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뉘이신 하나님의 아들(눅2:1-14) 2023. 12. 25. 성탄절
“하나님의 아들이 언제 태어나느냐, 어디서 태어나느냐” 라고 하는 내용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 등을 통해서 구약 성경이 반복하여 강조해 온 바다. 오늘 본문은 ‘때’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1절에‘그 때에’, 2절에 ‘때에’, 6절에 ‘그 때에’라고 하였다. 본문은 장소에 대한 설명도 분명하게 하고 있다. 3절에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5절에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호적하러 올라가니”라는 기록들이 그러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경륜의 때가 되어 성경이 미리 말씀한 예언의 그 장소에서 탄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그 당시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호적하도록 명령하였다.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된 그 때에 무려 144km나 되는 먼 거리를 이동해야만 했다. 호적하려고 조상들의 마을을 방문했던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머무는 그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거기서 탄생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때와 장소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이다.
구약 미가서 5장 2절에 보면 “베들레헴 아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세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였다.
예수 탄생의 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있다. 마태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기록한 반면에 누가는 베들레헴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의 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천사는 베들레헴 지역의 목자들에게 그 곳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예수 탄생에 대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성탄절 아침에 이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신 아기.
천사가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좋은 소식을 기다리나. 어떤 좋은 소식이 나에게 큰 기쁨을 주나. 무슨 소식이 나에게 큰 기쁨을 주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가나. 누구에게나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이 뭔가.
로마의 압제 가운데 지내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 분이 오시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분이 아니시다. 물론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나. 광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해결해야 하고 순간마다 해결해야 하는 물과 만나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했다면 사십년동안 광야 생활을 어떻게 버텨나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게 하신 목적은 광야가 아니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버티며 살아가는 광야 생활이 끝이 아니었다. 언약 민족으로 준비하게 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의 풍요로운 삶 조차도 영원한 대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기대와 관심은 애굽이냐 광야냐 가나안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들 언약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언약 민족의 삶을 이어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하나님의 관심사였다.
우리는 무슨 큰 기쁨의 소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우리는 무슨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생활하는가. 가난한 삶을 벗어나는 것, 질병으로부터 치유되는 것,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전쟁이 끝나는 것, 학대와 방치와 외면과 따돌림과 조롱 받는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무지로부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 좋은 소식일 수 있다.
사람이 이발소나 미용실에 다녀 온 후의 기쁨이 얼마나 가나. 사람이 새옷을 사서 입고 새 신을 사서 신는 기쁨이 며칠이나 가나. 사람이 새 집 장만하고 새 아파트 마련한 기쁨이 얼마나 가나. 사람이 좋은 차 새 자동차 마련한 기쁨이 얼마나 가나. 사람이 시집가고 장가가면 그 기쁨이 영원한가. 사람이 아들딸 낳으면 그 기쁨으로 모든 생애의 문제가 다 해결되나. 사람이 억만금을 내 손에 쥐고 살아가게 된다고 세상 기쁨이 다 내 기쁨이 될 수 있나. 사람이 한 나라의 왕이 되고 한 나라의 왕비가 된들 그 자리가 대단한 기쁨, 영원한 기쁨을 줄 수 있나. 세상에 그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사실 없다. 사람이 남들은 엄두도 못내는 우주 여행을 하며 살아 간다고 해도 그런 기쁨이 그렇게 대단한 기쁨, 대단한 만족, 영원한 기쁨을 주는 것이 못된다.
인간 최고의 기쁨은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라고 하였다. 공자는 <논어> 이인(里仁)편 제8장에서“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하였다.
예수의 탄생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소식이요 이것이 죄 사함의 소식이요 이것이 영생의 소식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부여 받는 소식이기 때문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이다.
예수를 만나야 기뻐진다. 예수가 누구신지 알아야 기뻐진다. 예수와 동행해야 기뻐진다. 예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께서 거하실 때에 그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누리고 전하는 자로 살게 된다.
어제 점심 식사 시간에 식당에서 김상용 장로님과 마주 앉아 점심 식사를 하였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던 중에 불교의 자승 승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승 승려 말이다.
50년 전인 1973년 2월에 해인사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두 청년이 들어 갔다. 춘천에서 온 청년에게는 ‘자승’, 대구의 병원장 아들로 온 이에게는‘계정’이란 법명이 주어졌다. 자승은 나중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33대와 34대 총무원장을 지냈다. 그랬던 그가 지난 11월 29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온갖 부와 명예와 권력의 중심에 있던 자승은 암자에 불을 질러 스스로 불 길 속에서 타 죽었다. 한 때 그를 만나길 원하는 연예인, 정치인,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가 줄을 서서 그를 만나보고 싶어했던 인물이다. 그가 한 때 불교 재단인 동국대학교 재단을 쥐락펴락했다. 온갖 루머와 불건전한 사생활에 대한 의혹에 그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69살에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의 승려 생활관인 요사채 안에서 불을 지르고 스스로 그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동료였던 ‘계정’은 10년 만에 세상에 나와서 성령을 체험하고 결혼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학을 하고 목사로 살아왔다. 계정은 배운 것이 불경을 외며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 매달 2번씩 대구 팔공산 갓바위 올라가 108번 절하며 부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더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자신을 버틸 힘이 없었던 그는 생을 마감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끈질기게 복음을 전하려는 이가 있었다. 그의 영향으로 승려에서 목사가 된 그는 지금 자신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코스타 강사로, 일본과 필리핀 등 선교지로 다니면서 전하고 있다. 어느새 그의 나이도 칠순을 맞이하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같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가 바로 최봉익 목사다.
교회에만 다니지 말고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배만 드리지 말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교회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성령 체험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씀이 들리고 예배의 감격이 있고 기도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은혜를 받아야 예배 시간이 기다려지고 찬송이 달라지고 헌신 생활이 달라지고 봉사와 섬김이 즐거워지는 것이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경험해야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복음은 전하고 싶고 전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주인공을 제대로 만난 제자들이 순교자의 길을 갔다.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주인공인 예수를 만난 다메섹의 사울이 초대 교회 이방 선교의 선봉에 서서 쓰임 받은 사도 바울이다. 성탄절 아침, 이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우리 각 사람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윗의 동네에서 나신 그리스도 주(主).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은 나사렛이 아니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위치이다. 그러나 나사렛에서는 무려 145km나 되는 멀고 먼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첫 호적 명령을 통해서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이끄셨다. 그르고 거기서 출산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장차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의 성취이다. 이는 사무엘하 7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과 다윗과의 언약이 성취되는 순간이다.
누가복음 2장 11절에 보면 예수를 ‘구주’와 ‘그리스도’와 ‘주’라고 세 가지로 삼중 표현하였다. 맞다. 예수는 ‘구주’시다. 구주라는 ‘소테르’는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 예수는 왕 중 왕이며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시며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시다. ‘주’라는 말은 하나님을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다. 존경심을 담아서 주인을 부르는 호칭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세주이시며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이며 우리의 범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사역>이란 책이 있다. 아지스 페르난도는 스리랑카 10대 선교회 의장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마가복음의 복음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에 보면 마가는 마태나 누가와 다르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시작한 후에 곧 이어서 세례 요한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전개된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이 붙잡힘으로 그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포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등장하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부르는 성탄 찬송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3절에 보면,
온세상 죄를 사하려 주 예수 오셨네
죄와 슬픔 몰아내고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 구원 하시네
라고 찬송한다. 맞다. 예수께서 구주이신 그리스도 주로 오셔서 죄와 슬픔을 몰아내고 그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자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이 성탄의 시작이다. 복음 즉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가 ‘기쁜 소식’이란 뜻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복음의 주인공으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요 그리스도요 주님이시다. 그가 나와 나의 가족과 이 민족과 시대를 다스리실 때에 온전한 구원의 은총이 각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영광과 평화의 왕(王)이신 예수.
성경을 읽다가 보면 13절에 수 많은 천군천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저들이 한입으로 주를 찬송하고 경배한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하였다.
그런데 잘 보면 누구에게나 임하는 평화가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이다.”하나님께 영광이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보면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아들 예수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주의 은혜를 입은 이 땅의 백성들에게 임하는 것이 평화이다. ‘기뻐하심’이란 은총과 택하심을 의미한다. 원래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라는 단어는 전쟁하는 양국이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그만 싸우자. 가자 지구의 하마스 세력과 이스라엘 간에 ‘그만 싸우자’ 이런 평화 조약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경이 의미하는 평화는 구원을 내포한 말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기뻐하는 모든 자에게 평화와 구원을 선물해 주신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조선 땅에 와서 26세에 순교한 루비 켄드릭 (Ruby Rachel Kendrick: 1883~1908)선교사의 묘가 있다. 1907년 9월 텍사스 주 엡윗청년회의 후원을 얻어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녀는 내한한 지 9개월이 못되는 1908년 6월 19일 맹장염으로 죽어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죽기전 그녀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나중에 세상에 알려졌다.
만일 내가 줄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 조선에 주겠노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 Ruby Rachel Kendric -
“내가 죽거든 텍사스 엡윗 청년회원들에게 가서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그녀의 양화진 묘비명에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만일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겠습니다.’
교회력은 강림절이 시작이다. 사주간의 강림절기와 함께 맞은 성탄일에 이런 기쁨과 은총이 각 사람에게 임하길 바란다. 어떤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며 어떤 삶이 평화와 구원을 이루는 삶인지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답으로 찾고 누리며 주변과 만방에 증거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