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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말씀을 지키는 자(계3:7-13) 201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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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9-29 13:48 조회 19,571 댓글 0
 
말씀을 지키는 자(계3:7-13) 2014. 9. 28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은 언제 대하여도 큰 은혜와 도전이 된다. 지난 주 수요일 밤에 서머나 교회, 금요일에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은 받지 않고 칭찬만 받은 두 교회 중의 한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책망만 받은 교회이다. 나머지 네 교회들은 칭찬도 듣고 책망도 받은 교회들이다. 이왕이면 칭찬이 좋지 않나. 더군다나 평생을 살고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책망 보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빌리델비아란 형제 사랑이란 뜻이 있다. 우리 가족이 10여년 살던 곳이 미국 동부의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필라델피아란 도시였다. 본문에 소개된 이 곳, 빌라델비아는 오늘 날은 터어키에 있는 ‘알라세히르’라는 이름의 도시이다. ‘알라세히르’란 ‘알라의 도시’란 뜻을 가진 도시이다. 주전 2세기에 버가모 왕조의 앗탈루스 2세(Attalus II, B. C. 159-138)에 의해 건설된 도시인데 그는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형제 사랑’이란 뜻의 ‘필라델푸스’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이 오늘 날 빌라델비아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주후 17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가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재건하여 오늘 날에 이르는 도시가 되었다. 직물과 피혁 산업이 발전하고 포도 농사도 잘되던 곳이었다. 그 당시에 소아시아 300여 교회의 성찬용 포도주를 항상 무상 공급하던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였다고 한다. ‘형제사랑’이란 이름에 걸 맞는 그런 교회의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하다 보니 교회 밖에서는 ‘디오니수스’라는 술의 신을 섬기는 이들도 많았다. 주후 100년경부터 60여 년 동안 암미아(Ammia)라는 여 선지자가 탁월하게 사역하여 교회의 큰 부흥이 있었다. 그 주변에 회교 즉 이슬람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심하였는데도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그 핍박을 잘 이겨 나갔다. 80년 전인 1932년까지도 기독교 도시로 존속해 왔다는 것이 이와 같은 점을 입증한다.
 
이곳,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 되었나.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가 없으시므로 거룩하시고, 거짓이 없으시고 완전하시므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다시 열 사람이 없는 권세자이시다. 왜 그리스도를 다윗과 연관 지어 말씀하는 것일까. 구약에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구약에서 다윗의 집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열쇠’란 통치권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불어 같이 늘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 자신이시며 우주만물의 창조의 근본이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교회의 머리이시고 천국과 음부를 다스리는 통치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영원하고 완전한 주권을 묘사하는 말씀이 바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 분이 닫으면 다시 열자가 없는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이시다.
 
 
그러면 그 주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열린 문’(open door)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열린 문이란 선교적인 의미이다. 당시의 빌라델비아 도시가 지리적으로 그러한 위치였다. 동서를 잇는 중요한 도시였다. 사도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문에 관한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였다. 고린도전서 16장 9절에서는,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 했다. 고린도 후서 2장 12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라고 했다. 또한 골로새서 4장 3절에 보면 ‘전도할 문’이 열려져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중보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열린 문’이란 선교적으로 전도의 가능성 앞에 활짝 열려진 문이란 의미가 강하다.
 
우리의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개인적으로도 닫혀져 있던 인생의 문이 활짝 열려 지길 바란다. 가정적으로도 굳게 닫혀져 있던 축복의 문들이 활짝 열려지기를 바란다. 건강의 문, 결혼의 문, 자녀 출산의 문, 재물의 문, 진학의 문, 취직의 문, 취업의 문, 진급의 문, 발전의 문, 번영의 문, 번성의 문, 관계의 문이 활짝 열려지길 바란다.
 
신앙적으로도 회개의 문, 닫혀져 있던 전도의 문, 예배의 문, 찬송의 문, 기도의 문, 충성의 문, 헌신의 문이 활짝 열려지길 바란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무슨 칭찬을 받았는가.
 
 
예수의 말씀을 잘 지켰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지켜야 복이 된다. 창세기 17장 9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말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강조해 주셨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하라하신 말씀을 지켜 가는 생활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거의 모든 명령이 지키라는 명령으로 가득하다. 무교절을 지키라, 유월절을 지키라, 안식일을 지키라, 규례를 지키라, 법도를 지키라, 율법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이 기록된 장이다. 그 6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켜 살면 천대까지 하나님의 은혜 받는 후손으로 지켜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대강 지키거나 지키는 둥 마는 둥 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잘 지켜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축복된 생활의 시작이다. 출애굽기 34장 10-11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언약을 지키되 “너는 내가 오늘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고 하셨다.
 
그러나 구약이 긴긴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바벨론의 70년 포로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과 징벌을 피하지 못했던 고난의 시절을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나.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을 법과 관련하여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한,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란 표현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 않나.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이 두 가지 법 가운데서 씨름하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 지면 음부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하여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면 지금부터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누리며 영생하는 축복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 나갔던 칭찬 받은 믿음의 주인공들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이 책망만 받은 것에 비하면 이는 얼마나 크나큰 칭찬인지 모른다. 당시에 빌라델비아는 산업이 발전하고 그 어떤 도시 못지않게 부요한 사람들이 많은 도시였다. 그런 그 곳에서 우상을 숭배하거나 불법적인 상업행위로 떼돈을 벌어들이려는 불건전한 상업 행위를 멀리하며 신앙의 정절을 잘 지켜 나간 성도들이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었다. 재능이나 은사나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가 대단하지 않았어도 예수께서 보시기에 저들의 신앙은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던 예수를 감동시킨 성도들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감동시키고, 하나님 아버지를 감동시키고, 교회와 목회자를 감동시키고, 성도들 간에 서로의 마음에 감동이 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 나가자. 저들은 ‘작은 능력’을 갖고도 비겁하지 않았다. 떳떳한 가난을 불의한 성공이나 출세나 영달보다 훨씬 값지게 여기며 신앙의 정절을 잘 지키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갈 줄 알았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노아, 애굽에서 노예 생활 하던 요셉, 소년 다윗, 다니엘이 그런 믿음의 주인공이요, ‘작은 능력’을 갖고도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아닌가. 방주를 건설하던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비난하고 조롱하던 상관하지 않고 굳건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다 준행해 나갔다.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 한 가지를 붙잡고 모든 고난을 잘 감당하고 유혹을 피하며 담대하게 살던 중에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체험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다윗도 형들이 전쟁터에 나가긴 했지만 골리앗의 함성 소리 앞에 벌벌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때에 물매와 물매용 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가서 한 개의 물매 돌을 던져 역사를 바꾼 주인공이 되었다. 다니엘도 보라.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고 하여도 마음 약해지지 않고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던 중에 사자 굴에 던져 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능력’을 갖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던 다니엘을 위하여 사자의 입도 막아 주셨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잘 지켜 나가는 생활이다. 그래야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한다. 빌라델비아교회의 성도들은 재물의 유혹이나 세상의 명예나 무력에 의한 핍박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작은 능력’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지킨 믿음의 승리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 실망스런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스스로도 자랑스럽고, 스스로도 대견한 그런 신앙생활을 하자.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함으로 서로에게 간증이 되는 그런 주인공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 이상으로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9절에 보면, 더 이상의 연단이 필요 없을 정도의 굳건한 믿음을 지켜 나갔다. 10절에 보면, 장차 올 시험의 때도 면하게 하리라는 상급도 받았다. 11절에 보면, 이미 면류관도 상급으로 받은 상태였다. 이미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 나가면 되는 상태였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참기 어려운 고난과 환난을 잘 참고 견디며 인내함으로 예수의 말씀을 지켰다. 참다운 신앙생활은 인내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주를 믿고 따르는 성도의 인내란 마태복음 10장 38절에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한 순간만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하여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인내하는 말씀’ 신앙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자기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간증하면서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고 했다. 여기서 ‘죽으심을 본받아’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 그 누가 자기 목숨을 그렇게 쉽게 포기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고난과 죽으심을 본받는 신앙 또한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아니하였노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감동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을 향하여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는 보증과 약속의 말씀 또한 받게 되었다. 그 동안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잘 이긴 것도 감사한데 앞으로 다가 올 시험을 면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10절에서 말씀하는 ‘시험의 때’란 국지적인 시험이 아니라 장차 올 ‘칠년 대 환난’을 말씀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은 장차 임할 극심한 환난을 면하고 이길 수 있도록 보호하신 다는 보호의 약속이시다. 10절 후반절에 보면 이 환난은 간단히 피할 수 있는 환난이 아니다. 왜 그런가.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셨다. 온 세상에 그런 극심한 대 환난이 임할 것이란 말씀이다. 이 시험은 특히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할 시험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땅에 속한 자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언급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세상적으로 치달아서 배를 신처럼 섬기며 먹자, 마시자, 취하자, 놀자 하며 세상 향락에 빠져 사는 이들을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
8절 후반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칭찬 받은 믿음의 또 하나는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제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붙잡히셔서 심문 받으시고 고난당하실 때에 비겁하게 예수 이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갔던 이름뿐인 제자였다. 마태복음 26장 69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이는 다른 복음서에도 모두 다 나오는 내용이다. 무슨 말씀인가.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을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붙잡히신 그 고난의 날 새벽 주님은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끌려갔다. 거기에는 이른 새벽에 서기관과 장로들이 다 모여 있었다. 58절에 보면 베드로는 어떻게 되나 결말을 보려고 멀찍이 하인들 틈에 가서 끼어 앉아 있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몰고 갔다. 분위기는 이미 험악하여 있었다. 67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을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하였다. 그 때에도 베드로는 저 만치 멀리 바깥뜰에 앉아 있었다. 절대 죽으시면 안 된다고 큰 소리 치던 베드로인데 이렇게 비겁해 져 있었다. 그 때에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 때에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모른 다고 부인하였다. 그리고는 머쓱하게 자리를 옮기려 하는데 앞문까지 나간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는 맹세하며 부인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무리로 몰려 와서 베드로에게 말했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그 때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의 예언처럼이나 닭이 울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 후에 베드로는 자신을 향해 예언하셨던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렇게 비겁하고 나약하게 무너지고 주님 버리고 도망가 버렸던 베드로를 다시 찾아 가셔서 세우신 분이 부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 부활한 그 이후에도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 고기잡이 하던 베드로가 아닌가. 그런 그를 그 다음 날 새벽에 갈릴리 해변 가에 찾아 가신 부활 예수께서 숯불을 지펴 놓으시고 떡을 구워 먹이시고 생선 153마리 잡게 하셔서 가져 오라 하시고 생선 구워 먹이시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의 문답을 세 번 씩이나 확증하심으로 베드로를 역사의 중심에 다시 세워 주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제자 베드로도 부인하고 저주하고 버리고 도망쳤던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성도들이었다.
 
지난 화요일에 청주실내체육관에서 하디 중부권 선교 대회가 있었다. 8천명이 모였다고 했다. 배종명 목사와 함께 다녀왔다. 그 넓은 시민 공원 예총 회관 앞 널따란 정원에 ‘신석구 목사’ 동상이 자랑스럽게 우뚝 세워져 있었다. 충북 청주 3. 1 공원에는 충북이 낳은 3. 1운동 33인 대표들이었던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의 동상을 나란히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들 중에서 신석구(申錫九,1875-1950)목사가 누구인가. 청주가 낳은 민족 지도자요 독립 운동가요 목회자요 사회 운동가였다. 그는 3. 1절 독립선언문 서명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충북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 구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총명하였다. 서당에서 11살 때부터 벌써 다른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5살에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집을 떠나 방황을 많이 하였다. 한 때 타락한 생활을 하던 중에 경기도 고랑포에서 친구 김진우를 만나서 예수를 소개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7년, 33살 때에 처음으로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는 그 날의 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히 구원할 것이다."
믿은 지 한 달 반 후에 같은 고향 출신인 정춘수를 만나 개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개성에서 선교사 리드(C.F. Reid, 李德)의 한글 선생으로 일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1909년 7월 29일에는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의 죄를 떨쳐버리는 중생을 체험하였다. 1909년 2월부터 전도인이 되어 개성, 홍천, 가평, 춘천에서 목회하였고, 1917년 9월 24일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신앙으로 결단하고 민족의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는 독립을 위하여 일하고, 신사 참배를 반대하며 해방을 위하여 일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또 갇혔다. 그는 해방도 일본의 경찰서에 구금된 상태에서 맞았다. 1949년에 10년 형을 받고 투옥 생활을 하다가 6. 25가 일어난 1950년 10월 10일, 평양 형무소에 갇힌 그는 공산당들에 의하여 총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평생의 삶은 청렴결백하였다. 그의 전 생애는 십자가를 잠시도 내려놓지 않고 지고 가는 생애였다. 그는 입으로만 교훈하지 않고 늘 몸으로 실천하였고, 늘 자기의 잘못을 간증하며 눈물로 설교하던 목회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 훈장’을 추서하였고 그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80년에는 충북 도민의 성금으로 청주시 3. 1공원 안에 그의 전신동상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1921년 11월, 2년 반 만에 출옥된 후에는 원산, 고성, 춘천, 가평, 서울, 철원, 한포,천안 등지에서 사도 바울처럼 처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며 목회했다. 또 옥고를 치르면서 중단했던 학업도 계속하여 1922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한번은 오늘 날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며 학생들에게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신학교 기숙사가 요란하여 그가 들어가 보니 학생들이 장기 두면서 훈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학생들, 성경 보고 기도하시오!" 하고 되돌아서자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큰 감화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면 주님도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신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던 믿음의 주인공들이었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고 예수 이름을 부인하고 배반하지 않고 살아가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다. 이방신전의 기둥이 아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어떻게 해야 그런 날이 올까. 가진 것을 굳게 잡아야 한다. 아무도 나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수영 선수 박태환 선수는 그동안 이런 저런 세계 대회에서 20개의 금, 은, 동메달을 탔다고 하지 않나. 운동 잘해서 메달만 타도 좋은데 신앙생활 제대로 잘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면류관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면류관을 받은 것도 귀하고 감사한데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왔다 갔다 흔들리면 안 된다. 기둥은 흔들리면 안 되다. 어떤 풍파가 몰려 와도, 어떤 시련과 어떤 핍박과 어떤 고난과 어떤 유혹과 어떤 갈등이 몰려 와도 굳건하게 자기 신앙을 지키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살아가야 기둥이 되는 것이다. 이 기둥은 보통 기둥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도 새겨져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도 새겨져 있는 그런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존귀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둥 된 나의 인생에 새겨 주신다고 하셨다. 과거에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기 위해서 그 얼마나 애를 썼나. 요즘은 동남아 사람들이나 조선족이나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한국 체류 신분을 보장 받는 ‘거류증’을 발급 받고 대한민국 정부가 부여 하는 그런 신분증에 제 이름이 새겨 진 것을 받아 들기를 염원하는 이웃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둥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다. 12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예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셔서 그런 은혜를 베푸시고, 그런 특권을 주시고, 그런 축복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 기둥에 하나님의 이름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개되지 않은 새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새겨 주신다고 하셨다.
 
솔로몬 성전의 낭실 양편에 세워진 야긴과 보아스. 이 두 놋 기둥이 세워졌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해 주시는 그런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인가.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있던 도시였다. 실제로 주후 17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가 폐허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믿음을 잘 지키고 하나님 성전의 기둥 되어 살아가면 결코 다시는 나가는 일이 생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이다. 이는 성도가 자기 신앙을 잘 지켜서 장차 온전한 구원과 상급을 누리게 될 영원한 축복을 보증하신 말씀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둥은 움직이면 기둥이 아니다. 들락날락하면 기둥이 못 된다. 아궁이의 부지깽이는 아궁이 속을 들락날락하면서 다 타 없어지고 만다. 다 타 없어지면 또 새로운 나무 가지를 꺾어서 부지깽이로 사용한다. 부지깽이는 그렇게 쓰이고 마는 소모품이다. 그러나 기둥은 다르다. 기둥은 백년이 가고, 오백년이 가고, 천년이 가고, 천년이 두 번 지나가도 기둥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둥은 언제나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 내는 역사의 기둥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 바나바 이런 인물들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기둥이 된 인물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나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도 역사에 기둥이 된 여인들이다.
 
그러나 이름만 제자였던 가롯 유다나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같은 이들은 기둥이 못된 이들이 아닌가. 사도 바울 곁의 의사요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나 마가복음을 쓴 마가나 디모데나 디도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나 뵈뵈나 바나바는 모두 다 기둥과 같은 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디모데 후서 4장 10절 이하에서 언급하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나간 데마”나 사도 바울의 선교에 많은 해를 입혔던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기둥 될 기회를 놓쳐 버린 기독교 역사의 불행한 이름들이 아닌가. 시간과 빠르게 지나가고 세월이 급하게 흘러가고 있다. 우리 각 사람이 시대의 중심에 서서 예수님께 인정받고, 면류관 받고,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그런 쓰임 받는 신앙의 역군들이 모두 다 되자.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런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 인내가 비결이다. 참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 다시 또 좀 더 참고, 좀 더 견뎌야 한다. 10절의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란 말씀은 공동 번역 성경에 보면,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을 너는 잘 지켰다.”(Since you have kept my command to endure patiently)고 번역하였다. 잘 된 번역이다. 성도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분명하다. 항상 잘 참고 잘 견디라는 명령이시다. 참아야 복이 임한다. 잘 참고 견뎌야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교훈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마태복음 5장의 팔복 말씀에도 예수로 말미암아 남들이 나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말 하고 악한 말을 할 때에 잘 참고 견뎌야 복이 있고 천국의 상이 크다고 하셨다.
 
끝까지 말씀을 잘 지켜 행하는 신앙 승리자가 모두 다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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