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항상(恒常) 기도(祈禱)하라(엡6:18-20) 7. 8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7-09 23:10 조회 24,148 댓글 0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미국 건국 초기에 활동했던  정치가요 외교관이요 과학자요 저술가요 신문사의 경영자요 교육 문화 활동가요 자연과학분야에서 전기유기체설을 제창하는 등의 공헌이 탁월했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정규 학교 공부를 거의 한 바가 없으나 독학으로 실력을 쌓으며 지혜와 명철이 뛰어난 역사적이고 독보적인 인물로 평생을 살아갔다.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경영하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공장의 허드렛일을 도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하나님을 잘 믿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나중에는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뉴잉글랜드 커런트’(New England Courant)지(紙)의 발행을 도왔다. 형과 의견이 맞지 않아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가서 살았다. 그 다음해인 1724년 런던으로 건너갔다가 2년 후 귀국하였다. 23살 때에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Pennsylvania Gazett) 잡지의 경영자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편집까지도 담당하고 유명한 신문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1750년에는 10년 전에 시작했으나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던 ‘필라델피아 아카데미’를 인수하여 오늘 날의 세계최고의 경영학부인 와튼 스쿨이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졸업생이며 교수였던 노벨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사람은 로버트 호프스태터(1961, 물리학), 제럴드 에덜먼(1972, 생리의학), 아흐메드 즈웨일(1999, 화학) 등이 있다. 또한 미국 9대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비롯하여 나이지리아 대통령인 은남디 아지키웨와 같은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유명 투자가 워런 버핏,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시인 에즈라 파운드 등의 저명인사들을 배출하였다. 도서관도 설립했고 미국철학협회를 창립하는 등 폭넓은 교육문화 활동에도 전념하였다. 그는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가져 지진의 원인을 연구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자기 성을 붙인 고성능의 ‘프랭클린난로’를 발명하고 ‘피뢰침’을 발명하기도 하였다. 46살 때인 1752년 연(鳶)을 이용한 실험을 통하여 ‘번개와 전기의 방전은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고 전기유기체설(電氣有機體說,Electric fluid theory)을 제창하였다.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되었고, 코플리상(賞)을 받았다.

그해에 전(全)식민지 체신장관 대리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다.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대표로 참석해서 최초의 식민지연합안을 제안하였다. 펜실베이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로 뽑혔다. 1776년에는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파리조약 때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귀국하여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787년에는 헌법회의에 펜실베이니아대표로서 참석하였다. 이때에 각 주 사이에 특히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이익 대립을 조정하는 헌법제정에 힘을 쏟았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결정을 통일해 내지 못하게 되자 그는 참석자들에게 성경, 시편 127편 1절을 소개하였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리고 다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을 제안하였다.

“여러분 저는 지난 81년 동안 살아오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힘을 결정하기 힘든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 모두가 전심전력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날마다 무슨 일을 행하기 이전에 아침마다 매일 기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와 같은 제안을 받아들인 참석자들은 아침마다 모여서 회의하기 이전에 매일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사안은 지혜롭게 해결되었고 그 당시의 의결안은 오늘날까지도 미국에서 통용되는 법률안 중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평생의 업적과 열매들은 모두가 다 기도의 결실이었다. 드디어 2년이 지난 1789년에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재위 1789-1797)을 초대 대통령으로 세운 미합중국(USA)이 수립된 이듬해인 1890년에 84세를 일기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평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 말씀을 존중하며 늘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언제나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면 평생을 살아간 기도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도우심과 살아 역사하심을 삶으로 간증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功利主義)에 투철한 전형적인 청교도의 신앙을 이어가며 살아갔다. 그의 책,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Poor Richard's Almana)은 상식철학과 뛰어난 기지와 경구가 넘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다. 프랭클린 자신도 “나의 출판업 중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낸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출판된 <자서전>(Autobiography)은 미국 산문문학 중 걸작으로 꼽힐 정도이다. 필라델피아에는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과 그의 이름을 딴 거대한 다리가 있다.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그 다리를 건너면 뉴저지 주로 연결되는 주 경계의 거대한 다리이다. 돈을 내야 건 널 수 있는 역사가 오랜 고색창연한 다리이다. 

본문인 에베소서에 편지한 사도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 보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가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With all prayer and petition pray at all times in the Spirit, and with this in view, be on the alert with all perseverance and petition for all the saints,-NASB-)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 여러 가지 기도 생활의 구체적인 강조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본문을 차례대로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도록 하자.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라.
영어 성경 NASB에 보면 본문에 ‘all’이란 표현이 4번 반복 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그레이스 커뮤니티교회의 담임 목사인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의 <영적성장의 열쇠>(The Keys To Spiritual Growth)라는 책에 보면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내용으로 이와 같은 묵상들을 잘 전해 주고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With all prayer and petition)이것은 ‘기도의 다양한 유형’을 말한다.

“항상 성령 안에서”(pray at all times in the Spirit)라는 말도 ‘모든 것을 언제나 성령 안에서’란 뜻으로 ‘기도의 횟수’를 강조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러하고 사도 바울이 그러하였다. 하루에 몇 번 기도하였느냐가 매우 중요한 기도 생활의 일과였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제 구시 즉 오늘 날의 오후 세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려고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 중에 베드로가 앞장서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일어나 걷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힘이요 성령의 능력이다. 베드로가 이미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사도였지만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열심히 항상 모든 것을 기도로 집중하는 생활을 하던 중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골로새서 4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도 했다.

또한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and with this in view, be on the alert with all perseverance)라는 말씀은 ‘기도의 자세’를 말한다. 끈기 있는 기도의 중요성은 바로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헬스클럽이나 피트니스센터나 수영장이 정원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등록을 받아도 전혀 비좁지 않은 이유는 대개의 사람들이 등록할 때의 마음이 며칠 못가서 시들해 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도 생활도 이것이 문제다. 깨어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고, 힘써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기도의 지속성, 기도의 지구력이 없이는 기도 생활에 승리할 수 없다. 2008년 북경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수들이 당시에 금메달과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든지 못 걸었든지 이번 2012년 런던 올림픽에 다시 또 출전할 수 있는 것은 4년 전과 비교했을 때에 국가대표 선수 선발 기준에 준하는 자기 실력 관리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종목별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 아닌가. 4년 내내 놀다가 출전 할 수 있는 선수란 어떤 종목에 그 어느 누구라도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 이치다.

마지막으로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and petition for all the saints)고 했다. ‘기도의 대상’을 말씀한 것이다.

신자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기도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란 거의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강조인 항상 기도하라는 ‘항상’(恒常)이란 ‘엔 판티 카이로’라는 말의 뜻은 ‘모든 경우에’라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도에는 변명이 필요 없다.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되 깨어 기도하기를 항상 힘써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반복되는 표현은 ‘항상’이다.

과거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 깨나 불조심’이란 불조심 포스터가 있었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다. “기도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항상 기도해야 한단 말씀이다. 항상 기도해라. 성령 안에 기도해라. 깨어 구하되 항상 힘써 기도해라. 기도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지 말고 열심히 계속하여 강력하게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밥이야 한 두 끼 굶고도 살 수 있고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40일씩 금식할 수 있다. 그러나 숨을 쉬는 호흡은 단 몇 분만 못해도 죽도 만다.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다. 호흡이 멈추면 죽은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죽은 신자다. 과거에 많이 기도했느냐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오늘, 지금 기도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은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도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 전파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느냐는 강조이다.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E. M. Bounds, 1835-1913)는 <기도의 불병거>(The Weapon of Prayer)라는 그의 책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무력하고 가난하다.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하더라도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기도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나. 예수님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일과가 끝나면 그를 따르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고침 받기를 원하고, 각종 질병에서 나음 받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곁을 떠나서 홀로 산 속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도의 힘으로 다음 날도 산 아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나갔다.

기도하면 성령이 임한다.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신다. 물론 기도하게 하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이란 단 한 가지도 없다. 성도는 영적으로 잠자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육신의 고단한 잠을 안자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늘 깨어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생활을 계속하여야만 한다.

마태복음 26장 3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이 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제자들과 저녁을 잡수시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신 그 밤에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그 밤에 산 속에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이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 밤에 예수님은 기도하러 가시면서 마음에 고민과 슬픔이 가득하셨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리고 조금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셔서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의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자들의 곁에 와서 보시니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때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리고는 다시 또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셔서 두 번째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의 곁에 오셔서 잠들어 버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후에 다시 앞으로 나아가셔서 세 번째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의 곁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 때에 가롯 유다가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를 앞 장 세우고 함께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고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예수님이 팔려가고, 붙잡혀 가고, 매를 맞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다시 사신 힘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기도는 역사를 바꾸는 힘이다. 이 세상에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는 기도일 뿐이다. 우리가 숨을 쉬지 못하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성도로 살고,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대답이고 기도가 힘이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항상 깨어 기도하고, 항상 힘써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그런 영적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더 마음이 편안하다 이런 사람은 지금 당장 회개하여야 한다.

가령, “나는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않을수록 마음이 점점 더 편안하다. 나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신자로서 양심의 거리낌이 전혀 없고 재물의 사용에 있어서 늘 편안하다. 나는 성도의 교제와 속회를 비롯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롭고 좋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만 한다. “나는 교회 다니지 않고 예배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잘 사는데 무슨 기도가 그렇게 필요하냐”고 반문한다면 이것은 기도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병든 자기 영혼의 심각성을 들어내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 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다. 본문은 기도의 강조이지만 바로 앞 절인 17절에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기차의 두 철길과 같은 것이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우리는 기도의 내용이 나 자신이나 내 가족, 내 자녀를 위한 기도에 국한 되어서는 안 된다. 두루 두루 서로를 위하여, 특히 성도들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중보하며 기도하는 기도(祈禱)의 연합(聯合)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잘 나타나 있는 중요한 기도의 원리이다. 그 앞 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장차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하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신 이후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말씀인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광야에서도 배불리 먹고 예수님 곁에서 모든 생활을 해결 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물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동전을 꺼내 세금을 내는 기적을 보며 지냈다. 거세게 불던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 것도 예수님께서 곁에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운 말씀인가.

그런데 그 이후에 제자들과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더 크고 새로운 일들이 가능 할 것이라고 위로하시고 소망을 주신 것이다. 이것의 기도의 능력이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보 기도의 힘이다. 실로 그런 날이 왔다. 예수님에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받은 무리들은 천한 만국에서 동시에 이와 같은 놀라운 약속의 말씀들이 성취되는 기적들을 목격하고 간증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되 특별히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주님께서 평생토록 행하신 그 많은 사역들을 우리도 하되 계속하여 할 수 있고 더욱 더 점점 창대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기도에 있다. 기도하면 그런 영광스러운 일이 나타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 간에 서로를 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한 심정으로 중보 하는 기도를 계속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형편을 잘 모른다. 그러므로 조금씩 서로의 마음 문을 열 되 활짝 열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기도 제목을 누군가에게 말로 옮기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구하라.”
는 말씀은 세상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을 안 믿는 이웃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되 특별히 성도들 간에 서로를 위하여 기도의 의무감을 갖고 진실하게 중보하며 기도해야 할 것을 명한 것이다.

복음 전파자를 위하여 구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 전파자인 자기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복음 전파자가 담대하게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쇠사슬에 매인 바울 사도 자신이 마지막까지 담대하게 진리를 전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 이와 같은 복음 전파자를 위한 기도의 연합은 과거나 오늘 날이나 앞으로도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역사에 탁월했던 기도의 사람들의 곁에는 항상 그들을 위한 기도의 용사들이 있었다. 마틴 루터, 잔 칼벵, 요한 웨슬리, 잔 낙스, 필립 부룩스, 조나단 에드워드, 주기철, 손양원, 길선주, 김익두, 한경직, 강원룡, 강신명, 옥한흠, 하용조 이와 같은 복음 전파자들의 곁에는 저들의 복음 전파가 열방을 향하고 역사 앞에 당당하도록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기도로 협력하고 물질과 봉사와 섬김과 헌신으로 연합한 수많은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는 악한 영과의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강력한 기도의 후원이 계속하여 필요하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본문의 앞부분에 있는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13절이 그와 같은 영적 싸움의 실상을 밝혀 주고 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모세 때에 광야 행진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막는 아말렉의 군대와 르비딤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전쟁터에 나가 싸웠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피곤하여 지친 손이 내려오면 전쟁에 지고 올라가면 전쟁에 이기는 장면이 보였다. 그 때에 아론과 훌은 모세를 바위 위에 앉아 손을 들고 기도하게 하고 서로 손을 잡고 높이 서로의 손을 치켜 든 채로 기도할 때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해가 지도록 저들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고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말렉을 무찔러 이길 수 있었다.

악한 마귀는 모세를 죽이려 하고, 여호수아를 죽이려 하고, 갈렙을 죽이려 했다. 영적 전쟁터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사사 기드온이라도 대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삼손이라도 기도가 부족해지니 넘어지고 말았다.

사사기 4장에 보면, 지금부터 3,200년 전에 드보라 선지자가 평범한 가정 주부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의 세력을 꺾을 수 있었다. 야빈 왕은 당시에 철 병거 900 대가 있었다. 오늘 날로 하면 최첨단 장갑차가 900대란 말이니 어찌 위협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도의 사람 여 선지자 드보라를 쓰시기 시작하자 역사는 바뀌었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다. 그 때에 드보라는 바락을 군대 지휘관으로 앞장세우고 군대 만 명을 동원하였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아가 싸우는데 하나님이 바락 앞에서 가나안의 야빈 왕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목숨을 취하시기로 결심하셨다. 하나님이 야빈 왕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병거와 군대를 저들의 칼로 혼란에 빠지게 하셨다. 결국은 시스라가 싸우다 말고 병거에서 내려서 걸어서 도망하였다. 이스라엘의 바락의 군대가 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하로셋 학고임이란 곳에 이르러서는 시스라의 군대가 한 명도 남지 않고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서 남은 자가 하나도 없이 다 죽임을 당했다. 혼자 살아남은 군대장관 시스라가 걸어서 피신하여 도망한 곳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었다. 하솔 왕과 야빈과 겐 사람 헤벨 사이는 평화스러운 관계였다. 목이 말라하며 물을 찾는 시스라에게 우유 한 모금을 건넨 후에 이불을 덮어 씌어서 감추어 주었다. 전쟁에 좇기다 지친 시스라는 자기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깊이 잠든 시스라 군대장관을 헤벨의 아내인 아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들어가서 손에 방망이를 들고 잠든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았다. 말뚝은 그의 관자놀이를 뚫고 말뚝 저 끝이 땅에 박히고 말았다. 시스라는 순식간에 기절해서 죽고 말았다. 뒤 쫓던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바락이 헤벨의 집에 쳐들어 가 보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를 맞아들여서 시스라가 죽어 있는 현장을 보여 주었다. 사사기 4장 23절에 보면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의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굴복하게 하신지라”고 했다. 역사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한다. 20년 동안 900대의 철 병거를 앞장 세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가나안의 왕 야빈의 세력을 이리하여 점점 기울어가고 진멸되었다. 사사기 4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 힘을 점점 더하게 하셔서 야빈 왕의 세력을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고 했다. 이 날 이후로 여선지자 사사 드보라 시대에 40년간 이스라엘에 평화가 임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라고 이름 붙여진 사사기 5장의 맨 마지막 구절인 3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는 노래가 나온다. 우리는 오늘 날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이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사사기 4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고 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주변이 문제가 아니다. 남들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주께서 범사에 이기게 하실 것이다. 아니 주님께서 이기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되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다. 우리도 오늘 날 서로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여야 할 때를 만났다. 기도하면 주께서 우리들을 도우실 것이다.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꿈 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너 축복 하시려고"최고관리자
"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염려와 감사(마6:2..최고관리자
"감사해"최고관리자
"바울의 소식"최고관리자
"염려와 감사"최고관리자
"누군가 널 위해 기..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