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사람의 권면(빌4:1-7) 2023. 10. 15
사도 바울은 주후 61년부터 2년여 동안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기간을 바울의 제 1차 투옥이라고 한다. 옥중에 갇혀 지내야 했던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목적은 저들을 권면하기 위함이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칭찬 받을만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교회 공동체에 불화를 일으키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 때문에 다툼과 원망과 시비가 있었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맑은 물을 흙탕물로 만든다. 그처럼 믿음으로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는 성도들 간에 누가 누구를 이간하거나 미워하거나 시비를 걸거나 원망과 불화와 다툼을 일으키면 교회는 금방 기쁨이 떠나가고 만다.
빌립보 교회 안에 그러한 모습이 있던 것을 알게 된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개척자요 설립자로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큰 관심을 가지고 편지한 내용을 지난 몇주 동안 나누어서 대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18절에 보면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라는 내용이 있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권면하고 있다. 그 권면의 편지 중에서 남은 분량 일부를 오늘 이 시간 대하는 중에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주 안에 서라.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도 했다. 이보다 더 따뜻하고 더 정성스럽고 더 진지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그렇지 않나. 누가 나에게 말이나 글로 이런 표현을 한다면 그런 표현을 받는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런 진솔한 표현으로 마음을 담아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또 하나의 권면은 “주 안에 서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용하는 ‘선다’는 표현은 군대 용어이다. 군대가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갖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일컫는 용어이다.
전쟁은 두려운 것이다. 일류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바울 자신도 전쟁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바울 자신이 이런 용어를 사용해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마치도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루하루 순간순간 전쟁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는 강조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 안에 서라’하는 권면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여 보라. 전쟁에 나아가 싸워야 하는 군인은 힘이 있고 건강하고 용맹스럽고 담대하고 죽기를 각오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에 참전할 수 없다. 죽고 죽이는 것이 전쟁이라면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단과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길 자를 찾아 다니는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 중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주 안에 서야 한다.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서야 하는데 서지 못하는 것은 주저앉는 것이며 넘어지는 것이다. 주님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 각 사람이 영적 전쟁에서 쓰러지거나 넘어지거나 주저앉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 각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 중에서 굳건하게 서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찬송가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의 가사 후렴을 보라.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굳게 서리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리라.”
라고 찬송하고 있다. 그렇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다시 일어서고 또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나. 살다 보면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시쳇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는 개인이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몇 명의 가족이든 기업, 국가 그 어떤 조직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별의 별 풍파를 다 이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일을 겪었다고 주저앉고 저런 일을 겪었다고 비관하면 안 된다. 546장 찬송의 2절에 보면,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세상 염려 내게 엄습할 때에
용감하게 힘써 싸워 이기며 약속 믿고 굳게 서리라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굳게 서리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리라”
라고 찬송하고 있다. 군인은 군가를 부른다. 성도는 찬송을 부른다. 군가는 군인으로 하여금 사기가 충만하게 한다. 군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아침 점호와 함께 군가를 부르는 것으로 새 날을 시작한다. 찬송은 성도로 하여금 은혜와 성령이 충만해지게 한다. 찬송은 가사에 곡이 붙여진 기도이다. 이 험한 세상을 주 안에서 굳건하게 서서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편지의 말미에서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제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빌립보 성의 첫 신자였던 루디아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증빙할 수 없는 거론일 뿐이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저들 두 여성으로 말미암아 빌립보교회가 시끄러워졌다는 것이다. 그 동안 편지에서 대한 다툼, 허영, 원망, 시비의 진원지가 이들 두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떤 교회는 전국 의사 협회 회장과 대한 체육회 회장을 지내던 두 장로의 다툼과 갈등과 시비로 인해서 큰 교회가 두 동강이 난 교회도 있다. 교회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 축복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어느 날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다. 거기는 우상 숭배가 심하던 곳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그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교회란 이런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곳이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곧 교회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서로 간에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동양에서는 삼강오륜을 강조해 왔다.
삼강(三綱)이 무엇인가.
君爲臣綱(군위신강) :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
父爲子綱(부위자강) :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
夫爲婦綱(부위부강) :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이다.
여기서 발전해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기강을 견고히 하는 것이 아닌가.
五倫(오륜)이란 무엇인가.
父子有親(부자유친) :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있어야 할 관계
君臣有義(군신유의) :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의미
長幼有序(장유유서) :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사이의 질서
朋友有信(붕우유신) : 친구 사이에 있어야 하는 신뢰
夫婦有別(부부유별) : 부부 간에 지켜야 할 분별을 말한다.
이것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4가지 덕에 신(信)을 더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나와 가족, 나와 친구, 나와 세상의 그 모든 인간 관계의 질서를 이루는 근본이다. 우리 교회 가까이 길 건너편에 있는 고전 번역원에 날마다 출근하지 않더라도 삼강오륜이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빌립보 교회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으로 인한 불화가 교회를 병들게 하였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다. 3절에 보면 저들 두 여인들은 처음부터 불화를 일으키던 이들이 아니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란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의 소중한 일꾼들이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저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다. 저들 두 여인의 불화가 교회를 병들게 하였고 뒤숭숭하게 하였다. 남여노유를 막론하고 스스로 자신을 돌아 보자. 나는 교회와 성도들의 관계를 평화롭게 해 나가는 주인공인가. 아니면 다툼과 불화를 일으키는 주인공인가 하고 말이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서로 서로를 예절 있게 대하며 주님의 마음을 품고 겸손하게 대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3절에 보면 ‘멍에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골에서 농사 할 때에 보면 소의 목에다가 멍에를 메게 한다. 그리고 그 멍에에 줄을 연결해서 쟁기질도 하고 수레도 끌게 한다. 농번기에는 소가 멍에를 메는 자리의 가죽이 다 쓸리고 벗겨져서 시뻘겋게 피멍이 든 것을 보았다. 그 상처에 약을 발라 주긴 하지만 쉽게 낫질 않는다. 하루도 쉴 시간이 없이 멍에를 메고 애쓰는 소의 수고를 기억하게 된다.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칭하고 있다. 그렇다. 오늘날 교 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각 사람도 서로 함께 멍에를 같이 멘 자들이어야 한다. 우리 서로가 함께 같이 마음을 다하여 멍에를 메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힘쓰며 동역자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3절에 보면 ‘도우라’라고 하였다. “지금은 불화하고 다투고 원망하고 시비를 끊이지 않고 있 으나 멍에를 같이 멘 동역자 의식을 가지고 잘 도와서 예전의 화목한 관계를 주 안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라”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은 주 안에서 부름을 받은 성도로서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이 이미 주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도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는 말씀으로 주님을 믿는 신자가 된 성도들인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고 격려하셨다. 요한 계시록 3장 5절이나 21장 27절에도 보면 ‘생명책’이란 표현이 나온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시내 산 위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앞장 세우고 금을 모아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며 숭배한 사건의 내용이 나온다. 그 현장을 보고 충격에 빠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하며 허리에 칼을 차라고 하였다. 그 때에 모세의 명령에 순종한 지파가 레위지파이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모세의 말대로 칼을 허리에 차고 나서서 동족들 간에 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자들 삼천명 가량을 죽였다. 그 이튿날 모세는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건강한 교회, 화목한 교회,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교회, 행복한 교회로 든든하게 세워가는 주인공들이 각각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도하라.
4절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권면은 바울의 기쁨에 관한 권면 중에서 유명한 권면이다. 왜냐하면 기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하되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난의 사도 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기쁨의 사도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가는 곳마다 끊임이 없는 고난과 고생과 수고를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에 갇히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기뻐했다. 그는 그 어떤 환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라도 기뻐하였다. 바울은 장차 주 앞에서 받을 상급을 마음에 품고 환난,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위협이 끊임이 없는 고난의 연속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살아갔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데살리니가 전서 5장 16-18절의 그 유명한 권면과 더불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진심이 담긴 권면은 기뻐하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기쁨을 찾아 나서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최근에 운전 중에“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재밌는 가사의 유행가를 들었다.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 대단히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가사에 보면 ‘연신내. 교회 오빠, 클럽’이야기가 나온다.
주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자기 점검 중의 하나는 ‘관용’이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서로에게 너그럽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 않나. 내일 내게 죽음이 찾아 온다면 지금 곁에 있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과 원수 맺고 불화할 이유가 있겠는가. 바울은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다. 5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그렇다. 세상 살 날이 얼만 남지 않았다고 여기면 주변 사람과 사이 좋게 지낼 것이다.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고 여기면 숙연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 또 하나는 모든 일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길이다. 6-7절을 다 같이 읽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세상에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왕이라도 염려는 있다. 과거에 중국 기(杞)나라 사람 중에는 하늘이 무너질까 봐 염려하며 살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기우(杞憂)’라는 말이다. 쓸데없는 염려, 불필요한 염려, 일어나지도 않을 염려를 달고 사는 어리석음을 교훈하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세요.
다만 모든 일을 기도와 간구라 하세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세요.
“그러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빌4:7/ 현대인의 성경>
존 템플턴의 <성공론>에 아브라함 링컨의 일화가 나온다. 그는 그를 반대하는 정적들을 품고 등용하며 정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젊어서 시골에서 품군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늙은 말 잔등의 쇠파리를 쫓으면 주인은“내버려 두어라. 쇠파리가 귀찮게 하지 않으면 저 늙은 말이 도대체 움직이려고 하질 않는단다”라고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염려, 걱정, 근신, 불안, 두려움뿐만 아니라 초조하고 답답한 일들이 끊임이 없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그 모든 것을 순간순간 쇠파리를 쫓듯이 쫓아내며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며 살아갈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다.”이런 은혜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