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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오직 사랑 안에서(엡4:11-16)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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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1-27 02:33 조회 21,392 댓글 0
 
'의사 손가락 잡은 아기' 동영상이 공개돼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에 거주하는 앨리샤 앳킨스는 지난 해 가을에 한 병원에서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에서 양수가 터지자 태아는 팔을 세상으로 내밀고 의사의 오른쪽 둘째손가락을 꼭 붙잡았다. 아내의 수술 장면을 지켜보던 남편은 이 경이로운 장면을 촬영했다. 사진은 지난해인 2012년 12월24일에 페이스 북에 공개했다. 일명 '의사 손잡은 태아' 사진과 사연은 미국의 각종 언론에 소개되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사진작가인 산모 또한 자신의 포토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아내 알리시아가 지난 달 26일 회사 페이스 북에 사진을 올리면서 삽시간에 화제가 됐다. 이렇게 시작되는 한 인간의 생애는 평생토록 그 누군가의 손을 서로 붙잡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엄마 아빠의 손이든 친구의 손이든 선생님의 손이든 아내나 남편의 손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주변의 그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서로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창조의 섭리이다. 특별히 인간은 인간의 손을 잡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한다. 아니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힌 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복된 인생의 출발이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처음에 혼자 창조되었을 때에는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다. 그렇게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손을 놓치고 사단인 뱀의 손을 잡게 되면서 인생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은 이처럼 서로가 더불어 다 같이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본문에서 가장 대조가 되는 두 가지 표현은 13절의, “온전한 사람”과 14절의, “어린 아이”이다. 어린 아이가 자라나서 장성한 분량의 온전한 사람이 되어 성인으로 성숙하게 살아갈 수 있기 까지는 끝이 없는 사랑과 배려가 필요하다. 밤낮으로 돌보아 주고 아껴 주어야 어린 아이가 자라나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발전한 것은 좋지만 고아를 다른 나라에 입양하는 비율도 세계 으뜸이다. 전쟁 중도 아닌데 웬 고아가 그리 많은가 하였더니 미혼모들이 출산한 아기를 고아원이나 영유아 복지 기관에 의탁해서 키우다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입양을 원하는 양부모에게 입양 되어가는 경우가 그리도 많다고 한다. 길거리나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갓 태어난 신생아들을 정성스럽게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가르치고 키워서 사회인으로 배출하고 혹은 저들을 양부모의 사랑을 갖고 정성스럽게 키워 줄 양부모의 품에 입양하는 일은 마음이 찡하고 숙연한 교훈을 받게 하는 일이다. 언론이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99년에 15,719명이었던 미국의 해외 입양아 규모는 2011년에는 9,319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난 2002년부터 2011년까지 1만2천978명의 아이를 미국으로 입양 보냄으로서 중국과 러시아와 과테말라에 이어 4번째 '고아 수출국'이란 불명예를 안고 있다. 문제는 태어난 아기가 제 부모의 품을 떠나서 이 손길 저 손길, 이 기관 저 기관을 거치면서 낯 설은 이들의 손길에 맡겨져서 자라나야하는 환난의 시작이다. 물론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서 더러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고 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낳은 부모의 손길에 의해서 양육 받아야 옳은 것이 아닌가.

본문 말씀은 4장 1절부터 이어지며 사실은 에베소서 1장으로부터 이어서 일맥상통한 논리적인 교훈을 깨달아야 하는 말씀이다. 모든 성경의 말씀들이 다 그러하지만 말이다. 본문은 2장과 3장에서 말씀한 사도 바울의 교회론 즉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어지는 말씀들이다. 4장 말씀의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 내용은 “교회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된 성도들의 연합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한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여야 한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된 이들은 왜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 4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이 그러한 말씀이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다.
·성도된 우리는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주님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다.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여기서 만유라는 말씀은 영어로 모든 것 즉 ‘all’이다.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 -- 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엡4:4-6)라고 하였다. 

교회됨의 바탕은 하나 됨이다. 사도 신경 중에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하는 고백 중의 ‘거룩한 공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온 인류 중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열방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의 거룩한 연합 그것이 교회라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교회가 몇 명이 모이느냐 혹은 어느 교회의 예배당 건물이 어떠하냐의 숫자의 문제나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건물의 환경이 교회를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한 믿음으로 부름을 받아 세례를 받은 한 소망과 한 부르심 앞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연합이 곧 거룩한 교회인 것이다.

본문은 이와 같은 교회의 거룩한 연합을 위하여 교회 안에 세우신 직분과 직무와 그 유기적인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다. 본문에 보면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라고 하였고, 16절 끝 부분에서도, “사랑 안에서”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세상적인 그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는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받은 직임.
교회 안에 주신 직임은 이것이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요 교사로 세우셨다. 그 모든 직임을 감당하는 기본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사역하여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게 된다. 오늘 날의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서 이와 같은 직임에 충실하여야만 한다. 물론 오늘 날은 사도요 선지자의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복음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목사요 교사로 부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도된 우리 모두는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복음 전하는 자의 사명으로 직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요 성도된 우리는 구약 아가서의 교훈처럼 울타리를 허는 여우를 막아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건전한 교회요 사랑과 진리 안에서 성장해 가고 성숙해 가는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만 세워져가야 한다. 그 사랑 안에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므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연합체인 교회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만 집중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의 말씀 증거가 나온다. 스데반은 모세 때의 광야 무리들을 ‘광야교회’(행7:38)라고 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세워 주신 선지자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영원히 두시려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것이 아니다. 광야 길을 거쳐서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섭리와 계획이 있으셨다. 그러나 광야 생활 중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모세의 형 아론을 앞장세우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며 절하고 섬겼다. 그 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지 않은 백성들을 외면하셨고 우상 숭배하는 일에 내어 버려두셨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 나중에 저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행7:43)을 받드는 죄를 범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선민이요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내신 성민이었지만 저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밖으로 옮겨 내시는 바벨론 포로 시대의 고난을 겪도록 내어 버리어 두셨다. ‘몰록의 장막’의 몰록이란 신은 암몬 족속들이 국가 신으로 섬기던 우상이다. ‘몰렉, 밀곰, 밀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형상은 황소 머리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제의(祭儀)를 드릴 때에는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고는 하였다.(신12:31, 겔 16:20) ‘레판의 별’이란 아모스서 5장 26절에 보면 ‘기윤’(Chiun)이라고 했는데 이는 앗수르 사람들이 숭배하던 토성이다. 시리아 말로 토성을 ‘렘판’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레판’이란 칭호가 나온 것이다. 거기 아모스 5장 26절에는 ‘싯굿’이란 우상의 이름도 등장한다. ‘싯굿’이란 앗수르 사람들이 섬기던 별의 신 이름이다.

예수님 시대에나 사도 시대인 초대 교회나 오늘 날이나 2,000년의 교회 역사에 말씀하시는 성경의 말씀의 교훈은 분명하다. 우상 숭배를 떨쳐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엡4:7)라는 말씀의 교훈대로 살아가야 만 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주신 은혜’란 ‘카리스마’( cavrisma) 즉 ‘은사’(恩賜)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이나 로마서 12장이나 에베소서 본문인 4장의 말씀처럼 은사를 왜 주셨느냐하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됨이란 회일적인 하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손과 발과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서로 각기 다 다른 기능과 역할에 의하여 몸이 하나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서로를 각기 다른 직분과 직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하고 복음적이고 건전한 하나됨을 지켜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과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하나로 부르신 것이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 사지백체가 작고 약한 지체로부터 우리 신체의 모든 것들이 보이는 부분이나 보이지 않는 부분이냐 다 소중하고 다 요긴하여 몸의 지체로 붙여 두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2장 21절의 말씀처럼 “눈이 손더러 쓸데없다. 혹은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지체가 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몸의 어느 부위에 암이 발생하면 그 암을 이겨 내기 위해서 온 몸이 함께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고린도 전서 12장 26절에는,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옳다.  이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어야 교회의 참다운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이와 같은 지체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성도들 간에 서로 온전해지고 서로 봉사의 일을 잘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것이다. ‘온전해 진다’는 말은 ‘준비하고 연단하고 훈련하여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교회는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과 직무에 충실하여 그 섬김의 직임을 잘 감당하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건축하는 일도 한 개인의 열심히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른 아이 청년 노인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벽돌 한 장, 건물 한 평, 땅 한 평 마련해 가는 섬김과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인 예배당이 든든하게 지어져 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 또한 든든하게 세워져 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장성한 분량의 충만.
어린 아기가 귀엽지만 항상 그 상태로 더 이상 자라질 않는다면 그 부모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되겠는가. 키도 자랄 만큼 자라나야 하고, 마음도,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성장할 만큼 자라나야 성숙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과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요즘 각종 일간 신문에 각종 이단들이 전면 광고 기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학을 변증하려고 앞장서고 있다. 이와 같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성도된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하여 미는 것과 아는 일에 건강하고 건전하고 올바른 면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어린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서 장성한 신앙의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상태란 무엇인가. 14절이 말씀하는 그대로이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이란 도박꾼들이 상대방을 속이는 눈속임과 손  속임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 원래 ‘속임수’란 말은 ‘주사위’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한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는 말은 파도에 밀려서 이리 저리 뒤 흔들리는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 즉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거짓 선지자들이나 이단이나 사이비의 그 어느 누군가가 유혹하고 미혹하면 귀가 얇아져서 이용당하고 놀아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배 멀미를 해 본 사람은 요동한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할 것이다. 사람을 영적으로 혼미하고 아찔하게 만드는 격렬한 진동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편지를 쓰던 당시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나 오늘 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고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어렸을 적 모습을 기록하는 두 구절의 소중한 말씀이 나온다. 그 하나는 누가복음 2장 40절이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했다. 그리고 누가복음 2장 52절에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키가 얼마였는지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몸무게도 모른다. 뚱뚱하였는지 아니면 홀쭉하였는지 모른다. 예수님의 얼굴의 피부가 고왔는지 아니면 기미가 잔뜩 끼고 죽은 깨가 많고 검버섯이 났었는지 모른다. 단지 이사야서 53장 2절의 말씀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큼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채찍으로 치고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리고 발길질하며 그 이마에 가시관을 씌우며 십자가에 매어 달고 신 포도주를 입에 대며 희롱하고 조롱하는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다 당하셨다. 그런 주님 안에서 우리가 세움을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만 바라다보아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른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 공동번역성경은 에베소서 4장 13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표준 새번역 성경은,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라고 번역해 주었다. 예수님은 그 말씀하시는 것이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과 달랐다. 그 권세 있는 말씀 앞에 모든 백성들이 마음 깃을 여미며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산상 수훈의 교훈을 마치셨을 때에 많은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9)고 하였다.

마가복음 1장 21절 이하에도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다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만난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은 내어 쫓아 주셨다. 귀신이 예수를 만나자 소리쳤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 때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경련을 일으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면서 나왔다. 그 주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권위가 있음으로 보고 놀랐고 귀신을 명하여 내어 쫓으시는 것을 보고 다시 또 놀랐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있는 새 교훈이로다.”(막1:27)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임하는 말씀의 권위로 사역하셨지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외모의 뛰어남으로 일하신 분이 결코 아니셨다.

우리는 자신이 신체적으로 약하거나 부족하거나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경쟁 사회에서 견뎌내고 살아남기 힘들어서 우울하게 지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올 2013년 1월 9일에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의 새해 시무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 김인 삼성 라이온스 구단의 사장 초청으로 키 110cm의 이지영 대리가 특강 강사로 초청되었다. 그녀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는데 ‘가연골무형성증’이라는 희귀병으로 키가 110cm 자라는데 그쳤다. 어려서부터 왕따를 많이 당했다. 언제나 따돌림을 당하고 놀림을 받으며 우울하고 소외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딜 가려면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편안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주변 동료들은 그녀를 향해서 “난장이, 뚱보, E. T 혹은 외계인”이라고 놀렸다. 그런 그녀가 오늘 날 세계적인 기업 삼성에 취업하고 인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팀의 대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에는 힘겹고 눈물겨운 날들이 많았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작은 키와 외모는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마음의 확신과 자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그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제 키는 110㎝입니다." 이렇게 풀어 나가는 그의 간증은 그를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학창 시절의 끝없는 따돌림을 뒤로하고 수도권 대학을 졸업한 후에 60여 번의 이력서를 보내며 입사에 실패하는 좌절을 수도 없이 겪었지만 한계를 인정하고 새롭게 도전하고 도전한 결과 그녀는 당당한 세계적인 기업의 간부가 되었다. 그녀의 소식을 전해들은 이건희 삼성 회장도 그녀의 팬이 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2012년 11월에 이지영 대리를 초청하여 둘이 함께 오찬을 하기도 했다.

키가 작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마음까지 작아서는 안 된다. 키야 작을 수 있지만 생각까지 작아서는 안 된다. 키야 작을 수 있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이나 꿈까지도 작아져서는 안 된다. 나폴레옹도 작았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도 작았고 중국의 등소평도 작은 키였다. 작은 것이나 없는 것이나 부족한 것으로 인하여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본문 13절을 다 같이 읽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런 은혜가 평생토록 계속하여 임해야만 할 것이다.

우스갯소리 하나 하자. 상처가 없이 그냥 우스갯소리로 듣기를 바란다.

아주 오랜 세월 만에 만난 네 할머니 친구들이 커피숍에 모여서 아들 자랑을 시작했다. “내 아들은 신부인데 사람들이 내 아들을 만나면 ‘오! 귀하신 분’이라고 한다네.” 그 때 또 다른 한 할머니가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들은 추기경인데 남들이 내 아들을 만나며 ‘오!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한다네” 그 때에 또 다른 할머니가 좀 더 큰 소리로 내 아들은 교황인데 남들이 내 아들을 만나면 ‘오! 고결하신 분’이라고 한다네. 그 때에 물끄러미 세 할머니의 아들 자랑을 듣고 있던 다른 한 할머니가 아주 큰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말했다. “내 아들은 키고 작고 뚱뚱하고 얼굴도 못생겼는데 남들이 내 아들을 만나면 ‘Oh! My God'이라고 한다네” 하고 응수했다. 

남들이 나를 혹은 내 자녀들을 ‘오 마이 갓’이라고 놀려 댈 지라도 포기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나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다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믿음이 약하고 부족하고 힘이 없고 어리석어도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입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성도의 연합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의 참된 행실.(Truth in Love)
앞서 묵상한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여기 15절에서 말씀하는 ‘참된 것’이란 ‘진리’를 말한다. 즉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새번역) “Instead, speaking the truth in love, we will in all things grow up into him who is the Head, that is, Christ.”(NIV) 그렇다. 성도된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답게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야 한다. 거짓을 말하거나 불신앙을 말하거나 모세 시대의 광야 백성들처럼 원망이나 불평을 말하면 마귀가 금방 자기 친구 만났다고 여겨서 내 마음 속에 일곱 마리의 다른 마귀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내 마음을 점령해 버린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여야 한다. 디모데 전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남녀 신도들에게 분명하게 부탁하였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8-10)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하는 참된 행실 즉 진리를 행하는 그 결과가 무엇인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 성장해 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연합하여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자. 그런 교회로 서로를 섬겨 가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된 우리 모두의  머리이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결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힘이 작용해서 몸이 자라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 성도들이 서로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워져 가는 것이다. 할렐루야!

암벽을 타는 이들이 암벽에 매달려 휴식을 취하는 장면을 보았다. 우리들의 삶도 그와 같은 도전의 연속이요 악한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이마의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잠들어 버린 베드로를 향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14:38)고 하셨다.

우리의 믿음은 잠이 들어 버리면 안 된다. 고단해도 자라나야 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자라나야 하고 그 어떤 환란과 핍박과 역경이 있더라도 자라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계속하여 은혜롭게 자라나야 한다. 그런 성숙을 이루어가는 모두가 되기를 서로 기도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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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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