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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마지막으로 말하노니(고후13:11-13) 20230604 삼위일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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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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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5 14:22 조회 3,151 댓글 0
 

                         마지막으로 말하노니(고후13:11-13)            2023. 6. 4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주로 올바른 신앙 생활을 촉구하는 책망과 강력한 권면의 말씀을 계속해 왔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대립과 갈등 속에 문제투성이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고 시작되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여유롭고 온유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성도들을 축복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관한 권면의 첫째는, ‘기뻐하라’는 것이다. 

‘기뻐하라’는 강조는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반복되는 강조이다. 빌립보서 3장 1절에 보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권면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희락’(喜樂) 즉 ‘기쁨’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기쁨을 선물해 주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베들레헴 지역의 목자들에에게 말하였다. “무서워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잠시 후에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나타나서 대합창을 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이들에게 기쁨과 평화를 선물해 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그렇지 않나. 복음서 그 많은 각색 환자들이 예수를 만나니 삶의 새로운 기쁨이 회복되었다. 못 보던 이가 보게 되었다. 말 못하던 이가 말하게 되었다. 걷지 못하던 이가 걷고 뛰게 되었다. 손이 오그라져 있던 이가 건강한 손을 갖게 되었다. 중풍병자가 나았다. 열두해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깨끗해졌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동안 누워 지내던 병자가 건강해졌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못 걷던 거지가 건강해 져서 성전 안에 뛰어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오늘날은 한센병이라고 이름하는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다. 귀신이 떠나갔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회당 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났다.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이 살아났다. 베다니 동네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났다. 예수가 저들을 살려 주었다. 

 

요한복음 4장에 소개된 수가성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나서 사는 기구한 여인이었다. 그런 저가 예수를 만났다. 기쁨으로 동네에 뛰어 들어가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 만난 소식을 전하였다. 

 

원래 사도 바울은 기쁨이 없던 율법주의자였다. 다메섹 변화 이전의 사울은 율법학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항상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 율법에 사로잡혀서 언제나 판단하고 언제나 공격적이고 언제나 누군가에게 꼬투리를 잡는 깐깐한 바리새인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 만난 후에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를 전하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편지할 때마다 “항상 기뻐하라”고 기쁜 일상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맞다. 예수 믿는 사람은 기뻐해야 한다. 기뻐져야 한다. 우리가 찬송하지 않나.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강림절 기간 동안에만 부르고 마는 찬송이 아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 하여라”이런 찬송은 성탄절 날 새벽 찬송으로 부르고 끝낼 찬송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성탄 찬양으로 ‘노엘noel 노엘noel’하고 찬양한다. ‘노엘’(noel)이란 라틴 말의 생일을 뜻하는‘나탈리스’(natalis)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즉 “주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하였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한 후에 핍박을 피하여 사마리아 성으로 간 것이다. 빌립이 전파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성민들 중에서 표적이 일어났다.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 지르며 떠나갔다. 많은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못 걷던 사람이 걷게 되었다. 사도행전 8장 8절에 보니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하였다. 맞다. 예수 믿으면 기뻐진다.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면 개인과 가정과 도성 안에 기쁨이 가득해진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생활은 슬픔과 아픔과 걱정과 근심과 고난과 괴로움과 상처와 상실 중에서도 하늘로부터 임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기뻐하라’는 말은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강조가 아니겠는가. 장수 사회에 이 세상에서 100년을 산들 날마다 탄식하며 살고 날마다 우울하게 산다면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요즘 심리학에서는‘긍정 에너지’(positive energy)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서 ‘긍정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된 일인지 금방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반대로 ‘부정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 자신도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지거나 찜찜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성실과 인내와 긍정 에너지가 잘 조화를 이룬 이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스티브 잡스, 오프라 윈프리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랜드의 박성수(1953-) 회장이다. 그는 사랑의 교회 장로다. 그는 아버지도 장로였다. 대학교 때에 지금의 성남 빈민가에 봉사 다니다가 복음을 다시 깨달았다. CCC 사영리 소책자의 내용과 “당신은 성령 충만하십니까”라는 그림 전도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긍정 에너지’로 살았던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이 창세기의 요셉과 에스더와 다니엘이다. 그렇지 않나.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일순간에 옷 벗겨진 채로 남의 나라에 팔려 가서 노예가 되고 말았다. 미쳐 버릴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여건에서 13년 천신만고 끝에 애굽의 제 2인자가 되었다. 성경의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매”라는 반복적인 표현은 심리학 용어로 바꾸면 “긍정 에너지”를 먹고 입고 깔고 덥고 살았다는 말이 아닌가. 요셉의 처지쯤 되었으면 탄식하고 절망하고 저주하다가 우울증에 빠져 버리거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십상이 아닌가. 그런데 요셉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굳굳하게 개척해 나갔다. 

 

긍정 에너지를 내 몸과 마음에 충전하기 위해서는 지난 날의 씁쓸한 기억을 잊어 버리고 지금, 현재에 충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가올 장래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꿈을 키우고 실력을 쌓아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살아가다가 보면 좋은 일도 경험하지만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속 상한 일이나 가슴 아픈 일이나 불행한 일이나 안타까운 일도 겪게 마련이니 말이다. 

우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은 ‘세로토닌’(serotonin)이란 단어를 알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감정, 감각, 기분, 수면, 식욕, 행동, 학습 능력, 신체 활동 전반에 골고루 영향을 미친다. 세로토닌이 증가하면 표정이 밝고 온화하고 기분이 좋고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 준다. 대인관계에서도 좋은 평을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세로토닌이 적어지면 우울해지고 짜증이 늘어나고 별 것 아닌 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 된다. 주변 사람에게 탓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뻐하라’라는 권면은 주 안에서 긍정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받는 일상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도파민이 과다 배출되면 지나친 쾌락을 추구하다가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도 위험한 것이다. 반대로 ‘노르아드레날린’이 과다 배출되면 우울증, 거식증, 폭식증, 신경 쇠약, 공황 장애 등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은 의학적으로 보면 몸 안에서 ‘세로토닌’이 적당량 배출되게 유지하라는 권면이기도 하다. 

 

경기도전통민요 중에 <태평가>의 가사는 이렇다.“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를 내어서 무엇하나 인생 일상춘몽인데”라는 가사가 이어진다. 어제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는 지난 1973년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 집회 5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다. 아들 플랭크린 그래함(W. Franklin Graham III, 1952-) 목사가 설교하였다. 그는 “서울 땅을 다 가져도, 서울 시내의 빌딩을 다 가져도, 서울 시내에 다니는 자동차를 다 가져도, 서울 안에 있는 모든 기업을 다 가져도 인간의 소유는 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끝이 없는 소유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도 인생의 궁극적인 대답은 찾을 길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생의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예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날 100만명 이상이 학살을 당한 르완다를 방문했던 일화를 소개하였다. 길거리에 널려 있는 참혹한 시체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삼년 후에 다시 방문해 보니 그 많던 시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반면에 여기 저기에 죽어간 이들이 입었던 옷가지들이 발에 밟혔고 죽은 자의 썩고 남은 뼈들이 여기 저기 굴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인간에게 죄 사함과 부활과 영생이 없다면 이 세상의 성공과 출세와 명예와 권력과 인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태평가>의 가사처럼 ‘일장춘몽’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프랭크린 그래함 목사는 설교 후에 아버지 빌리 그래함 목사처럼 회중을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수 영접 기도를 따라하게 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신앙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신다. 그래야 이단과 사이비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이 험한 세상만 탓하지 말고 스스로 주 안에서 기쁘게 살자. 주변에 기쁨을 전하는 자로 살자. 플랭크린 그래함 목사는 세계적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 담배를 피웠다. 고등학교 때는 여학생 괴롭히는 흑인 학생을 때려서 정학당했다. 기독교 학교인 대학교 때에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문제가 있다고 반항하다가 퇴학당했다. 20살 되던 생일날 아버지 빌리 그래함 목사는 아들에게 산책하자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선택하여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건지 아니면 네 맘대로 네 생을 살건지를 말이다.”그는 아버지와 산책하다 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성경을 펼쳤다. 요한 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를 읽게되었다. ‘거듭남’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단하였다. 그날 그 시간 자기 방에서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주님. 회개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플랭크린 그래함은 달라졌다.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50년을 달려왔다. 지금 나이가 71세이다. “그날부터 예수님을 위해 살고 싶었다. 나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이 내 삶에 주인으로 들어와 달라고 믿고 초대하였다. ”그날의 그 고백과 함께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세게 170여개국에 ‘Samaritan’s Purse’라는 복음 구호 단체의 대표로서 사역을 계속해 오고 있다. 빌리 그래함 전도 협회(BGEA)의 대표로 세계를 날아다니며 복음 전파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또 하나는, “온전하게 되라”라고 하였다. 

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온전하다’라는 말은 ‘수선하다’라는 뜻이다. 기계의 일정한 부분을 고치거나 부품을 교체하면 그 기계의 제 기능을 계속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마가복음 1장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만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저들 형제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그 그물 깁는 작업이 ‘온전하게’하는 작업이다. 그렇지 않나. 어부는 그 길고 넓은 그물의 몇 군데 코가 끊어졌다고 모든 그물을 버리지 않는다. 정성을 들여서 수선해서 다시 사용한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사용한 ‘온전하게 되라’는 권면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바로 잡고’라는 표현이 그런 의미이다. 범죄에 빠졌거나 잘못된 형제자매를 권면해서 바른길로 인도하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이런 강조를 하는 것은 지난 주일에 묵상한 고린도전서 12장의 성령과 은사에 관한 내용과 일치한다. 즉 일치와 통일과 화합과 화목을 위해서 거룩한 연합을 계속하라는 권면이다. 그걸 위해서 스스로는 교회의 일원이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일부로서 온전함을 추구하라는 권면이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등 모두 타이어 안에 일정한 기압의 공기가 주입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심지어는 비행기의 경우에 뜨기 전과 착륙 전에 타이어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비행과 착륙이 불가능해지고 만다. 이처럼 모든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야 한다.

 

바울이 각 사람, 각 성도에게 ‘온전하게 되라’라는 강조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하나쯤이야 이런 마음을 가지면 심각해지고 만다. 작게는 가정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기업도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교회 안에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의 삶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이어가길 원하신다. 

 

9절과 11절에 보면 ‘온전하게 하며’라고 하지 않고 ‘온전하게 되며’라고 말했다. 능동이 아니다. 피동이며 수동이다. 맞다. 내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러므로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섬세하신 손길로 만져 주셔야 한다. 그래야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같은 명품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주 안에서 존귀하고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신다. 

 

셋째는, “평안하라”라고 하였다. 

물론 어떻게 보면 ‘평안’이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평안은 환경의 산물이기도 하고 대인관계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다툼과 시기와 분쟁과 불평과 원망과 갈등과 중상모략 가운데 휩싸여 있다면 어떻게 나만 혼자 평안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평안할지어다”라는 권면은 개인적인 권면이기도 하지만 서로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너그러운 마음과 용서하고 용납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에 나 스스로 내 마음에 찾아 드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웃에 대하여.

이웃에 대한 첫 권면은, “마음을 같이하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던 교회였다. 게바 파, 바울 파, 아볼로 파 등등 서로 제 각기 자기들이 잘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래서 갈등과 시비가 멈출 날이 없었다. 그런 저들에게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마지막 권면을 유언처럼 말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가정의 가족이든 교회의 성도들 간이든 마음이 같아야 행복하지 않겠는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에서도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권면하였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라는 찬양을 부른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6월 첫 삼일 셋째 날인 어제, 토요일 새벽 기도회 시간에 몽골 김석환, 황보순태 선교사 부부가 다녀갔다. 몽골주심교회 담임 목사인 게를토야 목사도 다녀갔다. 예배 후에 잠시 교제하였는데 헤어지기 전에 “선교 현직에서 은퇴하고 나니 교회 선교 지원이 다 끊기고 예수사랑교회를 비롯한 2곳만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하며 나를 포옹하였다. 우린 작은 액수이지만 14년을 이어 가고 있다.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보내고 후원하는 교회의 성도들과 보냄을 받은 선교사가 주 안에서 하나이다. 하나 됨을 위하여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라고 하였다. 서로 간의 평화와 화합과 사랑을 확증하는 방법으로 이마나 볼이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하였다. 이러한 인사법은 이성간에는 금지되었다. 동성 간에 13세기까지 이어 오다가 멈추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주변의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하였다. 맞다. 성도는 서로간에 끊임이 없이 문안하고 문안을 받으며 살아가는 천국 공동체이다. 

 

둘째는,“위로를 받으라”라고 하였다. 

위로는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다. 서로 상호 작용이다. 고린도 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위로’를 주제로 교훈하는 편지를 썼다. 고린도 후서 1장 6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 내용처럼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서로를 진심을 담아 돌아 보고 문안하며 살아가는 우리 서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11절 중간에 보면,“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을 믿으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이러한 사랑과 평강을 충만하게 누리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예배를 마칠때에 기도하는 소위 ‘축도’(祝禱, benedict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축복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예수의 은혜를 하나님의 사랑보다 먼저 언급한 이유는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강조처럼 예수께서 중보자요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통로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이 모세를 통한 아론의 축복기도라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신약 시대의 축복기도이다. 우리 각 사람의 범사에 그리고 자자손손 만대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 안에서의 사귐과 친교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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