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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새로운 가르침(행17:16-23)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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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8-04 20:34 조회 19,915 댓글 0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철저히 금하셨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우상 숭배를 떠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선민으로 따로 불러내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들  조차도 우상 숭배에서 깨끗하지 못했다. 우상 숭배란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기고 위하며 가치 있게 여기며 살아가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우상숭배의 뿌리는 범죄하고 타락하여 허망해진 인간의 마음으로 시작된다. 로마서 1장 21절 말씀대로 우상 숭배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하며 사는 타락한 인본주의 인생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쾌락을 즐기며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며 천국이나 지옥이나 장래의 심판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는 무리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은 로마서 1장 25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믿고 따르기 이전에는 누구나 다 그렇다.창세기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장사꾼이었다. 우상을 섬길 뿐만 아니라 돌과 나무로 각종 우상을 깎고 다듬어서 만들어 파는 우상장사꾼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데라의 아들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첫 사람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430년의 애굽의 종살이와 모세의 광야 생활을 거치고 나중에 요단 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여호수아의 강조는 분명하였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유언을 말하듯이 말했다. 선조들이 과거에 우상을 숭배하던 일들을 거론하면서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4-15)

고 선언하였다. 그 때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우상 숭배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만큼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요,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로 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런 타락한 원죄의 속성이 항상 내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나를 잡아끄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엄격하게 가르쳤고 경고하였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24:20)

그렇다. 지금 잘되고 번영하고 돈 잘 벌고 내 몸 건강하고 내 집안 형통한 것 같다고 자랑하면 안 된다. 그 때가 위험한 때다. 인간은 잘되고 형통하기 시작하면 자기 스스로가 잘 해서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타락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며 겸손하게 스스로 주님 안에서 삼가는 나날을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계명의 출발이 우상 숭배를 금하시는 것부터가 아닌가. 출애굽기 20장 3절 이하에 보면 십계명이 소개된다.

제 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제 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 우상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피조물의 그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서 그것을 신격화 하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술 작품으로서 새와 짐승과 물고기를 형상화 하는 것까지를 금하신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과 바다의 그 무엇이든지 형상화 하고, 그것에 절하고 섬기는 행위는 분명히 우상숭배이다.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고 절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산과 바다와 큰 나무와 큰 바위 앞에서 절하는 행위도 우상 숭배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믿고 섬기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시시 때때로 우상을 숭배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고 강조해서 가르쳤다. 다시 보라. 음란(淫亂), 부정(不淨), 사욕(邪慾), 악한 정욕(情慾), 탐심(貪心) 이 모든 것에서 출발해서 우상(偶像) 숭배자가 되고 만다고 경고한다. 그러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생활이란 어떤 생활일까. 그 앞 부분인 골로새서 3장 1절부터 4절까지에 해답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다. 

이천년 전,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당시나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나 별 차이가 없다. 시대적으로 그러하고 지리적으로 마찬가지다. 아덴은 헬라의 수도였던 아테네를 말한다. 오늘 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아테네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아덴은 세모형의 반도로 형성된 도시다. 우리나라가 아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한 반도국가 인 것처럼 말이다. 일 년 내내 비가 별로 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이미 고대로부터 도시가 발전하였다. 그 이유는 그 곳에서 채취되는 점토로 제작하는 도자기가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대리석과 은과 주석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관련 산업이 발전했던 곳이다. 아덴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600여 년 전에 민주제도를 정착시킨 곳이기도 하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려 하던 당시의 아덴은 이미 주전 86년에 헬라가 로마에 망하면서 로마 시대의 로마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아덴은 도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하여 헬라의 삼대 도시 중의 하나였다. 아덴은 우상 숭배의 도시이며 철학의 도시였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에만도 아덴 안에 300여개의 우상들이 있었고 3만개가 넘는 신상들이 도시의 이 곳 저 곳에 즐비하였다. 중고등학교 때, 서양사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보던 파르테논 신전, 아폴로 신전 등이 모두 다 오늘날 까지 아덴의 산언덕에 남아 있다. 철학도 발전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철학자들이 모두 다 이 곳 아덴 출신들이었다.

본문 18절에 소개되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등장해서 사도 바울과 신에 대하여 논쟁한 장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에피크로스 학파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철학의 학파인데 ‘쾌락이 인생이 최고 목표’라고 여기며 살던 이들이다. 출발은 마음의 평정을 주장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된 철학파의 무리들이다. 또한 스토아학파란 이성을 강조하고 청빈하게 사는 생활과 자연을 따라서 사는 생활을 주창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민평등(萬民平等)사상도 주장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에피쿠로스학파와는 거리가 멀었고 로마의 황제나 유식한 고관들이 주로 추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복음이 전파되고 각 사람에게 영접되는 일은 17절의 변론이나 18절의 논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의 영혼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복음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베뢰아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수 없게 되자 피신하여 아덴을 향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엄청나게 많은 도시 곳곳의 우상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다. 결국 회당에서 만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아덴 사람들은 그 어떤 새로운 학문과 종교에 대해서든지 깊은 관심을 갖고 서로 토론하고 언쟁하는 일에 시간과 정열을 쏟는 생활을 무척이나 즐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학에 깊이가 있고 각종 우상 숭배에 익숙해 있던 아덴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는 결국 한다는 말이,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고 비난하고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아덴에 살던 헬라의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을 무슨 잡동사니 지식을 가지고 와서 전파하려는 자 정도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결국 저들은 사도 바울을 붙들고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함께 가면서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행17:19)하고 관심을 보이며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그 곳 ‘아레오바고’는 헬라 말로 화성을 뜻하는 ‘아레이오스’와 언덕을 뜻하는 ‘파고스’의 합성어이다. 즉 ‘화성의 언덕’이란 말이다. 헬라의 신화에 따르면 ‘아레스’라는 이름의 화성의 신이 그의 아들 ‘넵투네’를 살해한 범인을 붙잡아서 그 곳 언덕에서 재판하였다고 하여 종종 ‘공개 재판의 장소’로 쓰이는 곳이었다.

자! 그러면 아덴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듣고 배워 알기를 원했던 그 새로운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예수.
성경은 18절에서,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들 앞에서 예수를 전하였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단지 ‘예수와 부활’을 전하였다는 정도의 내용 말고는 그 이상의 기록을 더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우상화(偶像化) 하고 범신론(汎神論)적 의미를 부여하며 더군다나 철학적(哲學的)인 사고와 논쟁에 익숙했던 아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간단하게 말하면 헬라의 철학이란 것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따로 구분하는 이원법적인 사고이다.


헬라사람들은 “영혼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육체가 죽어 영혼이 해방되어 신(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헬라 철학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인 플라톤은 그의 책, <대화편> 중에 소개하는 ‘파이돈’에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상에 있다가 인간이 출생할 때 육체라는 감옥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서 진리와 이상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정신과 물질 그리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이러한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이 생겨났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다만 구원받는 것은 영혼이지 육체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영혼만의 그런 부활이 아니다. 육체의 완전한 부활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인간의 부활은 영혼육의 완전한 부활이다.

그러면 대단히 철학적이고 논쟁적인 철학자들이 살아가던 아덴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는 어떤 예수였을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자신이 만난 역사적인 예수, 체험적인 예수, 지금 자신의 삶을 이곳과 저곳, 이 도시와 저 도시, 이 나라와 저 나라, 아시아와 구라파 할 것 없이 곳곳으로 쉼이 없이 이끌어 가시는 성령을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 부활하신 예수,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여 계시며 장차 이 땅에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역사적인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하지 않았겠는가.

오늘 날 날 자신이 영접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 모두는 지난 삼년 팔 개월 동안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 그분으로 인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수 있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말고 나 자신에게 있어서 예수는 과연 누구이신가. 우리가 가끔씩 부르는 찬송 93장의 가사에 보면,

“예수는 나의 힘이요 생명이요 친구요 기쁨이요
소망이시며 영생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이 쌓일 때 위로하고 힘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또한 예수는 햇빛과 비를 주셔서 추수할 곡식이 많게 하시며 풍성한 열매를 주시는 오곡백과의 공급자이시다.
그리고 예수는 밤낮 보호해 주시고 바른 길 가게 해 주시므로 의지하고 따를만한 영원한 안내자요 보호자요 지도자이시다.
예수는 한이 없는 복을 주시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각 사람의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같은 은혜롭고 섬세한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고백했던 윌 톰슨(Will L. Thompson, 1847-1909)은 이 찬송가를 작사하고 작곡하였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보스턴음악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에 독일의 라이프치히로 건너가서 독일의 정통음악을 연구하였고 수많은 찬송가의 곡들을 탄생시켰다.

왜 예수여야 하는가. 로마서 7장에서 고민하는 사도 바울의 솔직한 고민을 보면 그와 같은 고민과 갈등은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나에게 다 있다.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19-25)

그러므로 이와 같은 죄와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는 없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 안에 사는 척 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하면 로마서 8장 2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켜 주신다.
 
신라 시대 때 김유신(金庾信, A. D 595-673)은 15살에 화랑이 되어 산천을 오가며 심신의 수련에 힘썼다. 그런 그가 언제부터인가 주색잡기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 그를 책망하는 어머니 만명(萬明)의 탄식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갖고 변화의 삶을 시작했다. 하루는 말을 타고 졸며 가는데 말 잔등에서 깨어나 보니 말이 예전에 자기가 즐겨 찾던 기생 집 앞에 멈추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습관이 되어 있는 말의 잔등에서 내려서 말의 목을 단 칼로 쳐서 끊었다. 이는 말의 목을 친 것이 아니라 김유신 자신의 목을 스스로 치는 자기 결단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군인이며 정치가였던 그는 나중에 백제와 고구려를 이기고 삼한 통일을 이룬 신라의 명장이 되었다.
4세기의 성자로 불리는 성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원래부터 그런 삶을 살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늘 날 아프리카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타가스테’라는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였고 어머니 모니카는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6살 되었을 때에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들 어거스틴이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기를 원하고 기도하였으나 유학 중이던 그는 철학에 심취하였고 마니교에 빠져 들고 말았다. 그는 부모를 떠나 유학을 시작한 다음 해인 17살 때에 한 여성을 만나서 14년간을 동거하기 시작하였고 ‘아데오다투스’라는 이름의 아들도 낳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철학과 수사학에 심취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행동이 못마땅하여 아들과의 관계를 끊고 절교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를 만난 후에 그의 철학과 학문의 깊이와 유창한 언변의 감동적인 설교에 감동되어 열심히 암브로스 주교의 설교를 들으며 교회에 출석하였다. 주후 386년 그의 나이 32살 되던 해의 부활절에 그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다른 전해져 오는 그에 대한 일화에 의하면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뛰어 놀던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랫가사 중에 “집어 읽어라”는 내용의 가사를 성령의 음성으로 듣고 사도 바울의 편지인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던 중에 로마서 13장 12절부터 14절을 읽던 중에 변화와 회심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와 같은 체험 이후에 그는 세례를 받고 낙향하여 북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수도(修道)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채 고향에 도착하기 전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지만, 고향에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들과 스스로 수도회를 설립하는 등 수도사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37살이 되던 주후 391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명설교가요 저술가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신학 사상과 신학적인 공헌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선행구원론에 반대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고백록>(Confessiones), <행복론>(De beata vita), <독백록> (Soliloquia)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역사적인 저술들을 완성하였다. 한 마디로 하면 그는 인간이 그 어떤 선행이나 공로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렇다. 예수를 만나야 인생이 변한다. 예수를 나의 삶의 구주로 영접하고 진정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부활.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인정하지 못하면서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가짜다. 예수께서 이 세상이 오실 그 즈음에 자칭 메시아로 주장하는 이들의 메시아 운동이 십여 개 이상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개의 메시아 운동은 주창하던 주인공이 죽음으로 무너지고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난 2천년 동안 점점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왔다. 거짓은 때가 되면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숨길수도 없었고 역사에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말살해 버릴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록을 한번 읽어 보자.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막15:37-41)

예수님은 그해 유월절인 금요일 오후 세시 경에 돌아가셨다. 불과 3시간만 지나면 안식일이 시작된다. 유대인의 법으로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등장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하였다.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15:42-47)

당시에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의 로마군대의 직위는 처형된 죄수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는 신분이었다. 빌라도는 그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나서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넘겨주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니고데모와 함께 세마포에 싸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해 두었던 돌무덤에 장례하는 과정을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가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장례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해 주었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이처럼 여러 사람들을 등장시켜 확증하고 있다. 부활을 증거하는 마가복음 16장을 보자.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막16:1-3)

여기서 우리는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가는 불과 몇 절 안 되는 본문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매- 이처럼 똑같은 여자들의 이름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경학자 중에 리처드 보캄은 “마가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전설이 아닌 역사적인 사실인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마가는 당시에 살아 있던 이 여인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서 만약에 내 성경의 기록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여인들의 찾아가서 물어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장례와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부활에 다하여 다시 확인해 보라고 그리 한 것이다. 마가 복음 말씀을 좀 더 보자.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16:3-7)

역사란 이런 것이다. 

“그가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He has risen! He is not here.) 천사의 이와 같은 말을 들을 때의 여인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는 사라지고 대신에 천사들이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은 몹시 무서워 떨고 놀라워하며 그 무덤에서 나와서 도망하였다. 저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아무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

사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평소에 하신 말씀을 믿고 기억했다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마가복음 8장과 9장과 10장에 보면 이미 예수님은 장차 죽으실 것과 삼일 만에 부활 하실 것에 대하여 여러 차례 반복하여 말씀해 주시고는 하였다. 마가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고를 세 번 이나 반복하여 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평소에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반복하여 언급하셨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아닌가. 마가복음 8장 31절, 9장 31절, 10장 33절과 34절을 보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할 당시에 그런 사실을 사실로 믿고 받아드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본문 17절과 18절의 말씀처럼 변증하고 논쟁하는 목소리만 높았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받아 들여 지는 사람은 극 소수였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31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 바고 언덕에서 설교한 설교 말씀의 내용이다. 3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예수 부활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 부활에 대한 네 말을 다음에 다시 듣겠다고 반응하였다. 바울도 아레오 바고 언덕을 떠났다. 그런데 바울의 예수부활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 중에서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예수의 부활 복음을 믿기 시작하였다. 누가는 사도행전 17장 34절에서 그들의 몇몇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역사란 이런 것이다. 사도 바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부활은 정말 쉽게 믿어 지는 내용이 아니다. 더군다나 헬라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사두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사건일 뿐이지 저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주후 2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인 켈수스(Celsus)는 기독교를 혐오하고 비판하는 글을 많이 쓰던 인물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폄하하고 비판하는 글들 중에서 자주 지적하는 내용이 이것이었다. 예수의 부활이 몇몇 여자들의 증언에  근거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했다. 여성이 천대 받던 당시에 그의 그런 주장은 설득력 있게 번져 갔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 부활에 관한 기록은 오히려 그래서 믿어지는 것이다.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 기록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미화하고 치장하려 했다면 그럴싸하게 부활의 목격자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거론했을 것이다. 무시 받고 인정받지 못하던 당시의 여인들의 이름 몇몇을 적어 넣는 것으로 성경의 기록을 마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목격자와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로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매가 본 사실대로 예수님을 장례하였던 무덤의 큰 돌문은 굴려져 나가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 예수의 부활 사실을 알려준 것은 그 빈 무덤에 있던 천사였다. 그 때 빈 무덤 안에서 여인들을 만난 천사는 저들에게 분부하였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모두 다 도망가 버린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 소식을 전하라고 천사를 통하여 지시하셨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다. 그렇게 비겁하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에게 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서둘러 알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망가서 숨어 지내던 제자들 곁에 찾아 가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축복해 주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자신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눅24:39-41)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체의 완전한 부활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전했고 몇몇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였다. 복음은 전파하면 받아 들여 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의 시작이니까. 예수 부활의 신앙과 능력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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