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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하는 자의 감사(욥28:1-11, 합3:16-19)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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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11-18 07:19 조회 22,094 댓글 0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영국을 대표하는 극작가요 소설가요 문학 비평가였다. 소설과 희곡과 뮤지컬의 대본을 쓰기도 하였다. <인간과 초혼>, <피그말리온>등의 책을 쓴 그는 69살 때인 1925년에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리고 95년을 살았다. 그의 평생의 업적도 놀랍지만 그의 묘비명이 더 유명하다. 그 묘비에 쓰인 글귀 말이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리말로 쉽게 번역하면 “내가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그래서 인생(人生)을 일생(一生)이라고도 한다. 한 번 지나가면 어제라는 시간,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올 2012년도 40여일 밖에는 남지 않았다.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 세월이고 인생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감사하며 살아야만 할 것이다. 내가 성공했든지 실패하였든지, 형통하든지 답답한 일만 계속되든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간에 지금 내게 생명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든지 말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이다.

욥기에는 직접 표현된 ‘감사’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욥은 지난 날 누렸던 복과 현재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편에서 극복해 나가며 감사를 잃지 않으려고 씨름한 흔적이 역력하다. 욥기 1장 5절에 보면 평소에 욥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하였나를 알 수 있다. 열 명의 자녀들이 서로 모여 잔치하고 즐겁게 지내고 나면 아버지 욥은 아들딸들을 차례대로 불러다가 성결(聖潔) 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燔祭)를 드렸다. 욥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보다 훨씬 이전의 인물이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에 족장의 권위를 갖고 자녀들을 성결하게 하고 번제를 드리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이었다. 요즘처럼 가장의 권위가 약하여지고 가정이 병들어 가는 때에 욥의 성결 신앙과 번제 신앙의 모습은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지 모른다. 욥의 열 자녀들은 의리가 있었고 서로 화목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욥은 자녀들이 겉으로 화목한 것처럼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성결하게 살아가기를 늘 소원하였다. 번제를 드리는 신앙의 역사는 그 기원이 깊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사실을 소개한다. ‘번제’라는 용어 자체는 창세기 8장 20절에 보면 노아 시대의 홍수가 끝난 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살아 나온 짐승들 중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이 시작이다. 짐승과 새의 정결한 것들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제단에 번제(燔祭)를 드렸다. 물론 욥이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번제는 민수기 6장 12절에 소개된 ‘속건제’를 드린 것이다. 나중 모세의 법대로 하면 그러하다는 말이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때에는 “일 년 된 숫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물로 드릴지니라.”(민6:12)고 하였다. 이처럼 욥은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고 기도드리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일상화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런 욥이 이해할 수 없고 소화하기 어려운 극심한 재난을 당한 것이다. 그 많던 재산과 짐승 다 날아가 버리고 열 자식 다 한 자리에서 죽고 자기 몸도 병들어 목숨만 겨우 붙어 있고 아내마저 남편을 구박하고 부부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된 채 친구들의 방문과 하는 말들이 욥을 점점 더 정신적으로 공허하게 하고 정신공황상태에 빠지게 하는 착잡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욥이 욥기 28장에서 지혜에 대하여 여러 말로 말하는 내용들을 대하게 된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줄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이다.
감사를 깨달아 알고 표현하는 지혜는 인간이 금과 은과 동과 철을 캐내기 위해서 어두운 땅 속을 뚫고 파 들어가서 온갖 보석과 귀한 것들을 얻어 내는 것 보다 천 배, 만 배 훨씬 더 귀하고 귀한 진리의 발견이다. 지혜를 찾아나서는 길은 공중의 솔개나 눈이 빠르고 두려울 것이 없는 매의 눈으로 조차도 찾아내기 어려운 길이다. 지혜를 찾는 길은 용맹스러운 짐승이라도 밟아 본 적이 없고 사나운 사자라도 지나가 본 적이 없는 세계이다. 인간이 아무리 도전정신을 갖고 굳은 바위를 부수며 산을 뿌리까지 뒤 엎어 대며 진리를 찾고 지혜를 찾을 지라도 쉽게 찾기 어려운 것이 지혜이다. 그 지혜란 것은 반석을 뚫어서 물길을 내고 온갖 보물들을 찾아 낼 지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못된다. 물이 새는 곳을 찾아내서 그 원인을 해결하고 땅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환한 세상으로 끄집어 찾아 낼 지라도 지혜만큼은 찾아내기 어려운 것이 인생의 수고이다. 그래서 고통의 사람 욥은 탄식하며 친구들과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로 질문한다.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욥28:12) 그리고 욥은 스스로 대답까지 한다.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욥28:13)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어디서 비롯되는가. 지혜로운 인생의 특징이 무엇인가. 지혜의 원주소는 어디인가. 잠언에 보면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잠2:2-7上)라고 하였다. 이처럼 본문에서 말씀하는 욥의 고민과 대답이 잠언 2장의 말씀에 담겨 있다.
동물은 감사를 모른다. 인간만이 감사를 깨달아 아는 인지(認知)능력이 있다. 아무리 개나 고양이나 애완동물을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위해주고 동물 병원에 부지런히 안고 다니고 온갖 정성을 쏟아 종합적으로 돌보아 주더라도 감사는 모른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애완견한테 코트에 모자까지 씌워서 산책 시키는 광경을 보았다. 주인을 잘 만나며 개나 고양이가 엄청난 사랑을 받는다. 길거리에 버려진 개 즉, 유기견들이 주인을 잘 만나면 동물 농장처럼 관리하는 환경에서 호강할 수 있다. 요즘은 돼지를 집안에 애완용으로 키우는 집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 고양이, 돼지는 감사를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감사를 모르는 인간은 동물적이다. 감사를 아는 인간,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다. 욥이 그런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여 재산이 몽땅 다 없어지고 우애 있게 살아가던 십남매가 한 자리에서 다 죽고 자기 몸도 병들어 거반 죽어 가면서도 그의 입의 말은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고백을 하고 있다.

재난의 비보를 전해들은 욥이 일어나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禮拜)하였다. 그 예배 때에 고백한 기도문이 욥기 1장 21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는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의 찬송이 아니라 감사의 찬송이다. 욥은 재난을 당한 후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 찬송을 부른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성숙한 감사의 사람의 모습인가. 사실 시편에도 보면 감사시가 적지 않지만 분량으로 하면 불평과 탄식을 담은 탄식시가 갑절이나 더 많다. 인간이 저절로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지어지질 않았다. 모세 때에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 위험한 출애굽을 감행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홍해의 기적과 반석에서 물이 터치고 마라의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이적들을 보았으면서도 틈만 나면 불평하고 원망하였다. 우선은 눈에 보이는 모세를 향해서 원망의 말이 불길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모세에게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한 말을 하나님도 들으셨다고 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그러므로 감사해야 한다. 환경과 여건과 자신의 신체적인 악조건들 앞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감사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여성 신학자요 영성가로서 캐나다의 리전트 신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는 마르바 던(Marva J. Dawn)은 사고를 당하여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책, <안식>에서 감사에 대하여 이렇게 교훈해 주었다. “자신에게 닥치는 악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나는 내 눈이 화상을 입어 점점 흐려졌고 완전히 실명한 후에 나의 그 상태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는 않지만 내가 이와 같은 장애를 입은 후에도 온갖 선한 일을 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잃지 않게 해 주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안식이란 시간적인 개념이기 보다는 그침(ceasing), 쉼(resting), 받아들임(embracing), 향연(feasting)의 의미를 통해 안식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져 하나님이 마련하신 안식의 향연을 맘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자”고 강조하고 있다.

욥기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감사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성경에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이 그 어디에 또 있겠는가. 욥은 그런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입으로 죄를 범하지 않고 감사한 신앙고백 위에서 재기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것이 지혜다
어디서나 감사하는 것이 지혜다
무슨 일 앞에서나 감사하는 것이 지혜다.
지금 감사할 줄 알아야 내일을 살아가는 의미가 있게 된다.

언제나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만 살아가면 매사가 불평이요 언제나 원망뿐이 되고 말 것이다.

2020년이 되면 1620년 12월 26일에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 102명이 미국 동부 메사추세추 주의 플리머스(Plymouth)라는 해변에 도착하여 감사예배를 드린 지 400년이 된다. 미국 맨해튼에 1920년대 경제 대 공황기에 건축한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102층 높이인 것은 이 같은 청교도들의 수를 기념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180톤 크기의 별로 크지도 않고 시속 2마일 속도의 느린 배를 타고 거의 4개월 정도의 기간인 114일 동안 망망대해인 대서양을 건넌 것이다. 그 항해 중에 2명이 죽고 한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큰 돛이 부러질 것 같은 풍랑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파선 되지는 않았다. 항해 중에 여성 몇 명이 물결에 휩쓸려 실종되기도 하였지만 구출해 내기도 하였다. 미국 땅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원주민들의 반대와 방해로 한 달 정도를 가까운 바다에서 배회하다가 마침내 원주민 인디언들의 마음이 누그러져서 육지에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긴긴 114일 동안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감사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생의 바다에서 역경을 이기는 힘은 감사다. 살아가다 보면 태풍도 만나고 유라굴로 같은 광풍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지경이 될지라도 감사해야만 한다. 어떤 고난과 역경과 환란과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주를 따르는 자의 증거이다.

함께 읽은 다른 본문인 하박국 3장의 말씀은 선지서의 말씀 중에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다. 언제 읽어도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이다.

선지자 하박국이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하여 유다 백성들을 침략하게 하고 약탈과 살육을 감행하시겠다는 결심을 듣고 두렵고 무섭고 안타까워서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는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누가 전쟁을 원하겠는가. 누가 내 몸에 큰 병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겠는가. 누가 내 재산 다 날아가고 내 가정에 큰 슬픔이 찾아오는 것을 원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큰 심판의 두려운 날이 다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먼저 알게 된 선지자 하박국이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표현을 잘 보면 좀 이상하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라고 말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일까. 아니 환난 날을 기다리는 선지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 말씀은 앞뒤 문맥을 잘 연구해 보면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징계가 심판으로 시작되고 있으나 이것은 유다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는 심판이 아니라 장차 선민 유다 백성들을 연단하여 정금처럼 뽑아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장래의 회복과 영원한 승리와 구원의 날을 소망하면서 힘과 용기를 가지고 어떤 환란이 닥친다고 하여도 참고 견디고 기다리고 이겨내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리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는 그 유명한 선언의 말씀이 바로 하박국 2장 4절에 등장하는 말씀이다. 마틴 루터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인용된 이 말씀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보고 종교 개혁의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갈3;24, 힘10:38) 하박국 선지자는 민족의 운명 앞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가오는 고난의 소식을 듣고 썩이는 것이 뼈에 들어오고 몸은 몹시 떨렸다고 했다. 유다의 백성들이 당할 환난의 소식을 듣고 당황해하고 두려움과 무서움 가운데 휩싸인 선지자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누군가가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는가. 혹은 지금 누군가가 이런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하박국이 활동하던 시대는 한 마디로 격변기였다. 유다의 이웃한 주변국들의 정세가 그러하였다. 하박국이 활동하던 주전 612-605년경의 고대 근동 지역은 신흥 제국 바벨론이 급부상하여 주변 국가를 점령해 가고 있었다. B. C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함락한 바벨론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도 B. C605년에 갈그미스(Carchemish)전쟁을 통해서 약화 시켜 나가고 있었다.
불안한 국제 정세는 계속되었다. B. C 609년에 앗수르에 반감을 갖고 있던 남 왕국 유다의 제 16대 임금이었던 요시아(B. C 640-609)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진격해 가던 애굽왕 바로느고의 군대를 막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대하35:20-27) 요시아 임금이 전사한 후에 바벨론은 애굽의 꼭두각시로 세워졌던 유다의 제 17대 임금 여호아하스(B. C 609)를 폐위시키고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B. C 609-598)을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주전 605년에 벌어진 바벨론의 애굽 침략 전쟁인 갈그미스 전쟁의 때에 애굽의 군대를 대파시킨 바벨론의 군대가 애굽의 젊은이들을 포로로 끌어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제 1차 바벨론 포로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정치지도자들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통치자들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조공을 바치기에 급급했다. 그러하다 보니 백성을 착취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을 조롱하기 시작하였다. 예레미아 36장 20절 이하에 보면 당시의 임금이었던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기록인 두루마리를 가져 오라고 해서 듣다가 말고 겨울 궁전에 앉아서 화로 불에다가 면도칼로 베어서 모두 다 불태워 버렸다. 그 내용은 남 유다를 장차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벗어난 타락한 임금 여호야김은 그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셔서 죽음을 면하게 해 주셨다.(렘36:26) 이와 같은 격동기에 활동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하박국이었다. 그는 감사 신앙을 대표하는 선지자였다.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하는 지혜
농사의 열매가 없고 우리와 외양간에 소와 양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이 어찌 논리가 맞는 말인가. 그런데 하박국은 그런 선언을 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가뭄과 한발과 재난으로 인하여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 같은 과실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좀 이상하게 된 것 같지 않은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는데 이것이 진정한 감사요 이것이 참다운 예배자의 모습이 아닌가.

6. 25 전쟁 중에 산언덕에서 예배를 드리는 흑백 사진이 언론에 공개된 바 있다. 전쟁터에서도 예배 가운을 차려 입은 군목이 언덕 위에 마련한 제단을 향하여 서고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간이 의자에 20여명의 참전한 이웃 나라 군인들이 언덕을 바라보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다. 깊은 산야에서 전쟁으로 지친 저들이 주일날을 맞아 잠시 예배드리는 전쟁터의 예배장면이다. 저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마도 저들의 야전잠바 주머니에 가족들의 사진이나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사진이 있을 것이다. 저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어서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살아서 조국과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올해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아무 열매가 없을지라도 농부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년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욥기의 욥이 찾아 나서는 지혜도 바로 그런 지혜인 것이다. 땅속을 파 들어가면서 금과 은과 철과 동을 찾아 헤매는 광부의 심정으로 지혜를 찾아 나서되 자기 스스로는 대답을 찾을 수 없는 고통스럽고 불안한 운명의 내일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운명을 여쭈어 보고 싶은 간절함이 넘치는 것이다. 오늘을 감사해야 희망의 내일이 열리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인하여 감사하는 지혜
18절에 우리 말 성경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있는 단어가 ‘그래도’라는 단어이다. ‘웨’라는 이 히브리말은 17절에 언급된 고통과 궁핍과 폐허 가운데서도 죽으면 죽을지 언정 하나님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바예호와’란 뜻은 ‘여호와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도 사도 바울이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신앙을 강조한 것과 같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위로와 안식과 평안과 소망을 찾겠다는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2007년 12월 7일에 태안 앞 바다를 지나던 홍콩 국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프리트’ 선과 삼성 물산 소속의 화물선인 ‘삼성 1호’가 충돌하면서 유조선에 실려 있던 12,547킬로리터의 원유가 태안 앞바다를 뒤덮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가 난 후 주일을 지낸 월요일 새벽에 청년을 비롯한 몇 십 명의 교우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물과 컵 라면 등의 비상 식료품을 버스와 승합차에 잔뜩 나눠 싣고 갔다. 온 해변이 시커먼 원유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C. C. C의 청년 동원을 비롯해서 겨우 내내 200여만 명이 동원되어서 기름을 걸레로 닦아내려는 노력을 계속했고 지금은 암흑의 바다에서 다시 생명의 숨 쉬는 바다로 회복되었다. 한참을 열심히 바윗돌을 닦고 있는데 저 만치에서 잠바를 입고 마스크를 쓴 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안산 제일 교회 고훈 목사님이었다. 그는 시인 목사답게 이렇게 기도하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여! 이 바닷가의 수천 만 개의 돌들을 우리 손을 닦는 것처럼
우리 인생들을 뒤 덥고 있는 죄악을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그 고훈 목사님이 여러 해 동안 주변 아파트 주민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우여곡절 끝에 성전을 건축하고 추수감사 주일인 오늘 성전 입당예배를 드린다는 광고가 교계 신문에 나왔다. 그리고 2012년 11월 17일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란에 추수감사절을 맞는 신앙고백의 글을 실었다. 그 간증의 내용을 읽고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폐결핵을 유산으로 받아 젊은 날 7년 동안 투병을 했다. 중년에 재발하여 1년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56세 되는 해 말기암 진단을 받고 위 절반, 췌장 3분의 1, 십이지장 전부를 적출하고 임파선은 덮은 채 12년째 생존하고 있다. 그동안 수술, 항암·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4번의 폐렴, 셀 수 없는 패혈증과 만성적 영양실조로 15㎏이나 빠졌다. 골다공증과 알 수 없는 혈관 혈루로 인해 한 달 동안 수혈 받으며 생존을 위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영과 육이 분리된 어떤 상황에서 5일간 장기가 썩는 알 수 없는 위기도 겪었다. 대상포진에 따른 면역력 저하로 만성적 세균간염에 노출됐다. 지금 나는 하루 5번 식사를 나눠 하고, 매일 두 시간 운동을 하지 않으면 건강 유지가 힘들다. 나에겐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정말 내가 살아있음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 깨달음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위로의 말을 할 수 있다. 수백억 부도로 절망하는 성도에게 “나와 처지를 바꿔서 고난당해 보겠소? 건강은 기적이오. 건강하면 더 큰 물질 경영을 할 수 있소”라고 했더니 그분은 건강 주신 것에 감사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곧 기적이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가져가신 분이 하나님이면 다시 주실 분도, 지켜주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인간이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고통 중에, 재난 중에, 슬픔 중에, 질병 중에 어찌 쉽게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아 있는 목숨, 지금 죽지 않고 버티고 살아가는 이 목숨, 이 생명이란 것이 얼마나 신비한 주의 축복이고 은총인가. 다른 것 더 바리지 말고 생명 있음에 감사하고 지금 슬픔과 재난과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여전히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그런 절대 감사의 신앙을 갖는 것이 신앙인다운 지혜요 고난당하는 자의 감사가 아닌가. 18절에서 욥은 선언한다.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23절,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그리고 28절에서 다시 한 번 신앙을 고백한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악을 멀리하며 주를 친근히 하여 경외하는 감사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절대감사 신앙의 주인공이 되자. <실락원>(Paradise Lost)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44살에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형편을 이렇게 받아 들였다. “주님께서 내 육안을 어둡게 하심으로 주님만을 뵐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찰스 왕이 죽은 후에 크롬웰 정부의 외교비서관이었던 그는 실명 한 후에 재산도 잃게 되었다. 실의와 고독 속에서 아내와 딸이 받아쓰게 해서 완성한 것이 <실락원>이며 그 후에 쓴 <복락원>과 <투사 삼손>을 비롯한 이 3편의 서사시는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 역사적인 작품들이 되었다. 신앙인의 감사란 무엇인가. 물질적인 것을 잃고 영적인 것을 얻는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순간적인 것을 포기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감사 생활을 해야 한다.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것을 버리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벧전1:4) 유업을 향한 소망을 품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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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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