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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거기에는(사35:1-10) 2016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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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12-11 22:24 조회 17,843 댓글 0
 
그 때에 거기에는(사35:1-10)                2016. 12. 11
성서주일


어떤 이들은 “그 때가 좋았지”라든지 혹은 “역시 구관이 명관이야”라는 말을 한다. 이는 과거의 그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나 때가 지금과 비교하여 더 좋았다는 추억을 말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미래 중심이다.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이 앞으로 다가 올 것이라는 장래의 희망을 말한다. 이사야서의 본문이 그런 내용들 가운데 일부이다. 이사야의 이런 예언은 700여년 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한 말씀이다. 

5절과 6절에서는 “그 때에”라는 장래의 그 어느 시간을 말씀한다. 
그리고 8절과 9절에서는 “거기에는”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광야이고 메마른 땅이며 사막이지만 장차 “그 때에는” 그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가 되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무성하게 꽃이 피고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즐거워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레바논이나 갈멜이나 사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보지 못하던 자들의 눈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못 듣던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절며 걷던 이들이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말 못하는 자의 혀로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사막이 변하여 연못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메마른 땅이 변하여 샘의 근원인 원천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승냥이가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가 되면 사자와 사나운 짐승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큰 길 즉 대로로 다니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사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눈다. 
그  첫 구분의 마지막 장이 이사야 35장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35장은 첫 이사야의 마지막 장이다.
이사야서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 중에서 본문으로 대하는 이사야 35장은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보여 주는 내용이다. 그 때가 되면 거기에는 완전한 회복의 복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여호와의 아름다운 영광을 보리라.
비가 오지 않는 건기철의 이스라엘 광야와 사막은 그 삭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기 철이 되면 광야에도 꽃이 피어난다. 1절의 ‘백합화’를 우리는 하얀 빛의 백합화로 상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는 백합화.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 28절에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시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9)고 말씀하신 이 꽃은 공동번역에서는 ‘아네모네’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던 광야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이 백합화 즉 아네모네의 붉은 꽃이 온 천지를 덮는다. 그 화려함과 화사함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붉은 색과 보라색과 흰 색의 아네모네가 온 광야의 들판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장관이 연출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때에 거기에는 그런 기쁨과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주의 영광이 회복 될 것이란 말씀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기, 강림절기는 그런 은혜를 사모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긴 세월 동안 그런 날을 사모하며 고대하며 살아왔다. 430년간 애굽의 노예 생활 중에 그런 출애굽의 날을 꿈꾸며 소망하며 살아 왔다. 광야 40년 생활 중에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날을 꿈꾸며 살아 왔다.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는 다시 시온 성 예루살렘에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지내야 했다. 이처럼 산다는 것은 끝이 없이 그 때와 그 날과 거기 주님이 예비 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상대적으로 그 누군가를 막연히 부러워하고 흠모하며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 때를 예비해 주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 아니신가. 

벤살렘 교회 목회 때의 이야기이다. 미국 교회 예배당은 주일 오후에 빌려서 예배하면서 예배당 건축을 준비하던 때에 틈틈이 특별 기도회로 모여 기도하고는 하였다. 그 때 부르던 복음 성가 중에 기억나는 복음 성가가 “보라 그 날이(주여 오소서”라는 곳이다. “보라 그 날이 곧 다가 오리라 생명의 주 예수 영광 중에 오실 날 네가 그 날을 곧 보게 되리라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시리라.” 이 복음성가는 1989년도에서 만들어진 복음성가이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할 날이 올 것이다. 사막에 아네모네 꽃이 무성하게 피어 즐거워하고 기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할 날이  온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날이 온다는 말씀이다. 
사람이 언제나 기쁘고 언제나 즐겁고 언제나 춤추고 싶고 언제나 신나고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 않나. 어쩌면 일 년을 기다리고 십년을 기다리고 평생을 기다리며 기도하여도 답답한 일만 많고 사면이 높은 벽 안에 감옥에 갇힌 자처럼 사는 이들도 없지 않다. 

생각하여 보라.
그 때와 그 날과 그 곳을 기다린다고 해서 보지 못하던 이의 눈이 금방 활짝 떠지나. 듣지 못하던 이, 말하지 못하던 이의 귀가 열리고 말하게 되나. 걷지 못하던 이가 걷게 되나.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라도 살려 내신 일들을 기억한다. 하나님은 오늘 날 처처에 광야처럼 살아가고 메마른 땅처럼 연명하며 사막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말씀하신다.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에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나 기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기쁨으로 즐겁게 찬양하는 그런 날, 그런 때를 경험하며 살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옛날 어느 농부가 집에 물을 길어다 먹는 물과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우물가에서 두 통의 물을 가득 담아 오고는 하였다. 그런데 그 두 통 중의 한 통은 새 통이라 물이 새지 않는데 낡은 통은 물이 줄줄 새는 통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새는 통의 물은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 새 통이 주인에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많은 물을 가득 실어 오는데 저 통은 언제나 절 반 이상의 물을 줄줄 흘려버리고 저게 뭡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인은 항상 물을 길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때마다 그 낡은 물통을 길 가 쪽에 싣고는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길가에는 날마다 그 물 통의 물을 흠뻑 받은 꽃길에 꽃이 화사하게 만발해 있었다. 

왜 내 인생만 이러냐고 불평하면 안 된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면 안 된다.
왜 내 인생만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고 메마른 땅과 같으냐고 원망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고 메마른 땅과 같은 내 인생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기쁜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하는 그런 아름다운 날을 예비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사람은 다 연약하다. 권력의 옷, 부요의 옷, 성공과 출세와 명예와 인기와 자랑의 옷을 입고 살아도 그 모든 인간의 영광의 들의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들어 버리듯이 사라져 버린다. 이 세상에 영원한 인간의 영광이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 인간이 손이 약해지고 무릎이 떨리기 시작하면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아무리 큰 소리 치던 장수라도 순간 약해지면 약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장수란 없다. 


다윗 임금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왕궁에서 피신 할 때의 장면을 보라. 왕이 왕의 화려한 옷을 입고 왕궁에 거하는 동안에 왕이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면 더 이상 왕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울면서 왕궁을 벗어나 피신하였다. 사무엘하 15장 30절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세상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우리를 구원하여야 하나. 본문 3-4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렇지 않나. 인간이란 겁나는 일이 생기면 그 누구라도 겁에 질리기 마련이다. 두려운 일이 생기면 그 누구라도 두렵기 마련이다.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무엇인가.  한자의 죽을 ‘사’(死)자를 보라. 세 가지 단어로 되어 있다. “한 일(一)자, 저녁 석(夕)자, 화살촉을 뜻하는 비(匕)자”의 종합이 죽을 사자이다. 죽음이란 어느 날 저녁 어두워진 시간에 화살이 날아들고 비수(匕首)가 날아 들 듯이 찾아온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약해지지 말고 떨지 말고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일까. 우리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신가. 우리의 딸리는 무릎을 굳게 할 수 있는 분이 누구신가.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우리의 하나님의 우리에게 찾아 와 주셔야 한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그렇다. 나의 하나님이 내 곁에 찾아 와 주셔야 한다. 그래야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가. 사람은 자기의 절대 권력이나 부나 국가적인 재물을 갖고라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새 옷을 입듯이 하나님이 덧입혀 주셔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이나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구한 힘이 군대의 힘이나 말과 병거의 힘이 결코 아니다. 물론 군대의 수가 많아야 한다. 말과 병거를 준비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애굽의 바로 왕의 군대와 말과 병거가 부족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가도록 놓친 것이 아니지 않나. 블레셋의 골리앗이 앞장 선 그 많은 군대가 어떻게 해서 소년 다윗 앞에서 두 손을 들었는가. 앗수르를 185,000명의 군대를 이른 아침에 송장 되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 엘리사 선지자의 때에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아람 나라의 군대가 먹을 것이 없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지 않나. 

4절을 다시 보라.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공동번역)
“say to those with fearful hearts, "Be strong, do not fear.)(NIV)

그렇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안, 두려움, 초조, 걱정, 근심, 염려, 좌절, 절망을 떨치고 굳세게 담대하게 용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어린이가 있었다. 그는 TV로 만화도 보고 간식도 먹고 주스도 마시고 주는 음식마다 받아먹고 잠도 쿨쿨 자며 먼 거리를 가고 있었다. 기내 방송이 나왔다. “난기류를 만나게 되어 비행기가 몹시 흔들리기 시작하니 안전벨트를 매라.”고 했다. 갑자기 비행기가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흔들렸다. 푹 떨어지기도 하였다. 여러 나라의 여행객들이 불안해하였다. 그런데 이 어린이는 소리를 지르며 신나 했다. “야 호” 두 손을 들고 마치도 무슨 놀이동산에 가서 공포 체험 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신이 나서 소리를 쳤다. 그 어린이가 왜 그랬을까.

그 어린이가 말했다. “이 비행기의 기장은 나의 아빠에요. 나는 아빠에게 미리 설명을 들었어요. 난기류를 만나면 비행기가 몹시 흔들릴 수 있다고 들었어요. 갑자기 비행기가 훅 떨어지는 그런 순간도 있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나는 무섭지 않아요. 나의 아빠가 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장이니까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믿음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탄절과 강림절은 바로 이런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고백하는 절기가 아닌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 말씀 바로 앞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나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구원 받고 영생하게 하시는 삶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하신다. 아멘


거룩한 길 가는 영원한 기쁨을 얻으리라.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 때에 거기에서 체험하고 누리게 될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을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삶을 살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 날도 가난하게 살고 열악하게 살아가는 나라에 가 보면 길이 형편없다. 1933년에 히틀러가 군사적인 목적으로 독일에 아우토반이란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이 고속도로가 전쟁 후에 독일 산업화에 요긴하게 쓰였다. 8절의 ‘대로’(大路)란 영어 성경에 보면 “highway"라고 했다. 고속도로가 아닌가. 우리나라에 고속도로가 처음 생긴 것은 1969년에 생긴 서울 인천 간의 29.5km 길이의 경인고속도로이다. 그 후에 경부 고속도로가 생겼다. 오늘 날은 전국 각처에 어딜 가나 얼마나 길이 좋은가. 그것이 대로이다. 

대로를 공동번역에서는 “크고 정결한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은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리라고 했다. 누가 그 길로 다닐 수 있는가. 

부정한 사람은 그리로 지나가지 못한다고 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서성거리지도 못하리라고 했다. 
사자가 얼씬도 못하고 맹수가 돌아다니지 못하는 길이라고 했다. 
구속(救贖) 받은 자 즉 구원 받은 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속량하신 사람 즉 죄 사함 받은 사람만이 이 길을 걸어 시온 산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이 즐거운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에선 영영한 희락이 활짝 피어나고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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