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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는 하나님(출8:1-1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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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3-24 13:05 조회 23,394 댓글 0
 
죠셉 M. 마셜 Joseph M. Marshal III 의 <그래도 계속가라>Keep Going 는 책이 있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에서 살면서 인디언 부족들의 삶을 관찰하고 좋은 글과 시나리오 등을 쓰고 영화의 배우로도 활동한 역사가이고 민간 전승연구가이다.

그 책에 나오는 일화다. 몇 해 전에 제레미라는 이름의 청년의 아버지가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이 아버지의 병 회복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드렸지만 결국은 아버지는 바싹 마른 채 항암치료 중에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젊은 아들 제레미는 그 후에 마음에 슬픔과 혼란과 분노가 소용돌이 치고 괴로운 나날을 지내야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이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마음에 평화도 없고 자유함도 없었다. 세월이 지나던 어느 날 인디언 부족들이 ‘늙은 매’라고 별명 붙여 부르는 한 노인을 찾아 갔다. 그는 팔십이 넘은 인디언이었다. 그는 태어난 곳에서 600km 이상 벗어나 본적이 없이 살아 왔다. 그 노인은 “무슨 일이든 간에 쉽게 얻어진 것으로부터는 가치 있는 것을 얻기란 어려운 법”이라는 교훈을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 늙은 매는 평생을 땅 파고 씨앗을 뿌리고, 말을 잘 조련하고, 사냥하고, 집을 잘 짓는 대목수였다. 울타리의 말뚝은 평생 얼마나 많이 박았는지 그 수를 자신도 헤아리지 못할 정도이다. 그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실망과 비탄과 슬픔의 쓰라림도 잘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일이 잘 되었을 때의 성취감이 주는 만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혹과 조롱 앞에서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붙잡고 살줄도 아는 의지의 노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늙은 매라고 불렀고 그의 가족들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를 만나러 간 제레미는 그 노인에게서 큰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평온한 태도........
대상을 바라보는 흔들림이 없는 눈길........

바로 이 두 가지였다. 그 늙은 매는 바로 제레미의 할아버지였다. 제레미는 오늘 날까지 할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문제, 어떤 위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할아버지는 늘 평온하면서 단호하였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늘 깊고 잔잔한 연못의 고요함과 같은 평화로움이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는 고목이 된 사시나무 아래로 손자 제레미를 데리고 가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해 주었다. 그 때에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며 음악소리를 냈다. 그 때에 할아버지가 “난 어려서부터 사시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바스락거리면 이상하게 내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목소리가 생각나더구나.”라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마치 하나님의 음성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제레미는 아무리 들어 봐도 나뭇잎 소리는 그저 나뭇잎 소리일 뿐이었다.
그 때 제레미가 할아버지 늙은 매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왜 인생이 이렇게 사는 게 힘이 들죠?”

부는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사시나무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노랫소리처럼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그 소리를 즐기기라도 하듯 나무를 쳐다보시더니 한참 후에 해 주신 전설 같은 긴 이야기가 있다. 아무도 못 올라가는 구름 위로 치솟은 바위를 망치와 정으로 쪼아서 50여명이 대를 이어 결국은 구름 위 맨 꼭대기까지 사람 키 절반만한 높이의 돌계단을 깎아 만든 이야기이다. 그리고 일을 다 마친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높은 계단의 첫 계단에 이런 말이 새겨 있었다.

“그래도 계속가라”
Keep Going

여기서 200여 페이지 분량의 늙은 매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는 끝난다. 저들 석공들이 대를 이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눈과 비와 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무릎 쓰며 애쓰고 수고한 결과가 무엇인가.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애굽에서 고난을 당하고 압제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동원하신 재앙이 10가지였다. 그 모든 재앙이 차례대로 진행되도록 바로 임금의 마음은 점점 완악해져만 갔다. 결국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인 애굽 전국의 장자를 쳐서 죽이는 재앙 앞에서 바로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 삼으셔서 아론의 손에서 던져진 지팡이가 바로 임금 앞에서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면 다시 지팡이가 되는 이적은 하나님이 바로 임금에서 보여주는 아주 사소한 징표에 불과했다. 그 정도의 이적은 애굽의 마술사들도 할 줄 안다고 달려들던 애굽 술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뱀을 아론이 던진 하나님의 지팡이 뱀이 모조리 다 삼켜 버렸다. 이 험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은 이처럼 영적 전쟁에서 악한 세력을 삼켜 버리듯 대적하여 이기는 승리의 삶을 나날이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씩 차례대로 보여주신 재앙이 나일 강물을 비롯한 전국의 모든 물들이 피로 변하게 하는 재앙이었다. 그래도 바로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팡이로 뱀을 만들듯이 다시 애굽의 술사들을 불러서 물이 피가 되게 하는 똑 같은 이적을 행하게 함으로 점점 마음만 더 완악해져갈 뿐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매우 독하고 악한 바로 임금의 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요즘도 세상에는 이처럼 독하고 악한 마음에 사로 잡혀 사는 이웃들이 적지 않다.

오늘의 본문은 그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두 번째 재앙에 관한 내용이다. 물이 피가 되는 재앙, 개구리 재앙, 티끌 재앙, 파리 재앙,  가축이 죽는 재앙, 악성 종기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이 천지를 덮는 재앙 그리고 마지막 재앙이 사람과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가진 것의 처음 난 것을 죽이시는 재앙이었다.

살아가다가 보면 재앙이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재앙을 만날 때에 우연한 일로 여기거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정도로 여기고 살면 안 된다. 우리는 각종 재앙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정도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 각종 천연 재해와 재앙 앞에서 마음 깃을 여미고 ‘왜’ 라는 질문을 하면 역사 앞에 겸비한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참된 모습이 아니겠는가. 오늘 날도 세계 처처에서 별의 별 재해 소식이 들려온다. 그 모든 천연 재해 앞에서 우리는 재난 그 자체만 생각하지 말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의지해야만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힘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 갈 수 있는 위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은 개인의 건강과 수명뿐만 아니라 모든 길흉화복과 흥망성쇠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뭘 좀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있어도 그것을 내가 잘해서 잘 한다고 여기면 안 된다. 그것이 그 어떤 지혜이든 그 어떤 힘이든 그 어떤 능력이든 자기가 잘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과 여건과 재능과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공급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순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었다면 아브라함이 나이 백세가 되도록 아들 낳기를 기다리고만 있었겠는가. 제 힘으로 척척 되는 일이라면 다윗이 왜 십 수 년씩 광야로 동굴로 피신 다니면서 지냈겠는가. 제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무엘 상 1장에 등장하는 한나가 성소에 엎드려서 울면서 탄식하며 “아들 한명만 주시옵소서.” 하고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온 나라의 물이 다 피로 변하는 재앙을 목격하고도 전혀 마음에 동요가 없던 바로 임금의 완악한 모습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일주일 쯤 후에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어 내시려는 목적은 너무나 분명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이는 이미 출애굽기 7장 16절에서도 말씀하신 내용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대적인 의지는 분명하셨다.(출5:1, 5:3)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결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압제를 받아 보았거나, 자유를 빼앗겨 보았거나, 인권을 유린당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자유와 해방의 숭고함을 절절이 깨닫고 체험으로 알 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는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지난 400년 동안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의 신분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시다. 사람은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이러 저러한 모습으로 눌리고 결박당하고 억압 받으며 진정한 자유와 온전한 자유가 없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각종 질병으로 인해서 혹은 여러 가지 장애나 산업재해나 상해로 인해서 혹은 경제적인 가난과 궁핍으로 인해서 결박을 당하고 억압을 받고 답답하게 연약하게 억울하게 속상하게 핍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심지어는 가정에서 부모나 혹은 반대로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학대를 받거나 극심한  핍박을 받으며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가적인 압제나 억압이나 탄압 속에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에 점점 심각해져만 가는 북한의 실상과 탈북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보라.

하나님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와 같은 압제와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백성들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선언의 말씀이 나온다.

어느 날 예수께서 고향 마을인 나사렛에 방문하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 가셨다. 그리고 늘 하시던 대로 성경을 펼쳐서 읽으셨다. 이사야 61장의 말씀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이 말씀과 더불어 엘리야 시대에 많은 홀로 사는 여인들이 있었으나 오직 시돈 땅에 사는 사렙다의 한 과부만이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이적과 자유케 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축복을 받은 것을 언급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당시에 얼마나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나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이 국경을 넘어 엘리야 선지자를 찾아 갔고 결국은 나병이 떠나가고 치료 받는 축복을 받지 않았느냐고 언급해 주셨다. 이 이야기를 듣던 나사렛의 동네 사람들은 예수께 화를 내며 안식일 날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결국은 동네 어귀의 낭떠러지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을 때에 예수께서는 저들의 위협을 피하셔서 다른 마을로 피신하신 적이 있다.

여기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에 보면 네 가지의 상황이 소개된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에 대하여 언급해 주셨다. 그렇다. 가난한 자가 누구인가. 너무 고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이니까. 그 가난이란 것이 경제적인 가난이든 심령의 가난이든 다 마찬가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주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가난이란 영적인 상황과 물질적인 상황을 모두 다 포함한다. 사람이 가난을 겪어 보면 일상적인 풍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적은 것은 적은 것이니 말이다.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이란 것도 그렇다. 배고픈 자에게는 당장 한 끼의 밥 한 상이 복음이다. 헐  벗은 자에게는 따뜻하고 단정한 옷 한 벌이 복음이다. 몸과 마음이 아프고 병든 자에게는 그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치료되는 것이 복음이다. 정신적으로 우울한 이들에게는 평범한 것 같은 일상생활 중에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 복음이다. 귀신에 눌려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 귀신이 떠나가고 깨끗함을 입는 것이 복음이다. 성경적인 복음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인간의 죄와 악을 깨달아 알고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복음이다.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복음이다. 사망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이 복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로마서 3장 10절 이하의 말씀처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0-18)고 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복음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으시다. 이것을 깨닫고 알고 믿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죄로부터 자유해지고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하신 은혜와 진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자로서 복음의 축복을 경험하고 누리며 사는 자이다.

뿐만 아니라 포로된 자에게 주어지는 자유,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는 자유의 가치와 축복을 깨달아 알고 혜택으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요 은혜요 축복인 것이다. 누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압제 속에 살고 억압 속에 살고 박해와 핍박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살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의외로 이와 같은 압제와 억압 가운데서 사는 불쌍한 영혼들이 의외로 너무나 많다. 하나님은 이 땅에 그와 같이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바로의 완악한 압제와 같은 악정으로부터 건져 내고 벗어  나게 해 주시는 구원의 주님으로 찾아오시는 전능자이시다. 우리를 슬픔과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하게 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시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왜 슬퍼하느냐”란 복음 성가가 있지 않은가.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픈 있어도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널 붙들어 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하는 가사로 되어 있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시되 슬픔과 가난과 질병과 걱정과 두려움과 염려와 어두움과 고통과 불안 속에 포로 되어 있는 있고 눌려 있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능력의 아버지이요 권능의 주님이시다. 자유하게 된다는 것은 이론이 아닌 현실의 문제이다. 생각이 아닌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현장의 생생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그 고난과 고통과 압제와 억압의 현장에 오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위한 선언인 것이다. 이런 은혜의 날과 감격의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광야로 불러내시려는 목적은 단 한가지다.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출8:1) 즉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민족으로 삼으시려고 출애굽 시키시겠다는 선언이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과 압제의 땅에서 불러내시는 제 일 목적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들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역사적인 대업을 시작하시는 장면이다. 그러한 민족 구출 대업의 선봉에 서서 노년기 40년을 쓰임 받았던 모세를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던 인물이 여호수아였다. 그 여호수아가 나중에 광야 생활을 마치고 모세마저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없는 상황에서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을 12지파와 점령하여 분배한 후에 세겜 성에 불러 모은 백성들 앞에서 이 같이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여호수아 앞에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수24:18)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여호와를 여호와로 섬기는 것이 신앙이다.

2012년 3월 17일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21면에는 넓은 지면을 가득 채운 대의그룹 회장 채의숭 장로에 대한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1939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의 가정은 4대째 기독교 집안이며 3대째 장로 집안이다. 오늘 날은 그의 삼형제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550여명이 모두 다 기독교인이다. 그는 사업가요 경제학 박사요 대학 교수요 장로인데 최근에는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 평생 나라 안과 밖에 100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하겠다던 그의 꿈이 오늘 날까지 98교회를 건축해 봉헌하는 축복을 받았다. 자손들이 이 거룩한 사역을 이어서 대를 이어 1000교회 건축의 꿈을 이루는 가문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평범했던 시골 소년의 꿈은 차근차근 이루어 졌고 오늘 날은 10여개의 계열 회사를 운영하는 대의 구룹의 회장이요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내인 김효신 권사와 함께 은총의 노년기를 지내고 있다.

오늘 날의 그를 만든 신앙 원칙이 있다.

주일을 성수하라.
십일조를 제대로 드려라.
주의 종에게 순종하라.
가정과 교회를 소중하게 여겨라.
이웃에게 주께 하듯 하라.

결혼 생활 45년 동안 아내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는 그는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십의 3조를 드려 왔고 요즘은 수입의 십의 9조를 드려가며 주의 일에 헌신해 가고 있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으니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상 에게 절하고 죽은 신에게 빌며 복을 달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겨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까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 리더십 저술과 강의의 대가인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궁극적인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충동적인 것의 노예다.”
(The person who forgets the ultimate is a slave to the immediate.)

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이고 첫 째 되는 목적으로 정하고 살아가지 못하면 항상 그 무엇엔가 충동적으로 끌려 다니며 보고 듣고 만져 지는 것으로 인하여 범죄하고 욕구와 욕망의 불만족을 채워보려는 본능적인 것의 지배에 빠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즉 ‘들으라 이스레엘’인 ‘쉐마 이스라엘’의 말씀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5)고 선언해 주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이다. 경배찬송인 찬송가 14장 1절을 힘차게 불러 보라. 그리고 그런 삶을 가꾸며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

주 우리 하나님 하늘에 계시니 온 천하 만민 주 앞에 찬송하네
이 천지 만물도 주 앞에 엎드려 그 거룩하신 이름을 늘 높이세.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
모든 운동 경기에는 심판이 있듯이 인생살이에는 피할 수 없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거룩하고 장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눈길과 손길이 늘 우리 곁에 있다.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이다. 둘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 앞에서 드디어 마음에 동요가 시작된 바로 왕의 모습이 출애굽기 8장 8절에 나온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을 대적하던 대적자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순간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도록 기도하고 주를 더욱 더 의지하자. 그러나 개구리가 눈에서 사라지자 바로 왕의 마음이 금방 또 바뀌었다. 여전히 다시 바로 왕의 마음이 완강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고 했다. 한 사람 정치 권력자 바로 임금의 마음이 여전히 완악해 져버리는 그 배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해 가시는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가 있으시다는 말이다.

이것이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고 이것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고통 받는 삶의 중심에 개입하시는 방법이시다. 모세 때의 그 하나님은 오늘 날도 살아계시다. 행복과 불행,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 죽음과 영생 가운데서 싸우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손길과 말씀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시 때때로 말씀하시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섭리대로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과 평화를 깨달으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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