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돌에 비유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누가복음 20장 17절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은 시편 말씀의 인용이다.(마21:42, 막12:10) 시편 118편 22절과 23절에 보면,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4절과 5절에서 이 같은 내용을 훨씬 명확하게 전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에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인용한 말씀들이 역시 돌에 관한 교훈이다. 이사야 28장 16절에 보면,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했다. 이 말씀을 베드로는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노라.”고 인용하였다. 그렇다. 아브라함 이후 지난 4,000년의 역사와 모세 이후 지난 3,500년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마다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이 되신 보배로운 돌이요 산돌이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시험하는 돌이요 귀한 돌이요 견고한 기촛돌이시다. 그를 받아들이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시다. 그가 하나님이 택하신 모퉁이돌이요 머릿돌이신 것을 모르고 핍박하며 박해하며 조롱하는 이들은 함정과 올무에 빠지고 말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돌의 비유로 역사 가운데 오셔서 영원한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이요 머릿돌이요 산돌이신 주님으로 깨달아 알고 영접하며 믿고 따르며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신비요 축복인지 모른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전에는 긍휼하심을 얻지 못하던 백성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백성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는 처형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여러 차례 예언하셨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골고루 다 나오는 본문의 악한 농부들의 비유도 결국은 예수님 자신의 당하실 고난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적인 일들을 예언하신 말씀들이시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려진 돌처럼 버려진 인생으로 고난을 겪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버려진 돌을 가져다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요 기독교의 신비이다. 이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하고 바라보면 바라다볼수록 기이한 일이다. 동양에서는 건물에 관한 중요한 기록들을 대들보에 적어서 상량식을 행한다. 그러나 서양식 건물의 특징은 모퉁이 돌인 머릿돌에 있다. 집의 모퉁이 돌인 머릿돌에는 그 건물이 지어진 년도와 건축 목적이나 건물의 이름 등을 기록한다.
올해 여름에 미국 방문 중에 머물렀던 맨해튼의 숙소 건너편에는 177년 전인 1835년에 건축된 성 바돌로매 교회(St. Bartholomew's Church)의 웅장한 예배당이 있었다. 그곳 예배당의 머릿돌을 보니 그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본인이 미국 생활 중에 목회하던 한인 교회인 미국 펜실베니아 동북부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교외에 건축된 벤살렘 교회는 2002년도에 입당하였다. 그 예배당의 바깥 현관 우측 벽면에 머릿돌이 있다. 내년에 입당하게 될 예수사랑교회는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계시니라”는 마태복음 12장 6절을 기록한 머릿돌로 새겨서 넣으려고 한다.
성전의 모퉁이 돌이신 머릿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의 그 많은 선지자들처럼 몹시 때리는 자들의 매를 맞으시고 능욕을 당하시고 상하신채로 처절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내어 쫓겨 질질 끌려가신 채로 죽임을 당하셨다. 실로 그는 버려진 돌과 같은 인생이셨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그 버리진 돌과 같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서 불러 내셨다. 다시 사신 것이다. 부활하신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이며 부활시켜 주신 것이다. 그리하므로 예수님은 집 모퉁이의 영원한 머릿돌이 되셨다.
본문의 악한 농부들의 비유라고 제목 붙여지는 예수님의 비유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타국에 갔다. 때가 이르러 포도원 소출을 알아보고 그 얼마를 바치게 하기 위하여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었다. 농부들은 그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다시 다른 종을 보냈으나 그도 역시 몹시 대리고 능욕해서 빈손으로 거저 보내고 말았다. 세 번째 종을 보내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 종도 몹시 때려서 상하게 한 후에 내 쫓아 버렸다. 고민하던 포도원 주인은 혹시 아들을 직접 보내면 존대하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아들을 보내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서로 의논하였다. “이 아들은 상속자인데 저를 죽이고 그가 받을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그리고는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쫓아내고 죽여 버렸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하신 질문이셨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경고의 말씀을 해 주셨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 말씀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하고 반응을 보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시편 118편 22절의 말씀이 바로 본문인 누가복음 20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버린 돌과 모퉁이의 머릿돌
여기서 예수님이 인용하시는 ‘돌’이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실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집단 따돌림을 당하시고 배척을 받으신 후에 참혹한 고난을 당하시고 버려진 돌과 같은 분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려진 돌을 택하셔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누가복음 18장 32절과 33절에 보면,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자신의 나아갈 길과 당하실 고난을 예언하셨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자신이 버려진 돌이 되기를 원하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그 아들딸이 장차 역사의 현장에서 크든 작든 버리진 인생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가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처절하게 버려진 돌 같은 인생으로 사셨다. 그의 어린 시절 그를 돌보아 주었던 나사렛의 아버지 목수 요셉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여러 동생들을 남편 요셉으로 더불어 낳아 키우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을 통하여 낳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향하여 가는 길을 가까이서 다 지켜보아야만 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그 참담한 고난을 다 당하시고 거반 죽은 자처럼 기진맥진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메어다 주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가 부활하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버려진 돌 같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무덤에서 다시 살리시므로 부활의 첫 열매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주목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언하여 고친 기적이 있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고 선포하였을 때에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던 선천적 보행 장애인이 벌떡 일어나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 안에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한 기적이 일어났다. 이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전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이와 같은 표적 사건 이후에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싫어한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서 그 날 밤에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 일을 전후해서 예루살렘에 믿는 자들이 점점 많아졌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혀 있던 이튿날 관리와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당시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 제사장의 문중이 다 같이 모여 들었다. 대대적인 차원의 재판이 열린 것이다. 저들은 사도들을 재판자리의 가운데 세우고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였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렇다.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누군가가 데려다 놓아서 구걸하면서 지내던 이 걷지 못하던 불쌍한 사람을 일어나 걷고 뛰게 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며 성령의 역사였다. 이때에 베드로의 믿음 가운데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나약하고 비겁하던 베드로를 담대하고 성령 충만한 전도자요 복음 전파자로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모든 권력자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붙든 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의 능력이요 은총이었다. 이때에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4:11)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이 버렸던 버림받은 돌이셨으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주님이시다. 모든 인생들은 그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 하였다.
생각해 보라. 에녹 시대에는 에녹이 모퉁이 돌과 같은 인생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하여 하나님 안에서 모퉁이 돌처럼 존귀한 인생으로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가 그런 인물이요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이 그런 주인공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존귀한 것은 저들은 모두가 다 시대적으로 버려진 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집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신앙의 선조들이었다. 이는 요셉도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도 그랬다. 버리진 돌 인생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하나님의 집의 모퉁이 돌인 머릿돌 인생으로 하나님께 바짝 붙어서 살아갔다. 사무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등 저들 모두는 버려진 것 같았으나 존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돌과 같은 인생들이었다.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저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는 신앙을 지켜 가며 생명을 부지해 나갔다. 그러나 뒤 돌아보면 저들은 모두가 다 집의 모퉁이 돌이시며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영생과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을 자기의 시대마다 지켜갔던 믿음의 선조들이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빠져 버린 건물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허전하고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이는가.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 집의 모퉁이 돌이시며 머릿돌이시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했다. 세계 만국에 세워진 모든 성도들의 신앙과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 즉 복음 전파자들과 선교사들과 목사와 교사들의 헌신과 주님을 내 삶의 모퉁잇돌로 믿고 따르는 이들에 의해서 그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세워져 온 증거인 것이다.
때를 분별하는 지혜
10절에 “때가 이르매”라고 했다. 그렇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전도서 3장 말씀 그대로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3:1-2)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그대로이다. 주인이 포도원을 세(貰)로 주고 떠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세로 포도원의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서 소출의 일정한 분량을 삯으로 결산하자고 요구할 때가 있다. 이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하나님이다. 소작을 세(貰)로 받은 농부들은 유대인이다. 주인이 세 차례 보낸 종들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때나 오늘 날이나 복음은 언제나 핍박을 받고 위협을 받고 대적을 받아 왔다. 이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그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예언의 성취요 언약의 성취 과정이었다. 같은 본문인 마태복음 21장 34절에 보면,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라고 하였다. 모든 열매가 다 그러하지만 특히 포도는 수확하는 때를 잘 지켜야만 하는 열매이다. 그냥 버려두면 비바람에 떨어지고 더 오래 두면 새들이 쪼아 먹고 햇볕에 건포도로 말라 버리고 만다. 이리와 늑대가 울타리를 헐고 쳐들어 와서 포도원을 엉망으로 짓밟아 버릴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미 구약의 그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집의 모퉁이 돌이시며 머릿돌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보냄을 받을 것을 언급하고 또 언급하셨다. 그러나 죄와 불의와 불신앙에 붙들려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들을 경홀히 여겨 왔다. 심지어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때리고 능욕하고 내어 좇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가꾸길 원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들포도나무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영적으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이사야 5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그런 탄식의 말씀이 나온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고 하셨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과 우리 각 가정이 극상품 포도나무와 같은 인생들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는 하루하루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연부년 마찬가지이시다. 요즘 신문과 라디오와 인터넷 뉴스를 비롯한 모든 언론매체마다 도배를 하는 사건의 주인공들의 기사를 보라.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들이 그런 참담하고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끼치는 인생으로 살기를 원했겠는가. 부모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은 어느 가정이나 그 어느 누구나 극상품포도와 같은 인생으로 살아가길 원하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에게 포도원을 세(貰)로 넘겨받아 농사하면서 주인의 종들과 주인의 아들에게조차 악행을 일삼는 이런 농부들과 같은 인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혹은 내가 어떻게 주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날도 세계 처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하는 사례들이 계속되고 있다. 사실은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의 현장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 교회의 건축 현장에서 교회 건축 자체를 백지화하려고 달려들고 반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도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농부들의 모습과 똑 같다. 그러나 때가 되면 주인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
심판과 구원의 새로운 기회
하나님은 요나서 4장 2절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 내용처럼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이 맞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언제까지나 길이 참고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심판의 시작을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했다. 이는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이방 백성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시다. 17절의 ‘그들을 보시며’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보시며’는 그냥 대강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자세하게 관찰하여 저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것을 의미한다. ‘보시며’라는 ‘ejmblevpw’(엠블레포)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당시의 관리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을 일일이 주목하여 꿰뚫어 보시며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는 엄하셨다. 누가복음 20장 18절을 보라.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다. 19절에 보면,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전해들은 서기관들과 대 제사장들은 그 비유의 내용이 자신들을 가리켜 하신 비유인 것을 알고는 예수님을 즉시 잡으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여기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와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질” 그 대상들은 모두가 다 생명의 산돌이시며 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했던 자들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이심을 믿지 못하고 대적하던 당시의 유대인들과 더 넓게는 사단의 세력들과 복음을 대적하는 모든 대적자들을 일컫는다.
이는 당시에나 오늘 날이나 앞으로나 다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배척하고 대적하는 나라나 민족이나 그 어떤 부족이나 가정이나 개인이든 저들은 이 같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순간이 다가 오고 말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은 AD 19년에 시작해서 예수님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인 63년도에야 완공하였다. 무려 43년이나 걸려서 건축하였다. 누가복음 21장 5절에 언급된 ‘아름다운 돌’이란 흰색 대리석이었다. 길이가 11. 4미터요 폭이 3. 7미터요 높이가 5. 5미터인 거대한 돌들로 쌓았다. 성전 입구의 대리석 기둥은 무려 12미터나 되었다. 웅장하고 거대하였다. 그런데 그 헤롯 성전이 완공된지 7년 후인 AD 70년 8월 10일에 로마의 티토 장군의 군대가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 성전조차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누가복음 21장 6절의 예언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는 예언대로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만 한다. 롯의 두 사위들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지 말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가는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조차도 미워하시던 에서처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께 사랑 받던 야곱처럼 루스 들판에서 돌베개를 세워서 기름을 붓고 서원하고 결단하며 무릎을 꿇고 서원기도하던 신앙을 배워야만 한다.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며 기도하던 야곱과 같은 영적 결단의 밤이 있어야만 한다. 요셉의 열 명의 형들처럼 아버지라도 속이며 사는 비열하고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가지 말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처럼 빈털터리요 벌겨 벗겨진 인생으로 출발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꿈과 소망을 버리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을 붙들줄 알아야 한다. 삼손처럼 살지 말고 기드온처럼 살아가야만 한다. 사울 임금처럼 하나님과 사무엘 선지자 앞에서 거짓말만 계속하지 말고 다윗임금처럼 처절하게 회개하여야만 한다. 엘리야 선자자 시대에 바알과 앗세라 우상을 숭배하던 어리석은 선지자들처럼 살아가지 말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 와야 한다. 영원한 모퉁이돌이요 머릿돌이시며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
지난 2000년의 세계 복음 전파의 역사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이요 머릿돌로 받아들이고 영접한 민족들이 받은 복을 보라. 예수님을 가정과 인생의 모퉁이돌과 머릿돌로 영접한 가정들과 인생들을 주목해 보라. 때가 되면 점점 존귀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되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더해 주실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져서 성할 자가 없다. 이 돌이 반대하고 대적하고 조롱하고 모함하는 이들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시리라고 했다. 무서운 심판과 경고의 말씀이며 반면에 구원과 영생으로 초청하시는 말씀이시다.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자. 산돌이시며 모퉁이돌이시며 머릿돌이신 예수님께 붙어 사는 인생이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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