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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기억하는 감사 기도(살전1:1-10) 202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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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0-29 22:04 조회 3,080 댓글 0
 

                        기억하는 감사 기도(살전1:1-10)              2023. 10. 29

 

 

빌립보를 떠난 사도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 동안 머물면서 성경을 강론하였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였다. 사도행전 17장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이를 받아들인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바울과 실라의 복음 전파를 받아들였다. 이런 일 후로 데살로니가에도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교회가 탄생하였다. 빌립보 교회의 탄생에 이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라에 의해서 유럽에서 2번째로 세워진 교회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의 시기가 심했다. 결국 유대인들은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야손의 집에 머물던 바울과 실라를 찾아 들이 닥쳤다. 그럴 일이 있으리라는 소문을 들은 바울과 실라는 이미 야손의 집에서 피신한 후였다. 결국은 집 주인 야손과 그 형제 몇 사람을 끌고 가서 핍박하였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을 영접해 주었다.”라는 죄목으로 고소하였다. 또한 황제 가이사의 명령을 어기는 자들이라고 고소하였다. 결국 야손과 몇 명의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야 풀려날 수 있었다.

 

칭찬을 받은 빌립보 교회에도 책망을 받을 일이 있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데살로니가 5장 14절에 보면,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라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라는 권면을 하였다. 왜 이런 권면을 하였을까. 그 도시에, 교회 안에 게으른 자들이 있었단 말이다. 말만 많고 일은 하려 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단 말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에 보면 “게으르게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떠나라”라는 권면을 하기도 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 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전3:10)라는 말도 남겼다. 3장 8절에 보니까 바울은 “수고하고 주야로 일한다”고 자신의 선교 현장의 일과를 피력하였다. 두 번째 편지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문제를 길게 언급한 것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려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라”라는 말을 보면 마음이 약한 자들이 있었단 말이다. 몸의 근육의 힘 즉 근력(筋力)을 키워야 하듯이 마음의 힘 즉 심력(心力)도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해야 한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속 상해하고 상처 받았다고 하고 삐지고 주저 앉으면 않된단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주 주저 앉고 힘이 없는 이들이 있다. 그런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고 붙들어 주어야 한다. 유모가 끊임이 없이 아기를 돌보듯이 그렇게 하여야 한다. 그게 성도의 교제이고 그게 교회의 할 일 중의 하나이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라고 권면하였다. 맞다. 참고 너그럽게 용납하고 기다려 주고 그래야 일꾼이 자라나는 법이다. 하루 이틀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용사가 탄생되는 게 아니다. 사자라도 갓 태어난 새끼는 아주 귀엽다. 사자도 새끼를 키울 때에 용맹스러운 숲의 왕이 되기까지 맹 훈련에 맹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숲의 왕이 되는 것이다. 저절로 동물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온갖 수난과 역경과 별의 별 꼴을 다 당하고 견디고 이기고 극복해 나가야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편지의 1절에 보면 이 편지를 쓸 당시에 바울의 곁에는 실루아노 즉 실라도 같이 있었고 디모데도 함께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정 중이던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에 아덴 지역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고 싶었던 데살로니가에 갈 수 없던 바울은 대신 방문하고 와서 소식을 전해 준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식을 알게 된 후에 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다. 

 

바울 사도는 기도할 때마다  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였다. 2-3절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다.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 없이 기억한다”라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제목을 <기억하는 감사 기도>라고 정한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그 무엇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하고 있는걸까. 

 

 

믿음의 역사.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행한 일을 의미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반면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믿음을 깨닫게 된 성도는 믿음으로 일하고 믿음으로 행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때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은 상대방의 믿음이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등의 말씀을 연이어 하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예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각 사람의 믿음이었다. 그렇지 않나. 마가복음 2장에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신 적이 있다. 어느 집에 들어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소문을 들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워 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 저들 네 사람은 그 집의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 마가복음 2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내용이 나온다. 맞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보고 계시다.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주목하고 계시다.

 

그렇지 않나. 스스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라. 자신의 시간 사용, 재물 사용, 관심, 우선순위를 지켜보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주의 몸된 교회를 향한 나 자신의 믿음의 정도와 믿음의 분량을 알 수 있게 된다. 마태복음 8장에는 병든 부하를 고쳐 달라고 가버나움의 예수를 찾아왔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내용이 있다.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라는 예수의 말씀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한다. 맞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도(聖徒)란 믿음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자들이란 말이다. 

 

며칠 전인 10월 25일에 고전 번역원 맞은편에 ‘서울 기독교 박물관’기공식이 있었다. 내년 말에 완공되면 서울과 수도권의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곳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예수사랑교회 주변에 기독교 관련 시설이 늘어나는 것은 얼마나 좋은 현상인가. 누가 하는 일인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늘 말씀드리지만 100여 세대도 되지 않는 강화도 고향 마을에 1907년에 복음이 들어간 후로 흥천교회는 마을의 거의 모든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폭포동 입구의 예수사랑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바란다. 지역교회에서 출발해서 열방을 향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한다.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배출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으로 일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일꾼들이 적지 않았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4절 말씀대로 각 사람을 향하신 주의 택하심이 있다. 6절의 말씀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사도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 받는 자들이 되었다. 저들의 신실한 믿음 생활은 주변의 여러 곳에 널리 널리 퍼져 갔다. 8절에 보니까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저들이 어떻게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었는지, 어떻게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예수께서 아신다”라고 격려하고 칭찬하였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 의지하면 않된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은 아침 볕 앞에서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기념 주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34세된 젊은 수도사 마틴 루터 한 사람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 당시의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었던 교황과 교황청의 불의 앞에 항거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끝까지 마틴 루터의 손을 붙잡아 주셨다. 거대한 로마 교황청 세력은 마틴 루터를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통해서 최후 승리를 선언하게 하셨다. “믿음의 역사”란 그런 것이다. 믿음으로 일한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열매 맺게 하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보라, 사무엘, 다윗, 히스기야, 다니엘, 에스겔, 엘리야, 엘리사,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저들 각 사람은 모두가 다 믿음으로 나아가고 믿음으로 행한 믿음의 거장들이었다. 하나님은 그 어느 시대에나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 

이제 곧 11월이 시작된다. 감사의 달이다. 11월 마지막 주일은 대강절 첫 주일이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이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가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에 천사 가브리엘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하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을 하였다. 그 순간에 천사가 마리아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때가 되어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 방문 중에 낳았다.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거룩한 어머니가 되었다. 주께서 하신 일이다.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라고 찬양하지 않나. 신앙생활이란 “믿음의 역사”를 계속하여 이루어 가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주님이 일하시고 성령이 일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끊임이 없는 과정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사랑의 수고.

신앙 생활은 사랑으로 수고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본 받아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사랑으로 수고한 열매가 풍성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생활하시던 하루하루의 일과를 보라. 날마다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끊임이 없이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인산인해로 몰려왔다. 예수는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는 동안에 뱃고물을 베고 깊은 잠이 드실 정도로 고단하였다. 낮에는 무리 속에서 지내시고 한적한 밤에는 홀로 지내시며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만나는 병자들마다 고쳐 주셨다.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다. 예수는 배고파하는 무리들을 배 불리 먹이셨다. 예수는 어린 아이를 품에 안으시고 천국을 교훈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배반하고 팔아 버린 가롯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는 십자가 우편의 강도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를 천국으로 초대하셨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예수는 그를 조롱하는 좌편 강도의 조롱 앞에서도 침묵하셨다. 예수는 그를 옷 벗기고 채찍으로 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뺨을 때리는 무리들 앞에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셨다. 예수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셨고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품으셨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수고”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나를 행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이들이 하는 수고를 말한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아 알고 나면 주를 향한 나의 섬김과 모든 것이 아까울 것도 없고 피곤할 것도 없다. 왜 그럴까. 대답은 하나다. “사랑하니까”<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라는 찬양을 부르자.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

 

 

이번 총회 개회 예배 시간에 성찬이 끝나고 아프리카 케냐 임찬호 선교사 부부에게 ‘선교 대상’을 수여하였다. 그는 케냐 35만 마사이 부족의 명예대 추장으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들어 쓰심>이란 책의 주인공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했다. 강원도 도계 탄광촌 광부였던 아버지는 진폐증으로 고생하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때마다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고 7년간 공수부대에서 군생활을 마친 그는아버지처럼 광부가 되었다. 고된 광부 일에 지친 그는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탄광에서 일하던 중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했다. 함께 깜깜한 갱 속에 갇힌 광부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 예수를 믿나?” 어이가 없었다. 갱이 무너져 죽게 생겼는데 갑자기 왠 예수 타령인가.“예수요. 그런거 안 믿어요”소리치자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내 경험상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너는 죽어서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어떻게 하겠니?”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갱도가 무녀져 내린 깜깜한 갱 속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 영접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급기야 대성통곡을 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병원에 누워있었다.그러나 자신은 기적처럼 구조되었으나 복음을 전해 주었던 광부는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나를 살리고 정작 자신은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광부가 죽어가면서 전했던 십자가의 복음을 이제 그가 전하고 있다. 선교사가 되어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자신을 구원한 그 십자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케냐에서 22년째 사역 중인 그는 케냐 사람들조차 두려워하는 마사이족 거주지에 24개 교회를 세웠다. 44개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세웠다. 3개의 중고등학교와 1개의 신학대학을 세웠다. 이러한 성공적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백한다.“주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우둔한 저에게 구원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1991년 3월, 임마누엘교회 파송으로 아프리카 케냐에 첫 발을 디딘 그는 아내 김정희 사모와 함께 32년째 그 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나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다만 제가 하여야 할 것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식지 않는 사랑으로 주를 섬기며 지치지 않는 믿음의 거장들이 연이어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기도한다. 

 

 

소망의 인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고 하였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성도가 소망을 갖고 사는 근거는 주님의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이다.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매 순간의 고난을 이길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생의 위기와 고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보여지는 소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가. 배우자인가. 아들딸인가. 손자손녀인가. 학력인가. 돈이며 재산인가. 건강인가. 젊음인가. 미모인가. 명예인가. 권력인가. 인기인가. 지금 잘되는 사업인가. 뭐가 당신의 소망인가. 당신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가. 어디에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가. <이 몸의 소망 무언가>488장 찬송에서 무엇이라고 찬송하고 있는가.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3절에 보면 “무섭게 바람이 부는 밤/ 물겔이 높이 설렐 때/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우리 주 크신 은혱에 소망의 닻을 주시고/ 구주의 언약을 믿어 나의 소망이 더욱 크게 하시는”분은 오직 나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지옥 문에는 “소망을 버린 자가 들어가는 문”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를 통해 슬픔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나를 통해 영겁의 고통으로 들어가리라. 

나를 통해 저주받은 영혼들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정의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움직여 

성스러운 힘과 최상의 지혜, 그리고 

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이루셨도다.

 

나보다 먼저 창조된 것은 영원한 존재인 

천사 이외는 없으니 나는 영원토록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신앙생활은 주 안에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생활이다. 그렇지 않나.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보라.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의 별과 같은 중대한 후손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 뿐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내 사라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셨다. 다시 세월이 흘러 갔다. 부르심을 받은지 25년 후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 100세, 아내 사라 90세 때의 일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홍해를 건넌 일이 모세의 전략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여리고성을 무너틀린 일이 여호수아의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물론 심고 물주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라나고 열매 맺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힘쓰고 애써도 안되는 일은 안된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면  일 순간의 역사가 바뀐다. 어제 밤에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가족과 함께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후에 밤 새도록 양 고기를 먹고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다음 날 아침 시간에는 이미 홍해 건너편 광야에 있었다. 저들 200여만 무리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건너게 해 주신 일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왜 기도하여야 하나. 왜 주를 의지하여야 하나. 왜 주님이 앞 서 행하시길 간구하여야 하나.

 

내가 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내가 내 능력, 내 지혜, 내 경험, 내 판단, 내 분별력으로 여기 까지 왔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그렇게 여기면 하나님이 섭섭해 하실 것이다. 나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 삶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소망을 두고 참고 인내하며 나를 향하신 주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 김두완 작사 작곡 <어지신 목자>라는 찬양이 있다. 그 가사를 보면,

 

어지신 목자 양 먹이시는 곳

그늘 진 바위 옆 시원한데

나 어찌 떠나서 양떼를 버리고

위태한 곳 위태한 곳 위태한 곳으로 나갔던고

어지신 목자 길 잃어 버린 양

찾도록 찾으며 부르소서

 

어지신 목자 날 가르치시고

주 따라 가는 법 가르치사

다시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 나를 보호 나를 보호하사 지키소서

어지신 목자 택하신 어린 양

다 들어 가도록 이끄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주께서는 주께 소망을 두고 인내하며 ‘소망의 인내’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을 통해서 마지막 구원받을 단 한 사람의 영혼까지 일일이 모두 다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시다. 이런 은혜와 소망과 사랑과 믿음이 우리 각 사람에게 가득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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