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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미5:2-5, 마2:1-6) 201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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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2-22 16:47 조회 21,781 댓글 0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미5:2-5, 마2:1-6)       2015. 12. 20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그 시대를 이끌어 갈 신화적인 인물이 탄생하기를 염원해 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단군 신화, 박혁거세 신화 등이 전해져 온다. 신화(神話)란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인 것처럼 전해져 온 전설(傳說)이며 설화(說話)를 말한다. 가령〈삼국유사〉,〈삼국사기〉에 의하면 지금의 경상남도 지역인 고허촌의 촌장이었던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 나정 곁 숲속에서 큰 알을 발견했다. 그 알 속에서 태어난 어린아이 박혁거세다. 그의 나이 13살이 되던 해에  주변 여섯 촌의 촌장들은 그의 출생이 기이(奇異)하다고 하여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나라이름은 서라벌(徐羅伐)이라 하고 그가 왕으로 즉위 하자마자 동시에 알영이란 이름의 여성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은 즉위 후 왕비와 함께 관할 지역인 여섯 부를 돌며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다. 서울을 금성(金城)으로 정하고 성을 쌓았다. 박[瓠]과같이 생긴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朴)이라는 성을 붙였고 혁거세(赫居世, BC 69-AD4)라는 이름은 “밝은 세상”이란 뜻이다. 그가 박씨 성의 시조다. 이런 것을 설화, 신화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화나 설화의 차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요셉과 약혼하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던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셨고 예수는 예언을 따라서 에브라다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이고 에브라다는 ‘풍성한 열매’라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역사가 BC와 AD를 사용하는 것은 ‘before Christ’ 와 ‘Ano Domini’(in the year of Our Lord Jesus Christ) 즉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지 않나. 우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달력이 예전처럼 흔하지 않지만 달력 중에도 불교인들은 불력을 쓰지 않나. 또 단군을 믿는 이들은 기원 전 2333년 전의 일이라고 해서 신화적인 인물인 단군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화나 설화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릴 평화의 왕으로 보내신 아들이시다. 이사야서나 스가랴서와 함께 메시아 탄생 예언의 말씀을 담고 있는 미가서의 본문에 보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스릴 자’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의 죄악 가운데 빠져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다르시는 왕, 평강의 왕이시다. ‘미가’라는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의미이다. 미가서 7장 18절의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의 의미는 곧 미가 자신의 이름 뜻과도 같다. 미가(BC735-690)는 남 왕국 유다의 아하스, 히스기야 임금 때에 활동하던 선지지이다. 마태복음 2장의 본문에 보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여호와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 안에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임재 되어 있으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을 사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가시는 곳마다 능력을 행하셨다. 각색 병자가 나음을 입었다. 귀신이 떠나가고 귀신들렸던 많은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그의 여생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다. 죽죽은 자가 살아났다. 회당장 야이로의 12살된 외동딸을 살려 주셨다. 나인성의 홀로 된 여인의 하나뿐이던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 주셨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장례가 된 무덤에서 불러 내셔서 살려 주셨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물 위로 걷기도 하셨고 걷기 원하던 베드로를 부르셔서 물 위를 걷는 체험도 하게 하셨다. 올 한 해 우리 교회가 걸어 온 길이 물 위를 걸어 온 것만 같다.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면 물에 빠져 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들을 끊임없이 물 위로 걷게 해 주셨다.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 성도들은 기도가 절로 되실 것이다.
하루 한 순간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파도치는 풍랑 가운데 깊은 물속에 빠져 버릴 것 같은 나날을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을 의지하며 오늘 까지 지내 왔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도 여호와의 이런 능력을 의지하고 구하지 않나. 진학, 입시, 어려운 시험, 취업, 결혼, 임신, 자녀 출산, 사업, 건강 문제 등 그 어떤 것 하나 능력이시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니고 내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 하나 있나.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나면 그 누구의 도움이 힘이 되나. 사람이 약해지고 보면 부부라도 부모 자녀라도 가족이라도 조금 도움이 되긴 하지만 철저히 고독하고 외로운 씨름이 아닌가. 물론 안타까워하고 기도하고 돌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올 한해도 질병과 씨름하며 지내 오셨고, 혹은 어려운 병을 이기며 기도하며 지내 오신 분들께 주님의 특별한 위로와 치유의 은총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마음이 아파서 울고, 괴롭고, 힘들고 지치고 답답하고 앞이 보이질 않고 막막한 나날을 지내는 이들에게 주님의 특별한 격려와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은 벳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에게 해가 져 가는 저녁나절에 2만 여명의 무리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풀어 배 불리 먹게 하셨다. 감사 기도를 드리신 예수께서는 그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먹게 하셨다. 그리고 배불리 먹은 후에 남은 것을 거두어들이니 그것만도 12광주리가 되었다. 예수님은 배불리 먹고도 남게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은 모자라는 능력이 아니다. 풍성한 공급자이시며 넘쳐나는 능력이시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구원의 감격이 그러하지 않나. 우리 스스로에게 나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가.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셔서 영원한 구워을 선물로 허락하신 분이 누구이신가.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하시고 죽으셨다.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권능’(權能)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 분에게 있으셨다.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권능을 예수님께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도 그러하지 않나.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세상을 비실대며 사는 자가 아니다. 세상에 끌려 다니며 사는 자가 아니다. 세상에서 죄의 종이 되고 악을 반복하며 육체의 방종한 습관에 붙잡혀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성도는 세상을 이기며 사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는 능력으로 오셔서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 늘 계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하셨다.
홍수 때에 그 범람했던 물이 감하여 들게 하신 분이 누구이신가. 나이 100세 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선물로 주신 분이 누구이신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나이 90세 때에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능력인가. 원주민들에게 늘 쫓겨 다니며 살아야 했던 이삭에게 끝없이 광활한 들판에 마르지 않는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해 주신 르호봇의 축복이 누구의 능력으로 임한 것인가. 열 두 아들들을 야곱이 낳았나. 요셉을 애굽 땅, 노예의 신분에서, 그것도 감옥에 갇혀 지내던 히브리 노예 청년 요셉을 임금 바로 앞으로 불러내고 왕의 꿈을 해석한 후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신 능력이 과연 누구의 능력인가. 모세가 홍해를 갈랐나. 모세가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게 하였나. 광야의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배불리 먹게 해 주었나. 광야 길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한 분이 누구신가.
요단강을 누가 홍해처럼 갈라서게 하였고 여리고 성을 창과 칼로 싸우지 않고 무너지게 한 분이 누구이신가. 그 모든 것들이 과연 누구의 능력이란 말인가.
그렇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전능자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못 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들떠서 지내는 절기가 아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속량 하셔서 자녀 삼아 주실 왕으로 오신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찬양하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삶에 구주로 영접하는 절기여야 한다.

여호와의 존귀함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존귀해 지면 그 이름이 존귀해 진다. 존귀해진 사람은 그 사람의 그 이름만 들어도 그 상대방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4절 말씀대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시는 주님이시다. 여호와의 이름은 영원 전부터 영원 까지 찬양을 받으실 이름이시다. 존귀한 이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함께 존귀하신 이름이요 찬양을 받으실 이름이요 경배를 받으실 이름이시다. 우리 주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계4:12)하신 존귀하신 이름이시다.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올려지는 이와 같은 우렁차고 아름답고 존귀한 찬송 소리를 들었다. 여호와의 존귀한 이름 앞에서 자신의 삶을 존귀하게 살다간 성도들이 세상에는 많다. 성경의 인물들로 하면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인물들이 그러하지 않나. 교회의 2천년 역사로 하면 초대 교회의 폴리캅 감독, 스코틀랜드의 잔 낙스,  히틀러의 학정이 계속되던 때의 독일 교회 역사의 정점에 서서 불의와 맞서 항거하다가 순교한 본 훼퍼, 노예 해방과 인권 회복을 위해서 살다가 저격당하여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미국 교회사의 존경 받는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수 없이 많다. 
서머나 교회의 주교였던 폴리캅(Polycarp, AD 69-155)은 황제 가이사에게 절하고 그를 숭배하라는 강요를 거역한 죄로 89살에 로마의 원형 경기장 안에서 수 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 당하였다. 그를 회유하는 자들이 한 번만 황제를 높이는 말을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할 때에 “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나에게 한 번도 해를 끼치신 적이 없는데 어찌 내가 주님을 배반한단 말이오." 그런 말을 남겼다. 그는 나무에 뒷짐을 지게 해서 묶인 채로 장작더미 위에 불을 붙이는 방법으로 화형 당하였다. 그는 제물로 바쳐진 희생 제물의 어린 양처럼 활 활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 순교 당하였다.
사람의 이름도 동서양의 역사 속에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이름이 있고 천대 받는 이름이 있다. 그것은 그 인생의 삶의 열매이다. 금번 성탄절 밤 10시에 성탄절 특집으로 KBS TV에서 주기철(1897-1944) 목사의 일대기를 다루는 다큐멘타리를 방영한다고 한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이며 살았던 ‘주기철 목사’ 그 이름이 존귀하지 않나.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올 곧은 신앙으로 살다가 옥중에서 47살에 순교하였다.
 
나는 강화도 시골 중학생 시절에 성탄절에 마을의 장로님 댁에 갔다가 그 집 책  꽂이에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책을 보고 빌려다 읽었다. 그 때부터 목사 될 결심을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 내용을 18살에 신학교 입학할 때 쓰는 신앙 고백서에도 썼다. 미국 유학 갈 때에도 그런 내용을 썼다. 그는 경상남도 웅천 출신이다. 몇 해 전에 그 곳 창원 마산 지역의 연합 집회에 갔다가 주기철 목사의 고향 마을, 고향 교회를 찾아 가 보았다. 그는 웅천에서 사립 개통소학교(開通小學校)를 나오고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다녔다. 그 후에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안질이 심하여 고생하다가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지낼 때에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성령을 받고 중생(重生)하는 체험을 하였다. 24살 때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후에 29살 때에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34살 때에 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 이미 그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저명한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 39살 때에 그 유명한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송창근(宋昌根) 목사의 후임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그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고당 조만식(曺晩植), 유계준(劉啓俊), 오윤선(吳胤善) 등이 장로로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큰 교회당 건축에 착수하여 2년 후인 1938년 3월 헌당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자로 지목 되어서 헌당식 직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게 갇히고 말았다. 1938년을 전후한 당시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극에 달하였다. 일본의 경찰들은 평양교회 교인들과 평양 신학교 신학생들을 괴롭혔다. 결국 평양의 숭실학교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강제로 폐쇄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살벌해져 가던 때에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에 앞장 섰던 인물이 주기철 목사였다.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간 뒤에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설교를 교인들 앞에서 유언처럼 전하였다. 이 주일 설교 후 이틀이 지난 화요일에 다시 일본 경찰은 그를 검거하였고 산정현 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파면은 그 속한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한 결의형식이었다. 결국은 산정현교회도 폐쇄 당하고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주기철 목사는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순교했다. 감옥에서 5년간 온갖 고문을 다 당하며 견디기 어려운 고생을 하다가 해방을 일 년 남겨 놓은 1944년 4월 13일 병자들을 가두어 두는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4월 20일 부인 오정모 사모의 마지막 면회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4월 21일 감옥에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7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와서 주일을 맞은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주일 설교인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의 설교 전문이 전해져 온다. 그 다섯 가지 제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4)고 신신부탁하셨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 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케 되는 삶을 살아가자. 예수님의 이름이  드높여 지는 그런 생을 가꾸어 가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하신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그 존귀하신 이름 앞에서 살아가면 주께서는 우리의 이름도 그처럼 존귀하게 해 주실 것이다. 4절 말씀에 “그는...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고 하였다. 그렇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의 역사를 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장차 나아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장래를 보증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주의 이름이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도록’ 간섭하시고 역사하신다.
‘서서 목축하니’ 라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 주님은 양떼를 몰라라 하고 내어 버려두고 산허리에 두 팔 베고 누워서 하늘만 처다 보며 안일하게 지내는 목자가 아니란 말이다. ‘서서’라는 표현은 언제라도 양떼를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고 달려갈 자세를 갖추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양떼를 사자와 곰과 맹수들로부터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한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한 손에는 막대를 잡고 언제나 사방을 돌아보며 양떼에게 마음을 두고 소 떼의 형편을 보살피는 그런 목자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미가 선지자를 통한 예언의 말씀 가운데 보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곤고한 날을 지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5장이 시작되는 1절에 보면 “적군들이 이스라엘을 에워싸고 막대기로 이스라엘 왕인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한 나라의 왕이 이웃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 와서 막대기로 뺨을 치며 조롱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 않나.
우리나라도 그런 때가 있었다. 1636년 12월 1일, 병자년에 중국 청나라가 쳐들어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이름 붙여진 전쟁이다. 조선 16대 임금이었던 인조(仁祖,1595-1649, 재위 1623-1649)때의 일이다. 12만 명의 군대가 심양을 출발하여 9일 만에 압록강을 건넜다. 12월 12일에 한양에서는 청나라가 쳐들어오고 있는 소식을 접했다. 그 다음 날에 평양, 그리고 그 다음 날에 개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다시 5일 후에 청나라의 말을 탄 군대가 한양에 까지 밀어 닥쳤다. 당황한 임금 인조는 세자빈,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강화도리 피신하려는데 길이 막혔다. 결국은 13,000명의 군대와 함께 50일쯤을 버틸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순 식간에 청나라의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지원군이 전라, 경상, 충청, 강원, 평안도에서 몰려 왔으나 청나라의 군대를 당할 수가 없었다. 40여일 만에 고립되고 말았다. 해가 바뀌고 다음 해인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한강 동편에 있는 삼전도까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홉 단으로 높이 쌓은 수항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윽고 청 태종이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그것은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 바닥에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의식이었다. 이어서 강화도에서 끌려온 왕족과 대신들도 똑같은 예를 올렸다. 1637년 2월 2일, 청 태종이 철수할 때 인조는 또다시 삼배구고두례를 행해야 했다. 2월 8일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빈궁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떠났다. 얼마 후 청은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조선은 이때부터 청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양국 간에 군신관계는  250년 세월이 지난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말기 우리나라는 청나라, 일본, 러시아의 침략 야욕의 각축장이었다. 그런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를 거치고 6.25의 폐허를 딛고 오늘 날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메시아 예언인 미가서 5장의 6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 내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이 세상에서 압제와 불행 가운데 버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5절의 말씀처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란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종들로 하여금 앗수르의 침략과 같은 세상에서 영적 전쟁에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시다. 우리 교회도 앗수르와 같은 이 세상에서 ‘일곱 목자와 같고 여덟 군왕’과도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힌 믿음 좋은 일꾼들로 넘쳐 나기를 소망한다. 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세움 받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들은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시는 성령의 검과 말씀의 칼을 들고 앗수르 땅과 니므롯 땅을 황폐하게 하듯이 대적하여 이기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할 평강의 왕으로 구별하여 세우시고 영원히 다리스시는 목자로 삼으실 것이다. 7절과 8절을 조금 더 보자. 여호와의 평강의 능력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이슬처럼 단비처럼 내릴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이다. 이슬과 단비는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도 얼마든지 내리는 것처럼 전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의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하시기로 작정하시면 그 어떤 인간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잠자는 새벽 시간에 풍성한 이슬이 내려서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과 같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주의 은혜를 간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나 그 뿌린 씨앗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죽어가던 생명을 소생하게 하시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집 안에 작은 화분의 개량 선인장이 3년 째 이 계절에 빨간 꽃을 피웠다. 늘 물을 준 것 밖에 없는데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이 겨울에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었다. 이슬과 단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수풀 속에서 나오는 사자와 같고 양 떼 중에 있는 젊은 사자와 같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 교회의 영광이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미한다. 7절을 오해 없이 깨달아야 한다. 양과 사자로 비유하는 말씀의 양은 ‘세상의 무리로 운집한 세력’을 상징한다. 반면에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라는 말씀의 ‘사자’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교회를 통한 영적 권세와 권위와 능력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주신 말씀이다. 성도된 우리가 그러하여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자와 같고 젊은 사자와 같이 복음 안에 용감하고 진리 안에 담대하며 성령 안에서 지침이 없는 용맹스럽고 정의감에 불타는 영적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9절의 ‘네’라고 반복하여 사용된 ‘너’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의 승리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영광의 본체이시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고 예언하여 주셨다.
여호와께서 보내주신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의 성탄을 맞이하길 기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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