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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왕하7:1-2) 201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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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09-18 19:37 조회 19,891 댓글 0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왕하7:1-2)         2016. 9. 18



산헤립 왕이 보낸 아람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포위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성경은 그 기간이 얼마 동안이었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기간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몇 달이 지났는지 몇 해가 지났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전쟁의 참상이 극심하였다.

사마리아 성 안에 갇힌 채로 목숨을 연명하며 살아남은 자 중에 엘리사 선지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굶주리기는 왕도 마찬가지였고 선지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말에 ‘초근목피’(草根木皮)라는 말이 있다. 몹시도 찢어지게 가난하고 어렵고 흉년이 자주 들고 햇곡식이 나기 전에 식량은 떨어져 가고 하던 보릿고개 시절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이들이 있었다. 초근목피가 무엇인가.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란 뜻이 아닌가. 

우리가 어렸을 적에 간식이 귀하고 보리밥 먹고 나면 배고프고 하던 시절에 2월 말의 봄 방학 때에는 칡뿌리를 캐러 다니던 기억이 난다. 동네 털복숭아, 개 복숭아는 동네 아이들이 다 훑어 먹었다. 그 많던 싱아, 찔레도 다 먹었다. 연하게 자라나는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안에 달착찌근하고 떨떠름한 송기를 빨아 먹었다. 우리 집은 그렇게 가난한 집은 아니었는데도 동네 아이들과 산과 들에 몰려다니면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마리아 성 안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그 이상 심각하였다. 그래서 나귀 머리도 엄청난 돈을 주고 사서 먹었다. 심지어는 비둘기 똥도 돈을 주고 사서 먹는 지경이 되었다. 아이들을 삶아 먹는 엽기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배가 고프니 미쳐 버릴 정도가 된 것이다. 

먹을 것은 없고 돈만 있는 상태에서의 돈이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렇게 아람의 군대에 포위되어 지내던 어느 날 엘리사 선지자가 말하였다. 이는 그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해 주신 말씀을 전한 것뿐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선지자가 누구인가.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전하는 자들이다. 아브라함도 선지자였고 모세도 선지자였다. 다윗도 선지자였고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선지자였다. 세례 요한도 선지자였다. 예수 그리스도도 선지자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까지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임하지 아니하였다. 말라기는 주전 430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그 후로 400여 년 간 하나님은 이 땅에 선지자를 더 이상 세우지 않으셨다. 그 기간을 기독교역사에서는 “신구약중간기”라고 하고 혹은 ‘침묵기’라고도 한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페르시아 마지막 왕인 다리오 3세가 등극하기 바로 이전 해인 BC 336년에 그리스 마케도냐에서 20살 청년이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아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가 왕이 된지 3년 후인 주전 333년에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근동 지역의 판세를 바꾸어버렸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인도까지 쳐들어갔다. 불과 10년 만의 일이다. 알렉산더의 헬라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앗수르,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제국을 세워 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는 단순히 국경을 넘어서서 땅만 넓힌 것이 아니라 군대 속에 역사학자, 민속학자, 건축가, 동물학자, 식물학자, 지리학자, 광물학자, 수로학자(hydrographers)등을 포함시켰다. 알렉산더는 점령지 자국민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그 곳에 그리스 문화를 접목시켜 나갔다. 그렇게 건설된 도시들 중에 하나가 데가볼리, 알렉산드리아 등이다. 

알렉산더의 점령지 국민들은 그리스 말을 배웠다. 발전한 도로망과 헬라 말로 번역된 구약 성경은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런 신구약 중간기 즉 침묵기를 거치던 로마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전해지지 않던 긴긴 침묵기가 있었다.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셨는지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4장 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고 하였다.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목소리로 가득하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들리나 모른다. 특히 오늘 날은 통신과 방송의 황금시대이다. 과거에는 국영 라디오 방송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라디오, TV, 인터넷을 통한 방송의 홍수시대이다. 얼마나 세상에는 말, 말, 말로 가득한지 모른다. 

그러나 성도인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말뿐이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귀에 들려야만 한다. 내 영혼의 귀가 막히면 안 된다. 
엘리야 선지자나 엘리사 선지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저들은 한 결 같이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시는 말씀을 들어 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성도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있어야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선지자 엘리사는 아람 나라에 포위되어 사마리아 성 안에 갇혀 있는 왕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무슨 말씀을 전하였는가.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가.


경청(敬聽)하는 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주신 말씀은 “내일 이 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밀과 보리가 제법 싼 값에 매매될 것이다.”라는 말씀이셨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그 동안 돈을 가져도 먹을 식량을 구할 길이 없었다. 굶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마리아 성문 안의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이 소식은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 일이 벌어져야 했다. 

그 첫째는,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아람 나라 군대가 아무 조건 없이 철수해 버리는 길이다. 아니면 아람 나라의 왕 벤하닷이 명령을 내려서 사마리아 성곽 안에 일단 먹을거리를 풍성하게 공급해서 살려 놓고 전쟁하는 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선지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전하였다. “내일 이맘때쯤에 밀가루 값과 보리 값이 폭락해서 그런대로 싼 값에 식량을 사고파는 길이 열릴 것이다.”

열왕기하 7장 전체를 본문으로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이미 내용을 아시는 분들은 아시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아람 나라의 군대로 하여금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다.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군대가 접근해 오는 소리를 발하셔서 아람나라의 군대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드셨다. 그러므로 아람나라의 군대는 그 큰 군대가 접근하는 소리를 헷 사람의 왕과 애굽 사람의 왕이 연합해서 쳐들어오는 소리로 착각하였다. 이스라엘 왕이 밀사를 파견해서 상응한 값을 주고 저들 두 이웃 나라의 원조를 요청해서 쳐들어오는 소리라고 오판하게 되었다. 해 질 무렵에 그런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아람군대는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그 동안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긴긴 세월을 먹고 놀듯이 지내다 보니까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큰 군대가 몰려오는 병거 소리와 말 발자국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자 혼비백산하고 도망치게 되었다. 

하나님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내일 이 맘 때쯤에 사마리아 성문 앞에서 밀가루와 보리를 사고파는 매매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큰 군대의 소리를 발하셔서 아람 나라의 군대를 모조리 퇴각시켜 버리셨다. 

사마리아 성문 밖 어귀에서 피신하며 지내던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있었다. 저들은 이래도 굶어 죽고 저래도 굶어 죽느니 차라리 죽기를 각오하고 아람 나라 군대 진영에 가까이 가서 살려 달라 하고 먹을거리를 구하자고 합의하였다. 그런데 정작 아람 군대의 진영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저들의 진영이 텅텅 비고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사연인 즉은 하나님이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를 발하셔서 아람군대가 급하게 도망치도록 만드신 것이다. 아람 군대는 주둔지에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려두고 목숨만 건져 보겠다고 도망친 상태였다. 

목격자들은 나병에 걸린 채 가족들로부터 소외되어 굶주림 가운데 연명하며 살아가던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다. 그들은 엄청난 먹을거리와 금과 은과 의복들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신없이 배 불리 먹고 금과 은과 옷가지들을 가져다가 감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람 진영의 또 다른 곳에 가서 금과 은과 의복들을 가져다가 감추기를 계속하였다. 얼마를 그런 행동을 반복하던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 서로에게 말하였다. “오늘 아람군대가 퇴각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서 속히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지 않으면 내일은 우리에게 벌이 임할 것이다.” 저들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이 사실을 사마리아 성문지기들에게 가서 전하였다. 성 문지기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였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군대가 진영을 모두 그대로 내어 버려 둔 채 퇴각한 것은 필경 유인 작전을 벌인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사마리아 성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문 밖의 먼 들판으로 유인해서 죽이려는 유인작전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왕의 그런 설명을 듣고 있던 신하 한 사람이 나서서 의견을 내었다. 성 안에 아직 건장한 말 다섯 마리가 있으니 그 말들에 정탐꾼을 태워 아람 군대의 퇴각한 곳까지 뒤 쫓아 가서 정탐하게 하자고 하였다. 왕의 명령을 받은 정탐꾼들은 두 대의 병거를 다섯 마리의 말이 끌게 하고 아람 군대가 물러간 요단 강가까지 정탐해 보았다. 그런데 가는 길에 아람 군대가 퇴각하면서 급하게 떠나가느라 버리고 간 의복들과 병기들이 널려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리자 사마리아 성 안에 아람 군대가 퇴각한 사실이 금방 소문으로 퍼졌다. 그 동안 굶주려 죽은 자가 한 둘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 안에 갇혀 있던 굶주린 사마리아 성민들이 성 밖의 아람 군대 진영으로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아갔다. 사마리아 성민들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먹을거리를 구하게 되었다. 저들의 노략질은 전쟁을 방불케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먼저 많은 밀가루와 보리를 확보한 이들이 노략질한 밀가루를 팔고 사고 보리를 사고파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을 치르던 그 난리 통에도 여기저기서 틈틈이 물건을 사고파는 매매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16절을 보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디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었다. 1절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날이 온 것이다. “내일 이맘때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분주하게 살던 일주일의 생활을 마치고 주일이면 예배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듣고, 헌금을 드리는 봉헌생활하고, 성도의 교제를 하는 중에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신앙생활은 들어야만 하는 소리를 듣는 생활을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들려야 한다. 교회 와서 그냥 졸다가 가면 안 된다. 예배의 모든 순서 가운데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경청하여야만 한다. 경청이 무엇인가. 귀를 기울여 듣는 태도가 경청하는 태도이다. 들으면 듣고 말면 말고가 아니다. 반드시 나를 향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겠다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경청하는 태도이다.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 그 시대에 왕이라도 듣지 못하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그 때 그때마다 세상에 증거 하였다. 엘리야는 감히 아합 임금과 이세벨 앞에서도 할 말을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이다. 그 동안 대하여 온 대로 엘리사 선지자도 엘리야 선지자처럼 그 때 그 때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세상에 전파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선지자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여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태도이다.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미리 말씀하셨고 “내일 이 맘 때에” 하나님의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또 새로운 역사의 기적을 보여 주셨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순종하는 생활이다. 사사시대 말기에 엘리 제사장은 못 듣던 하나님의 음성을 사무엘은 들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은 그 밤에 어린 사무엘을 부르셔서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타락을 심판하시며 사무엘의 시대를 준비해 가셨다. “귀 있는 자는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주의 말씀을 경청할 때에 복이 임한다. 


비아냥거린 자가 받은 심판.
선지자 엘리사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자 왕의 곁에서 왕의 총애를 받던 장관 한 사람이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이 말은 노아 때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사십 주야 홍수가 내린 것을 말할 때에 사용된 표현이다.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 문을 열고 밀과 보리를 이 땅에 내리신들 어찌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겠느냐”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그 장관은 두 가지 죄를 범하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쓰시는 엘리사 선지자를 불신한 죄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무시한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성신으로 충만케 하셔서 기적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엘리사 선지자는 자신을 조롱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계획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린  장관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열왕기하 7장의 마지막 절은 20절인데 안타깝게도 그 마지막 절은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비아냥거린 그 장관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으니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비참한 심판의 죽음인가. 어느 시대에 어디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비아냥거리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앞에 잠잠하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그 입의 권세에 달려 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면 그 주어지는 권세가 대단하다. 대통령은 판단과 결정을 말로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국가 경영의 각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이다. 대통령이 직접 잠수함이나 군함을 직접 운행하고 B-1B와 같은 최첨단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 아니다. 대통령이 직접 핵폭탄을 연구하여 제조하고 사용하는 것 아니다. 단지 대통령은 현명한 판단과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통해서 시기적절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통령이 말하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움직인다. 정상적으로 대통령의 권위가 세워진 국가라면 그렇다. 

성도의 말도 그런 것이다. 이스라엘, 사마리아 도성, 그 당시에 아람 나라 군대가 장기적으로 성을 포위하고 있던 비상시국에 기도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에 왕의 장관은 신중하게 반응하여야 했다. 그가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장관이었다면 “아하! 드디어 하나님께서 우리 북 왕국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새로운 기적을 펼쳐 주시려나 보다”하고 “아멘 할렐루야” 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겸손하게 말하였어야 했다. 그런데 왕의 총애를 받던 그 장관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발언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은 선지자 엘리사의 마음도 몹시 상하게 하고 말았다. 엘리사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이 아람 나라의 군대를 큰 군대의 소리를 발하셔서 퇴각 시키신 후에 벌어진 사마리아 성에서의 밀가루와 보리 매매의 현장을 보긴 보았지만 그 풍성한 곡식을 먹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심판의 장면인가. 

말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 말이 곧 그 사람이다. 우리 교회는 아직 그렇게 큰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한 말이 저기서 들리고 저기서 한 말이 여기서 들린다. 교회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 교회의 구성원들과 임원들은 특히 말조심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말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 시간의 말이든 평상시의 말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말 속에 나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장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사람은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와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말을 배운다. 그냥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과 이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말을 통해서 배운다. 주 안에서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그런 말의 열매를 얻게 된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그 말이 씨가 되어 불행해지고 만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말로 창조하셨다. 사람에게도 그 하는 말에 창조의 능력이 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현실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말한 말들의 열매이며 결과이다. 앞날의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지금 쓰는 나의 말이 나의 장래를 결정한다. 말이 곧 그 사람이다. 천한 말을 자주 하면 그 사람이 천해진다. 그러나 품위 있고 귀한 말을 하면 그 사람 자신이 품위 있게 되고 귀해지게 된다. 

상대방과 환경을 축복하는 말을 하며 살면 나 자신이 축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방이나 환경을 저주하거나 비판하며 살면 그 저주와 그 비판이 결국은 나 자신에게 다 되돌아오고 만다. 그러므로 말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바로 그런 내용 아닌가. 

말의 힘은 불이니 물의 힘보다 더 크다. 불이 나면 재산이 타 버린다. 물난리가 나면 재산이 떠내려간다. 재물과 재산은 다시 벌고 모으면 된다. 그러나 말의 상처는 평생갈 수도 있다. 말(言)한대로 이루어진다.(成) 그러므로 매사에 정성(精誠)스럽게 성실(誠實)한 말을 해야 한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말을 제대로 잘 할 수 있을까하고 거금을 들여서 “스피치학원”에 다니는 이들도 있지 않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으셨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한 마디의 말씀으로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나온 채 돌에 맞아 죽을 위기 처한 한 여인을 위험한 환경에서 구해 내셨다. 그리고 그 현장에 돌을 들었던 남자들은 모두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고 그 현장을 떠나 버리게 만드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원망의 말이나 불평의 말 대신에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세 때의 광야 백성들을 보라. 모세와 아론 앞에 불평하던 자들이 다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세에게 한 말을 하나님도 들으셨다고 했다. 


말씀과 성취.
말에는 성취 능력이 있다. 누에나 벌레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사람은 말의 집 안에서 사는 것이다. 아파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파트에서 산다. 마당이 있는 개인 주택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때가 되면 그런 집에서 산다. 농촌 생활이 좋다고 늘 말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런 전원주택 환경에서 살게 된다. 이처럼 말에는 창조의 능력, 성취의 힘이 있다. 인간에게 말을 선물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 말할 줄 아는 동물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말을 하며 산다. 하나님은 말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매 빛이 생겼다. 하나님은 그 모든 날마다의 창조를 좋게 보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그렇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중에서 아름답지 않고 좋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이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 공간에서 인간이 타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좋고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여 선물로 주셨다. 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하는 좋은 기능을 선물해 주셨다. 우리는 이 말로 기도하고 말로 찬송하고 말로 설교하고 말로 대화하고 말로 아들딸을 가르치고 말로 사랑을 나누고 말로 칭찬하고 말로 감사하고 말로 격려하고 말로 용서하고 말로 용기를 주고 말로 화해하고 말로 꿈을 나누고 말로 계약하고 말로 백년가약을 맺고 말로 축복한다. 이처럼 말은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 모른다. 상상하여 보라. 말이 없는 세상을. 사마리아 성민이 다 죽어 가고 있었다. 굶주리면 연명하기는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에 엘리사 선지자도 사마리아 성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런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말씀하셨다. “내일 이맘때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니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이룩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아버지이시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가족 혹은 자녀들에 대하여도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에 보면 미리암의 노래가 나온다. 하나님은 미리암의 남동생 모세를 앞장 세우서서 43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주셨다. 홍해는 갈라졌고 그 안으로 육지를 건너게 되었다. 하나님이 홍해의 물 줄기를 갈라서게 하셔서 홍해의 바닥이 드러나게 하셨다. 젖 먹이를 뺀 장정만도 60만이었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가 심히 많았다. 그 뒤를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는 모두 다 홍해 물 가운데 수장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 역사의 현장을 경험한 미리암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21)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반복하여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그 다음 날 이 맘 때에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발하셔서 아람 군대를 모조리 내 쫓아 주셨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성 밖에서 고생스럽게 연명하며 살던 네 사람의 나병 환자들로 하여금 그 아름다운 승리의 소식을 성문지기에게 전했고 성문지기는 임금에게 알렸다. 순식간에 성 안에서 굶주리던 백성들은 배불리 먹을 것이 생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비아냥거리던 왕의 총애를 받던 장관은 백성들이 발로 밟아 죽이고 말았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겸손하게 살아가자. 성경을 다시 보자. 
16절 끝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17절 끝에 보면, “그가 말한대로라.”
20절에는,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 중에서 살아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말조심하며 살자.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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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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