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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왕하4:8-17) 2016.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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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06-13 22:35 조회 21,051 댓글 0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왕하4:8-17)        2016. 6. 12



KBS 1 채널에서 매주 수요일 밤 10시에 방영하는 의학상식 프로그램 중에 <생로병사의 비밀>이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100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3살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평균 수명이 78살이다. 한국 여성의 기대 수명은 83.8세이다. 반면에 남성의 기대 수명은 76.8세이다. 장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 해라도 더 살려면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날마다 7-8시간씩 자라, 아침 식사를 반드시 하라, 가능하면 간식을 피하라,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라, 매주 3일 정도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 술과 담배를 피하라.” 이와 같은 원칙이 건강하게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오늘 날과 같은 의학의 발전은 앞으로 평균 수명이 120살에서 150살로 늘어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무엇인가. 열왕기 하 4장의 8절부터 37절까지에는 그야말로 생로병사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수넴 여인의 남편은 늙었고 자녀가 없었다. 8절에 그녀를 ‘귀한 여인’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재물도 많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는 ‘귀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연세가 꽤 들어가도록 자녀가 없었다. 그런 이 가정의 소원을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그 가정에 아들을 주셨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서 추수하는 때에 들판에 나갔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며 급하게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그 죽었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다. 

물론 세월이 지난 후에는 그 부모도 세상을 떠나고 그 다시 살아난 아들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선지자 엘리사도 그의 사환 게하시도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가야 만 한다. 생로병사는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 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물론 의학의 도움을 받아서 수명을 연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하루하루, 순간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각 사람이 누리는 일상의 행복이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자녀의 탄생이 아닌가. 아들이든 딸이든 부모가 원한다고 해서 낳을 수 있는가. 성경은 생명의 탄생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90세 된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았다. 하나님이 그 나이에 선물로 주신 아들이 이삭이다. 사사시대에, 엘리 제사장의 때에 한나가 실로의 성막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낳았다. 하나님이 한나에게 그의 남편 엘가나를 통하여 아들 사무엘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사갸랴 대제사장과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통한 세례 요한의 탄생도 그러하지 않나. 당시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연세가 많았다. 이처럼 젊든 늙든 자녀의 탄생은 부모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나라 여성들 중에서 최고령 출산은 지난 2011년 11월 21일이다. 서울 아산 병원에서 시험관 아기를 임신하여 55살된 산모가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3.2kg의 여자아기를 낳았다. 올해 5월 10일에 인도에서 70세 여성이 출산을 하였다. 인도 북부 의 70대 초반 여성이 2년에 걸친 시험관 시술 끝에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79세로 부부는 46년 동안 혼인생활을 해왔지만 자녀가 없었다. 약 2kg으로 태어난 아기는 건강하고 튼튼하다고 한다. 아기를 안고 있는 저들 부부의 모습은 이삭을 낳던 때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 때를 상상하게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들이 요즘처럼 전쟁, 테러, 교통사고, 전염병, 각종 질병과 사고와 사건이 많은 세상에서 70-80년을 살고 그 이상을 살아가려면 별의 별 일을 다 겪어야 하고 이겨 내야만 한다. 기독교 방송인데도 라디오에서 이런 노래가 흘려 나오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애란이란 이름의 가수가 부르는 그 노래의 제목이 <100세인생>이란다. 이런 가사다.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간다고 전해라...
7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간다고 전해라......
8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간다고 전해라.......
9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말라 전해라...........
10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런 노래를 자주 부른다고 100세까지 살 수 있을까. 생명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온 국민이 다 알던 건강 박사인 장로 황수관(1945-2012)박사도 67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참으로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이란 것이다. 

8절에 나오는 지명인 ‘수넴’은 오늘 날 이스라엘의 ‘솔람’(solam)이란 곳이다. 헐몬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엘리사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사마리아로 가려면 반드시 이 마을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 마을에 귀한 여인이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저들 부부의 나이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14절에 보면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하는 말씀을 보면 연세가 적지 않은 부부였던 것 같다. 재산도 넉넉하고 인품도 좋아서 ‘귀한 여인’이라고 알려진 그 부인은 그 마을을 지나다니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를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집안에 모셔 들이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하고는 하였다. 엘리사가 그 마을을 지나가던 어느 날도 여전히 그 귀한 여인은 엘리사와 사환 게하시를 집안에 모셔 들이고 풍성한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자주 대하다 보면 그 상대방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이나 실망스러운 점이 발견되는 법인데 늘 대하는 엘리사 선지자이지만 엘리사에 대한 수넴 여인과 그의 남편이 가지고 있는 인상은 남달랐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왕하4:9)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엘리사는 그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란 인상을 남겼다. 그런 엘리사를 위하여 수넴 여인은 남편과 의논하였다. 그리고 늘 먼 길을 오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국가적이고 시대적인 선지자 엘리사를 위하여 그가 묵을 처소를 마련해 드리자고 제안한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제안을 좋게 여겼고 담 위에 마련된 방에다가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마련해 드렸다. 

고맙고 감사하게 받아들인 엘리사 선지자는 사환 게하시와 함께 그 마을을 지날 때마다 묵어가고는 하였다. 본문은 그런 어느 날의 일화를 담고 있다. 본문의 주는 교훈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해 보자. 


세심한 배려.
수넴 여인의 집에 누워 하룻밤을 지내게 된 선지자 엘리사는 늘 그와 동행하던 사환 게하시를 통해서 그 집의 여 주인인 수넴 여인을 가까이 불러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길 원하였다. 사환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의 그런 뜻을 전하였고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왔다.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를 통해서 안부를 전하였다. 이런 대화 모습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다운 신중한 처세인 것을 알게 해 주는 장면이다.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왕하4:13) 사실 엘리사 선지자는 엘리야처럼 왕을 상대하는 국가적인 선지자였다. 엘리사는 너무나도 수넴 여인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 나머지 혹시 왕에게나 군 사령관에게라도 부탁해서 무슨 특별한 도움을 받을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실로 선지자 엘리사의 국가적인 입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열왕기하 6장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 엘리사 선지자를 향하여 “내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런 엘리사 선지자였지만 한편으로는 갈멜산에서 사마리아 성을 오가던 길에 수넴 마을에서 수넴 여인의 가정을 통하여 늘 따뜻하게 섬김을 받고 배려 받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엘리사는 항상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지냈다. 

사람은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상대방을 통하여 섬세하게 배려 받을 때에 기분 나빠할 사람이란 없다. 누구나 진심이 담긴 따뜻한 환대를 받을 때에 누구나 다 좋아 한다. 

나 자신도 5층 사무실에 다녀가는 손님을 경우에 따라서는 문 앞에서 배웅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1층 주차장에 까지 배웅하고 상대방이 차를 타고 주차장을 벗어나서 멀리 출발해 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가면서 정중하게 배웅할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구파발 지하철역까지 모시러 가거나 혹은 모셔다 드리는 경우도 있다. 혹은 점심을 대접하거나 저녁 식사를 대접하여 더욱 정중한 예절로 모시고 배웅해 드리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일은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 해 드릴 때에나 혹은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그런 세심한 배려를 받을 때에나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 소설이 아닌 분야에서 책을 써서 100만부 이상을 팔리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만큼 독서 인구 시장이 좁다. 그런데 한상복의 <배려>라는 제목의 책이 그 선을 뛰어 넘는 밀리언셀러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저자 한상복은 우리나라의 명문고, 명문대를 졸업하고 신문기자 생활 12년을 하다가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책, <배려>는 우화집이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위'는 수석으로 입사하여 회사 내에서 고속 승진을 계속하던 인물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리대상으로 지목받는 프로젝트 1팀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혼란에 빠진다. 거기다 그를 못 견뎌하며 집을 나간 아내는 이혼서류를 보내온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야. 이건 너무 부당해...”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혼란스런 상황 앞에서 ‘위’는 과연 어떻게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발견한 것인가? 늘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11층에서 만난 '인도자'가 그에게 준 카드의 키워드가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불어 이웃과 함께 행복한 세상을 가꾸어 가는 ‘배려’(配慮)의 삶”을 말한다. 배려하는 마음이란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길을 걸으면서 상대방을 위하여 등불을 들고 가는 마음이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대 낮에 뙤약볕 아래서 어딘가를 향하여 가고 있는 낯 설은 세 사람에 대하여 배려하는 장면이 소개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그 낯 설은 세 사람의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하여 고운 가루로 떡을 굽게 하고 친히 소 떼 곁으로 가서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 왔다. 그리고 아내를 앞장 세워서 송아지 요리를 해서 손님들을 대접하였다.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따뜻하게 환대를 받던 나그네 세 사람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를 축복하는 말을 하였다. “네 아내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는 이 말을 듣고 웃었다. 그 때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금방 일 년 세월이 흘러갔고 아브라함의 가정에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는 장면은 창세기 21장에 나온다. 창세기 21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 그렇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때가 되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들 이삭을 낳아 품에 안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

이 얼마나 귀하고 감동적인 체험의 고백인가. 

이런 장면은 신구약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사울의 아들이었던 왕자 요나단이 그랬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언제 대하여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그런 다윗이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왕궁을 벗어나서 신도 제대로 못 신은 채로 왕궁을 내어 주고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무엘 하 15장 30절에 보면 다윗 왕은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가렸다. 왕은 맨발이었고 울며 걸어가고 있었다. 왕의 곁에 함께 가던 백성들도 모두 다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왕을 따라 가고 있었다. 

다윗 왕의 피신 길에 음흉한 간계를 꾸며 가며 다윗의 마음을 사려고 했던 무비보셋의 종 ‘시바’ 같은 자도 있었다. 무비보셋이 누구인가. 세상을 떠난 사울 왕의 손자이며 왕자 요나단의 아들로 사울의 불구였던 왕세손이다. 다윗의 배려로 왕세손의 지위를 누리며 살던 무비보셋의 곁에서 그를 돌보던 자가 ‘시바’이다. 그는 원래 사울 왕의 종이었다. 그런 그가 아들 압살롬에게 모반을 당하여 피신 길에 있는 다윗을 찾아 와서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았다. 그 장면 자체로 하면 얼마나 감동적인가. 그런데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이다. 시바는 지금은 다윗 왕이 피신 중이지만 때가 되면 정세가 뒤 바뀌어 다시 다윗이 왕직에 복귀하게 될 것을 알아차렸다. 그 때를 위하여 대단히 정략적인 처세로 그리 한 것이었다. 순수하지 않은 섬김이었다. 사무엘 하 16장 서두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어서 ‘시무이’라는 자가 나서서 다윗 왕을 저주하는 장면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 길에 있는 약해져 있는 임금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장면도 있다. 다윗이 여전히 압살롬의 세력에게 쫓기고 피신하면서 마하나임 지역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그 곳에서 ‘소바와 마길과 바르실래’를 만났다. 저들은 마음을 합하여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다.”(삼하17:28) 세월은 흘러갔고 다윗의 고난의 시대도 끝났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임을 당한 슬픔을 가슴에 묻고 다시 왕위에 복귀하였다. 그 후에 다윗은 자신의 피난길을 선대하던 바르실래에게 은혜 갚을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그 당시 바르실래의 연세는 80이었다. 바르실래는 자신의 아들 ‘김함’이나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실로 다윗은 바르실래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임금 다윗은 평생토록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을 챙겼다. 나중 열왕기상 2장에 보면 다윗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때 다윗은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을 솔로몬에게까지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라” 이것이 임종 직전에 다윗이 남긴 유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바르실래와 다윗, 다윗과 바르실래’ 저들의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는 평생을 갔고 다음 대에까지 이어졌다. 사무엘 하 19장 30절에 보면 바르실래는 큰 부자였다. 

누가복음 8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때에도 그러하였다. 예수님을 인해서 일곱 귀신이 나갔고 새 삶을 되찾은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를 비롯한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선교 활동을 돕고 섬겼다. 

저도 목회하면서 성도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세심한 배려’를 과분하게 받을 때가 있다. 그 모든 일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여 저들이 행한대로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하고 말이다. 본문 13절의 “세심한 배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기적을 낳는 곡식의 종자와 같고 과일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이 말은 엘리사 개인의 그 어떤 권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이런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것에 대하여 너를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랴”하는 제안이다. 선지자 엘리사는 자신에게 항상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던 수넴의 여인 부부에 대하여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을 하고는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그의 집에 머무는 기회에 수넴 여인을 불러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이는 엘리사 개인의 질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며 시대적인 선지자였던 엘리사에게 늘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던 수넴 여인을 향한 질문이셨다. 그러나 수넴 여인의 대답은 대단히 일상적이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이 대답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 내외는 왕의 특혜나 사령관의 그 어떤 특별한 도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재산도 있을 만큼 있고 마을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며 귀히 여김을 받고 존경도 받을 만큼 받으며 이웃과 다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선지자 엘리사 선생님을 대접한 것이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하기에 늘 그렇게 한 것 뿐입니다. 앞으로도 저희 마을에 오실 때마다 저희 집에 묵으시고 저희 부부의 환대를 기쁘게 받아 주시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 뭐 이런 뜻의 대답을 한 것이다. 그 때에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가 나서서 한 마디 거들었다.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그 때 엘리사 선지자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수넴 여인을 다시 부르라고 하였다. 게하시가 수넴 여인을 다시 불러 왔을 때에 엘리사가 말하였다.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 
엘리사 선지자로부터 일 년 후에 네 가정에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축복의 말을 들은 수넴 여인은 깜짝 놀라며 대답하였다.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시간은 흘러갔고 수넴 여인은 태기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한 달 두 달 세월이 흘러  갔고 수넴 여인은 일 년 후에 건강한 아들을 낳아 품에 안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전능자이시다. 인간의 모든 불가능이 하나님께는 모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편에서 기적이지 하나님의 편에서는 일상일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못 하실 일이란 없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찾아 온 한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요청하였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다 나오는 내용이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그에게 해 주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은 그 아버지가 믿음의 말로 말을 바꾸어 소리 질러 말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 후에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 들린 아들 안에 있는 귀신을 꾸짖으셨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 말씀을 하실 때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다.  그 후에 그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었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일어서서 걸어서 제 집으로 들어갔다. 그 때에 제자들이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기도하는 여름이 되길 바란다. 기도하는 6월이 되길 바란다. 기도하면서 7월을 맞고 헐몬산 기도회에 열흘간 부르짖어 기도하여 기적을 체험하는 응답이 넘치는 기도의 나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무엘 상 12장 23절에 나오는 이와 같은 사무엘의 고백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언으로 남긴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아멜렉과 전쟁하게 되었다. 모세는 지팡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모세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군대와 함께 나가서 싸우기 시작하였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전쟁에 이기고 내려 가면 전쟁에 지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모세의 손이 점점 피곤해 져서 내려갔다. 그 때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그 위에 모세로 하여금 앉아 기도하게 하였다. 모세의 치켜 든 손을 아론과 훌이 양편에서 잡고 함께 쳐들고 기도하였다. 세 사람의 맞잡은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여호수아의 군대는 전쟁을 승리로 마쳤다. 

하나님은 이 전쟁 후에 모세에게 전쟁의 승리담을 책에 써서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지도록 들려주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인가. 하나님은 있게도 하시며 없게도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기도 하시고 소멸하시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새옹지마의 교훈처럼 이 가정에 태어난 아들이 추수철에 아버지를 따라 들판에 나갔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얼마나 몹시 아팠던지 “내 머리야 내 머리야”하고 심한 두통을 호소하였다. 급하게 집으로 데려온 아들이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죽은 아들의 시체를 엘리사가 사용하는 방의 침상에 뉘워 놓고 수넴 여인은 종을 앞장 세우고 나귀를 타고 갈멜 산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나섰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어린 아들이 죽은 소식을 듣고 사환 게하시에게 자기의 지팡이를 갖고 어서 달려서가 그 죽은 아들의 얼굴에 올려놓으라고 하였다. 앞서 달려간 사환 게하시가 엘리사의 지시대로 하였으나 죽은 아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뒤를 따라 도착한 엘리사 선지자는 방문을 닫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왕하 4:33) 그리고 침상에 뉘어 있는 아이의 시체 위에 엎드려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맞대었다. 그러자 식었던 아이의 몸이 차차 따뜻해지기 시작하였다. 엘리사는 침상에서 일어나서 집 안을 이리 저리 다니다가 다시 한 번 아이의 시체 위에 몸을 엎드렸다. 그러자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더니 눈을 떴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이런 방법을 그대로 실험해 보는 가족이 없기를 바란다.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를 통해서 이 사실을 수넴 여인에게 알렸다. 수넴 여인은 살아난 아들을 받아 안고 엘리사의 발 앞에 엎드려서 잘을 하며 기뻐하였다. 엘리사 때에 죽었던 수넴 여인의 어린 아들을 살려 주신 하나님의 기적은 마치도 엘리야 때의 일화와 비슷하다. 열왕기 상 17장에 나오는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아들을 다시 살게 한 장면처럼 말이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공통점은 죽음 앞에서도 기도하였다는 점이다.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의 시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 대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그 죽은 아들의 생명을 다시 살려 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서 살아간다. 죽음 직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기도이다.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신다. 살아 있는 날마다의 일상도 기도여야 하고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기도여야 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 들이셨다. 예수님도 기도하셨으나 죽으셨다. 붙잡혀 옷 벗기는 무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다 당하시고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며 조롱하는 무리들 앞에서 온갖 조롱과 모멸을 다 당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 가셨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아니면 나중에는 지쳐서 더 이상 십자가를 메고 갈수조차 없으셨다. 그렇게 처첨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의 묘실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살아 나셨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피할 수 있는 용사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하늘로 들려 올림을 받았다. 성경 역사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간 인생은 에녹과 엘리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노아도 죽었고 아브라함도 죽었고 모세도 죽었고 다윗도 죽었고 솔로몬도 죽었고 엘리사도 죽었다. 세례 요한도 죽었고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도 죽었다. 사도 바울도 죽었고 바나바도 디모데도 죽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그 많던 왕들도 죽었고, 방백도 죽었고 부자도 죽었다. 열왕기 하 4장은 수넴 여인이 그 남편으로 인하여 연세 많을 때에 낳은  한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인생의 탄생과 병과 죽음과 다시 사는 부활이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교훈하는 말씀을 담고 있다. 

죽음을 이기는 힘은 영생이다. 사망을 이기는 힘은 주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이다. 주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 하루를 살아도 주 안에서 행복자로 살자.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자. 죽은 나사로의 누이 동생인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공부를 잘 했든 못 했든, 공부를 많이 했든 조금 했든, 가난하든 부하든, 건강하든 병약하든, 출세하였든 그렇지 못하든, 성공하였든 실패하였든, 권력이 있든 없든, 힘이 있든 없든 모든 인생은 다 죽는다. 

이 분명한 진리를 깨닫고 죄 사함과 회개와 영생의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붙들 줄 알아야 영원히 승리하는 인생을 사는 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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