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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한 마음과 생각(빌4:4-7) 2014.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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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6-01 07:27 조회 20,741 댓글 0
 
평강한 마음과 생각(빌4:4-7) 2014. 6. 1
 
 
 
어른이나 어린이나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는 평강이다. 사람은 누구나 평강한 나날을 원한다. 평강을 다른 말로 하면 평안, 안녕, 평화 등으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평강하고 행복한 것 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요즘처럼 사방에서 사고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불안한 때에 하루를 평강하게 살아가고 또 하루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성경에서 우리말의 ‘평강’ 혹은 ‘평화’를 히브리말로는 ‘샬롬’ 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는 같은 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민수기 6장 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은혜와 평강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 베드로의 편지의 첫 머리에 늘 사용하는 저들의 인사법이기도 하였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혹은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인사하고는 하였다. 시편 29편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하였다. 시편 72편 7절에는 시적인 멋진 표현의 성경 말씀이 나온다.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122편 8절에는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도 나온다.
 
지금 슬퍼하고 있는가. 괴로워하고 있는가. 답답해하고 있는가. 막막해 하고 있는가. 울고 있는가. 질병과 씨름하고 있는가. 어찌할 바 몰라 하고 있는가. 장래에 평강과 은혜와 행복이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살아가는 성도다운 믿음을 갖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주 안에서 기쁘게 살라.
삶이 곤고하고 우울한 일이 겹치고 기뻐할 조건이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형편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하고 인사하면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다. 누가 기뻐할 줄 몰라서 이러고 사는 줄 아는가.”하고 반응할 것이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다. 그 감옥 안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런 편지를 한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지금 기뻐할 수 없지만 주 안에서 항상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대적으로 참혹하고 불운하고 우울하고 답답한 날들을 지내고 있었다. 로마가 유대 땅을 점령하여 피지배국민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저들은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해방을 꿈꾸고 소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은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시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우리가 성탄절이 다고 오는 대강절이 되면 부르는 찬송 104장의 가사처럼 말이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은 이런 평화와 기쁨을 목말라하며 살아가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누리던 평안이나 기쁨이 사라지고 고난과 고생과 역경이 끊임없는 날들을 지내야 했다. 여러 번 잠을 자지 못하고 육신적으로는 춥고 배고프고 굶주리고 헐벗었다. 때로는 사십에 하나를 감한 39대씩 때리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때로는 배가 파선 되어 죽음의 위기를 겪는 등의 위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세 번 태장으로 맞고 두 번 돌에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 속에서 지냈으며”(고후11:25)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그는 매도 여러 번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후11:23)
 
그런 그가 지금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반복하여 부탁하였다. 반드시 기쁘게 살라는 강조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은 어떤 형편을 만날지라도 그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앞서서 빌립보서 2장 17절 이하에도 보면 그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고 하였다.
 
기쁜 일이 있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즐거워하는 일이야 어느 누가 못하겠는가. 그러나 신체적으로, 여건이나 환경적으로 기뻐할 여건이 못 되는데도 기뻐하며 살 수 있다면 남다르지 않나.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강조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 성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려 점하는 여종에게 꾸짖어 그를 짓누르고 있던 귀신을 내어 쫓았다. 돈 벌이가 없어지게 된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에게 알려서 붙잡아 옷을 찢어 벗기고 몹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 밤에 바울과 실라는 찬송하며 기도할 때에 차꼬가 풀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옥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다. 저들을 지키고 있던 간수들은 바울과 실라가 도망간 줄로 착각하고 칼로 자결하려 하였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도망하지 않고 감옥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저들에게 알렸다. 그 때에 간수들은 등불을 밝혀 들고 바울과 실라 앞에 찾아 들어가 무릎을 꿇고 “선생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하고 질문하였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가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하였다. 그 밤에 차꼬에 채인 채로 기도하고 찬송하던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간수들도 들었다.
 
예수 믿으면 기쁜 일만 많았으면 좋겠는데 꼭 그렇지는 못하다. 어찌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여야 항상 기뻐하고 언제나 즐거워하고 언제나 기분 좋게, 언제나 밝게 언제나 감사하며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걸까.
 
신체적인 조건이나 환경적인 여건을 초월하는 성도들의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남들과 비교하면 전혀 기뻐할 여건이 없는 그런 환경 중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주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한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하였다.
 
기쁘게 살아야 평강이 마음에 깃들고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평강한 생활을 사모하며 살아야 마음과 생각이 기뻐지는 것이다. 기쁨과 평강, 평강과 기쁨이 항상 샘솟는 나날이 되기를 기도하자.
 
 
상대방을 너그럽게 대하라.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삶을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 대하여 너그럽게 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너그럽게 관용하며 대하여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종말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나의 살아갈 날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 가족이든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 대하여든 어찌 아등바등하며 대하겠는가. 종말신앙을 갖기 시작하면 매사에 있어서 그 누군가에 대하여서이든지 너그럽게 대하고 관용하며 대하지 않겠는가.
이 식탁이 아내가 차려주는 마지막 식탁이라고 생각한다면 반찬 타령할 수 있겠는가. 이번 달 월급이 남편이 벌어오는 마지막 월급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 어찌 남편의 사회생활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이번 세월 호 참사에 희생된 아들딸의 엄마가 하는 아쉬운 고백 중에 “이렇게 소풍 떠나서 못 돌아 올 줄 알았다면 소풍 가는 날 아침밥이라도 잘 차려 먹여 보낼 걸 그랬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밥 한 그릇이 문제인가. 이것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여기면 모든 것이 새롭고, 매사가 진지하고, 누구이든 귀하고 반갑고 고맙지 아니하겠는가.
 
맥나잇(Macknight)이란 주석가는 관용에 대하여 세 가지 해석을 하였다.
 
첫째, 박해에 대하여 온유하게 대하는 것
둘째,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는 것
셋째, 감정의 전적인 절제
 
여하튼 관용이란 모든 사람에 대하여, 모든 일과 사건에 대하여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대하는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온유하게 대하고, 용서하며 대하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관용이라고 하였다. 누군가가 잘 용서가 되지 않는가. 용서가 되도록 기도하야야만 할 것이다. 그가 목사인가, 교사인가, 가장인가, 남편인가 아내인가 아니면 사회에서 만나고 직장에서 만나고 사업차 만나는 그 누구인가. 용서하는 자가 큰 자이다.
 
유럽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시계를 만드는 아버지와 두 딸이 다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1940년에 독일 군대가 네델란드를 침공하였다. 코리 텐 붐 자매와 그녀의 아버지는 유태인들에게 은신처로 자기 시계 제작소를 제공하였다. 같은 동족이었던 얀 포겔은 독일 나치 비밀경찰로 활동하고 있었다. 1944년 2월 이얀 포겔에 의하여 코리와 그의 언니와 아버지와 친척들을 비롯한 30명이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얀 포겔의 밀고로 체포된 코리의 아버지는 84살에 감옥에 들어 간지 10일 만에 돌아 가셨다. 언니는 10개월간 끔찍한 고문과 고통과 모욕과 모독을 당하다가 숨졌다. 오빠도 감옥에서 숨졌고 조카는 다른 수용소로 끌려 간 후에 소식이 끊겼다. 긴긴 세월이 지나고 혼자 살아남아 석방된 코리는 끔찍한 생지옥과 같던 수용소의 기억을 이렇게 썼다.
 
“우리 가족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얀 포겔을 용서하였습니다. 나에게 그런 용서의 힘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코리는 성경책에 편지와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에 빨간 밑줄을 그어서 얀 포겔에게 선물하였다.
 
세상은 바뀌었고 얀 포겔에게도 사형 언도가 내려졌다. 그러나 얀 포겔은 코리의 편지와 성경을 받아 읽은 후에 변화되었고 이런 답장까지 보내 왔다.
 
“당신이 내게 보내 준 성경을 보니 예수님은 인간의 엄청난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군요. 나는 나의 큰 죄도 예수님께 얹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의 죄도 용서하신 것을 성경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나와 같은 용서 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심으로서 용서는 예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코리와 그의 언니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 매질하고 고문하던 얀 포겔 빌렘젠 캅타인 이 세 사람 모두에게 코리는 일일이 용서의 편지를 보냈고 예수의 사랑과 용서의 힘을 전하였다. 저들에게서 날아 온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나의 죄를 용서한 것을 통하여 예수께서 당신에게 어떤 사랑과 용서를 베푸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목숨과 아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장본인입니다. 당신에게 용서를 깨닫게 하신 예수님이 나의 죄도 용서하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저는 제가 저지른 모든 죄를 예수님 그분에게 맡깁니다.”
 
세월이 지나고 제 2차 대전은 끝났다. 1947년 코리는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 많은 무리들 앞에서 간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간증이 끝날 즈음에 그 많은 회중들 한 가운데 잿빛 코트를 입고 무리 사이에 끼어 앉은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매주 금요일마다 코리와 그의 언니 베티를 옷을 벗긴 채로 나치의 군인들 앞으로 지나가게 하는 둥 온갖 수치를 당하게 하고 때리고 고문하던 일을 감시하던 감시원 중 한 사람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하나님의 용서, 예수님의 용서를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간증하고 난 직후인데 정작 그를 마주 대하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예수님의 용서를 주제로 한 메시지는 멋졌습니다.”라고 말하며 희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악수를 청해 오는 그를 대하는 순간 코리는 온 몸이 얼어 붙는 것과 같았다. 수용소 안에서의 악몽과 같은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가슴 속에서 불 같은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코리는 순간 이렇게 기도하였다. "날 용서하신 주님 저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
 
그리고 악수하는 손을 자기도 손을 내밀어 악수 하였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며 노력하며 악수하였다. 그 순간 코리의 마음속에는 온유하거나 자비한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악수하였다. 코리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내키지는 않으나 악수하여야만 했다.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5)고 미리 말씀하셨고 그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고 하였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 갈 때에 모든 사람에 대하여 너그럽게 관용하는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염려 대신 감사 기도를 드리라.
감사는 인간의 가장 성숙한 표현이다. 개나 고양이를 아무리 사랑해 주어도 감사를 표현할 줄은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개나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집안에 두는 분들은 지금 이 시간 속으로 “목사님 몰라서 그러시지요 우리 집 강아지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위로가 되는데요.”하고 대답하실지도 모른다. 창세기의 루스 광야의 야곱, 애굽의 노예 시장에 벌거 벗겨진 채 팔려 갔던 요셉,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떠내려 보내졌던 모세, 가나안의 철기 문명을 점령하러 들어 가야만 했던 광야의 여호수아, 물매와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 서야 했던 소년 다윗, 사자 굴 앞에서의 다니엘,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겝게 펄펄 끓던 풀무 불 속에 던져져야 했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어찌 저들의 마음 속에 염려와 불안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저들의 삶을 너무나도 잘 알던 고난 극복의 이방 전도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세요.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세요.”
 
하는 교훈은 얼마나 소중한 가르침인가. “염려함으로 너의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느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저것들이 창고 지어 쌓아 놓고 살고 길쌈하여 입고 살더냐 솔로몬의 영광도 이만 못하다.” 왜 예수께서 그런 교훈을 주셨을까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주 안에서 살면서 염려와 불안과 초조와 긴장과 두려움과 번민을 쓰레기를 쓰레기장에 갖다가 버리듯이 버리고 주께 범사를 맡기며 살아가고자 할 때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순간마다 지켜 주시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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