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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이렇게 키우라(벧전2:2-10) 20230507 어린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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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5-09 22:15 조회 3,236 댓글 0
 

                         이렇게 키우라(벧전2:2-10)                   2023. 5. 7 어린이주일

                                                                   

 

어린이 주일인 오늘 베드로전서 2장의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키우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다 아들딸을 인물로 키워내길 원한다. 

창세기의 야곱, 요셉은 키워진 인물이다. 출애굽기의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도 키워진 인물이다. 사사시대의 기드온과 여 사사 드보라도 키워진 인물이다. 부모 일찍이 잃은 에스더도 사촌 오빠 모르드개를 통해서 키워진 인물이다. 다니엘이나 느헤미야도 포로의 땅에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키워진 인물이다. 키워졌다는 말은 깎이고 다듬어져서 인물로 자라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 키우시고 맞닥뜨려지는 그 모든 환경과 사건과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내신다. 

 

1920년 생으로 104세인 김형석 교수도 하나님 안에서 키워진 시대적인 인물이다. 시인 윤동주와 친구요 동기라고 하지 않나. 유관순 열사는 엘리스 샤퍼 선교사에 의해 키워졌다. 인덕 대학교의 설립자 박인덕 여사도 엘리스 샤퍼가 키워낸 인물이다.  박서양의 아버지인 백정 박성춘은 갑오 개혁 당시에 백정의 신분도 개혁되어야 할 것을 탄원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아 냈다. 그 후로 호적도 없이 살던 백정에게도 호적등록이 가능해졌다. 미국의 노예 해방에 준하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룬 것이다. 

 

백정 출신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곤당골 예수학당에서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다. 박서양은 제중원에서 만난 의사 선교사인 올리버 에비슨에 의해서 키워졌다. 선교사 곁에서 쓰레기 치우며 청소하던 소년이 의학생이 되었다. 에비슨 선교사는 캐나다에서 조선에 온 의사 선교사로 고종의 주치의이기도 하였다. 고종의 허락으로 조선 최초의 서양 병원인 제중원으로 설립하였다. 박서양은 제중원 출신 의사 제 1기생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로 키워졌다. 의사 박서양은 제중원 졸업 후 틈틈이 후배 양성을 위해서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이승만, 김규식,  등과 함께 황성기독청년회에 나가 학생들의 교육을 맡았다. YMCA 학당의 부학감을 맡기도 했다. 박서양은 나중에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왕궁에 드나들며 고종황제의 진료를 보기도 했다. 백정 출신이었던 그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 은혜를 그는 잊지 않고 나라와 민족에 보답했다. 박서양은 시대가 키워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아버지 박성춘은 병든 자기 몸을 치료해 준 사무엘 무어 목사가 이끌던 소공동 부근의 곤당골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복음에 대한 감격으로 사람들을 열심히 전도하는데 주로 백정들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먼저 교회를 다니던 양반쪽에서 백정들을 거북하게 생각하고 출입금지를 요구했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소신은 분명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양반교인들은 홍문수골 교회라는 곳으로 따로 분립해 나갔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노력으로 나중 두 교회는 다시 연합하여 1905년 종로구 인사동으로 교회를 옮겼다. 양반과 천민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가 되자하여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을 지었다.

 

1898년(고종 35년) 박성춘은 지도적 능력과 역량을 인정받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서울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 공동회의에 모인 수많은 군중 앞에서 중에서 애국 연설을 하였다. 6가지를 헌의한 것이 국가기록물에 지금도 남아있다. 그의 연설문을 보면 대단한 열정과 비전과 시야를 가진 애국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박성춘은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한성부지역의 간부로 활동했다.

 

나중 박성춘은 1911년 12월에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3년후 대원군의 친척으로 왕족이었던 이재형도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승동교회는 안디옥교회처럼 왕족, 양반, 백정이 명실상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는 ‘차별 없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 되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에 대하여 설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자녀의 양육과 성장 측면에서 접목하여 묵상하려고 한다. 동물의 세계도 일정한 양육기를 거친다. 그냥 낳아 놓은 것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동물마다 그 나름대로 번식을 이어가는 생태계가 있다. 

 

지난 3월 23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어린이 대공원의 얼룩말 한 마리가 울타리 밖으로 뛰쳐 나와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다가 마취 총을 맞고 포획된 소동이 있었다. ‘세로’라는 이름을 가진 이 얼룩말은 지난 2021년에 태어난 갓 두 살짜리 수컷으로 알려졌다. 세시간 가량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을 활보하다가 7발의 마취총을 맞고 붙잡혀 동물원으로 돌아 갔다. 원래 얼룩말이 살아갈 공간은 동물원 사육장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이어야 맞다. 한 마리의 수컷과 여러 마리의 암컷이 모여 산다. 밤에는 모두 누워 자고 한 마리는 맹수의 공격을 살피기 위해서 일어 서서 보초를 선다. 누가 저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었겠는가. 줄무늬 그렇다. 과학자들이 100여년 연구했지만 그 답이 명확하지 않다. 인프루엔자와 같은 병을 옮기는 아프리카 말파리는 피를 빨아 먹는데 말파리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착시 현상을 갖게 하려고 얼룩 무늬를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말은 조련을 통해서 사람이 다룰 수 있지만 얼룩말은 워낙 성질이 사나워서 절대로 길들여 지지를 않는다.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맹수의 공격을 받으면 어린 말과 암말을 앞장 세우고 숫 말이 뒤에 남아서 힘이 넘치는 뒤발질로 맹수의 공격을 방어한다. 시력과 청력이 뛰어나고 시속 56km까지 달릴 수 있다.

 

사람은 어떤가. 낳기만 했다고 저절로 사람이 사람다워지지는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엄마와 아빠의 손길을 통해서든 혹은 그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이든 양육되어야 한다. 사람은 양육을 통해서 사람다워지는 것이다. 가르쳐서 키우기도 하지만 보고 배우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전서 2장의 본문은 교훈하는 바가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키우라”라고 정하였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키우라.

1절과 2절에 보면 ‘버리라’, ‘사모하라’라는 두 가지의 명령어를 사용한다. 신앙이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버릴 것을 버리고 사모할 것을 사모해야 한다. 1절에 보니까 “모든 악독, 모든 기만, 외식, 시기,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하였다. 버리는 것이 소극적인 선택이라면 사모하는 것은 적극적인 선택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젖’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 단어로 설명하였다. 그 하나는 ‘순전하다’는 것이다. 이는 ‘악의와 속임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또 하나 ‘신령하다’는 것은 ‘로고스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사모한다’는 표현은 ‘갈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낳아 양육하려면 어려서부터 이처럼 버릴 것을 버리고 갈망할 것을 갈망하게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의 노년기의 세대와 청장년세대 그리고 지금 한창 성장하는 세대를 비교해 보면 신체 조건이 확연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남녀 평균 신장으로부터 외모나 신체 조건이 월등하게 변화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양, 보건, 위생, 의료 혜택 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게 발전하였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늘그막에 믿어 보려고, 복음을 받아 들여 보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물론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순조로운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적인 양육관을 가지고 우리의 다음 세대를 키워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나중에 예수의 세상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나사렛에서 자라났다.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먹고 컸다. 마리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서민 가정들이 행하는 이유식을 공급 받았을 것이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된 요셉을 통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났다. 마리아의 품 안에서 커갔고 요셉의 무릎 위에서 커갔다. 성경은 예수의 성장기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의 아들 딸들이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점점 사랑을 받는 존재로 자라나도록 돌보고 양육할 책임이 부모와 교사와 목회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라는 명제를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2절 말씀처럼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심고 물주면 자라게 되어 있다. 이것이 식물의 원리이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난 아기에게 엄마 아빠가 날마다 대하는 그 일상이 쌓여서 한 아기가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진 믿음의 가정에서는 엄마, 아빠가 아들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양육자요 조력자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신앙은 계속하여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성숙되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의 삶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성화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을 말한다. 죄와 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깨달아 알고 죄와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끊임이 없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일상이 쌓이고 쌓여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 안에서 계속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 교육과 학원과 같은 사설 교육을 통해서 경쟁력 있는 자녀들을 키워내려고 적지 않은 투자를 계속한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들딸들을 갓난 아기를 키워내듯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이 없이 양육해 나가야만 한다. 

 

“엄마, 내가 알아서 할께요. 아빠, 내가 알아서 믿을께요.” 이런 소리 하기 전에 분명한 하나님 신앙, 분명한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분명한 구원관을 깨닫게 해 주어야만 한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건축의 원리를 동원해서 설명을 게속해 나가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를 “사람에게는 버림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시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우리 각 사람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산돌 신앙으로 살아가고,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젯밤에 영 연방의 왕위에 등극한 찰스 3세도 어머니가 낳았고 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운 캔터베리 대주교도 어머니가 낳았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거룩한 제사장’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산돌이요 모퉁이 돌로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로운 돌이지만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에 불과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산돌이요 신령한 돌이요 택함 받은 보배로운 모퉁이돌이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우리 교회의 2-3층 예배당 외벽은 수 만장의 벽돌로 쌓았다. 같은 벽돌이지만 예배당의 벽돌로 쓰임 받은 것이다. 같은 벽돌 공장에서 구워낸 벽돌이라도 퇴폐 영업을 하는 룸 싸롱이나 나이트 클럽의 내부를 장식하는 벽돌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회사, 같은 공장, 같은 벽돌공의 손길에 의해서 만들어진 벽돌이라도 예배당을 장식하는 벽돌로 쓰임 받을 때에 그 용도가 거룩해 지는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8절에 보면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가정의 아들딸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들거나 세상의 보여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길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백향목과 종려 나무처럼 든든하게 자라나길 소원한다. 감람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넘처나게 맺기를 축원한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로 키우라.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네 가지로 분명하게 교훈해 주었다.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다. 

 

‘택하신 족속’이란 원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천하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로 구별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특권과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였다. 가나안을 선물로 받았으나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하나님은 저들을 이방의 막대기 때리시고 이방의 가시채로 치셔서 연단하셨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만을 가지고는 ‘택하신 족속’임을 자랑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오늘 날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는 자들이야 말로 ‘택하신 족속’인 것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출애굽기 19장 6절에 근거한 말씀이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5절에서는 ‘거룩한 제사장’, 9절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는 “거룩한 제사장이면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복이며 특권인가. ‘왕 같은 제사장’이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끌려간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전쟁하였다. 롯과 모든 가족을 모두 안전하게 되 찾아 왔다. 많은 전리품을 얻게 되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오던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다. 아브라함은 살렘 왕국의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 앞에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치며 그를 귀하게 여겼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에게‘왕같은 제사장’과 같은 은혜와 특권을 부여해 주셨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인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이요 제사장인 특권과 권세를 덧입혀 주셨단 말씀이다. 

 

‘거룩한 나라’라는 말씀은 역시 출애굽기 19장 6절의 “거룩한 백성”이란 말씀에 근거한 내용이다. 맞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거룩한 나라요 거룩한 민족이요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셨다. 그러나 저들 이스라엘 민족은 그 거룩한 나라, 거룩한 민족으로서의 부르심을 박차 버리고 말았다.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 신앙에서 떠났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나의 죄를 씻어 새사람 만들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나라, 거룩한 민족, 거룩한 백성’의 긍지와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 여행을 가면 “중국인이냐” 아니라고 하면 “일본인이냐”라고 대개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그렇게 자랑스럽고 긍지 있게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그처럼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는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긍지 또한 마찬가지여야만 할 것이다. 

 

‘소유된 백성’이란 출애굽기 19장 5절의 인용이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하였다. 신명기 7장 6절에 보면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다.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다. 이를 말라기 3장 17절에서는 “특별한 소유”라고 하였다. 

 

요즘 ‘장난감 병원’이 인기라고 한다. 장난감 비용이 장난이 아니다. 조금 상했다고 장난감을 버리기에는 아깝기도 하고 정도 들었다. 그런 면에서 장난감을 고쳐 주는 ‘장난감 전문 병원’이 인기라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을 ‘특별한 백성, 특별한 소유’ 로 삼으시길 원하신다. 이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하였다. 

 

자, 이처럼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인 우리 성도들을 향하신 주님의 기대가 분명하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를 먼저 믿는 부모된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인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만방에 선포할만한 복음의 사람들로 양육해 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다 목사가 되고 다 선교사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세상의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전공이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르고 재주가 다르고 솜씨가 다르고 역량이 각기 다 다르지만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구원의 덕을 만방에 선포하는 복음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라.

본문 10절은 극단적인 대조의 표현을 연 이어 반복하고 있다.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을 비교하고 있다.

그리고, 전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였던 자였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자라는 대조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세상의 80억 인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아가는 자들로 구분된다. 

 

요즘 묵상하는 사무엘 하 말씀대로 하면 다윗의 장남 암논이나 종들을 시켜서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자들이다. 왕의 아들인 왕자이긴 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매김하질 못했다. 배 다른 오빠 암논에게 겁간당한 불운한 운명의 다말도 마찬가지이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서 낳은 쌍둥이이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했고 동생 야곱은 하나님의 긍휼과 넘치는 사랑을 받은 주인공이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길에 들어 섰으나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형 에서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시들해 지고 말았다. 가정의 달, 아름다운 계절이다. 아들딸을 위해 고민하고 아파하고 마음을 담아서 대화하고 기도하는 회복의 달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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