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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복음을 위하여 갇힌 자(엡3:1-13) 2015.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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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1-19 14:03 조회 20,391 댓글 0
 
복음을 위하여 갇힌 자(엡3:1-13)            2015. 11. 15



이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어느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하면 그만인 그런 일이 아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사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주께 택함 받은 그 부르심이 소중하기에 그 사명을 감당해야만 한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보라,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엘리야와 엘리사, 에스라, 느헤미야 다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자기 원하는 것 다 찾아 하고, 자기 가고 싶은 곳에 다 가고, 자기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며 살았다면 성경 역사의 그런 인물이 되었겠나.

세례 요한이라고 따뜻한 집에서 편한 잠자리에 눕고 안온한 가정환경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어찌하여 없었겠나. 그러나 세례 요한은 광야의 선지자로 지내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며 그를 만나기 위하여 광야로 찾아 나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 하였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복음 전파에 갇혀 지냈던 구약 시대 말기를 닫고 메시아 시대의 문을 연 선지자였다. 

구약의 인물 중에는 다니엘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그는 느브갓네살 임금의 때에 바벨론에서 쳐들어 온 군대에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땅으로 포로 되어 끌려가고 말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다운 신앙적인 결단과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결심과 각오를 환관장에게 알렸다. 이와 같은 결심을 듣고 더욱 당황스러워 하는 것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에서 끌어간 젊은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환관장이었다. 열흘이 지났다. 그런데 왕의 내려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채식과 물로 연명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얼굴빛이 더 빛나고 밝았다. 저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고 더욱 살이 윤택하여 보였다. 왕이 내린 음식을 받아먹은 다른 청년들보다 오히려 더욱 좋아 보았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선택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학문을 깨달아 아는 지혜와 환상과 꿈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나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면접한 느브갓네살 왕은 나라 안의 그 어떤 박수나 술객과 비교해도 그 지혜와 총명이 부족하지 않은 저들의 지혜에 감탄하였다. 왕은 저들의 지혜가 나라 안의 다른 지혜자들의 지혜보다 열배나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에 갇혀 지내지 않고 하나님께 갇혀 지낸 믿음의 거장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다메섹 체험 이후의 바울은 언제나 복음에 갇혀 지내는 이방 복음 전파의 선봉장이 되어 있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한다. 1절에 보면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란 무엇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들의 일이란 직장, 사업, 상업, 공부 그것이 전부가 절대로 아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공부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장사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하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내가 역량이 있어서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해서 가정도 이루고 자녀도 낳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 뭘 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요 축복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고백하지 않았나. 

앞서 언급한 다니엘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다니엘 1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하였다. 

돌아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요 긍휼하심이었다. 바울 사도는 실제 세상의 감옥에 갇혀 지낸 날들이 적지 않았다. 에베소서도 감옥 안에서 쓴 편지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고백대로 그는 하나님 안에 갇혀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고, 성령 안에 갇혀 있던 사도였다. 그는 그를 사도되게 하신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손길 안에 늘 갇혀 지냈던 이방의 사도였다. 그는 언제나 복음에 갇혀 지냈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갇혀 지냈다. 날마다 복음 전파의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였던 사도 바울을 언제나 항상 새로운 간증에 갇혀 지냈던 성령 충만한 사도였다.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경륜에 갇힌 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던 자였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체험하기 이전의 그의 모습은 율법의 감옥에 갇혀 지내던 자였다. 율법을 따르기 위한 자기 의와 자기 열심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율법 신앙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들은 모조리 잡아내서 죽여 없애려는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 갈 때에도 사울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죽어 마땅한 자의 죽음이라고 여겼고 스데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모여서 스데반의 죽음을 슬퍼하며 크게 울며 장례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여전히 교회를 잔멸하며 돌아 다녔고 각 집에 들락거리면서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도가 되었다. ‘경륜’(經綸, administration)이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속(救贖)의 계획과 실행하시는 그 모든 일”을 뜻한다. 즉 바울 자신이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러하지 않고는 사울이 바울로 변화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자로 택하여 구별하여 사용하셨다. 주께서는 다메섹 성에 살던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다메섹 체험 이후의 사도 바울의 생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안에서 준비되어 쓰임 받는 과정일 뿐이었다. 

예루살렘에 임한 큰 핍박은 결국 예루살렘 안에는 사도들만 남게 하였다. 계속되는 큰 박해를 피해서 거의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중국에 의화단운동이 일어났을 때 188명의 서양 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2만 명이 넘는 신도들도 죽임을 당했다. 1900년대 초에 태어난 세 어린이 왕명도, 송상절, 예탁성 이들은 모두 중국의 복음화를 위한 순교자요 순교적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 이들이다. 왕명도(王明道, 1900-1991) 부부는 20년간 감옥에 갇혀 지냈던 중국 교회사의 큰 인물이다. 왕명도는 20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어둠이 그를 가두었으나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은혜의 빛과 복음의 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송상절(宋尙節, 1901-1944)은 1901년에 태어났다 25살에 미국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유니온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교장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겨서 정신병원 보냈고 193일을 갇혀 지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서 성경을 40독을 했다.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박사학위 메달을 태평양에 던져 버렸다. 그 후 17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전파에 매진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송 미치광이” 혹은 “작은 전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치 맹렬하게 타는 복음의 불꽃과 같았다. 그는 중국과 동남아를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1944년에 그는 43살의 나이로 바싹 마른 장작같이 자신의 생명을 다 불태우며 복음을 전파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아는 워치만 니(Watchman Nee, 倪柝聲, 1903-1972)도 이 때 태어난 인물이다. 그의 부모는 존경 받는 감리교인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신실한 세관원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선교사들이 상해에 세운 여학교의 주목 받던 여학생이었다. 저들 부부의 9명의 자녀들 중에서 세 번 째로 태어난 워치만 니는 초중고 시절에 총명하고 유능하게 성장하였다. 언제나 일등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워치만 니가 17살 때인 1920년 봄에 '천안당 교회'(天安堂, the Church of Heavenly Peace)예배당에서 열리는 열흘간의 부흥 집회에서 전도자로 그를 부르셨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1920년 4월 28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달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도할 때 너무도 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주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한 면으로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 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비웃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기도한 후에 나는 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그 때 방 안에는 빛이 충만한 것 같았다. 나는 주님께 말했다. "오 주여, 당신은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 

17살에 회심을 체험한 그는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 30여 년 간 활동하면서 수 백 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는 영문 서적 3000여권을 독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탁월한 종으로 쓰임 받았다. 48살 때인 1952년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20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영에 속한 사람> 등을 비롯한 그의 여러 권의 책들은 20개 국어 이상으로 번역되어 오늘 날까지도 읽히고 있다. 좌행참 즉 “앉으라, 서라, 행하라”(sit, walk, stand)는 세 가지  주제로 에베소서를 연구한 책,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도 그의 뛰어난 성경 관찰과 묵상집 중의 한 권이다. “앉으라는 것은 주님 안에 누리는 성도의 안식이다, 행하라는 것은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비결과 방식이다, 서라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을 언급한 내용이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의 핍박기 이후 50년 동안 더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13개의 대학과 6,000여개의 초, 중학교와 900여개의 병원을 설립 했다. 중국 기독교인도 10배나 증가해서 70만 명이 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생각하기에 이것이 제국주의 문화침략의 결과로 생각하고 서양 선교사를 모두 추방시켰다. 중국 사역자들의 사상을 개조하기 위해 전면적인 무신론교육을 시작했다. 1966년 모택동의 기독교 핍박과 문화대혁명은 마치 적그리스도 치하의 대 환란을 미리 보는 것 같았다. 그 후 다시 50여년이 지난 오늘 날 중국 기독교인은 7,000만 명에 달한다. 100배에 가까운 성장을 한 것이다. 

핍박과 환난이 없이 복음이 들어 간 땅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전래되던 초기에 엄청난 핍박과 고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기독교의 복음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우리가 기억하는 손양원, 주기철 이런 분들의 신앙은 모두가 다 환난과 핍박 앞에서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씨름하던 신앙 선배들의 간증이 아닌가.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드리고 제 나라로 돌아가던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내시가 광야 길을 거쳐서 제 나라로 돌아가던 길에 광야에서 빌립 집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빌립 집사를 그 광야 길로 보내셔서 만나게 하신 일이었다. 그 작은 만남과 시작이 당시에 에디오피아가 복음의 나라, 복음의 땅이 되게 한 시작이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그러하였고 가사로 향하는 광야 길을 찾아 나서서 에디오피아의 관리인 내시에게 복음을 전파 한 일도 날마다 복음에 갇혀 지낸 그를 통한 복음 전파의 열매였다. 

이 땅에 고려 말에 문익점을 통하여 중국의 원나라로부터 목화 씨 숨겨 들어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었다. 이 땅에 고추가 들어오고, 후추가 들어오고, 감자가 들어오고, 옥수수가 들어오고, 고구마가 들어 온 것이 먹을거리가 풍요해 지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씀이다. 더군다나 복음을 모르던 이 땅에 130년 전에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들어 온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다. 복음이 들어 와서 영이 살고 영과 혼과 육이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려 말의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은 혁명가도 아니고 이름난 문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붓 뚜껑 안에 감추어 들여 온 목화씨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마을에 장인과 함께 심었다. 목화씨는 단 한 개가 살아남았다. 그 한 개의 씨가 자라나서 그 해에 100개의 씨앗을 더 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씨앗을 여기 저기 나누어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사신의 일행으로 원나라에 간 때는 1363년(공민왕 13년)이었다. 당시 충선왕(재위 1308-1313)의 아들 덕흥군이 고려황실에서 쫓겨난 몸이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로비를 해서 1363년 원나라로부터 고려의 왕으로 인정받고 고려를 정벌하려다가 실패했다. 이때 그를 따라 다음해 고국으로 돌아온 문익점은 덕흥군에 붙었다고 해서 조정으로부터 파직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목화 씨앗을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하고 보급시키는데 열심을 다하였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양잠을 해 얻은 명주(明紬)와 모시로 만든 저포(樗蒲)와 삼을 길러 만든 삼베와 그리고 가죽옷 따위를 입었다. 그러나 명주는 만들기가 힘들었다. 모시옷감과 삼베는 겨울에 추워서 입을 수가 없었다. 무명 보급은 당시의 의복만이 아니라 이부자리도 따뜻하게 해 주었고 나라의 경제적인 풍요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그는 ‘백성에게 옷을 입힌 공’(衣服生民之功)을 이룩했다는 칭송을 얻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세종 때에는 그의 목면 보급의 공이 인정되어 비록 그가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 영의정(領議政)의 자리로 높여 주었고(추증(追贈, 나라에서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주는 것)사당도 세워 주었다. 오늘 날도 그의 고향 단성 언저리에는 묘소와 사당, 그리고 목화시배지(始培地)임을 알리는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목화박물관’을 세워서 우리나라 의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는 목화 실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그 기계의 명칭인 ‘물레’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된 것이다. 또 손자인 문영(文英)이 맨 처음 베를 짰다고 해서 목면이 ‘문영베’에서 ‘무명베’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세 개 중에서 한 개 살아남은 씨앗이 싹이 터서 그 해에 100개의 씨앗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조선 시대 500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무명 이불을 따뜻하게 깔고 덮는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란 그런 것이다. 핍박자 사울을 택하고 부르셔서 이방 전도의 선봉에 서는 은혜의 경륜 안에 살아가게 하심과 같이 말이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것을 바울은 반복해서 ‘비밀’(秘密)이라고 말했다.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비밀’이란 유대인과 헬라 사람 즉 이방인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 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구원의 은총을 말씀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항상 표적을 구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는 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 십자가 복음 전파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는 중에 바울 사도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이 사실이 곧 비밀인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이 비밀을 깨달아 알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福音)의 비밀 전파에 갇힌 자.
예수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 이 비밀을 사도 바울에게 알게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 부활의 비밀, 승천의 비밀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이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깨달아 알고 믿고 전파하는 능력이다.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相續者)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체(肢體)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約束)에 참여 하는 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복음(福音)의 일꾼이 된다. 

7절에 보면 사도 바울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한 일꾼이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를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파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먼저 의지하고 사모하여야 한다. ‘일꾼’이란 ‘디아코노스’는 ‘하인, 봉사자, 집사, 섬기는 자’의 뜻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려면 능력을 받아야 한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 세리였다. 그런 그가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복음서의 기록자가 되었다. 주께서 그에게 그런 은혜와 복음 전파의 능력을 부어 주셨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였다. 그런 그가 예수 만나 예수의 부르심으로 주의 제자가 되었다. 신앙 고백을 인정받아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까지 받았다. 그런 그가 예수께서 붙잡히시자 비겁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가 버렸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다시 갈릴리로 가서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런 방황의 날을 다 보낸 후에 그는 부활하신 예수께 다시 사로 잡혔다. 예수는 그에게 해변에서 숯불을 지펴 놓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 사명의 분부를 들은 베드로가 승천하신 예수님을 배웅하고 돌아 와서 120여 성도들과 함께 성령 받기를 기도하였다. 성령 받은 베드로는 달라졌다. 그의 복음 전파를 들은 유대인들이 3000명이나 하루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성령 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그래야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될 수 있다.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성령 받아야 하고 능력 받아야 한다. 
예수의 비밀을 깨달아 알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풍성(豊盛)하신 은혜(恩惠)를 누리고 전파(傳播)하게 된다.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그런 겸손한 고백이 나 오지 않나.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씨를 뿌려야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들로 인해서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지 않겠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라고 심고 물을 주고 가꾸어야 나중에 새가 깃들만한 큰 나무로 자라는 것 아니겠나.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려야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게 되지 않겠나. 가루 서 말에 누룩을 넣어야 부풀러 오르지 않겠나. 집안을 쓸고 닦아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을 수 있지 않겠나. 산과 들판을 찾아 헤매어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나. 

이 비유의 말씀들은 모두가 다 천국 비유일 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의 비밀을 교훈하는 비유가 아닌가.

120년 전까지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당시의 유명한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3개의 학교를 세웠다. 신학적인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영국과 미국의 교회 부흥에 큰 불을 지폈다. 라디오나 T. V가 없던 시대였지만 그는 1억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계속되고 있다. 무디의 아버지는 그가 4세 때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구 후로 그의 가정은 심한 재정적 곤란에 처하게 됐다. 이 때문에 무디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7살 되던 해 그는 고향을 떠나 보스톤으로 가서 외삼촌의 구두 만드는 가게에 취직했다. 외삼촌의 성화에 못 이겨 그는 매 주마다 주일학교와 교회에 나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마운트 버논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인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을 만나게 되었다. 킴볼 선생으로부터 성경 한권을 선물 받았지만 무디는 거의 문맹에 가까웠기 때문에 킴볼 선생이 요한복음을 공부한다고 했는데 그는 창세기를 펴들고 있었다. 무안해진 무디는 다음 주일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킴볼 선생의 설득으로 다시 교회를 출석했고 그의 도움으로 일 년 뒤에는 성경을 잘 읽을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킴볼 선생은 구둣방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무디의 어깨를 짚고 “나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야기 하고 싶단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무디에게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무디는 눈물을 흘리며 "네"하고 대답했다. 무디는 즉시 무릎을 꿇고 고백기도를 드렸다. 실로 그 시간은 그가 회심과 함께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훗날 무디는 그 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있었다. 새는 더 즐겁게 노래하고 태양은 더 밝게 빛났다. 나는 이전에 이와 같은 평안을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40년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 무디는 거듭난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복음을 증거 했다. 매일 최소한 한명의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결코 잠자리에 들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였다. 말년에 그는 무디성경학교와 노스필드신학교를 세웠다. 노스 필드에서는 정기적인 성경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무디의 복음 전파 능력도 대단하였지만 그를 기독교 역사의 중심에서 쓰임 받도록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교회 학교 교사였던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 역시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덧입고 그 복음의 능력에 갇혀 살았던 복음 전파의 거장이 아닌가. 


교회(敎會)를 통한 장래의 영광에 갇힌 자.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는 시대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임하였다. 사도 바울이 누구인가. 교회와 예수 믿는 이들을 그렇게 몹시 핍박하던 박해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변화되어 교회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증거하고 있다. 10절에 “이는 교회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교회를 말미암아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을 이룩해 가신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시고 확신을 갖게 하셔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신다. 성경을 잘 보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12절 끝에 보면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하심이라”가 무엇인가. 우리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과 나아가는 힘과 나아가는 담대함과 나아가는 능력 또한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예수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를 만물 위에 있는 교호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다. 예수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성도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건물로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는 자들이다. 성도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마음 중심에 비워 드리고 주님을 나의 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거룩한 교회로 지어져 가는 자들이다. 

122년 전인 1893년 강화도 최초로 시작된 교회가 강화교산교회이다. 인천 내리 교회의 제 2대 담임 목사이던 미 감리회 소속의 죠지 허버 존스선교사가 섬 마을인 강화도의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앞 바다에 배를 타고 가서 달밤에 배 위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마을 사람들의 반대와 부딪치지 않으려는 판단에서였다. 존스 선교사는 인천 내리 교회 곁에서 술장사를 하던 청년 이승환에게 복음을 전했고 회개한 이승환은 술  장사를  문 닫고 고향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먼저 받으시게 한 것이 강화에 복음의 겨자씨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존스 선교사는 헨리 아펜셀러 선교사의 뒤를 이어 내리 교회의 제 2대 담임 목사가 된 선교사이다. 그의 한국 이름은 조원시(趙元時·George Heber Jones, 1867-1919)는 미국 뉴욕주 출신으로 1888년 약관 20세로 선교사가 되어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 5년간은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 출판 사업을 하다가 1892년부터 1903년까지 인천 지방 선교부 책임자로 파견되어 11년 간 내리교회(內里敎會)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선교와 교육 전반에 걸쳐 놀라운 업적을 쌓아올려 ‘내리의 아버지’라 불리었다. 그의 아내인 존스 여사는 한국 최초로 교회 이름으로 된 교육기관인 영화학교(永化學校)를 인천에 개설하였다. 오늘 날의 인친 영화 초등학교, 영화 여자 중고등학교의 시작이다.  강화와 황해도 연안(延安), 해주(海州) 그리고 남양(南陽)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1895년 만수동에 최초의 지교회(支敎會)를 개척하였고, 1897년에는 우각동(牛角洞: 현 금창동)에 선교사 주택을 건축했다. 또한 1899년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회(神學會)를 조직하여 이동식 학교를 개설하였고, 1900년에는 제물포웨슬레기념학교를 금창동에 건축하였다. 1901년에는 한국선교회가 3개 지방회로 확장되면서 인천에 한국 최초의 서지방회(西地方會)를 조직하여 장로사(長老司)로 취임했다. 또 1901년 성탄절을 기해 내동 현 위치에다 80평 규모의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02년에는 홍승하(洪承河)전도사를 선교사로 한 하와이 이민회사를 조직하여 50명의 교인을 하와이로 이민시켰다. 1903년 11년 간 헌신 봉사한 내리교회를 떠나 서울로 전임했다. 그의 부인인 존스 여사 또한 영화여학교를 세움으로써 인천 지역 여성교육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런 존스 선교사에게 배 위에서 한 밤 중에 세례를 받은 이승환의 어머니와 아들이승환은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신자의 수는 얼마 가지 않아서 40-50여명으로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강한 복음의 물줄기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 1910년대에는 벌써 강화전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120년이 지난 오늘 날은 강화도에만도 100교회가 훨씬 넘는 감리교회가 마을마다 세워 지게 되었다. 

나의 고향 교회도 1906년 11월에 시작되어 1907년부터 세례 교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의 고조부 지상준 권사, 김마리아 권사 등의 이름이 그 100주년 기념비의 8명의 초기 개척자의 명단에 새겨져 있다. 섬 마을의 작은 시작이 마을을 복음화 하고 후손들을 복음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이 복음의 비밀, 교회의 비밀은 놀라운 비밀이요 크신 비밀이다. 지난 이천년 교회의 역사 동안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세계 열방 처처마다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게 하셨다. 활짝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위대함과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위하여 옥에 갇혔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갇혀 지냈다. 언제나 주 안에 갇혀 지내는 날마다의 삶을 사도 바울은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예수 안에 갇혀 지내며 당하는 고난과 환난을 넉넉히 이겨 내려고 씨름하였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후대의 모든 성도들을 가슴에 품는 사랑이 가득하였다. 바울은 권면하였다.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당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일부는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으로 인해서 낙심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사도 바울이 이렇게 편지한 것이다. 이는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지내는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분부이다. 

요즘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낙심하고 있는가. 개인적인 무엇인가. 가족으로 인한 무엇인가. 직장 혹은 사업이나 상업이나 공부하는 일이나 그 무엇으로 인한 낙심인가. 아니면 교회적인 그 무엇인가. 국가적인 현실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낙심하지 말자. 장차 이룩하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중을 가슴에 간직하자.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하고 환난이 영광이 되게 하자. 지금의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가 변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룩하시는 영광스러운 나중을 가슴에 간직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4:8-9)

하나님은 성도들을 만물 위에 있는 교회를 통하여 영원히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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