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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1:29-42) 2015.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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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1-04 08:11 조회 20,014 댓글 0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1:29-42)        2015. 1. 4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 양이다. 무려 500번 이상 언급된다. 구약 제사용 제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도 양이었다. 물론 소나 송아지, 염소나 비둘기가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물의 제 1호는 역시 양이었다. 요한 복음 10장에 나오는 비유 말씀 중에 “나는 양의 문이라.”는 비유는 잘 알려진 유명한 비유 중의 하나이다. 31년 전인 1984년에 대전에서 상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에 지었던 교회 이름이 ‘양문교회’였다. 지금은 후임 목회자의 때에 열방교회라고 개명되었지만 말이다. 양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도 하시고 또한 예수님은 양으로 비유된 인간의 목자이시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 중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인간의 목자이시며 인간은 목자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보하하심을 받는 양으로 묘사된 유명한 성경 말씀 중의 한 곳이다.
그런데 본문인 요한 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양으로 비유하여 선포하고 있다. 그것도 어미 양이 아니라 어린 야이라고 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냥 어린 양, 귀여운 어린 양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지고가는 양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장차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선포한 정의이다. 예수님은 인간 역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속죄양이시다. ‘지고 가는’이란 ‘호 아이론’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진 것은 대단히 심오한 신학적인 표현이다. 과거적이거나 일회적이 아니라 현재적으며 영속적이란 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죽으심이 어린 양으로 단번 제물되어 죽으신 대속의 죽임이지만 이는 일회적이며 동시에 영원한 대속의 과정이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아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출애굽하는 그 때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출애굽기 12장 3절에 그 첫 달의 열흘 날 각자가 식구대로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잡으라고 하셨다. 이것이 유월절을 행하는 유월절 양의 희생이다. 그 어린 양은 흠이 없는 일년된 숫양으로잡으라고 하셨다. 양이나 염소로 하라고 하셨다. 열나흩날까지 간직하여 두었다가 해가 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고 하셨다. 날 것으로 먹거나 물에 삶아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은 다 불에 구워서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고 다 먹으라고 하셨다. 혹시 아침까지 남은 것이 있거든 곧 불 살라 버리라고 하셨다. 양의 고기를 구워 먹을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셨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다. 하나님은 그 밤에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쳐 죽이셨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하셨다. 그러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은 첫 것의 죽음을 보지 않고 넘어 가게 하셨다. 이것이 유월절의 규례이며 영원히 지키도록 하셨다.
이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는 것, 즉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먹는 것이 무교절이다.
출애굽기 29장 38절에 보면, 매일 제사를 드리는 번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나온다.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되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 번 드리도록 명령하셨다. 어린 양을 드릴 때에는 양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고운 밀가루 십분의 일 에바와 찧은 기름 사분의 일 힌을 더하고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드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십분의 일 에바란 일 에바가 40리터이니 4리터를 말하고 사분의 일 힌이란 한 힌이 6. 5리터인데 그것의 사분의 일을 말한다. 이와 같은 소제와 전제를 번제로 드리는 어린 양과 함께 드려서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제사를 하나님의 집인 성막 즉 회막 문에서 늘 드리라고 하셨고 거기서 너희를 만나 주겠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회막을 거룩하게 하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제사를 통하여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시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며 제사장의 직분을 거룩하게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9:45-46)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는 번제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며 날마다 모든 백성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성별의 선언이었다.
또, 레위기 4장 32절에 보면 어린 양으로 속죄제를 드리는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흠이 없는 어린 암양으로 하여야 했다. 그 어린 양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게 되어 있다.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인 어린 암양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 번제단 밑에 쏟았다. 그 모든 기름은 떼어 내서 번제단에 화제물로 불 살랐다. 이처럼 제사장이 그 제사드리는 사람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릴 때에 그 사람의 죄가 사함을 받으리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어린 양의 희생 제사에 대한 내용들은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말씀으로 귀결된다. 이사야 53장 7절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이와 같았다. 세례 요한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예언적인 말씀과 예수님께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나아가는 장면이 본문의 내용이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 세례를 받으라.
신구약에 500여 번의 양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만 사실‘어린 양’이란 표현은 신약 성경에 단 4번 나온다. 그 중에 두 번은 본문인 요한복음 1장의 29절과 36절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 32절과 베드로 전서 1장 19절에 한 번 더 나온다. 거기 베드로 전서 1장 19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과 말씀하였다. 이는  그 앞 절에 보면 우리 믿는 자들이 받은 구원과 대속의 은총은 금이나 은과 같은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하여 된 것이란 말씀이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본문에 보면 32절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예수님 위에 머문 것을 세례 요한이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던 그 요단강에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당시나 오늘 날이나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동시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믿음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성령 세례의 계속적인 임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남녀노유 그 어느 누구라고 성령세례를 사모하면 받게 되어 있다.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머물렀다는 것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사건이다.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가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관유로 기름을 붓듯이 내게 계속하여 임하는 것이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잉태되고 탄생되고 성장하고 각종 기사와 이적의 사역을 하하고 천국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시험을 이기고 죽음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셨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권능은 성령의 힘이며 기도의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칠십 인의 제자가 귀신이 다스려지는 능력 사역 경험을 하고 돌아 와서 예수님께 보고할 때에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 기뻐하신 것처럼 성도들의 기쁨은 ‘웃찾사’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처럼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로, 생활을 깨끗하게 하고 늘 회개하여야 한다.
둘째, 늘 간절하게 기도생활을 하여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때를 늘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바는 보혜사 성령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임하도록 기도하시되 그 성령이 영원토록 떠나지 않고 믿는 자들과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사마리아에서 빌립 집사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큰 부흥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의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사마리아 성을 방문하였다. 그 도성에는 시몬이란 마술사도 빌립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많은 예수 믿는 이들이 성령 세례는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사마리아 도성의 믿는 자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그 때에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다. 그 장면을 본 마술사 시몬인 돈을 주고 성령의 권능을 사고 싶어 하였다.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돈을 주면서 그 성령의 권능을 자기에게 팔라고 흥정하였다. 그는 돈이 많은 마술사였다. 그는 돈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엄하게 그를 책망하였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8:20-23)
구약 성경의 세례 사건은 두 가지다. 노아의 홍수와 모세 때에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과 21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 1절과 2절에 보면 그러한 내용들이 나온다.
물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외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구체적이다. 과거의 죄악을 끊고 용서 받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는 내적인 증거가 성령 세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라면 나의 옛 사람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새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을 말한다. 주일날 교회에 오느냐 못 오나냐의 그런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에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 성령의 내주,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대하여 선포하면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성령과 불을 주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이들은 누구나 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임한 성령과의 관게를 어떻게 지속해 나가느냐는 숙제가 남아 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보면,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했다. 예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그는 그 이후로 가는 곳마다 성령의 증거자가 되었다. 그 바울이 고린도교회에도 이 같이 편지한 것이다.“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1:21)
각 사람에게 임하신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 사람 안에서 계속하여 임재하시는 현상을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고 거하신다는 말씀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설명한 ‘성화’란 바로 이런 상태의 거룩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함께 거하시는 데 내가 막 살 수 있겠는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과 성령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 들인 상태라면 어찌 죄와 악을 가까이 하며 살 수 있겠는가. 성령님이 내 안에 와서 계신다면 내 인생이 하나님의 성전과 같은 삶을 어찌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리하면 이렇다. 성령 세례가 단회적이라면 성령의 내주는 지속적인 상태이고 성령의 충만함이란 반복적인 사건과 체험을 말한다. ‘충만’이란 용어는 배에 물건을 가득 실은 상태, 혹은 물 잔에 물이 넘치도록 부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하심은 분명하나 그 성령은 마치도 전기가 공급된 가정 안에서 불을 밝히면 방 안이 환해지고 에어컨을 켜면 시원해지고 난방을 하면 따뜻해지고 전자렌지에 어떤 음식을 데우면 요리가 되고, 오븐에 빵이나 피자를 굽기고 하고 갈비를 구울 수도 있고 고구마를 구울 수도 있다. 그 전기로 TV도 볼 수 있고 인터넷도 할 수 있고 전축으로 베토벤의 교향악을 들을 수도 있는 것처럼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하심이란 성령 안에서 성도된 우리 성도들이 각양 기름 부으심과 인치심과 풍성하게 하시는 은혜와 은사를 누릴 수 있고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어린 양을 주목하라.
세례 요한은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1:34)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튿날에는 세례 요한이 자기의 두 제자들에게  저 만치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 하였다. 그랗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심오한 신학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까지는 알겠고 믿겠는게 도대체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표현은 예수님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세 때의 속죄제에 쓰임 받던 어린 양처럼 십자에 달려 죽으시는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대속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사야에서 여러차례 예언한 바 대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 양이시다. 신약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사도행전 8장 32절 이하에 보면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의 여왕인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인 내시가 예배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다가 제 나라로 돌아가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그 때 성령께서 빌립에서 그 수레에 가까이 가라고 명령하셨다. 빌립 집사가 그 수레에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위에 탄 사람이 수레에 올라 함께 그 뜻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그 읽고 있던 본문이 바로 이사야 53장의 말씀이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에  대한 그 본문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된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속죄 제물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잘 설명한 말씀 중의 한 곳이 히브리서 9장 14절 말씀이시다. 그 앞부분인 13절부터 보면 염소나 황소나 암 송아지를 피와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실 뿐만 아니라 ‘죄에서 속량 받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어린 양이신 예순님을 늘 바라보며 살아가야만 한다.
 

반석(磐石)같은 신앙으로 부르심을 받으라.
안드레의 형제인 시몬 베드로는 형제간에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고 세례 요한을 따라 다니던 이들이었다. 어느 날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이 저들 형제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구하느냐”그 때 저들 형제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하고 되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 와서 보라’는 말씀은 유대 사회에서 권위있는 스승이 제자들을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 오는 지금의 초청에 응하는 행위를 통해서 장차 진리를 제대로 깨닫게 되는 궁극적인 약속을 하는 초청이 ‘와서 보라’는 초청인 것이다.
그 시간이 저들 시간으로  10시 즉 우리 시간으로 오후 4시 경이었다.  그후에 형제 안드레가 형제인 시몬 베드로에게 말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메시야란 그리스도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안드레는 형제인 시몬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 다시 찾아 갔다. 그 때에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인 시몬에게 ‘장차 게바가 되리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 게바란 말이 베드로란 말이다. 뜻은 ‘반석’이란 의미이다.
이는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인가. 갈릴리 변방 마을의 안드레의 형제인 시몬, 그는 아버지 요한의 대를 이어 형제간에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시장에 팔아 가족들을 부양하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를 만나므로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나는 사도 베드로가 탄생하게 된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인 것이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래를 예언이라도 하시듯이 그에게 ‘게바’ 즉 ‘베드로’란  새 이름을 지어 주셨다. 게바란 아람어 표현이고 베드로란 헬라어 표현이다. 그 뜻은 ‘반석’이란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책망 받은 적도 있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쳐 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령 받은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사람은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나면 얼마든지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믿어야 한다.
조엘 비키 목사는 청교도신앙 연구의 권위자이며 미국 퓨리탄리폼드 신학교 총장이다. 오래도록 화란개혁주의교회를 담임하고 목회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 출판사인 인헤리턴스 출판사의 사장직도 맡고 있다. 50여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지난 2012년 5월에 한국을 다년 간 적도 있다. 그는 3년 전에 한국을 다녀 가면서“참된 열심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말씀에 발판을 두고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거짓된 열심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종교적인 사람인가에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왕국 건설에 관심을 가질 뿐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다. 거짓된 열심은 자기중심적이기에 교만에 이르지만 참된 열심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기에 더욱 겸손하게 만든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성경,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책에 보면, “지혜로우려면 성경을 읽고 연구하라. 안전하려면 성경을 믿어라. 거룩하려면 성경을 실천하라. 성경이 당신을 붙들 때까지 성경을 붙들어라. 성경 말씀이 머리를 채우게 하고, 성경 말씀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도록 하고, 성경 말씀이 당신의 손을 움직여 실행에 옮기도록 하라. 그렇다. 머리, 마음, 손이다.(head, heart, hand) 성경 읽기를 통해 당신의 삶 전체가 변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이 완전히 용서받았고 하나님이 당신을 완전히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성경 읽기는 결코 즐겁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은 진리이며, 지혜로 가득하다. 진리와 지혜가 결여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진리와 지혜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이런 강조도 하였다.“청교도인들은 매우 성경적인 삶을 살았다. 청교도 신앙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실천적 교훈이 들어있다. 그들의 가르침은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머리, 가슴, 손, 발 등 전인격에 관한 진지한 가르침이었다. 의무적인 예배와 성경읽기, 기도생활은 오히려 참된 부흥을 막는 방해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자세와 각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신앙 열정이 정말 필요한 시대다.”
1881년에 태어난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은 5살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강원도 홍천의 삼촌 집에 버려 지듯 한 상황에서 벽지를 뜯어 먹으며 굶주림을 호소하며 죽어 가고 있었다. 병약한 상태로 죽어 가자 병풍 뒤에 버리듯 방치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눈에 띄었다. 병약했지만 눈은 총명해 보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아버지는 조선말 왕궁에 근무하다가 유배된 상태였다. 11살 때에 아버지마저 돌아 가셨다. 그의 아버지 김지성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15살에 귀국하여 조선 왕실에 시종무관으로 근무하던 조선시대 말기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아들 김규식은 몸이 허약하고 위장병과 간질 등으로 자주 사경을 헤맸다. 그런 그를 언더우드 선교사가 데려다가 약을 먹이고 우유를 챙겨 먹여 간절히 기도하여 돌보아서 살려 냈다. 언더우드 선교사 곁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지고 비서처럼 일했다. 얼마나 밖으로 쏘다니고 싶어 하는 지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별명을 ‘번개비’라고 지어 불렀다. 김규식은 명석하였다. 영어, 불어, 라틴어, 신학, 과학, 수학 모든 과목에서 우수하였다. 서재필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독립신문>출판을 위해 그 곳에 취직한 적도 있다. 영어 편집 및 회계 일을 맡아 보았다. 서재필은 유학을 권했고 서양 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애국하라고 충고하였다. 15살에 미국 버지니아에 유학길이 열렸다. 열심히 일하며 돈을 벌어가며 공부하였다. 그의 버지니아의 로느크 대학교 졸업 성적은 92.2점으로 전교 3등이었다. 그 곳에 다니는 동안에 미국 방문길의 의친왕 일행의 방문을 받고 통역을 위해 98일간 학교를 결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학교 측은 그를 공가처리해 주었다. 결국 영문학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으로 석사를 마쳤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려 하자 박사 공부를 접고 애국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그 때 나이가 22살 때였다. 그는 명석하고 똑똑하였다. 영어와 불어와 라틴어 실력이 미국인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프린스턴대학교 석사 졸업식때는 ‘러시아와 극동아시아’란 주제로 졸업생 연설을 할 정도로 그는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귀국 초기 YMCA 간사. 경신, 배재, 연희 전문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윤치호와 함께 세계 기독청년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새문안교회의 집사가 되었고 교회 건축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29살에 장로가 되었다. 조병옥 박사도 그가 숭실중학교에서 가르친 학생이었다. 나중에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대한 독립을 위해서 열심을 다하였다. 어학 재능이 뛰어났던 김규식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에 국제적으로 김규식을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을 정도였다. 1918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 독립 청원서를 전달한 것도 김규식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떠나면서 그 다음 해인 1919년 3.1 독립 운동의 필요성에 불을 붙인 것도 김규식이었다. 파리강화회의 참석 자격을 얻지 못한 그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상해 임시 정부는 그를 외무총장으로 임명하였다. 배 안에서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 배 멀미로 큰 고생을 하면서 시력을 잃어갈 정도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타이프를 붙잡고 이승만에게 보낼 보고서를 타이프하고 있었다. 그는 심한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줄곧 국내외 세계의 언론에 조선 독립을 위한 협조를 호소하는 칼럼과 기고문을 송고하여 싣기도 하였다 계속된 두통으로 1919년 말 김규식은 미국체류 중 두골 전면 좌측부분을 절개하는 수술을 했다. 1919년 말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부작용으로 그 뒤로 간질병이 나타나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병원비는 이승만이 부담하였다.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보내는 일에도 앞장서서 뛰었다. 그는 김좌진, 안창호, 이승만, 김구, 신익희, 신채호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 러시아, 미국과 하와이와 호주와 상해를 잇는 뱃길을 오가며 연약해짐 몸으로 대한 독립을 위해서 사력을 다해 노력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도 지냈다. 그의 당대에 그는 최고의 영어 실력을 발휘하던 외교통이었다. 미국 사람의 영어를 교정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신앙도 철저해서 반드시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렸다. 한 마디로 하면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요,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우리 모두 반석과 같은 굳건한 믿음을 잘 지켜 나가서 이 험한 세상, 이 미혹과 유혹이 극심한 세상에서 세상 물결에 휩쓸려 넘어지지 말고 담대하고 맞서서 승리하는 영원한 신앙 승리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올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답게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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