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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속사람을 강건하게(엡3:14-19)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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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2-12 01:35 조회 26,431 댓글 0
 
사람들은 헬스클럽에서 근육 운동을 비롯한 신체 단련을 하거나 에어로빅으로 체력을 키운다. 혹은 수영이나 테니스나 배드민턴이나 등산이나 골프를 통해서 겉 사람이 강건해진다. 물론 여럿이 함께 하는 운동들은 사회성을 길러주고 단합하고 협력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인내심과 승부의욕을 갖게 하는 등의 유익이 적지 않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의 말씀처럼 육체의 연단은 육체에 유익이 있다. 그러나 경건 생활은 현세와 내세로 이어지는 영원한 유익이다.

그러므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려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원리와 방법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선서 여러 곳에서 겉 사람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과 속사람의 요구와 기대를 따라서 사는 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사람의 겉으로 보이는 것은 겉 사람이다. 어떻게 생겼느냐, 피부색이 어떠하냐, 키가 크냐 작으냐, 뚱뚱하냐 홀쭉하냐는 것은 겉 사람의 외모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격이 급하냐 느긋하냐, 친절하냐 무뚝뚝하냐, 이기적이냐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격이냐, 착하냐 사나우냐, 정직하냐 거짓되냐, 의로우냐 불의하냐는 것은 속사람의 문제이다. Inner Being 즉 속사람인 그의 성품과 됨됨이와 성향과 기질과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의 문제이다. 속사람이 바로 그 사람 자체이다.

어느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컬투 쇼라는 것이 있다. 기독교 방송이나 극동 방송 혹은 클래식 음악 방송 말고는 잘 들을 기회가 없고 더군다나 운전 중에 잠시 듣는 이외에는 라디오 방송을 들을 기회가 별로 많지 않는 여건이라서 그런 방송 프로그램이 있는 것조차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접해 보니 무진장 웃기면서도 교훈이 담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풍자한 사연들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 회식이 있었다. 중소기업이라 사장과 직원들이 다 같이 회식을 한 것이다. 이차 삼차 술에 잔뜩 취하자 나중에는 모텔 방을 얻어서 집단 투숙을 하게 되었다. 서도 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에 취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잠이 들었던 사장이 자다가 말고 목이 말라서 마실 물을 찾았다. 방에도 없고 복도에도 없고 현관 안내실의 종업원도 없는 깊은 밤의 으슥한 모텔 방에서 더듬더듬 건물 밖으로 나가서 길 건너 편 저만치에 있는 24시 마켓에 들렀다. 그런데 종업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었다. 큰 비명 소리에 따라서 놀란 사장이 자신의 복장을 보니 사각 팬티 차림에 양쪽에 양말을 신고 오른 쪽 발에는 슬리퍼를 왼쪽 발에는 구두 한 짝을 신은 거의 반나체로 가게에 들어 선 것이다. 종업원의 비명 소리에 놀라서 자신의 복장을 알아차린 사장은 물을 사 마시기는 커녕 얼떨결에 자기도 놀라서 가게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문제는 그때부터 벌어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골목에 한 30여 개 쯤의 모텔들이 길 양편에 늘어서 있었다. 이 모텔 저 모텔 드나들며 아무리 찾아도 어느 모텔인지도 모르겠고 방 번호는 더군다나 전혀 기억에 입력이 되어 있질 않았다. 손에 든 돈도 한 푼 없이 물을 사 마시겠다고 술기운에 바깥으로 나섰던 것이다. 얼마를 헤매었는지 날이 밝아 오는데 찾아 드는 모텔마다 미친 사람 취급을 하며 그를 내어 좇는 것이었다. 덜덜 떨면서 모텔 골목을 지나는데 이미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면서 일찍이 출근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킥킥거리며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힐끔 거리며 처다 보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몇 블록 쯤 지나면 부모님 댁인 것이 생각났다. 그 때 까지도 술이 잘 깨어나질 않았다. 이른 아침에 부모님 댁 아파트에 찾아가서 현관 문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하고 문을 연 것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동생 내외의 제수씨가 조반 준비를 위해서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있다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 제친 것이다. 사각 팬티만 입은 시 아주버니와 그 당황스러운 방문객을 맞은 제수씨의 겸연쩍어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웅성거리를 소리를 듣고 안방에서 나오신 부모님이 “이런 미친 놈 같으니라고......”하며 혀를 끌끌 차는 것으로 장면이 끝났다.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살아가는 모습과 겉 사람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중소기업의 경영자, 사장, 상급자, 아들, 남편, 아버지, 연 매출이 얼마이며 직원이 몇 십 명 혹은 몇 백 명 아니 몇 천 명인 회사의 CEO 뭐 이런 직함들은 어떻게 보면 다 겉 사람에 관한 것들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기도하였고 특별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15절에 보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슨 기도의 내용을 갖고 기도하였는가. 16절에 보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했다. 자, 그러면 어떤 신앙으로 살아가야 속사람이 강건해 질수 있을까.

성령으로 말미암아(through the Spirit).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숙해지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힘이 공급되어야 변화도 가능하고 성장도 가능하고 성숙한 삶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다른 힘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이다. 16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그런 교훈을 준다. 여기서 말미암는 다는 말은 영어로 ‘through'라고 했다. 즉 ‘무엇 무엇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가. 성령을 통해야 한다. 성령이 시작이다. 성령이 대답이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승용차의 배터리에 이상이 생겨서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점검을 통해서 원래 자동차가 출고될 당시의 종류의 새로운 배터리로 무상 교체를 받을 수 있었다. 자동차는 아무리 연료 탱크에 연료가 가득해도 전기 점화 장치에 이상이 생기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전기 발화를 통해서 엔진이 작동하기 시작해야 엔진의 운동력이 크랭크축을 통해서 양쪽 바퀴로 전달되어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크고 좋은 차라도 일단 배터리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시동조차 살아나질 않는다. 그러므로 다 중요하지만 배터리가 중요하다. 신앙생활의 시작도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야 한다. 친구 따라서 여건 따라서 교회 다닐 수 있다. 부모나 자녀나 혹은 부인이나 남편이나 가족들 중에 그 누군가를 따라서 억지로라도 교회에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활은 아직 아니다.

성령은 신앙생활의 모든 것의 시작이요 끝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의 전부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었다. 가령 누가복음에 보면 복음서 전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역사의 기록인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1장 15절에 보면 세례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탄생되었다고 했다. 1장 67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였다. 천사 가브리엘은 예수를 잉태하게 될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의 너를 덮으시리니”(눅1;35)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당시에 메시아를 기다리며 지내던 시므온 이란 사람도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고 했다. 그 다음 절에 이어서 보면 성령은 시므온에게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올라갔다가 아기 예수를 그의 부모와 함께 만나는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되었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임했다.(눅3:22) 예수는 광야에 나가서 사십일씩 금식을 시작할 때에도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의해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성령에 이끌리어 그렇게 한 것이었다.(눅4;1) 광야에서 금식하는 기도를 마치신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눅4:14)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안식일 날에 이사야서의 말씀을 펼쳐서 전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고 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도 보면, 예수는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선언하셨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마치도 공기와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 공기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 말씀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성령이 대답이다. 성령 받아야 신앙생활이 제대로 시작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활이어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작은 죄도 크게 느껴져서 회개하게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간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생활에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잘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주를 위해 살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행복하게 살아간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남을 섬기고 돌보는 삶을 살아간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소망과 장래에 희망이 넘쳐 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이 능력으로 임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
17절 말씀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라고 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신다. 그렇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특징은 내 안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임재하시는 것이다. 에베소서를 관찰해 가며 읽어 보면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자주 반복된다. 1장 7절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15절에 ‘이로 말미암아’, 2장 8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18절에 ‘그로 말미암아’, 3장 6절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10절에 ‘교회로 말미암아’, 12절에 다시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피를 믿는 믿음과 그가 깨닫게 해 주신 복음과  그가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로 말미암는 신앙순례의 연속인 것이다.

인생이 한 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일들을 다 겪게 된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8688)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란 책이다. 존 버니언은 영국의 베드퍼드셔의 작은 벽촌에서 몹시 가난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직업을 이었다. 겨우 읽기와 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에 크롬웰 장군이 이끄는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들어가서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결혼을 하였는데 그때 신부가 가지고 온 혼수품 중에 2권의 책이 있었다. <천국에의 길>과 <신앙심과 실행>이란 책을 읽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존 버니언의 생애는 달라져 갔다. 신앙이 깊어감에 따라 고뇌가 시작되었는데 특히 베드퍼드셔의 설교가였던 기퍼드 목사를 만남으로써 신앙생활의 깊이를 더하여갔다. 1653년에는 정식으로 기퍼드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기퍼드 목사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기퍼드 목사가 죽은 후로는 비국교파(非國敎派)의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1660년에 찰스 2세가 국교회 이외의 모든 종교 활동을 제한하며 탄압하던 때에 설교를 계속하다가 붙잡혀서 3개월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풀려 난 후에 다시 계속하여 설교하다가 붙잡혀 비밀집회 금지령 위반죄로 체포되어 12년간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자서전 인 <넘치는 은총>(1666)은 그 동안에 겪은 그의 영혼의 고뇌와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당한 고통을 기록한 것이다. 또 1675년에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동안에 그의 주요작품들이 집필되었다. 최대걸작인 <천로역정(天路歷程)>제1부가 1678년에, 제2부가 1684년에 완성되었다. 그는 모두 간결하고 소박한 문체로 그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과 신앙심을 작품화하여 영국 근대소설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이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난 이천년간 기독교의 신학과 문학과 음악과 미술의 세계에 놀라운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가 서구의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빼면 언급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복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힘이 아니라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나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같은 책도 세상에는 없었을 것이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단테의 <신곡>과 같은 작품은 어떤 배경에서 쓰여 진 책들인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삶이 아니었다면 헨델의 <메시아>같은 오라토리오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Pieta> 나 <다윗상>이나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등의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같은 역사적은 작품은 탄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복음의 힘이 아니었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같은 작품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란 소중한 것이고 한 사람의 생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다. 그 믿음이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철학과 관습과 작품과 예술과 말과 글과 행동반경과 삶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인간은 특히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영과 혼과 육이 강건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의 통로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중풍 병에 걸린 하인의 병을 고침 받은 백부장의 믿음, 병든 딸의 질병을 치료 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예수의 뒤에서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고침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주의 옷자락을 붙들었던 12해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믿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치며 눈을 떠서 광명한 세상을 보기 원했던 소경 바디메오의 믿음은 모두가 다 이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 승리의 주인공들이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역사를 인정하지 못하거나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내 경험과 내 능력과 내 학력과 내 신분과 내 주장과 내 모든 체험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살아가고 만다. 그러나 일단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생기고 나면 매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판단하고 해석하고 따르게 되어 있다. 믿음은 위대한 것이다.

사랑으로 말미암아(through love).
오늘 본문에 정확히 그런 표현으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맥을 관찰해 보면 사랑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는 성령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여 질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은 어둠을 삼키는 태양의 힘보다 강하다. 사랑의 힘은 이 세상에 가득한 미움과 증오를 모두 다 봄 눈 녹이듯이 녹일 수 있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엊그제 금요일 오후에 솜털처럼 눈이 날리는 광경을 보았는가. 일 년 중에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는 날은 많아야 한 두 번이다.  실로 시편 147편 16절의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라는 표현이 실감나는 장면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카메라의 동영상에 담는 대신에 심상(心象)에 잠잠히 담아 두었다.

요즘 우리나라 우리 사회와 가정들이 안고 있는 사회적인 고민과 갈등과 현상이 무엇인가. 어제 아침 미국 워싱턴 D. C에 있는 웨슬리신학대학교의 데이비 맥갈리스터 총장과 한국 동문회 임원단의 조찬 모임이 있었다. 그는 최근의 한국 교회는 40년 전의 미국 교회를 보는 것과 똑 같은 현상을 반복하여 겪고 있다고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미국도 40여 년 전만 해도 삼대가 함께 살거나 엄마 아빠 그리고 아들딸들이 가족을 이루고 함께 사는 경우가 절반은 되었는데 요즘은 겨우 20% 정도의 가정들만이 가족이란 의미의 가족들이 모여 살고 혼자 살거나 해체된 가정의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정 혹은 교회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사랑의 공급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굳게 하고 능히 모든 성도들이 서로 더불어 다 함께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깨달아 체험하여 잘 알아가는 그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할 것이다. 19절에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사랑의 정의가 나온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다.

19세기에 호레이시오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 1828-1888)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미국 시카고의 성공적인 변호사였을 뿐 아니라 린드 대학교와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 및 운영 위원이었다. 그리고 전도자인 무디(Dwight L. Moody)목사의 절친한 친구 사이로서 무디교회의 회계 집사였다. 이 사람은 시카고에서 부동산 투자에도 손을 대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나서 300 여명이 죽고 십 만 명 이상의 화재민들(火災民)이 집을 잃게 되었다.  이 때 스패포드 역시 많은 재산을 잃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남 4녀 중 외아들까지 갑자기 폐렴으로 잃게 되었다.  그러나 스패포드는 실망하지 않고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힘껏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한 2년이 지난 후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만큼 되었을 때 온 가족이 영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스패포드는 무디와 생키(Sankey)의 전도여행을 도와야할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스패포드는 그의 출발을 연기했다. 그는 며칠 후에 뒤따라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의 아내와 네 딸을 계획대로 여객선에 태웠다. 1873년 11월 15일, 많은 승객들과 함께 스패포드의 아내와 네 딸을 실은 프랑스 여객선 ‘하브호’는 뉴욕 항을 출발하여 순항하였다. 모두 깊은 잠이 든 1873년 11월 22일 새벽 2시경에 그 배는 대서양 한 가운데서 영국 철갑선 ‘라키언’(Lochesrn) 호와 정면충돌하였다. 배는 226명의 생명을 안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47명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스패포드의 네 딸들은 모두 배와 함께 생명을 잃었고 부인만 물위에 떠올라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다. 9일 후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웨일즈의 카디프(Cardiff)에 도착한 스패포드의 부인은 미국의 남편에게 전보를 보냈다.
그 내용은 단 두 글자로 되어 있었다.  "SAVED ALONE."  "저만 살아남았어요."  스패포드의 아내 애나(Anna)만 구조되었고, 네 딸(Maggie, Tanetta, Annie, Bessie)은 모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스패포드는 즉시 다음 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운항도중에 선장실에서 차를 같이 하자는 전갈이 왔다. 차를 나누는 도중 선장은 딸들이 잠긴 물위를 지나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선실로 돌아와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새벽 3시경에 아직까지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이상하고 놀라운 평안이 그의 마음에 깃들었다.

"It is well with my soul"
(내 영혼은 편하다.)

아침이 되자 스패포드는 주님이 주신 영감을 받아 기록한 이 시를 정리해 두었다. 얼마 후 카디프에서 부인을 만났는데 부인의 얼굴은 환히 밝아 있었다. 그것은 모든 당한 환경을 용서하고 용납한 이들 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인의 승리의 모습이었다. 스패포드 부부가 귀국하려고 영국의 리버풀에 왔을 때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부흥의 불을 붙이고 있던 무디와 생키가 이들을 위로하러 찾아왔다. 그러나 스패포드가 "나의 영혼이 편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오히려 그들이 위로를 받았다. 스패포드는 성악가 생키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했으나, 생키는 이토록 훌륭한 믿음의 찬송시에는 자기보다 블리스(P. P. Bliss, 1838~1876)가 곡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귀국 후 블리스에게 작곡을 의뢰하여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찬송가 413장이다. 작곡가 블리스는 당시 무디와 생키와 함께 기독교 부흥운동을 주도한 복음찬송 가수였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사랑하는 네 딸을 잃어버리고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완전히 망했다고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슬픔을 딛고 다시 재기했다. 그 후에 딸 둘을 더 낳아서 완전히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예루살렘으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선한 일을 하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경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사랑으로 말미암는 승리의 삶을 선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5-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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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 하나님"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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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천사의 말을 ..최고관리자
꿈 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너 축복 하시려고"최고관리자
"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