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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시29:1-11) 201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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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1-18 01:21 조회 18,613 댓글 0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시29:1-11)          2015. 1. 18
 
지난 주 월요일 저녁부터 열리는 화성 지방 사경회의 밤 집회를 위하여 월요일 오후에 출발하였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꽉 막혀서 한 시간 조금 넘으면 갈 길을 두시간 이십 분 걸려서 저녁 다섯시 반경에 도착한 곳은 화성시 우정읍이란 곳이었다.그 곳에서 얼마를 더 가면 바다가 나온다. 우정읍의 높은 언덕 자락에 웅장하게 지여진 조암 교회를 향하여 거의 다 도착할 즈음에 붉게 물든 석양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평소에 서울 하늘에서 보던 태양보다는 두 배나 커 보이고 얼마나 붉고 아름다운지 눈길을 사로잡았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몇 장의 저녁노을과 석양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물어 보니 화성시의 석양은 화성시가 자랑하는 화성 팔경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 저녁 시간이었다. 그 후 이틀 연속 저녁 날씨가 흐려서 더 이상의 아름다운 석양을 볼 기회는 더 없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감사 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장엄하신 통치와 다스리심을 찬양하고 있다. 많은 물과 우렛 소리 가운데 충만하신 여호와의 소리가 힘이 있고 위엄차다고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의 소리로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고 그 나무들로 하여금 송아지 같이, 들 송아지같이 뛰게 하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소리는 화염을 가르시고 광야를 진동하시며 때로는 암 사슴을 낙태하게 하시며 산과 나무와 숲들을 말갛게 벗기신다고 하였다.
 
본문의 시편이 시작되는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의미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하고 반복하여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경배하되 그 영광과 권능을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하여 늘 돌려 드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이름” 그 자체로서 가지고 계신 그 존엄하시고 영광스러운 위엄을 찬양하자고 초청하고 권면하는 것이다.
 
9절과 10절에도 보면, 영원한 왕으로 좌정하시는 여호와께 여호와의 성전에서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생활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거룩한 옷을 입고 예배하게 하시는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한다. 군인은 육해공군을 구분하는 군복, 회사원은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회사원 복장을 할 때 긍지를 갖는다. 은행원들도 그 은행의 고유 복장이 있다. 항공사 남녀 승무원들과 조종사들도 멀리서도 알아 볼만한 근무 복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쁜 옷, 화려한 옷, 비싼 옷이 아니라 거룩한 옷을 입고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범죄의 피가 뭍은 죄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 아니 예수님을 통하여 땀 내나고 한센 병으로 피고름이 묻어 코를 진동하고 악취 나는 나의 몸을 깨끗하게 치료 받고 세마포 옷으로 갈아 입혀 주시는 축복의 옷으로 나의 부끄러움을 가려야 한다. 존 플라벨은
 
“몸이 건강하여야 하듯이 영혼은 거룩하여야 한다.”
 
고 말했다. 모세의 때에 그의 형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져 시작된 제사장들이 입는 제사장의 옷이 따로 있었다. '에봇‘이라고 해서 하나님은 그 제사장의 옷을 재료와 식양과 색깔과 우림과 둠밈을 비롯한 가슴에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보석의 장식까지를 자세하게 말씀하셔서 지어 입도록 하셨다.
 
사무엘상에 보면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 사무엘의 탄생과 더불어 그 당시에 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대한 기사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제사장 엘리에게 거룩한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입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연세 많던 엘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주어진 직임을 제대로 잘 감당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두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업신여기고 방탕하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타락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유기한 채 멍하게 지내고 있는 엘리를 책망하시며 섭섭한 말씀을 전하셨다.
“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삼상2:28)
거기에 보면 “내 앞에서 내가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성도된 우리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사무엘상 2장 30절 후반절에서 엘리 제사장을 책망하실 때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Those who honor me I will honor, but those who despise me will be disdained. )
반면에 어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들 사무엘이 젖을 떼기가 무섭게 실로의 성막에 데려다 놓고 항상 성막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얼마나 보고 싶을 터인데 그 모자간의 정을 꾹꾹 누리고 아들 사무엘을 성막에서 성장하도록 하였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어린 시절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한나는 해마다 매년 제를 드리러 성막에 갈 때마다 남편 엘가나와 함께 아들 사무엘이 입을 작은 겉옷을 정성스럽게 지어다가 입도록 하였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성령이 충만한 성장기를 보냈다. 사무엘 3장 19절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The LORD was with Samuel as he grew up, and he let none of his words fall to the ground. )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크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인가.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인 라헬이 낳은 요셉은 언제나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으며 다른 아들들과는 다르게 화려하고 좋은 채색옷을 입고 지냈다. 그런 요셉을 열명의 배 다른 형들이 들판에서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다. 요셉은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로 발가벗겨진 채로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 갔다. 그 때 요셉의 나이가 열 일곱 살이었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주목하셨고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셨다. 요셉은 노예들이 입는 남루한 옷을 입고 항상 땀내 나는 옷으로 몸을 가리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의 영혼에는 거룩한 옷이 입혀져 있었다. 나이 삼십이 된 요셉을 하나님은 이년 동안 애굽 왕실의 감옥에 갇혀 있던 그 참혹한 환경에서 불러 내셨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해 내게 하셨다. 그 날로 요셉은 바로 왕의  하사한 왕이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입고 손가락에는 왕의 반지인 어인을 끼고 80년간 애굽을 다스리는 경제 총리가 되었다.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을 잘 이겨 나갔을 뿐만 아니라 바로 왕이 죽고 새 왕이 세워지고 하는 긴긴 세월 동안 요셉은 왕이나 입는 곤룡포를 입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늘 그와 함께 하심으로 거룩하고 존귀한 영의 사람의 모습을 잃지 않는 여호와를 경배하고 여호와를 높이고 여호와를 예배하는 하나님의 사람다운 면모를 한 순간도 잃지 않고 살아갔다. 요셉의 그런 모습은 그를 처음 만나던 순간의 바로 임금도 알았고 애굽의 대신들도 알았고 애굽의 온 백성들도 인정하였다.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하는 자의 모습은 그러하여야 하지 않나.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Therefore, as God's chosen people, holy and dearly loved, clothe yourselves with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 )(골3: 12)라고 권면하였다. 성도의 거룩한 옷이란 “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이라고 구체적으로 권면하였다. 성도는 유명 메이커 제품이나 몹시  값이 비싼 옷을 입어야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과 같은 성도다운 품성의 옷을 그 마음과 그 영혼에 입고 여호와께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주색잡기를 즐기며 받은 유산을 다 날려 버리고 돼지우리에 누어서 쥐엄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 보려 하던 아들이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 나오는 장면이 아닌가. 남의 나라 돼지우리에서 굶어 죽느니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품꾼으로만 살아도 이것 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갖고 제 나라로 돌아 왔다. 아버지가 사시는 마을 어귀에 나타난 남루한 복장의 거지 행색을 한 아들을 먼저 알아 본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마을 어귀까지 뛰어나가서 아들을 얼싸 안고 입을 맞추고 집에 데려다가 종들에게 부탁하였다. 누가복음 15장 22절부터 보면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죄와 악이 가득한 인생들을 집 안으로 불려 들여서 목욕을 시키고 좋은 새 옷을 입혀 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좋은 새 신을 신겨 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여호와의 소리를 듣고 그의 성전에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다윗은 물과 많은 물 위에 계신 여호와의 소리. 우렛소리를 내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소리, 힘이 있고 위엄에 찬 여호와의 소리, 백향목을 꺾으시고 그 꺾인 나무가 들 송아지같이 뛰게 하시고 화염을 가르시며 광야를 진동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우렁찬 소리 앞에서 연약한 암사슴이 낙태한다고 했다. 암 사슴이 뛰어 노는 삼림이 말갛게  벗겨지고 만다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하시는 자연 속에서의 위엄과 창대하심을 통하여 암사슴처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자기 번영을 자랑하고 교만할 지라도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정하시지 아니하시면 백향목 같이 꺾어 부수시고 그 꺾인 나무들이 레바논과 시룐 즉 그 곳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헤르몬 산의 백향목이라도 꺾여서 들송아지가 뛰듯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가고자 씨름하는 다윗의 신앙 고백이 담겨 있는 시적인 감사의 시편이 바로 본문인 시편 29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 고 거룩한 옷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 예배다운 예배자로 예배드리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9절 말씀처럼 모두가 여호와의 성전에 모여서 ‘영광’이라고 외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문들아 머리들어라>의 찬양처럼,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 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 가신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 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 가신다
영광의 왕 뉘시뇨 강하고 능하신 주로다
전쟁에 능하신 주시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왕께 만세 왕께 만세 당신은 영광의 왕이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이라고 큰 소리로 소리 높여 여호와의 ‘영광’을 외치고 외치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여호와의 위엄과 그 창대하신 능력의 이름을 드 높이고 드 높이는 그런 성도들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자는 권면이 아닌가.
하나님은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세상적인 권세를 자랑하며 교만한 자를 좋아 하지 아니하신다. 성경이 언급하는 대개의 ‘레바논의 백향목’이란 번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창대하고 강대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었지만 본문에서 말씀하는 백향목은 그와 정 반대의 의미이다. 교만하면 레바논의 백향목 같던 인생이라도 꺾어 부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인생은 여호와의 손길 안에서 겸손하여야 한다. 9절에서 말씀하시는 암사슴이 그런 말씀이다. 들과 산과 숲 사이에서 평화롭게 거닐며 풀을 뜯고 때가 되면 새끼를 낳아야 할 암 사슴을 낙태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여리고 연약한 암 사슴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면 곰과 사자와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새끼를 수태하고 그 새끼를 건강하게 낳아서 기르는 것은 낙태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이 아니면 아니 된다는 고백과 함께 이는 암사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나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권능 앞에서 연약한 인간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수 있겠느냐는 신앙의 고백이며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선언인 것이다. 레바논의 나무와 숲들인 삼림이나 시룐 즉 그 높은 헤르몬 산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라도 그것들로 무성하게 하시고 산을 울창하게도 하시며 머리를 빡빡 깎은 것처럼 말갛게도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에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생사화복의 범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아 알고 믿고 의지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여호와의 성전에서 하나남의 영광을 ‘영광’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고백인 것이다.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시는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은 천하 만민을 골고루 사랑하신다. 그래서 선인과 악인에게 해와 비를 골고루 내려 주신다. 그러나 11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신다. 여기 ‘자기 백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것이다. 천하 만민을 구원하기 원하셨으나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으로부터 피하고 어둠 가운데로 숨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이나 이 땅에 와서 활동하시던 당시나 이천 년이 지난 오늘 날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은 많은 물 위에도 계시고, 홍수 때에도 그 홍수 가운데 좌정하셨던 하나님이시다. 여기 3절의 ‘많은 물’과 10절의 ‘홍수’는 노아의 홍수를 말씀하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악인에 대한 징벌과 의인에 대한 구원’이신 것처럼 하나님은 홍수 가운데 좌정하셨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좌정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하나님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시고 평강의 복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영접하며 구원이요 받아 들이지 않으면 심판인 것이다.
 
요한 복음 3장 18-19절에 보면,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 앞에 보면 요한복음 3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사건에 근거한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모세 때에 광야의 호르산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 하려 하다가 너무 길이 험하고 힘이 들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고 만나와 같은 하찮은 음식은 마음에 들지도 않고 너무 싫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셔서 백성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 불뱀에 물려 죽게 하셨다. 그 때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달려 와서 자기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것을 뉘우치면서 모세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불 뱀들이 자신들에게 떠나게 해 달라고 다급하게 매달렸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드렸고 하나님은 “놋으로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그것을 처다 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고 하라고 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했고 그 장대 꼭대기의 놋 뱀을 처다 보는 백성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모세 때에 장대 꼭대기에 달린 놋 뱀을 바라다보는 자들이 살아 난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는 자들은 살리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면 살고, 음식을 먹고 소화 시키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힘이 되고 기운이 되어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에 신비한 영생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
 
다윗 자신이 나라 안과 밖의 그 불안한 두려움과 수 없이 겪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는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사십년의 왕위를 이어 갈 수 있었을까. 다윗의 마음속에는 자나 깨나 분명한 고백이 있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 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The LORD is my rock,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my God is my rock, in whom I take refuge. He is my shield and the horn of my salvation, my stronghold.  (시18:1-2)
 
“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18:6)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주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공급해 주시는 힘과 평강의 복을 받아 누리고 전하는 성령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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