 엘리야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유독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는 여인들이 많았다. 전쟁과 질병을 비롯한 재앙의 결과였으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과부들 중에서 시돈 땅의 사렙다에 사는 한 과부에게 보내셔서 기적을 베푸셨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 선지자 때에는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 중에 나병 환자가 그렇게 많았다. 그러나 특별히 이웃 나라인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만이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치유 경험을 갖도록 하셨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예사로운 기적들이 아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면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에게 임한 것이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구약 시대 기적의 인용이 나사렛 마을 주민들에게 도전이 된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크게 화를 내는 것으로 반응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나사렛의 회당에서 예수님의 구약 시대 일화를 설명 들은 자들이 다 크게 화를 냈다. 결국은 이 날 안식일에 있었던 그 사건으로 예수님을 나사렛 동네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 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다. 죽여 버리려고 합작을 벌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날 그 현장을 피해서 나사렛 마을을 떠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중심, 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이 몸에 배어 있던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본문에 보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금식 기도 하신 후에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고 특별히 고향 마을의 회당에서 선포하신 장면이다.
성경(聖經) 중심의 예수.
예수님은 철저히 성경 중심의 삶을 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즘 서로 연말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이 곳 저곳을 대통령 출마 선포식 장소로 선택하는 각 당의 대통령 예비 후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사십일 간 금식하신 후에 고향 마을의 회당에서 안식일 날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신 것을 공포하신 장면이 본문이다. 물론 시간적으로 이러 저러한 기사와 이적들이 있었다. 누가복음은 4장 14절과 15절 말씀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이 갈릴리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방으로 소문이 퍼져 나간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마을 저 마을의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장소로 사용하고 계셨다. 이미 예수님의 받으시는 칭송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산 낭떠러지로 밀쳐서 죽여 버리려고 했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명을 갖고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죽으실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펼치셔서 자신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친히 읽으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는 오늘 날 우리들의 예배처럼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쉐마의 고백(신6:4-9)을 했다.
기도를 드렸다. 테필라, 쉐모나 에스레라고 한다.
모세 오경을 일곱 사람 이상이 나서서 차례대로 윤독하여 읽었다. 파라샤라고 한다.
선지서를 낭독하였다. 하프타라라고 한다.
제사장이 설교하였다.
제사장의 축복기도로 마쳤다. 제사장이 없으면 폐회 기도를 하였다.
이와 같은 예배 형식 중에 예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성경을 읽으신 것이다. 예배의 순서를 따라 읽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본문의 이사야서 예언을 성경 말씀 그대로 이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福音)이 전파되는 주인공으로 오셨다.
포로 된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自由)를 주시려고 오셨다.
앞 못 보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하시려는 회복(回復)의 구주로 오셨다.
주의 은혜(恩惠)의 해를 전파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가난한 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열려진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성령을 받으셨고 기름 부음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또한 예수님은 인류를 죄의 사슬과 결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해방해 주시는 구주로 오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표현대로 하면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분”으로 오셨다. 토굴 속에 갇혀있으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이처럼 못 보는 자를 보게 하고 못 듣는 자를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자를 말 하게 하는 회복과 치유의 주님으로 오신 것이다.
2010년 10월에 칠레의 탄광 속 700미터 땅 속에 매몰되어 갇혀 있던 광부 33명을 고스란히 다 구출해내는 세계적인 뉴스가 있었다. 칠레의 코피아포 지역의 호세 산의 탄광 갱도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해 8월 2일에 사건이 생기고, 10월 12일에 69일 만에 22시간 40분 동안 구출 캡슐에 한 명씩을 담아서 모두 다 구출해 냈다. 700미터 역 갱도를 뚫고 내려 보낸 캡슐로 먹을 비상식량과 구급약품을 들여보내면서 한 사람이 끌어 올려낸 세계적인 기적을 이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갇힌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원하신다. 가난에서 풀려나고, 질병에서 풀려나고, 슬픔에서 풀려나고, 죄와 악에서 풀려나고, 우울하고 초조하고 답답한 일들로부터 풀려나기를 원하신다. 실패로부터 풀려나고 좌절과 절망과 어두움으로부터 풀려나서 성공과 승리와 희망과 소망과 빛의 광명한 세계를 향하여 풀려나고 자유해지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이사야 61장 1절에서 3절까지에 보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은혜의 해가 선포되었다. ‘쉐나트 하요벨’이란 그 히브리말의 원 뜻을 직역하면 50년의 희년을 알리는 ‘숫양의 뿔의 해’라는 뜻이다. 희년이 되면 가난으로 빼앗겼던 땅을 다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종들이 풀려나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이 같은 희년의 축복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이사야의 말씀을 이룩하신 메시아이시다. 레위기 25장 8절에서 12절에 보면 이와 같은 희년의 숫양 뿔 나팔을 전국적으로 동시에 불어서 선포하라고 하였다.
성령(聖靈) 중심의 예수.
예수님의 평생은 성령 중심의 생애였다.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순간부터 탄생과 성장과 공생애의 모든 사역들이 모두 다 그러하였다. 본문 말씀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의 시작이다. 누가복음 4장에만 보아도 1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라고 했다. 14절에도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라고 했다. 누가복음 3장 22절에도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라고 했다. 이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미리 성령이 임하셔서 그의 수태 사실이 증거되었다. 누가복음 1장 35절에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라고 했다.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예수님을 수태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 후에 부활 하신 첫 말씀도 성령에 관한 말씀이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사도행전 1장 2절에도 보면 승천하실 때에도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레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셨다. 8절에서는 성령이 임해야 권능도 받게 되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성령을 약속해 주셨다.
오늘날 세계교회와 한국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은 사도행전 2장에 임한 성령의 임재가 그 시작이다. 불은 번져 가게 되어 있다. 물도 번져 가게 되어있다. 물이 계속 흘러서 바다로 가는 것처럼 작은 불이 산도 태우고 마을과 도시를 태우는 것처럼 성령은 그 무엇으로도 제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恩惠) 중심의 예수.
예수님은 은혜 그 자체이시다. 희년(稀年)이 되면 땅도 자유로워지고 종도 자유해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셨고 가시는 곳마다 은혜의 역사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이 들어가는 땅마다 마을마다 고을마다 도시마다 집집마다 인생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은혜가 넘쳐 나기 시작하였다.
나 같은 시골 섬 마을 소년이 커서 목사가 된 것도 예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1906년에 시골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개인적으로도 뒤 돌아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주의 은혜요 새롭게 힘껏 주님의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지치지 않는 힘을 주시는 것이 주님의 은혜이다.
제 곁에서 저와 더불어 이 먼 곳까지 도시의 이 끝과 저 끝에서 새벽마다 총알같이 달려와서 새벽마다 기도의 자리에 함께 엎드리는 것이 주의 은혜가 아닌가.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눅1:28, 30) 은혜가 중요하다. 누구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은혜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생각해보고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100년 만에 가뭄이라던 극심했던 봄철과 초여름의 가뭄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가뭄을 이기는 해갈의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노력도 해야 하고, 열심히도 살아야 하고, 계획도 해야 하고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안 된다. 심고 물을 주는 노력이야 서로 협력해서 할 수 있지만 결실을 보고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다.
내 건강, 내 마음가짐, 내 희로애락애오욕의 모든 감정 표현과 느낌 하나까지라고 그렇다. 나의 자율 신경과 반 자율 신경의 모든 것들을 관장해 주시고 주관해 주시고 다스려 주시고 유지시켜 주시고 이만한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해 주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잘해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재태크를 잘해서, 내가 성실해서, 내가, 내가, 내가, 매사를 내가 잘 해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면 큰 교만의 시작이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 빠지면 아간처럼 함께 가나안에 들어 갔으나 여리고 성 함락하고 아이성 전투하다 말고 문제 들어나서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불태워지고 마는 아간의 운명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사사 삼손의 교훈, 임금 사울이나 솔로몬의 나중이 주는 교훈을 보라,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지만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면 가롯 사람 유다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를 유지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305장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에 보면 구절마다 은혜를 찬송하고 있다. 노예 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톤(John Newton)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 썼다는 이 찬송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그렇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모두 다 주님의 은혜요 살아갈 앞날도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301장 찬송 “지금까지 지내온 것”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이런 은혜 생활이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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