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하는 이유(시145:1-7) 2023. 9. 24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다. 그는 왕으로 있으면서도 늘 자신을 높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데 마음을 쏟았다. 평민들이 왕을 높이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왕이었던 다윗은 자신이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경배하였다. 다윗은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의 믿음 생활을 신실하게 이어갔다. 다윗은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늘 하나님을 높였다. 다윗은 날마다 주님을 송축하고 찬양하였다. 다윗은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라”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시편 145편 1절을 곡을 붙여 부르는 찬양의 가사로 기억하기에 더욱 친근한 말씀 중의 하나이다.
시편 145편은 시편 150편의 분량 중에 담긴 그의 73편의 시편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실린 시편이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이나 장막절이나 칠칠절과 같은 절기 때에 이 시편을 낭송하였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예배드릴 때에 이 시편을 낭송하고는 하였다. 다윗에 의해서 기록된 29편의 감사예배시 중의 한 편이다. 그 뒤에 이어진 146-150편까지의 다섯 편의 시편을 살펴 보면 시작과 끝이 ‘할렐루야’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편들을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부른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라는 뜻이다.
1-2절에서 다윗은 날마다 그리고 영원히 왕이신 주의 이름을 높이고 송축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이유로 인해서 이처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일까.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민주주의 시대의 임기기 정해진 통치자들도 권세가 대단한데 왕정 시대의 왕이란 죽기까지 절대 권력자들이었다.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이었다. 그런데도 다윗 왕은 늘 하나님만을 높이고 경배하였다. 3절과 6절에서 ‘위대하시다’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great’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인간은 위대하지 못하다. 상대적으로 누군가를 위대하다고 높이고 영웅시하고 칭송하는 것은 한 시대의 시류로 지나가고 만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한 시대 공산국가에서 우상처럼 섬기던 레닌(Lenin, 1870-1924)의 동상들이 나라들마다 줄줄이 철거되던 때의 장면을 기억하는가. 레닌은 17살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하였다. 그는 1917년, 47살 때에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하여 혁명을 지도했고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은 7년 후인 1924년 1월 21일 저녁에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4살 때의 일이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1922~53)과 국가평의회 주석(1941~53)을 지냈던 스탈린(Joseph Stalin,1879-1953)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등을 많이 건립해 개인숭배를 강요했다. 그는 전대미문의 광신적 예배대상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20세기 공포정치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런 그의 동상들도 구 소련의 해체와 함께 나라마다, 도시마다에서 훼손되었고 나뒹굴게 되었다. 30년간 절대 공산 권력자로 통치하다가 74살에 죽었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가진 일벌레였다. 의심이 많았다. 자기 주변의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의외로 잔걱정을 많이하는 겁쟁이였다. 말년에는 자신을 지키는 근위병들 중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쏴 죽일 것이라는 불안에 떨기도 하였다.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별장에 이송되어 머무르다가 닷새 후에 사망했다.
세상의 왕, 세상의 권력자들이 누리는 부귀영화와 그 절대 권력의 영광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인기, 명예, 권력, 부, 외모, 젊음이 영원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크게 찬양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측량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한다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20여년 전의 연말에 지방 교역자들이 속초로 새해 준비 목회 세미나 준비차 며칠 동안 간 적이 있다. 어느 날 오후에 흔들 바위를 지나 울산 바위 정상까지 등정을 하였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었다. 춥기도 했지만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겨우 겨우 정상에 올랐다. 여럿이서 바위 꼭대기에 둘러 앉아서 파란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 같이 찬양하기 시작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큰 소리로 합창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다. 여호와만이 위대하시다.
모세 때에 홍해를 육지처럼 가르신 일이 위대하시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십년 동안 날마다 만나로 먹이신 것이 위대하시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반석에서 생수가 넘쳐 나게 하신 것이 위대하시다.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게 하신 것이 위대하시다.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일이 위대하시다.
여리고 성을 칼과 창과 활이 없이 무너지게 하신 것이 위대하시다.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을 하루아침에 송장 되게 하신 것이 크고 두렵고 위대하시다.
소년 다윗이 던진 물맷돌 한 개로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죽게 하신 일이 크고 놀랍고 위대하시다.
이렇게 묵상해 가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제목들은 우주 안에 가득하다. 끝이 없이 넘쳐 난다. 내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알이나 앗세라처럼 죽은 신이 아니시다. 인간이 만들어 섬기는 우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 영존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창조주이시며 위대하신 섭리자이시다. 하나님은 우주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셨다.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우주삼라 만상을 지으시고 질서있게 운행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자이시다.
다윗은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3절에,“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대하심은 측량하지도 못할 것입니다.”6절에,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할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13절에 보니까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주를 찬양하였다. 다윗은 11절과 12절에서 “주의 나라의 영광, 주의 나라의 위엄있는 영광”을 연이어 높이고 있다. 다윗은 이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세상 나라는 바벨론과 앗수르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하루 한 순간도 평안할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안전한 나라이며 견고한 나라이며 영원한 나라인 것을 알았다.
다니엘 4장에 보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간증이 나온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던 왕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왕이다. 그런 그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보호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였다. 풀무 불 속에서 터럭 하나 상하지 않고 생명을 보존하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그러고 베벨론의 통치 아래 있는 각 나라, 각 백성, 각 언어로 조서를 내렸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단4:2) 그리고 이어서“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각 사람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며 찬양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주는 존귀하고 그 위엄이 영광스러우시니.
사람이 상대방에게 나를 존귀하게 대해 달라고 요구해서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다. 존귀함이란 스스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나 마음가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하나님의 존귀를 깨달아 알고 나면 누가 나에게 하나님을 존귀하게 대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마음 속 깊이 읊조리게 될 것이다. 묵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고 체험하게 되면 그 누구든지 하나님의 위엄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존귀를 높이게 될 것이다.
다윗은 체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라고 말이다. 여기서 ‘읊조린다’는 말은 ‘묵상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나. 개인적으로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지 않나. 시편 1편에 보면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장래를 매사에 형통하게 해 주신다고 하셨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악인들은 바람이 날아가는 겨와 같다고 했다. 악인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죄인들은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도 못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의인들의 길을 인정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시편 145편에도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을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귀와 그 영광스러우신 위엄과 주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깨달아 알고 묵상하는 사람은 복되고 복된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인생을 보호하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으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 때문이다. 시편 145편 19절을 보자.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하였다.
신구약 성경을 주목하여 보라. 오늘 날 나와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라. 신앙의 눈으로 보면 존귀하신 주님, 위엄이 있으신 주님의 영광과 주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단풍이 드는 계절이 되었다. 과실나무마다 열매가 풍성하다. 어느 뛰어난 화가의 손길로 이렇게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단풍잎을 형형 색색으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들 사과, 배, 감, 대추, 밤 등등 가을의 풍성한 열매들을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낼 수 있겠는가. 봄, 여름, 가을의 그 아름다운 꽃들을 누가 지으셨는가. 공중의 새들은 누가 만드셨는가. 강과 바다의 그 많은 물고기들은 누가 다 만드셨는가.
잠언 30장에 보면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잠30:24- 28)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지 않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만사 가운데 주의 존귀와 위엄과 영광이 가득하다. 그러나 불신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출애굽기 12장 26절부터 보면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교훈한다.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라고 묻거든 이렇게 설명해 주어라 라고 교훈하였다. 그렇지 않나. 유월절이 무엇인지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체험한 세대가 아닌 후손들이 유월절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윗은 부모에게서 배워서 알았을 것이다. 이처럼 깨달아 알고 나면 주님의 존귀하심과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어찌 묵상하고 읊조리며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향하신>이란 찬양의 가사를 보라.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 영원하시도다 영원 영원하시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계획하심이
놀랍고 놀랍다 놀라우시도다 놀랍고 놀랍다 놀라우시도다
다윗은 알았다. 베들레헴의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가 수 많은 고생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탄생과 성장기와 오늘 날의 자신의 삶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존귀하신 손길과 영광스러운 위엄과 기이한 섭리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읊조리는 묵상으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주는 크신 은혜를 베푸시니.
다윗이 깨달아 알고 주를 송축하고 찬양하며 경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이다. 다윗은 8절에서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라고 말이다. 7절의 “노래하리이다”라는 말은 “큰 소리로 노래하다”라는 뜻이다. 맞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큰 소리를 찬양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3절에도 보면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라고 하였다. 4절에도 보면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 은혜를 감사하게 된다. 고마워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은 7절에서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자’라고 하였다. 10절에서는 감사하며 송축한다고 고백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크신 은혜가 무엇인가.
14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신다고 했다.
비굴한 자들을 일으켜 주신다고 했다.
15절에 보니까,
주는 주를 앙망하는 자들에게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신다고 했다.
16절에 보니까,
손을 펴셔서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했다.
17절에 보니까,
여호와는 언제나 의롭고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했다.
18절에 보니까,
여호와는 자기에게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했다.
19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부르짖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신다고 했다.
20절에 보니까,
여호와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다 보호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한 것이다. 다윗은 21절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다 같이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하자”라고 초청하고 있다. 2절과 4절에 보니까 다윗은 ‘날마다 주를 송축하고, 대대로 주를 찬양하자, 영원히 주를 찬양하자’라고 말했다. 42명의 이스라엘의 임금들 중에서 22명이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다. 물론 솔로몬을 포함해서 남유다의 20명의 왕들 중에는 악한 왕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과 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혈통보다 더 소중하고 다윗의 혈통의 후손으로 왕이 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사람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왕이냐 신하이냐 평민이냐를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날마다 찬양하며 대대로 찬양하며 영원히 찬양할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시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누구나 다 각 사람이 평생토록 진심으로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아버지를 송축하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찬송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이렇게 찬양하였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윗의 심정을 가지고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