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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4:7-16) 201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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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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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2-17 13:55 조회 21,130 댓글 0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4:7-16)       2015. 12. 6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의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중심으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따라 나누워 주신 직분이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직분이 아니다. 이 직분들은 은혜로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주어진 은사의 열매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도록 자라나기를 원하신다.
 
집안에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가족들이 어린 아이 중심이 삶을 살아간다. 집안의 살림살이 배치나 공간 사용도 어린 아이 위주로 바꾼다. 어린아이들이 위험하거나 다치기 쉬운 가구들이나 살림살이들을 정돈하기도 한다. 책상이나 의자나 탁자 하나라도 그 모서리에 어린아이들이 부딪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어린아이들이 한 살, 두 살, 세 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물론 병으로 고생하거나 한 밤중에라도 응급실로 안고 업고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난다. 아기가 귀엽고 어린이가 예쁘지만 그 상태로 성장이 멈추어 있으면 안 된다. 자라나야 한다.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야 한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아야 한다.” 14절의 ‘속임수’라든지 ‘유혹’이라든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든지 하는 말은 도박꾼들이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하는 속임수를 말한다. 거짓 교사들의 간교한 속임수에 빠져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와 같은 이단과 사이비의 훼방과 유혹은 사도 바울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가 태어나면 부모와 유모와 교사의 손길에 의하여 양육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유능한 성인으로 자라나지는 못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하여 뛰어나게 되고 우수하게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교육과 양육과 훈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가 된다. 그러므로 제자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되고 훈련되는 것이다.
 
본문 말씀은 지난 주 분량인 4장 1-6절 말씀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4장 2-3절에서 말씀하는 “모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의 용납, 평안,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성도 간에 서로 서로 잘 지켜 나가야 한다.
 
특히 남녀 성도 간에, 오랜 신자와 새 신자 들 간에 예절 있게 서로를 대하여야 한다. 각각 은사와 직분을 따라서 교회 안과 밖에서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한다. 그래야 교회로 하여금 교회다운 교회로 부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는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그 거룩한 목적과 부르심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은사를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목적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로 주신 은혜(恩惠).
7절의 ‘은혜’(恩惠)란 사실은 ‘은사’(恩賜)를 말한다. 하나님은 성도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다. 쌍둥이 형제라도 재주와 역량과 은사가 서로 다르다. 에서와 야곱이 그러하지 않았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적당하고 적절한 은사를 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선물이다. 서로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다름으로 더 아름답고 좋고 조화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도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바리톤 이처럼 서로 조금 씩 다름으로 더욱 조화를 이루고 더 아름다운 화음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다. 어른이 있고 어린이가 있다. 노인이 있고 젊은이가 있다. 힘차게 떠오르는 아침 해가 있는가 하면 노을이 지는 석양의 아름다움이 있다. 여름과 겨울, 봄과 가을, 낮과 밤, 산과 바다, 하늘과 땅, 새와 물고기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아름답지 않나. 색도 “빨주노초파남보” 각각 일곱 가지 무지개 색이 서로 다 제 각기 아름답지 않나.
 
성도들에게 부여 하신 은혜와 은사도 그런 것이다. 그 은사의 크기와 분량과 종류의 다양함은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을 따라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까 사람에게 선물의 분량대로 주신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명철함도 마찬가지다. 갈고 닦으면 옥이 되는 것이고 방치하면 세월 속에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문방구 발명품 중의 하나가 ‘지우개’라고 한다. 그 중의 또 하나는 ‘포스트 잇’이다. 아무데나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메모지 말이다. 1970년 화학제품ㆍ의료기 등을 만들어내는 미국 회사 ‘3M’의 중앙연구소의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잘 붙기도 하고 반대로 잘 떨어지는 접착제를 만들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능을 가진 새 접착제를 신기하게 여겼지만 결국 쓸모를 찾지 못했다. 접착제의 본래 기능은 한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 접착제는 붙는 것 같지만 반대로 쉽게 떨어지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영영 잊혀 질 뻔했던 스펜서 실버의 접착제의 사용을 유용하게 한 것은 같은 회사 테이프 사업부에서 일하던 동갑내기 아트 프라이였다. 아트 프라이는 매 주일마다 교회의 성가대에서 활동하는 찬양대원이었다. 그는 그날 부를 찬송가 페이지에 찾기 쉽도록 종이를 끼워 넣었는데 그 종이가 자꾸 빠져 나가 원하는 페이지를 찾느라 허둥대곤 했다. 1974년 어느 날 이를 고민하던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스펜서 실버가 개발한 접착제였다. 그 접착제를 종이에 바르면 쉽게 붙일 수 있고 다시 떼어낼 때 찬송가가 찢어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트 프라이는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붙였다가도 말끔하게 떼어낼 수 있는 적당한 접착력을 가진 접착제를 바른 종이조각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포스트 잇’(Post It)이라고 이름 붙여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의 일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인기는 높아만 갔다. 서류에 간단하게 붙여 표시하거나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적어 책상머리에 붙여두는 메모지로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포스트잇은 이렇게 쓸모없는 발명품에서 최고의 사랑을 받는 사무용품으로 거듭났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성도의 믿음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예수 믿어 구원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천국 백성이 된 것으로만 만족해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몸담고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에 나아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각기 다른 은사와 은혜를 개발하여야만 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양 모든 은사들을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공급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예수께서 필요하셔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시고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 후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가신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 역사 가운데 행하신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이 계시지 않나. 이처럼 성도된 우리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은혜의 선물의 그 분량을 따라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안과 밖에서 그 은사를 빛나게 활용하여야만 한다.
 
한국선교초기에는 개화의 돌풍과 맞물려 놀라운 일들이 많이 생겨났다. 박성춘(1862-1933)역시 그러한 사건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862년 서울 관자골(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아버지가 백정이면 아들도 백정이 되어야만 했다. 당시 포졸, 광대, 나무껍질을 벗겨 내서 장롱을 만들던 직업인 고리장, 무당, 기생, 짐승의 가죽으로 신발을 만드는 제화공인 갖바치, 짐승을 잡는 백정 등은 칠천반(七賤班)이라 하여 하류계층으로 대대로 천대 받았다. 그중에서도 백정은 인구조사에서 제외될 정도였고 거주지역도 제한되어 있었다. 상투를 올릴 수조차 없었다. 망건이나 갓을 쓰지도 못했다. 당시 망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미성년의 표시로 여겨졌기에 나이 많은 백정도 아이 취급을 당하는 등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았다.
 
백정마을에서 백정의 딸과 결혼한 박성춘에게는 봉출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들만은 백정신세에서 면해주려고 곤당골예수교학당에 보냈다. 1892년에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선교사 사무엘 무어(S. F. Moore, 모삼열)가 1893년 6월 곤당골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 학당을 세우고 무료로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가르치고 있었다. 백정인 박성춘은 두 딸도 엘러스 선교사가 시작한 여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그런데 동학운동이 일어난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했다. 이때 박성춘도 전염병에 걸려서 거반 죽게 되었는데 곤당골교회 사무엘무어 목사와 제중원 의사이자 고종황제 시의(侍醫)였던 에비슨(O. R. Avison)선교사가 백정마을을 찾아가 그를 돌보아 주었다. 콜레라가 완치될 때까지 계속 왕진하면서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백정에게 손을 대어 치료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일로 감동받은 박성춘과 가족들 모두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박성춘은 1895년 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교회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곤당골교회 교인은 20여명이었는데 정부 관리들도 출석하는 등 양반위주의 교회였다. 천민 중의 천민인 백정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던 양반들은 박성춘을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사무엘 무어 선교사에게 압력을 가하며 교회출석을 거부하였다. 사무엘 무어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설득하며 그들을 권면했으나 결국 양반들은 모두 나가서 따로 예배당을 세우고 말았다. 이로써 그들이 따로 새롭게 세운 ‘홍문사골교회’는 양반들만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곤당골교회는 백정과 상민만 남은 교회가 되었다. 이 일로 박성춘은 자신 같은 백정을 위해서 애쓰는 사무엘 무어 목사에게 감동을 받고 전도하기를 시작하였다. 곤당골교회는 텅 비어 있던 자리에 다시 교인이 20여명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반면 양반들끼리 모이기를 원했던 ‘홍문사골교회’는 점점 모이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3년 후인 1898년 다시 두 교회가 합쳐져서 ‘승동교회’란 이름으로 재탄생하였다. 1911년 박성춘은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6년 만에 승동교회의 장로 피택되었다. 한편 박성춘은 당시 내무부장관 격인 내각총서로 있던 유길준에게 ‘백정차별금지법’을 만들어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고 다니게 해달라는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마침내 그 요구가 관철되어 박성춘은 이조 500년간 못 썼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쓴 백정 출신 첫 인물이 되었다. 그는 갓을 쓰던 날 너무 기뻐서 잠잘 때도 갓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박성춘은 독립협회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종로 군중집회에서 연사로 강연을 하는 등 개화기에 두각을 드러냈다.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은 백정 출신 박성춘(朴成春) 장로의 아들이다. 의료선교사 에비슨(O.R. Avison)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 박성춘을 통해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다. 박서양은 우리나라 최초로 백정 출신 의사가 되었다. 그는 졸업 후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 교사로 가르쳤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재직했다. 1917년 일제시대 때에 만주로 망명해서 용정에서 구세의원을 운영하고 숭신소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국민회 산하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임명 받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5년 일제의 압력으로 학교가 폐교 당하자 귀국하여 계속하여 의료 활동을 하였다.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교회가 우리 당대에도 잘 되어야 하겠지만 자자손손 시대적인 은사와 은혜를 주신대로 각 사람이 받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자신을 개발하여 교회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복음을 알고 믿는 인재들이 자라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직분의 분량을 따라서 주신 은사(恩賜).
11절에서 말씀하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의 직분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따라서 주신 직분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사도 바울이나 예수의 아우 야고보나 바나바가 사도이다. 사도행전 14장 14절에 보면 ‘바나바’도 사도라고 하였다. 이처럼 초대 교회에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던 자들이 있었다. 선지자란 초대 교회에 유다와 실라와 빌립 집사의 네 딸 등이 선지자였다. 사도행전 15장 32절에 보면 ‘유다와 실라’를 선지자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1장 9절에 보면 빌립 집사의 네 딸들이 초대교회의 유명한 선지자들이었다. 사도행전 11장 28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장래 되어 질 일을 예언하였던 선지자였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그런 일이 있었다. 아가보는 장차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하여 큰 고난을 당할 것이고 결박되어 이방인에게 넘김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던 선지자였다.(행21:11) 이처럼 선지자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죄를 깨닫게 하는 회개를 촉구하거나 훈계의 말씀을 전하여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가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행15:31)
 
또한 직분은 ‘복음 전하는 자’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 집사를 ‘전도자 빌립’(행21:8)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의 선교단 일행은 가이사랴에 도착하였을 때에 빌립 집사를 만나서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목사와 교사’라는 직분은 목사직을 말한다. 한 단어이다. 목사라는 표현은 직분이가 교사라는 표현은 직무이다. 목사는 목자이며 교사이다 목자란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신 양무리인 성도들을 맡아 영의 양식을 공급하여 목양하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사로서 복음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10만 명이 넘는 목사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인 목회자들이 잘 하여야 한다. 성도들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사도성과 선지자 성과 복음 전하는 자의 능력과 사명을 골고루 은혜와 은사로 부여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로서의 직분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제대로 잘 감당하여야 하는 이유는 12절에 나온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이다.
 
당신에게 어떤 은사가 주어져 있는가. 성도 간에 서로를 온전하게 해 나가는 건덕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온전하게’라는 말은 ‘완성, 준비, 연단, 훈련’이란 의미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자는 서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여 영적으로 성숙해 지도록 제대로 잘 세워 나가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의 말씀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나 자신을 살피며 나 자신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을 갖고 삼가며 살아가야 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훈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집안에서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도 “예와 아니요”를 가르치지 않나.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여 가르치지 않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내가 속한 교회의 모습이다. 진면목이다. 그러므로 성도 각 사람들 간에 서로 서로가 역할을 잘 하여야만 한다. 성가대원인가. 영유아 유치부 혹은 교회학교나 청소년부나 청년부의 교사인가. 주방에서 봉사하고 있나. 주차장에서 섬기고 있나. 성도는 무슨 봉사의 일을 하든지 서로 간에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잘 감당하여야만 한다. 내가 잘 못하는 경솔한 생각이나 판단이나 말이나 행동이 주변의 다른 성도들에게 상처가 되거나 실망이 되거나 부끄러움이 되거나 덕을 가리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삼갈 줄 알아야 한다.
 
수고하고 애쓰고 봉사하였는데 성도들 간에 서로 상처가 되거나 실망스럽게 되거나 후회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된다. 교회의 어느 부서에서 무슨 크고 작은 일을 맡아 하든지 덕스럽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하고 사람 앞과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숨김이 없이 하여야 한다.
 
여호수아 때의 아이 성 전투 때에 일어난 아간의 범죄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뒤를 따라가서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요구한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나아만 장군은 이왕이면 운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면서 두 전대 가득하게 은을 담아 주고 옷 두 벌을 주었다. 게하시는 그 것들을 가져다가 집에 감추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인 엘리사 앞에 섰다. 엘리사가 물었다.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게하시는 주인 엘리사 선지자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게하시의 출입을 환하게 꾀고 있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너와 네 후손이 나아만 장군에게 걸렸던 그 나병에 걸릴 것이라고 책망하자 나병에 걸려서 피부가 눈같이 되었다.  열왕기 하 5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예수를 팔아 버린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성도는 무슨 은사를 따라 무슨 봉사의 일을 하든지 성도 간에 서로를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나가는 주인공이 되어야만 한다. 교회와 성도들을 허무는 자가 아니라 건강하고 든든하게 세워가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1961년 1월 20일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취임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국민 여러분, 우리의 노선(路線)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관건은 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나라가 창건된 이래 모든 세대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그들의 충성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군대의 부름에 응했던 젊은 미국인들의 무덤이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를 부르는 나팔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무기를 필요로 하지만 무기를 들라는 부름이 아니요, 비록 우리가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싸우라는 부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제나 『소망 중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견디며』 끊임없이 계속되는 지구전, 즉 독재정치, 빈곤, 질병, 그리고 전쟁 자체라는 인류 공동의 적에 항거하는 싸움을 이겨낼 짐을 지라는 부름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들 적과 맞서 남과 북, 동과 서, 전 세계가 대 동맹을 맺음으로써 모든 인류의 보다 풍요로운 삶을 보장할 수는 없을까요? 그 역사적인 과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장구한 세계 역사를 거치면서 겨우 몇 세대만이 최악의 위기에 자유를 수호할 역할을 다해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임을 피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국민이나 다른 어느 세대와 자리를 바꾸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과업에 기울이는 열정과 신념, 헌신이 우리의 조국, 그리고 조국에 봉사하는 모든 국민들을 밝게 비춰줄 것이며 거기서 나오는 찬란한 불꽃이 진정 온 세상을 밝혀 줄 것입니다. 자, 미국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미국의 시민이든 세계의 시민이든 간에,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 똑같은 수준의 힘과 희생정신을 우리에게 요구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우리의 유일하고 확실한 보상으로, 그리고 역사를 우리 행위의 최종 심판자로 삼고, 우리 함께 나아가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을 이끌어 갑시다. 하나님의 축복과 도움을 구하되, 이 땅에서 오직 그 분이 이룬 업적만이 진정 우리의 것임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존 에프 케네디의 그 명언이 이 취임 연설 중에 나온다. “자, 미국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을 명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교회가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Ask not what your church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hurch.)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가는 믿음.
에베소서 4장 말씀은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신 것일까.”
“어떻게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온전한 사람을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라날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울 수 있을까”
 
를 생각하고 깨달아 알고 믿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성도 간에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든든하고 왕성하게 세워가도록 힘을 합하여 섬겨 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부르심이다. 성도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장성한 어른의 분량을 갖고 힘차게 전진해 나가야 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래서 그리스도의 선불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도 주시고 은사도 주시고 능력도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선물의 분량”, “지체의 분량”을 따라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결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거룩한 성도의 연합인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사람의 몸 안에는 206개의 뼈가 있다. 그 중에 두개골은 15종 23개의 뼈가 아래턱뼈를 제외하고는 복잡하게 연합해 있다. 척추가 26개의 뼈로 되어 있다. 손은 27쌍 54개의 뼈로 되어 있다. 발은 26쌍 52개의 뼈로 되어 있다. 귀 속에도 2쌍 6개의 뼈가 있다. 이처럼 머리부터 어깨 척추 가슴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 까지 온 몸이 연결되고 결합하여 206개의 뼈마디에 신경, 혈관의 복잡한 구조 위에 살과 피부가 덥혀서 사람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요즘 예배당 지하 남자 화장실 천장에 누수 현상이 생겼다. 원인을 찾아야 수리를 할 수 있다. 건물은 건물 자체도 견고하여야 하지만 상수도, 하수도, 가스관, 전기, 전화 등등 보이지 않는 배관과 배선에 문제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건물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나 한 사람이 그만큼 소중하다. “나 한 사람 쯤이야”하고 자신을 방치하거나 소속감을 불분명하게 하거나 부르심과 사명감을 불확실하게 하고 어정쩡하게 하면 나에게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누수라는 것이 보일락 말락 하는 틈으로 조금 씩 스며드는 물인데 나중에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이 교회 안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므로 서로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결합된 건강한 지체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면 안 된다.  언제나 복음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참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한다. 분별력과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 하나 됨을 지켜 나가는 연합과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나 한 사람 쯤이야” 혹은 “우리 가장 한 가정쯤이야”하고 뒷걸음질 치면 안 된다.
 
서해대교에 낙뢰에 의한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다리 상판을 매달고 지탱하던 사장교의 케이블 선이 화재로 끊어져 내리면서 그 케이블 선에 맞아 소방관 한 명이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두 명의 소방관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서해 대교는 7년간의 공사로 완성된 다리이다. 경기도 평택과 충남 당진을 잇는 서해안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이다. 다리의 길이만도 7310미터이다. 전체 구간 중에 사장교 구간이 990미터이다. 사장교 구간은 교량 밑으로 5만 톤급 화물선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182m 높이의 2개의 주 탑을 세우고 주 탑 간 거리를 470m로 해서 양편에 144개의 케이블 선의 힘에 의해서 그 거대한 6차선의 31m폭인 콘크리트 상판의 무게와 통행하는 차량의 무게를 유지하게 하는 최첨단 공법에 의한 다리이다. 그 케이블 선은 케이블용 피아노선재는 인장력과 강한 복원력을 지닌 고탄소 소재이다. 포스코의 생산 재료를 갖고 고려 제강에서 제품화 한 것이다. 화재가 낙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가운데 철강업계는 와이어를 감싼 피복에서 불이 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케이블은 길이 50m, 지름 280cm로 피복에 감싸진 그 내부에는 300여개의 철선을 합쳐 꼬아 만든 강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안전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 현장의 문제점을 복원하기 까지 다리 사용이 전면 통제되고 있다. 그 쪽으로 이동하던 차량 이용자들에게 엄청난 불편을 주고 있다.
 
사고란 그런 것이다. 케이블 선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다. 그 하나하나가 연결되고 결합되어서 엄청난 규모의 다리 사용이 가능해 진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가지면 큰일 난다. 서로가 다 중요하다. 몸의 뼈 마다 하나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 아이의 몸 안에 있는 뼈의 수나 장성한 어른의 몸 안에 있는 뼈나 그 수자는 같다. 단지 자라나는 것  뿐이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연결되고 결합되어 서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몸이 점점 자라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몸의 구조를 잘 관찰하고 이런 말씀의 편지를 써서 격려 하였다. 그 모든 마디마다의 윤활유와 같은 것이 ‘사랑’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는 말씀이 그러하지 않나. 사랑으로 해야 한다.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충성하고 사랑으로 봉사하고 사랑으로 헌신하고 사랑으로 교제하고 사랑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사랑으로 매사를 감당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대동단결하여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오늘 날 교회의 지체요 성도로 부르신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기대요 분부하심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믿음이 점점 더 진보해 가야 한다.  주님을 아는 일에 체험적인 믿음이 점점 더 확고해져 가는 그런 간증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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