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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아는(창6:5-1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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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3-03 23:57 조회 24,978 댓글 0
 
국제적으로 명망이 높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아온 강영우(1944-2012. 2. 23)박사께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돈독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경기도 양평군의 문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때인 중학교 시절에 축구를 하다가 사고로 실명하게 된 이후로 68세에 하나님 앞으로 가기까지 앞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사고를 당하던 해에 어머니도 돌아 가셨고 그 후 누이마저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어려서 고아 아닌 고아가 되고 말았다. 18살의 늦깎이 맹학교 학생 시절에 만난 지금의 아내인 석은옥 여사와의 만남이 그의 불운했던 운명에 하나님의 축복의 빛이 임하는 시작이었다. 당시에 그의 아내인 석은옥은 숙명여자대학교 학생이었다. 서울 맹학교에 자원 봉사를 다니던 그녀는 학생이었던 강영우와 사랑하게 되었고 나중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강영우 청년은 그녀와 결혼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강영우 박사는 하나님 곁으로 가기 전에 부인 석은옥 여사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편지를 남겼다.

“50년 전,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입니다. 더 오래 함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 주지 못할 것이라서.....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두 아들들에게는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함께 한 추억이 내 마음 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라는 편지를 또한 남겼다.

그는 지난 10월에 최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성탄절에 손주들을 포함한 온 가족들과 함께 생애 마지막이 될 가족 모두와의 행복한 시간을 가졌노라고 추억했다. 그는 담담히 몇 개월 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곁을 떠나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 왔다. 그는 지난 해 성탄절 즈음에  주변 사람들과 작별을 준비하는 이런 편지도 이 메일로 남겼다.

“올해는 그 어떤 해보다 뜻 깊고 아름다운 한 해였다. 아내와 두 아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평생을 살아왔다. 나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역사들을 이뤄내셨다. 6. 25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었다. 두 눈을 잃고, 나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나로 인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왔다.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 받았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했고 은혜로웠다.”

시각장애의 충격과 어머니와 누나가 이어서 세상을 떠나는 불행 앞에서 처절한 날들을 보내야 했던 그에게 지금의 아내인 석은옥 여사와의 만남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축복의 만남이요 전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새로운 축복의 세계를 향한 꿈의 성취와 희망을 향한 도전의 시작이었다. 그들 부부와 안과 의사가 된 큰 아들 강진석과 오바마 대통령 곁에서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는 강진영 군은 그의 자랑이요 하나님이 주신 가정의 축복의 열매였다. 그 자신이 이미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평생을 다 문화 국가인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는 주인공으로 살아 왔다. 그는 시각 장애를 가진 신분을 극복한 대학교의 교수요 미국 정부의 행정부의 중심에서 장애인권위원회의 정책 차관보라는 높은 보직을 받고 역량 있게 활동해온 인물이다. 미국 루즈벨트 재단은 126명의 미국을 빛낸 인물들 중의 한 사람으로 강영우 박사의 이름을 등재해 주었다.

그는 시각의 장애, 고아가 되어 버린 가족과의 사별, 가난과 두려움과 외로움과 고독의 수렁에서 헤쳐 나왔고 절망의 높은 장벽을 수도 없이 뛰어 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량이 있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왔던 성숙한 심성의 그리스도인답게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가 남긴 책들 중에서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도전과 기회 3C 혁명>, <오늘의 도전 내일의 영광>, <원동력>과 같은 책들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꼭 읽게 하고 싶은 너무나 좋은 책들 중의 하나이다. 원동력과 같은 책은 <Today's Challenges, Tomorrow's Glory>라는 제목의 영문판으로 출판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본문에 보면 그와 같은 시대적인 신앙 정신을 품고 살아갔던 인물 노아에 대한 말씀을 대하게 된다. 창세기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는’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이 오늘 설교의 제목이다. 노아 당시의 시대 상황이 본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이 땅 위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창세기 6장 2절은 당시의 결혼 풍습을 엿보게 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창세기 4장 26절에 언급된 셋의 후손을 일컫는다. 아벨을 죽인 가인의 시대에 아담이 하와를 통해서 낳은 새로운 아들이 셋인데, 셋의 아들인 에노스의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하나님 중심 신앙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그 셋을 통해서 태어난 후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반면에 ‘사람의 딸들’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죽였던 가인의 후손들을 일컫는 상징적인 내용의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의 영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못하는 육신적인 생활에 점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러한 여건에서도 사람들의 생활상은 점점 번성해 갔다. 4절에 말씀하는 ‘네피림’이란 노아의 홍수 시대 이전에 타락과 방종과 전쟁과 압제와 약탈을 일삼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막 살아가던 당대의 부호들과 귀족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와 같은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셨다. 그와 같은 시대 상황을 향한 하나님의 심경이 기록된 말씀이 오늘 본문의 시작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6:-5-6)라고 했다. 이처럼 마음 아파하시고, 타락한 인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탄식하시던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고 재창조의 질서를 회복해 가시려는 그 시대에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살고, 막 살고, 되는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인간적인 욕구를 따라서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육체적으로 살아가던 때에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하나님의 고민을 보게 된다. 천지 만물과 그 가운데 공중 나는 새들과 땅 위의 온갖 동물들과 그 중에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근본적인 창조자의 고민과 슬픔과 번민과 회의와 갈등 가운데 마음 아파하며 탄식하고 근심하고 계신 것이다. 그처럼 의인을 찾기 어려운 때에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이것이 노아의 노아다움이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쉼과 안식’이란 의미이다. 세상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문제다. 예레미야 5장 1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함부로 막 살아가는 모습이 문제가 아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정의와 공의의 편에 서지 못하거나 나 자신이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크고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한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죄도 한 사람 아담에게서 왔고 구원도 둘째 아담이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했다.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하여금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게 하시지 않았는가.

세월이 지난 나중, 창세기 18장에 소개되는 아브라함 때에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생각하며 기도했던 그 유명한 기도의 바탕은 무엇인가. 소돔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가. 사십 오명이냐, 사십 명이냐, 삼십 명이냐, 이십 명이냐, 열 명이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인이 없는 사회, 의인이 없는 국가, 의인이 없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기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노아와 같은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와 같은 믿음의 주인공을 찾고 계신 것이다.

여호와께 은혜(恩惠)를 입은 사람.
노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했다. 원 뜻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다. 노아의 의로운 성품과 행실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믿음이 가고 신뢰가 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호의와 자비와 사랑과 보호를 받을 만한 그릇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의 마음에 들고 위 사람의 눈에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중하지 않은가.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부부가 되고, 혹은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디에 취직을 하거나 채용이 되거나 등용이 되거나 하는 바탕이 무엇인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똑 같이 쌓여 있는 과일 한 봉지나 생선 한 마리도 구매자의 눈길을 끌고 마음에 들어야 선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노아는 당대에 하나님의 눈에 들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쌍둥이 형제라도 야곱은 하나님께 사랑받았고, 에서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았다.(말1:2-3, 롬9:13)

사람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도 귀하지만 평생토록 매 순간마다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하나님 앞에 가기 까지 계속하여 은혜를 입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노아는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와서 포도 농사를 했다.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잠이 든 모습을 둘째 아들인 함에게 보인 적도 있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며 95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까지 늘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인생으로 살아갔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은혜 입기를 사모하고 의지하는 생활이 아닌가. 사람이 제 노력과 제 수고와 제 열심만으로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자상하신 도우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고 겸손히 간구하며 주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와 보살피심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건설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방주를 만드는 재료와 크기와 높이와 격식과 모양 등 모든 것들을 일일이 말씀하셨고 노아는 그대로 다 순종하였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나날은 방주를 건설하던 일백년 동안 이어졌다. 부패한 인간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방주를 건설하라고 하신 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창세기 6장 14절에 보면, “너는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방주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아를 위한 축복의 시작이요 언약의 시작이요 장차 보게 될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었다. 거기에 ‘고페르 나무’라는 나무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잣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cypress'라는 이 나무는 예전에 보던 개역성경에는 ‘잣나무’라고 했고 공동번역에는 ‘전나무’라고 했는데 소나무 과의 일종인 편백나무나 측백나무 종류로 나무의 색과 향이 짙고 단단해서 배를 만들거나 성문을 만드는 등에 사용되는 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마음에 반복되는 확신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새로운 축복의 시작인 것이다.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여 사용하시고 미리 깨달음을 주셔서 인도하신다. 노아는 500살 때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그리고 10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 그리고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다. 그렇게 보아도 100년이란 그리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런 긴긴 세월 동안 노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갔다. 오늘 날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건강이나 돈인가 아니면 출세인가, 명예인가, 권력인가, 인기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가. 창세기 6장의 끝과 7장의 긴 내용을 단숨에 읽어 보면 노아는 방주를 짓던 100년 세월동안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준행하였다.(창6:22, 7:5)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나지 않고 순종하며 준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은혜의 출발이요 은혜를 유지하는 첩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노아에게 있어서 특징적인 은혜를 유지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遵行)하였더라.”(창7:5)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 준행했다’는 말씀이다. 더러 더러 자기 유익한대로 판단해서 어떤 것은 준행하고 어떤 것은 거역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명령을 철저하게 다 준행한 것이다. 이것이 노아 당시의 세상 사람들과 노아의 다른 점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은혜 생활이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다 실수나 부족이 있고 죄를 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저들이 성경적으로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자리매김하는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전히 부족함이 있고 실수고 있고 죄를 범한 적도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려 한 것이다. 이것이 소중하다. 인생이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는가.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었다.

의인(義人) 노아.
“노아는 의인이요.”(창6:9)라고 했다. 하나님께 버림 받지 않고 하나님이 동행해 주신 것이 의인의 특징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친구라도 의리가 상할 수 있다. 가족이라도 형제자매간이라도 아니 부부라도 의리가 상할 수 있다. 세상은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날마다 시끄럽고 언제나 안정될 날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그러면 누가 의인일까. 시편 84편 5절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 그렇다. 의로운 사람 즉 의인이 누구인가. 항상 언제나 매 순간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자하는 인생이 바로 의인이다.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알아서 척척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에 붙들려서 하나님을 종 부리듯 하며 하나님을 작게 생각하며 사는 자를 결코 의인이라 할 수 없다. 의인이란 매 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힘의 근원 삼고 살아가는 자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이 의인이요, 이삭이 의인이요, 야곱이 의인이요, 요셉이 의인이요,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이 의인이었다. 여인들로 하면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의인이요, 시어머니 나오미 따라 나섰던 룻이 의인이요, 부모 일찍 잃었으나 하나님 편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금식하던 에스더가 의인이요 , 아들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애원하며 기도하던 중에 아들을 선물로 받은 사무엘의 어머니가 된 여인 한나가 의인의 믿음을 가진 여인들이 아닌가.

신약의 신앙으로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가 의인이요(고후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고 살아가는 자가 의인이다.(엡2:10) 또한 심령으로 새롭 게 된 자가 의인이요(엡4;2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의인이다.(엡4;2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사는 자가 의인이요(골3;9)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인생이라야 의인이다.(골3;10)

베드로의 교훈대로 하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들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의인의 영광이요 축복인 것이다.(벧전2;9) 이런 백성들은 어두운 데서 나와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세상 중에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엊그제 녹번역 4번 출구에서 전도하는데 어느 60대 초반의 말끔한 복장의 남자 분이 내가 건네는 전도지를 받아 들면서 “저도 전도하고 돌아오는 길인데 전도하면 너무나 좋으시지요.”하고는 총총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러므로 의인이라 여김을 받으려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 살아가면서 악한 행실을 고치고 공의를 구하며 의를 심으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호세아 10장 12절에서,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의인은 죄에 대하여 죽고 죄를 멀리하며 죄에서 떠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복이 있고 그래야 배가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했다.

당대에 완전(完全)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던 자.
신앙생활은 이랬다저랬다 하면 안 된다. 노아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놀라운 칭찬을 받은 인물이었다. 완전한 자라는 뜻은 하나님 앞에서 완벽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면,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인물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가족을 구원한 인물이며,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라 살아가던 ‘의(義)의 상속자(相續者)’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라는 노아에 대한 평가는 마치도 장인이 세련된 솜씨와 경륜을 가지고 악기나 소품들을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씨름했던 신앙인의 모습을 칭찬하는 말씀인 것이다. 완전한 자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자이다. 노아 때의 세상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 보시기에 한탄스럽고 근심스럽고 부패하여 포악하게 함부로 막 살아가던 때에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경건했고 노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 노아는 방주를 짓는데 100년이 걸려도 그 긴긴 세월을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며 살아갔다. 그러므로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할 줄 알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평가를 영원히 받게 된 것이다. 예수님도 노아의 시대를 언급하신 적이 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17:26-27)라고 경고하셨다. 요즘은 마치도 노아의 때와 같은 인간성의 부패와 영적 타락과 복음의 변질로 인해서 세상 끝 날의 징조가 점점 확연해져만 가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 할 줄 아는 경건한 믿음생활의 승리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요즘 우리는 탈북자의 강제 북송 소식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자유의 숭고함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9년 후인 1919년 일본이 고종황제를 독살했다. 장례식 날인 3월 3일에 대한독립선언을 하려다가 탄로가 나자 이틀을 앞 당겨서 3월 1일에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의 처처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을 벌린 것이다. 일본의 강제 진압으로 7,509명이 죽었다. 15, 850명이 다쳤다. 45,000명이 넘는 이들이 잡혀서 감옥에 갇혔다. 715채의 집이 불탔다. 47곳의 교회가 불탔다.  당시 기독교인은  국민 전체의 1. 35 정도였다. 그러나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중에서 기독교인이 16명이고 감리교인이 9명이었다. 감옥에 투옥된 이들의 40%가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는 애국하는 종교요 기독교인은 애족하는 이들이다. 독립 선언서에는 자유와 평화와 인권과 자주독립과 수난과 희생의 숭고함과 애국심과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선언으로 가득하다. 우리 한 민족은 자랑스러운 민족이요 위대한 민족이다. 경기도 화성시 발안면 제암리에 가면 제암리감리교회가 있다. 일본 경찰은 1919년 4월 15일 오후에 수원의 제암리 교회에 신자들을 모이게 한 후 문을 폐쇄하고 교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23명의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그 해 4월 5일에 발안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 교회 신도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일제의 학정의 후유증과  북한 공산당의 악랄함이 아직도 계속되는 오늘 날이다.

요즘처럼 노아의 때와 같이 부패와 타락이 점점 심해져만 가는 때에 노아와 같은 시대적인 인물로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믿음을 지켜 나가는 복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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