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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요15:1-8) 201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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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03-06 22:44 조회 22,276 댓글 0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요15:1-8)         2015. 3. 1

오늘은 1919년 3월 1일, 삼일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96주년이 되는 날이다. 올해는 해방 70년이요, 6. 25 전쟁이 일어난 지 65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만에 해방과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길이 열렸는데 우리나라는 언제나 평화 통일이 될지, 언제나 북녘의 고통당하는 동포들에게 자유가 주어질지를 손꼽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다.
3. 1 독립 운동은 1910년 경술국치의 해에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이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날이다. 당시에 세계열강의 식민지를 받고 있던 나라들이 적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처럼 비폭력의 방법으로 독립을 위하여 궐기한 민족은 세계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3월 1일에 시작해서 5월까지 1,500여회에 걸쳐서 400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전국 218곳의 군중에서 211군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조선 총독부의 발표 자료의 우리나라 측의 발표 자료에 차이가 있지만 삼일 운동으로 사망한 우리 동족이 7,500명이 넘고, 부상당한 동족이 16,000명이고 실종자가 15,000여명에 이른다. 그 중에는 기독교인이 가장 많다. 그 희생자들 중의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 유관순이 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고 하셨다.
 
독립 선언서 대표 33명 중의 16명이 기독교인이고 그 중에 9명이 감리교인이었다.
신석구 목사는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북한 기독교 복원에 앞장서다가 1950년에 처형당했다. 신홍식 목사는 3.1 운동 후에 신사 참배 반대하는데 앞장서다가 1939년에 하늘나라로 갔다. 양한묵은 1919년 10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당시 인구 2,000만 명 중에서 1. 2%에 불과했던 기독교 초기의 인구 비율로 하면 대단한 지도력과 희생이 아닐 수 없다. 희생자의 60%이 상이 기독교인이었다. 이와 같은 통계 자료는 기독교인들의 희생정신과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이 얼마나 불 타 오르고 있었나를 입증하는 자료이다.
 
우리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가장 먼저 나온다.
 
3. 1 운동 당시 조선 총독부가 남긴 비밀 문건에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교회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1885년에 시작된 개신교 한국 선교는 우상 타파, 반상의 계급 타파, 여성의 지위 향상, 축첩제도 폐지, 금주 금연 운동, 놀음 철폐 운동, 문맹 퇴치, 서양 학문의 보급과 계몽 운동, 보건 의료 혜택 등 삶의 질이 변 화 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전국 각곳에 기독교 초중고 대학교, 기독교 병원, 기독교 복지 시설 등의 시작은 지난 130년 동안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 발전에 공헌하였다. 독립투사의 절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임시 의장 이승만은 감리교 장로였다. 그의 부탁을 받고 개회 기도를 한 종로 출신 이윤영 의원은 감리교 목사였다. 모든 의원인 일동 기립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자그마치 기도를 30문 이상 하였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항의하거나 반대 하는 이가 없이 엄숙하게 다 같이 기도하였다.
 
3000여명의 독립군이 활동하던 우리나라가 당시 700만 명도 넘던 일본군을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하고 대한민국에 해방이 온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가 오늘 날과 같은 번영하는 나라가 된 힘은 기도의 힘이요, 예배의 힘이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의 힘이다. 부인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맞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이 아니면 어찌 살 수 있을까.
 
삼일절 노래 가사를 아는가.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광복절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가.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본문 말씀을 묵상하자.
‘나는... 무엇이다’는 헬라어의 ‘ἐγώ εἰμι’(I am)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대하는 예수님의 반복되는 강조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크게 일곱 번, ‘나는 무엇이다.’ 선언을 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10:7)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15:1)
 
포도원의 농부는 포도나무의 가지를 깨끗하게 한다.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된 성도가 깨끗해지는 비결은 3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말씀으로 깨끗해지는 것이다. 헬라어인 ‘카다이로’(kadairo)라는 동사는 ‘마음이나 양심이 청결한, 물이나 유리 등이 흠이 없이 맑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죄인을 정결하게 하다’(히10:2)는 의미를 담고 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인생의 필요 없는 가지를 쳐서 다듬는다는 뜻은 죄의 가지를 잘라 내서 쓸모 있는 가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가지만 남겨 놓는다는 뜻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쓸모없는 가지를 전지 작업해서 제해 버리는 심판의 의미와 과실을 잘 맺을 만한 가지를 잘 다듬어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돌보는 은총과 보호의 의미를 포함한 말씀이다.
포도나무의 가지인 인생이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신앙생활.
당시나 오늘 날이나 가짜 포도나무가 많다. 들포도 나무에서는 풍성한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참’이란 ‘진실된’이란 뜻이다. 요한복음 10장의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처럼 도적과 삯군이 설치는 세상에서 참 포도 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붙어 있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이다.
 
원주 제일교회 문창모 장로는 그의 자서전에서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있는 쇠파리가 천리를 갈 수 있듯이 나는 95년 동안 예수님께 꼭 붙어살아 왔다”고 고백하였다. 2절에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붙어 있지 못한 가지는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신다고 하였다. 열매를 잘 맺고 많이 맺는 가지는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다. 성도인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힘은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다. 3절에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 요한복음으로만 하여도 1장부터 얼마나 많은 말씀들을 반복하여 대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아는데 그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붙어살아야 한다. 참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님께 붙어사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길이다. 4, 5, 6, 7, 9, 10절에 반복해서 “내 안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 보라.
 
지난주에 온 나라가 헌법 재판소의 ‘간통제 폐지’ 결정에 대하여 7: 2로 폐지 결정한 것에 대하여 이 곳 저 곳에서 많은 대화를 하였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성경의 말씀은 분명하다. 십계명 중의 제 칠 계명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나라의 법이나 제도가 어떠하든 피차가 불행해 지고 마는 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붙어사는 인생은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이다. 가정이 복되고, 인생이 복되고, 평생이 복되고, 자손이 복되고,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그 중에 망대를 세우셨고 그 안에 술틀을 파셨다. 그리고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들 포도를 맺고 말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신 말씀이시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으나 들 포도를 맺고 만 예루살렘 거민들과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사5:3) 하나님의 포도나무 비유의 교훈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4-7)
 
포도나무 가지인 믿는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의 기대는 정의와 공의의 풍성한 포도 열매를 맺는 극상품 포도나무 인생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공부하는 학생이든, 살림하는 가정주부이든, 사회 생활하는 그 어떤 분양의 그 누구이든 나의 인생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농부이신 하나님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꼭 붙어살고, 예수님 안에 꽉 붙어 풍성한 말씀의 영양과 수액을 빨아 들여서 맛 좋은 극상품의 포도열매를 맺는 그런 자기 인생을 가꾸어 가자.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가꾸는 것이 아니다. 나는 포도  나무의 가지일 뿐 내 인생의 가지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꼭 붙어서 그 말씀 안에 살아가면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가지에 주렁 주렁 풍성한 포도 열매가 맺듯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도록 가꾸어 주시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의 공급자이시고 참 포도 나무의 줄기이신 예수님께 붙어서 살아가지 못하고 제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재주 피우며 살아가는 그 결과는 헛수고가 되고 만다.  내 인생의 농사를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한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붙어살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복되게 가꾸어 가시고, 나의 자녀들의 인생도 가꾸어 가시는 법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원리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절을 다시 보라.
“나는 참 포도 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그렇다. 내 인생 농사가 잘 되도록 나를 가꾸어 가시는 분은 농부중의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참 포도 나무로 심어 놓으신 나의 인생을 스스로 들 포도나무 인생으로 초라하게 만들어 가지 말라. 나 스스로 발버둥 치면서 내 인생의 열매를 거두려고 하면 안 된다. 이것은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민족이든 다 마찬가이다. 성경의 역사와 성경의 인물들이 교훈하는 바가 그러하지 않나.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그걸 교훈하지 않나.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370장 찬송)
 
“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 주사 곧 충만케 하옵소서
이 주리고 목마른 나의 맘에 주 성령을 부으소서
주 예수여 충만한 은혜 내 영혼에 부으소서
주 예수만 나의 힘 되고 내 만족함 됩니다.”(368장 찬송)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어떤 축복이 따르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제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포도나무 가지 인생이란  어떤 인생으로 살아간다는 말씀인가. 요한복음에는 ‘영광’이란 표현을 무려 23번이나 사용하였다. 누가복음에 9번 외에는 요한복음이 ‘영광’에 대하여 강조한 유일한 복음서이다.
 
 5절과 7절에 그 답이 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떠나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영어 성경에 보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If you remain in me and I in you)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7절은 더 대단한 약속과 축복과 도전의 말씀을 하시고 계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대개가 잘 벌어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고 잘 놀며 잘 여행하고 사치하며 향락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인생들은 그런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인생관만으로 살지는 않는다.
 
북한 관련 기사를 많이 쓰는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기고문을 아래에 인용한다.
제목은 “심장에 남는 사람 박준재(1941-2005) 목사”이다.
1996년 초겨울, 연변은 몹시 추웠다. 피골이 상접한 탈북자들이 밤마다 두만강을 넘어 몰려왔다. 거리와 마을은 동냥하는 탈북자로 넘쳐났다. 그때 머리 흰 50대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연길에선 가장 넓은 축에 속하는 120평방미터짜리 아파트를 3채나 사서 탈북 고아들을 데려가 돌봤다. 1999년까지 3년 동안 그곳을 거친 탈북 고아는 200명이 넘었다. 그의 이름은 박준재. 미국 시민권자로 제프리 박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한중수교가 막 이뤄졌던 1992년 즈음 중국에 처음 왔다. 초기엔 흑룡강 성에서 사비를 들여 50여 개의 교회를 만들어 농민들을 전도했다. 미국에서 모텔 사업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가 무엇에 끌려 중국 전도에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박 씨는 연변에 탈북자들이 몰려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연길로 자리를 옮긴 박 씨는 흑룡강 성에서 전도했던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아 탈북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꽃 제비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이 박 씨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엔 연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도 없었다. 탈북 고아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국 공안에 두 번씩이나 체포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에 가서 잠깐 돈을 벌고는 그 돈을 들고 다시 태평양을 넘어 지구 반대편 중국으로 날아오기를 50여 차례나 반복했다. 그럼에도 2004년경부턴 더 이상 탈북자를 돌볼 수 없었다. 당시 탈북자의 공관 진입이 잇따르자 중국 당국은 대대적으로 탈북자를 검거했다. 박 씨는 도와주던 조선족에게 계속 탈북자를 돌본다는 조건으로 연길의 집 세 채를 넘겨주었다. 2004년 11월 23일 그는 마지막까지 돌보던 10대 부흥이를 포함한 6명의 탈북자를 데리고 연길에서 한국행 길에 올랐다. 하지만 유일한 길이던 베트남 루트는 그 즈음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머무르던 탈북자 468명을 한꺼번에 데려오면서 막혀버렸다. 박 씨는 미얀마 쪽으로 새 루트를 개척하기로 결심했고 12월 초 중국 국경을 넘어 미얀마에 도착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에 두 차례나 연락했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정글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이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미얀마를 거쳐 라오스로 가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박 씨는 어느덧 63세의 노인이 됐지만 항상 일행의 맨 앞에서 열대림을 헤쳤다. 정글에서 헤맨 지 7일 만에야 드디어 라오스가 건너다보이는 메콩 강에 도착했다. 밀항선을 구해 보았지만 1인당 1만 위안을 불렀다. 돈이 없었다. 고민하던 박 씨는 마을 시장에 가 튜브를 사려 했다. 시장을 다 돌아봐야 4개밖에 살 수 없었다. 강을 넘기 전 일행은 시장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박 씨가 기도했다. “하나님, 천국에 가게 해 주세요. 아내에게 미안하고…. 제 아들이 계속 선교활동을 하게 해 주세요.” 무엇을 예감했을까. 그는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라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일행은 가장 연장자인 박 씨에게 튜브를 양보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래 보여도 미군 출신이다”라고 주장하며 기어코 여성과 아이들에게 튜브를 넘겨주었다. 그러곤 자신은 배낭만 메고 메콩 강에 뛰어들었다. 유유하게 흐르는 듯했던 메콩 강은 막상 사람이 뛰어들자 사납게 변했다. 일행은 40분 가까이 정신없이 떠내려가다 강 가운데서 보트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구조됐다. 일행 중 막내였던 부흥이는 이렇게 회상했다. “물살이 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뒤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안 보이고 배낭만 물에서 들락날락하는 것이 보였어요.” 부흥이는 나중에 알았다. 박 씨는 헤엄을 잘 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가에서 몇 시간째 할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행은 라오스 경찰에 체포됐고 한국 대사관에 통보가 됐다. 하지만 라오스 대사관도 이들을 무시했다. 이들은 목숨 걸고 넘어왔던 메콩 강을 다시 넘어 미얀마 경찰에 넘겨졌다. 미얀마는 이들을 북송하려 했다. 하지만 박 씨의 넋이 이들을 끝까지 지킨 것일까. 미국 시민권자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가 미얀마 한국 대사관에 박 씨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그제야 한국 외교관이 나타났다. 미얀마 경찰이 말했다. “여기 들어온 북한 사람은 다 북에 보냈지만 너희는 한국 외교관이 왔으니 한국에 가게 될 것이야.” 정글을 헤맨 지 석 달 뒤 그들은 한국에 왔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005년 1월 2일 메콩 강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박준재, 제프리 박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늘 날 탈북민과 새터민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가 살려낸 탈북 어린이 중에 ‘부흥이’는 커서 지난해에 미국의 명문대학인 컬럼비아 대학에 당당히 입학 하였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냥 이사야서 1장 12절 말씀처럼 성전의 마당만 밟고 다시 돌아가는 그런 신앙생활, 그런 습관에 젖어 버린 예배 생활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가꾸어 주시는 농부이신 하나님의 보살펴 주시는 손길을 체험하고 참 포도 나무의 원 줄기이신 예수님과 나와의 영혼의 거리를 확인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나와 예수님과의 거리를 검진하는 시간이다.
 
자동차 수리 센터에 가면 오일 첸지를 하고 헐렁해진 나사를 조이고 기름을 치고 파이프를 교체하고 배터리를 점검하고 타이어 상태를 확인하고 앞뒤 라이트의 전구 상태를 조사하고 하는 등 자동차의 안정 상태를 확인받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아무리 자동차 상태가 좋아도 역주행하면 큰 사고 나고, 탈선하거나 뒤집히면 생명에 위험이 찾아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제자다운 제자가 되는 것이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의 <제자입니까>라는 책에 보면 가장 먼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누가복음 6장 46절이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듣고 행하는 자마다.....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고 준행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을 갖기는커녕 영적 비만이 점점 심해지고 있지 않나 점검하라”고 도전한다. 제자는 예수님을 본 받는 자여야 한다. 생각, 사랑 실천, 주변 영혼을 대하는 태도, 겸손, 온유, 한 마디 말의 권위, 약한 자를 대하는 마음가짐, 배 고픈 자, 목마른 자, 병든 자, 갇힌 자, 포로 된 자,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일가친척 주변 영혼을 대하는 구령의 열정 등 그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본 받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 십자가 사랑의 은총 가운데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한다. 아니,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사셔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하시고 나를 지배하셔서 그 분이 기대하시는 풍성한 섬김과 나눔과 돌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선교 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아멘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This is to my Father's glory,
that you bear much fruit, showing yourselves to be my disciples.)(요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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