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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성찬을 받기 전에(빌2:1-11) 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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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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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0-01 21:20 조회 2,880 댓글 0
 

                           성찬을 받기 전에(빌2:1-11)               2023. 10. 1

 

 

 

우리는 성찬(聖餐)이 무엇인지 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성찬을 행하셨다. 예수는 그 날 밤에 유월절 전날 만찬을 잡수시던 중이었다. 유월절 마다 늘 대하던 떡과 포도주인데 그 날은 달랐다. 여기서 말하는 떡이란 무교병이다. 예수는 무교병을 가지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다”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게 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설명해 주셨다. 절기 때마다 먹던 무교병이며, 절기 때마다 마시던 포도주인데 의미를 부여해 주셨다. 

 

오늘, 우리는 세계 교회 성찬 주일을 맞아서 성찬식을 할 것이다.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묵상할 빌립보서의 말씀이 은혜가 되길 바란다. 빌립보 교회의 탄생 배경은 사도행전 16장 1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빌립보 성에 머물던 바울과 실라는 안식일이 되었지만 예배할 곳을 찾지 못했다. 기도할 곳을 찾던 중에 강가에서 장사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 곳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를 만났다. 루디아는 바울과 실라의 복음 전파를 받아 들였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것”이었다. 루디아는 그 날 온 가족이 다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자기의 집으로 모셨다.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날마다 길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기도하는 곳을 찾아 가던 바울과 실라는 길거리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한명을 만났다. 그 여종은 점치는 것을 돈을 벌어서 주인에게 경제적인 유익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날마다 그 앞을 지나가는 바울과 실라를 보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자입니다.”라고 날마다 소리를 지르며 큰 소리로 말하고는 했다. 며칠 째 되던 어느 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라고 그 여종을 장악하고 있는 귀신에게 명하였다. 그런데 그 즉시 귀신이 그 여종에게서 나갔고 여종이 건강해졌다. 

 

수입원이 끊긴 주인들은 장터 관리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끌고 갔다. 사도행전 16장 19절에 ‘여종의 주인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여러 명이 이 귀신 들린 여종이 점을 쳐서 벌어들이는 소득을 날마다 분배했던 것 같다. 나중에 저들은 바울과 실라를 상관들에게 끌고 갔다. “이 사람들은 성을 요란하게 하는 유대인들인데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하는 자들이다.”라고 고발하였다. 무리가 달려들어서 고발했다.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많이 맞고 옥에 갇혔다. 간수들이 저들을 든든히 지켰다. 그 밤 중에 몸이 아프지만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다른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갑자가 큰 지진이 나고 옥터가 흔들렸다.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차꼬가 다 풀렸다. 간수들이 잠 자다 말고 놀라서 깨어 일어 났다.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크게 소리쳤다. “여러분의 몸을 상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간수가 불을 밝혀가지고 현장을 확인해 보니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간수는 무서워서 떨며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서 말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그 때 “주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식구들이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바울과 실라는 그 밤 중에 그의 집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간수는 그 밤에 정성스럽게 바울과 실라의 매 맞아 피 멍이 든 곳을 씻고 싸매 주었다. 그리고 온 가족이 그 밤중에 세례를 받았다.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하였다. 간수는 온 집안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믿기로 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와 그의 가족,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이 받아 들여 지면서 탄생한 교회였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관심과 애착이 많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해에 바울은 옥에 다시 갇히게 되었다. 그 때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빌립보서를 감옥에서 쓴 것이다. 그래서 옥중 서신이라고 한다.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문제가 전혀 없는 교회는 단 한 곳도 없다.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도 많고 골칫거리도 많다.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1장 15절과 17절에 보면 ‘투기, 분쟁, 다툼’이 거기에도 있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2장 3절에 보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안에‘다툼과 허영’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의 편지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교훈하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

1절에 보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 위로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서로 간에 교제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가짐으로 대하십시다”라고 촉구하고 있다. 2절에 보면“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세요”라고 권면하고 있다. 

 

왜 이런 권면을 하는 걸까. 그 당시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렇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그 당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간에는 불화와 반목이 심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이 이런 편지를 써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교인이 많이 모이든지 적게 모이든지 교인들 간에 서로 불화하고 반목하고 편을 가르고 나뉘이고 다툰다면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그런 문제 투성이의 교회였다. 그래서 이런 권면의 편지를 쓴 것이다.

 

바울은 뭐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마음을 같이 하십시오”라는 말은 생각과 뜻의 연합과 일치를 권면하는 것이다. 뒤에 이어서 나오는 “같은 사랑을 가지세요. 뜻을 합하세요. 한 마음을 품으세요”라는 권면은 앞에 나오는 “마음을 같이 하세요”라는 권면에 덧 붙인 설명이다. 신앙생활이란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몸된 성도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생각과 마음과 뜻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나가는 과정이다. 이에서 벗어나면 가롯 유다처럼 불행해 지고 마는 것이다. 

 

“뜻을 합하며”라는 권면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라고 교훈해 주셨다. 예수를 보고 싶어 찾아 온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의 방문 소식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라는 교훈도 해 주셨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장차 때가 되면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베드로거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그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 그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그러므로 “ 마음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을 품는다”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가 내 뜻 네 뜻을 주장하며 내 뜻을 따르라, 내 생각을 따르라, 내 주장에 동조하라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무슨 일 앞에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한 마음, 한 사랑, 한 뜻, 한 의지, 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찬양은 아무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마다 때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깨달아 분별하고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판단에 순종할 수 있을 때에라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길 소망한다. 

 

 

서로에게 겸손하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마세요.”라는 권면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중에 다툼이나 허영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다툼’은 사단이 좋아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 보면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며 사단의 지배를 받는 모습이라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다툼’을 <새 번역 성경>에서는 ‘경쟁심’이라고 했고,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이기적인 야심’이라고 했다.

 

‘허영’(虛榮)이란 그리스도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인간 자신의 명예와 자기 만족을 목표로 하는 허세이며 비열하고 천한 야망을 말한다. 그러므로 허영은 그 자체가 우상 숭배에 속하며 성도 간에 사랑의 위로를 병들게 하는 모든 분쟁과 불화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다툼과 허영은 공동체 안에 번져 가는 독버섯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라고 말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이다. 누가 교만한가. 누가 겸손하지 못한가. 생각해 보라. 그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노예처럼 상대방에게 굽실거리거나 복종하는 모습은 수치로 여겼다. 따라서 헬라 사람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반대의 삶을 사셨다. 예수는 언제나 겸손하였다. 예수께서는 겉으로만 겸손해 보이는 척 하신 분이 아니셨다. 예수는 마음가짐이 겸손하셨다. 예수는 스스로 말씀하신 적도 있으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마11:29)라고 교훈해 주셨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많이 가졌다고 덜 가진 이웃 앞에서 우쭐해 하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많이 배웠다고 해서 덜 배운 사람 앞에서 자랑하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외모가 잘 났다고 해서 외모가 그렇지 못한 사람 앞에서 잘 난체 하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남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해서 남들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듭한 사람, 중생한 사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 나를 향하신 주님의 기대와 뜻을 분별하는 사람은 결코 교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는 성도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겸손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헤를 주시느니라”(벧전5:5)라고 권면하였다. 

 

4절의 말씀처럼 겸손한 사람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름 사람들의 일도 돌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사도 바울의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되는 나날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고 찬양하기 전에 스스로 매 순간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지켜갈 때에 나의 일상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나.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서로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못 할 때에 불상사가 생기고 만다. 누군가가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서로가 주변 사람들의 형편을 소상하게 돌아보는 마음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를 겸손하게 대하세요”라고 교훈하면서 5절 이하에서 우리가 잘 기억하는 그 유명한 교훈을 여기서 하였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5절의 ‘마음’이란 ‘프로네오’는 지정의의 영역을 말씀하는 것이다. 막연히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겸손의 극치이다. 자기 포기(抛棄)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을 구원할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자기 비하(卑下)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을 품은 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을 따르는 길이다. 지정의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의 기대를 따르는 것이어야 예수의 마음을 품는 삶인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찬송가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이라고 찬송하지 않나. 그 3절 가사에 보면, 

 

“가는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 내신 주님의 마음 본 받음이라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라는 고백을 담아서 찬송하는 것이다. 예수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다. 낮고 천한 곳에 오셨다. 그는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다 당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셨다. 자기 희생(犧牲)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오늘의 성찬이 이런 진리를 믿는 각 사람에게 은혜로운 성찬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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