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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이는 누구냐(마21:1-11,마27:27-56) 2014. 4. 13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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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4-14 12:29 조회 20,253 댓글 0
 
이는 누구냐(마21:1-11,마27:27-56) 2014. 4. 13
종려 주일
 
 
2014년 종려 주일인 오늘 이 시간에 ‘이는 누구냐’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다. 오늘도 교회를 찾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나에게 있어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성경의 인물들로 하면,
 
유대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 하며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근동의 2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을 모조리 찾아 내어 다 죽이던 헤롯 왕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누가복음 2장에 소개되는 주인공인 평생토록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지키며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던 선지자 시므온이나 여 선지자 안나에게 있어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였나.
예수의 세상 아버지였던 나사렛의 요셉이나 예수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제자였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12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였나.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부르시고 강한 빛으로 두 눈을 가리셔서 삼일 간이나 빛을 보지 못하는 신비 체험을 하였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신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 가에서 예수를 만났던 이전에 다섯 남자와 살았었고 지금도 남의 남자와 살아가고 있던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였나.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예수 만나 고침 받은 38년 된 병자에게서 예수는 누구였나.
어느 날 예수께 와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하였으나 그가 부자인 것을 아신 예수께서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쳐 주셨을 때에 그가 부자인 고로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하였는데 그런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일곱 귀신 들렸었으나 예수를 통하여 깨끗함을 입고 새 삶을 살아 갈 수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여리고성의 세리장이었고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를 보고 싶어 하였던 키가 작은 부자였던 삭개오에게 있어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안나스나 가야바 같은 대 제사장이나 그 수 많은 제사장의 무리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누구신가.
모두 다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인계 받아서 자기 묘실에 장례하였던 두 산헤드린 관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그 장례를 정성스럽게 도왔던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신가.
죽었던 12살 외동딸이 예수를 통하여 다시 살아난 경험을 했던 회당장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신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장례가 끝난 무덤 속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되살아났던 나사로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신가.
그 나사로의 두 여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신가.
예수께서 부활 하신 그 날에도 엠마오로 내려가며 예수께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글로바라하는 제자와 또 다른 한 사람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였는가.
 
이처럼 오늘 날 나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호산나 찬미 가운데 그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던져진 질문 “이는 누구냐”(Who is this?)는 물음 앞에 스스로 대답하는 예배 시간이 되길 바란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삼 일 동안의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다. 예수께서는 감람산의 벳바게 마을 가까이 도착하셨을 때에 두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의 기드론 시냇가에 있는 해발 800미터 정도 되는 산이다. 감람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산이다.
 
그 두 제자가 누구들인지는 성경 어디에도 밝히지 않고 있다. 예수께서는 저들 두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에 들어가서 매어 있는 나귀와 그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다. 누가 왜 남의 나귀를 끌어가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설명하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하였고 나귀와 그 새끼 나귀를 끌어 왔다.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셨다. 예수께서 타신 새끼 나귀의 잔등에 두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안장처럼 얹었고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 수많은 무리들은 대 부분이 자신들의 겉옷을 펴서 길 위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 위에 펼쳤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의 앞뒤로 앞서고 뒤 따르는 무리들이 소리 높여 함성을 질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 무리들이 웅성거리며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저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이는 누구냐”(Who is this?)
 
본문에서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언을 이루신 주.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며 예언의 종교이다.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의 말의 약속도 소중하거늘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랴. 하나님은 역사 속에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말씀을 때가 되면 이루신다. 특히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이 장면은 구약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5절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는 말씀이 스가랴 9장 9절 말씀의 인용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고 하였다.
 
마태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구약의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주님이신 것을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2-23)는 예수 탄생의 예언을 구약 미가서 5장 2절에서 인용하여 입증하고 있다.
 
미가서 5장 2절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근동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라는 헤롯의 명령을 피하여 애굽으로 급하게 피신하였던 역사를 “애굽으로 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호세아서 11장 1절의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설명해 주었다.
 
또 마태복음 8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각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며 깨끗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하여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의 예언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였다. 이사야 53장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는 메시아 예언이 담겨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징벌을 받고 매를 맞고 십자가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얻도록 하신 구주이시다.
 
이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유대 땅에 나시고 갈릴리에서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스가랴, 미가,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하여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구원의 주님이시다.
 
새끼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
우리 주님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시며, 평화의 왕이시며, 공의의 왕이시며, 죄를 사하시는 대속의 왕이시며, 만왕을 이기시는 왕 중의 왕이시며, 영원한 왕이시다.
 
세상의 왕은 백마를 타거나 코끼리를 타거나 약대를 타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나귀 그것도 어미 나귀가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전쟁하는 왕이 아니시라 평화의 왕이며 세상을 다스리고 군림하는 교만하고 거만한 통치자로서의 왕이 아니시라 겸손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상징적으로 교훈하는 장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께서 저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정치적인 권세자요 능력 있는 메시아이신 왕으로 군림하시길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호산나 찬양을 목소리 높여서 함성 지르는 무리들 한 가운데 오셨다.
 
따르는 재자들과 무리들이 자기의 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의 잔등에 깔고 혹은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전통적으로 왕을 영접하는 행위이다. 왕의 즉위를 경배하고 높일 때 하는 행위가 겉옷을 벗어 길에 까는 행위이다. 열왕기하 9장 13절에 보면, 예후가 왕이 될 때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또 요한 계시록 7장 9절에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승리를 상징하는 성대하고 복된 의식의 장면이다.
 
백성들이 큰 함성으로 마음을 합하여 호산나 찬송을 부를 때로 하면 분명히 예수님이 왕이셨다. 저들 무리들 모두가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에 저들은 호산나 찬미하던 그 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강도 바라바를 풀어 살려 주라고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평화의 찬미를 부르던 백성들이 갑자기 폭도로 변한 것이다. 요한복음 19장 6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폭도로 변한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들에 의하여 빌라도로부터 불의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셨다. 예수께서는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을 잡수셨다. 소위 최후의 만찬이라고 이름하는 식사 말이다. 식사하시다 말고 예수께서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을 발을 일일이 닦아 주셨다. 베드로는 절대로 자기의 발을 씻지 못하실 것이라고 반응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고 하셨다. 그 때에 베드로는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미 목욕 한자는 발만 씻어도 족하다”고 대답하시면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가롯 유다의 배반을 경고하셨다. 일일이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후에 예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4-17)는 겸손한 섬김의 삶을 교훈해 주셨다.
 
제자들의 주와 선생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처럼 서로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의 삶을 살라고 하셨다. 이 교훈의 가치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 오늘 날 우리가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장사하는 현장과 사회와 나라의 구석구석과 교회 현장에서 예수님의 겸손한 섬김의 마음을 갖고 서로를 섬겨야만 한다.
 
남들보다 재물이 많은 이들은 재물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
남들보다 학식이 많고 지식이 많은 이들은 그 배운 것으로 주변의 그 누군가를 섬겨야 한다.
남들보다 힘이 많고 권력이 잇는 이들은 그 힘과 권력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연약한 이들을 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신다.
남들보다 건강한 이들은 병약한 이들을 섬겨야 한다.
남들보다 은사가 많고 역량이 많고 능력이 많고 재주가 많고 실력이 많은 이들은 그 자기에게 주어진 각양 좋은 것을 가지고 그 능력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섬길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들이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요, 선물로 주신 것이요, 혜택으로 주셨고, 축복으로 주신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교만하거나 자랑하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큰 소리 치거나 거만하거나 으스대면 안 된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만다. 겸손해야 한다. 4세기의 성자 성 어거스틴(354-430)은 주후 41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스코르스Dioscorus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그대가 온전한 경건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진리만을 붙잡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 길의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해야 한다.’ (In that way the first part is humility; the second, humility: the third, humility.) 다시 신앙의 방향을 물어 온다면 나는 이 같은 겸손을 강조할 것이라.”고 했다.
 
겸손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모욕을 당할 때 얼굴에 드러날 정도의 억울함을 참는 것이요, 둘째는 모욕을 당했을 때 말없이 묵묵히 참는 것이요, 셋째는 모욕을 당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을 기억하면서 마땅히 당하여야 할 모욕이라고 여기고 기쁜 마음으로 참아 내는 것이다.
 
사슴이 제 뿔 아름다운 것 자랑하다가 동산 나무의 숲에 걸려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다윗의 아들 중에서 압살롬이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아버지 다윗 왕의 왕권을 찬탈하고 어리석게 교만을 떨다가 불행한 최후를 맡고 말지 않았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그러므로 누구라고 겸손하고 언제라도 겸손해야 한다. 잠언 13장 10절에 보면,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난다”고 하였다. 잠언 15장 25절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신다”고 했다. 잠언 16장 5절에서는,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였다. 잠언 16장 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라고 교훈하셨다.
 
예수는 생명의 근원이셔서 죽여도 죽일 수 없는 왕이시다. 죽어도 다시 사시는 왕이시다. 천 번을 죽여도 다시 사시는 왕이시다. 예수는 영원한 왕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예수는 겸손함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 승리하셔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해 주시는 평화의 왕이요 겸손한 왕이시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선지자 예수.
갈릴리 나사렛은 유대 마을들 중에서 시골 중의 시골이다. 그곳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나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장 23절에 나오는 이사야 11장 1절의 예언처럼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예언을 따라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궁에서 나시거나 귀족 들 가운데 나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예언을 따라서 갈릴리의 변방 마을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나셨다. 헤롯의 칼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셨고 나중에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 호산나 찬송하며 따르던 무리들이 “이는 누구냐”고 웅성거릴 때에 또 다른 무리들이 대답하였다. 그 대답은 옳은 말이었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선지자이신 예수시다. 예수님이야 말로 선지자들 중의 선지자이시다. 이천년 전에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며칠 후에 유월절 희생 양으로 붙잡히셔서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다 당하시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그는 실로 그의 한 몸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흠모할만한 아무 것도 없으셨다. 탄생도 그러하시고 성장도 그러하시고 외모도 그러하셨다. 화가들은 예수님을 긴 머리, 파란 눈, 높은 코, 멋진 외모의 백인 남성으로 그림 그렸지만 사실 예수님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셨다. 이스라엘 남자는 키도 작고 외모도 지극히 평범하다. 예수께서도 그런 외모를 지니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2절부터 6절까지에 예언된 그 모습 그대로셨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바로 나사렛에서 나신 선지자 예수시다. 예수 그 이름에 권세가 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들에게 기도 응답이 있고 주의 능력이 임한다. 그 이름으로 찬송하는 이에게 놀라운 하늘의 평화가 임한다.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이는 누구냐”
 
는 신앙적인 질문이요 신학적인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자기 고백이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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