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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1-14) 2016. 5. 15 성령강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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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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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5-15 21:04 조회 20,729 댓글 0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1-14)         2016. 5. 15  성령강림주일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분부와 약속은 성령에 관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1장 5절에 보면, “요한을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라.”고 하셨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중에 열흘 째 되는 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120여명의 기도하던 이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 현상이었다. 이 성령 충만의 경험은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과  그 곳에서 성령 체험한 이들에 의하여 불길처럼 번져 가기 시작했다. 환난과 핍박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은 오히려 복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번져 나가는 불길과 같은 증거를 보였다. 130년 전에 아펜셀러 부부와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왔다. 저들이 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작은 나라에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조선 땅에 찾아 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힘은 성령의 능력이었다.

‘성령의 세례’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경험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란 예수 안에서 거듭난 성도가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여 기도하는데 힘써야 한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분부였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한 자리에 모여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의 세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이 대답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다른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돈 많이 벌어라, 공부 잘해라, 성공해라, 출세해라, 권력을 잡아라, 한 자리 해라, 외모를 잘 가꾸어라, 그런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해야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이는 “성령 받고 권능 받아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라.”햐는 것이 예수님의 승천 직전의 마지막 분부였다. 이는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에도 미리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

예수님의 마지막 기대와 분부는 이것이다. 먼저 성령 받은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 성령 세례를 받도록 복음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는 일에 매진하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예배당 건축된 것으로 만족해 하지 말고 성령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기도 하던 중에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 베드로와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여러 여인들과 예수님의 아우들을 비롯한 120명이 초대 교회 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데 힘써야 한다. 주일 예배 드리는 것으로 만족 해 하면 안 된다. 날마다 예배,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데 힘써야 한다. 매 순간 기도와 성령 충만에 힘써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도 제 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던 40대 남성을 고쳐 일으켜 세웠다. 기도 할 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교회에 다시 기도 불이 붙기를 소원한다. 새벽 기도, 수요 기도회, 금요 기도회 등 모든 기도의 시간과 예배의 시간에 모이기를 힘쓰는 기도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언제 자는지, 언제 살림 하는지, 언제 학교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직장 가고, 언제 사업하고, 언제 장사하는지 모를 정도로 날마다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와 예배에 힘 써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성령은 바람과 같은 성령, 불과 같은 성령, 물과 같은 성령, 비둘기와 같은 성령, 기름과 같은 성령이라고 한다. 이는 다 현상이며 설명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내 영 안에 충만해 지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으로 인해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듯이 성령에 충만해 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오직 성령 중심의 삶을 산다. 성령 안에서 바빠지고 성령 안에서 분주해 진다. 성령 안에서 생각하고 성령 안에서 모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성령 받고 나면 성령 받기 이전에 즐겨 하던 모든 세상적인 습관들을 끓어 버리게 된다. 성령은 도우시는 영, 즉 보ㅎ혜사의 영이시다. 성령은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영이시다. 성령 받으면 기쁨과 감사와 소망과 즐거움과 만족과 은혜와 헌신과 순결과 변화와 결단과 승리의 삶을 영원히 살게 된다.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 안에서 성령 충만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영원한 승리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잠을 자고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영적으로 게으르고 영적으로 주저앉아 있는 분들이 모두 다 에스겔의 환상처럼 마른 뼈가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듯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계속하여 함께 묵상하려고 한다. 엘리야는 아합 임금 시대의 바알 숭배로 인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변질에 맞서서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증거하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갈멜산의 기도 응답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아합 임금과 왕후 이세벨이 앞장 서며 전국에서 불러 모았던 바알 숭배자 450명을 그릿 시냇가에서 처단할 수 있었던 것도 엘리야를 앞장 세워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왕후 이세벨은 아합을 죽이겠다고 나섰고 이 소식을 알게 된 엘리야는 브엘세바의 먼 길을 피신하여 로뎀 나무 아래 지쳐 잠이 들어 있었다. 그를 어루 만져 깨우고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천사의 방문이었다. 하나님의 천사는 두 번이나 계속하여 브엘세바 광야에 지쳐 잠들어 있던 엘리야를 어루만져 깨우시며 떡을 먹게 하시고 물을 마시도록 해 주셨다. 다시 힘을 얻은 엘리야는 40일 밤과 낮을 걸어서 호렙산의 동굴에 숨어 지냈다. 하나님은 그 곳, 호렙 산 동굴 입구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불러 내셨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하여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대를 이을 선지자 엘리사에게도 기름을 붓게 하실 것이라고 사명을 언급하셨다.

열왕기 상 20장부터 22장까지의 장면에는 아합 왕의 때에 아람 나라가 쳐들어 왔으나 그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여호와가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신 것을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심으로 보여 주셨다. 그러나 여전히 아합 임금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합 임금은 아람 나라의 왕 벳하닷을 죽일 기회가 왔음에도 다시 조약을 맺을 뿐 그를 살려 주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전쟁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어야 함에도 아합은 여전히 교만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아합과 이세벨은 이스르엘의 나보이 조상 때부터 물려받아 농사하던 아름다운 포도밭을 강제로 빼앗는 등 악행을 계속하였다. 이세벨은 불량배를 두 명 동원하여 나봇을 위협하였다. 결국 그 두 명의 불량배들은 나봇을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였다. 아합 임금과 그의 부인 이세벨의 악은 점점 더 극심해져 갔다. 

그러하던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선지자 엘리야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러 가는 아합 임금을 가서 만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 임금과 그의 악한 처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를 예언하게 하셨다. 아합도 악했지만 이세벨은 더욱 심각하였다. 악행하는 임금 아합의 곁에서 남편을 충동질하던 왕비가 이세벨이었다.(왕상21:25) 아합의 우상 숭배는 심히 가증하였다. 웬일인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저들 부부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전해들은 아합 임금은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녔다.(왕상21:27) 그러나 세월이 지나는 몇해 동안 여전히 아합과 이세벨은 진정으로 회개 하지 않았다. 다시 아람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열왕기 상 22장은 아합과 이세벨의 비참한 죽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아하시야도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처럼 바알을 섬기고 바알에 예배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노하시게 하였다. 열왕기 상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의 그와 같은 악행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합 왕이 죽자 이웃 나라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 아합의 아들인 새로운 왕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왕궁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었다. 아하시야는 사자들을 보내서 에그론의 우상인 바알세붑에게 자기의 병이 낫겠는지 묻고 오라고 보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정황을 아시고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말씀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리고 하나님은 아하시야 임금이 병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셨다. 

엘리야 선지자를 통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아하시야 왕은 오십 부장과 군사 50명을 동원하여 엘리야 선지자에게 보냈다. 오십부장과 군대가 엘리야를 찾아가서 보니 엘리야 선지자는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저들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 오라 하셨나이다.”하고 말했다. 그 때에 엘리야는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너희를 태울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 시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오십 부장과 50명의 군대를 불살랐다. 이 소식을 들은 아하시야 왕은 다시 새롭게 또 다른 오십부장과 50명의 군대를 보냈다. 하나님은 엘리야 앞에서 엘리야의 말처럼 불을 내리셔서 오십부장과 50명의 군대를 불태우셨다. 왕은 물러 서지 않고 세 번 때로 다시 새로운 오십 부장과 50명의 군대를 보냈다. 엘리야 앞에 도착한 오십부장은 엘리야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다. 엘리야는 저들을 따라서 왕 앞에 나아가 직접 듣도록 예언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에그론의 우상인 바알세붑을 의지한 왕의 목숨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고 전했다. 결국 아하시야 왕은 왕이 된지 2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 배경 가운데 엘리야 선지자가 이 세상에서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이다. 엘리야는 창세기 5장의 에녹과 함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또 다른 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 올리셨다. 엘리야의 마지막과 아합이나 이세벨이나 아하시야의 죽음을 극명하게 비교하여 보게 하는 장면이 열왕기 상의 끝과 열왕기 하의 시작에 담긴 내용이다. 
열두 겨리 소를 앞장세우고 밭을 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는 항상 엘리야의 곁을 지키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가 가는 곳마다 그의 곁에 있었다.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 강 그 어디를 가든지 엘리사는 엘리야의 곁을 그림자와 같이 지키고 있었다. 엘리야는 그의 제자 50명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겉옷을 가지고 말아 요단 강 물을 쳤다. 그러자 물이 일리 저리로 갈라지고 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강의 마른 땅 위를 건너서 갔다.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넌 엘리야는 곁에 서 있는 엘리사에게 물었다. “나를 네게서 데려 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그 때에 엘리사가 대답하였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하고 대답하였다. 그렇다.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엘리야가 아니다. 엘리야는 이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대화하고 있을 그 때에 불 수레와 불 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다. 
이 감격스러운 현장을 목격한 엘리사는 큰 소리를 질렀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엘리야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었다. 엘리사가 그 순간에 옷을 찢은 것은 그 순간의 충격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가를 말하는 장면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요단 언덕에 섰다. 엘리사가 엘리야 선지자의 그 겉옷을 가지고 요단 강물을 치며 말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계시니이까” 엘리야의 때처럼 요단 물이 이리 저리 갈라졌다. 엘리사는 그 갈라진 요단 강 바닥을 건너서 맞은편의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 곁으로 다가 갔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동행.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를 만난 후에 언제나 엘리야의 곁에 있었다. 본문의 1절에서 7절까지의 내용이 그와 같은 일상의 장면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1절의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라고 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 오면 스스로 예견하는 경우가 대개라고 하지 않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오는 것을 스스로 예감한다. 엘리야도 그랬다. 본문에는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 강 이런 지명들이 소개된다. 그 곳들은 엘리야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곁으로 들려 올림을 받기 전에 방문하였던 곳들이다. 길갈은 여호수아 때에 요단강을 건넌 후에 12 기념돌을 세우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증거 한 곳이다. 벧엘은 야곱에 돌베개를 세우고 기름을 부으며 여호와의 성전을 세우고 싶어 하던 곳이다.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때에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칼과 창을 사용하지 않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신 곳이기도 하다. 엘리야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런 엘리야의 곁을 졸졸 따라 붙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제발 그만 따라 오고 여기 머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막무가내였다. 엘리사는 세 번이나 똑 같은 고백을 하였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하2:2, 4, 6)

3절과 5절의 말씀에 보면 이제 장차 선지자 엘리야를 하나님이 하늘로 불러 올리 실 것을 선지자의 제자들도 알았고 엘리사도 알고 있었다. 다만 엘리사는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하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장차 하실 일을 잠잠히 침묵하며 지켜보고 싶어 하는 진지한 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엘리야 선지자은 아합 왕 시대에 왕과 왕비와 온 나라의 백성들이 나서서 바알 우상을 숭배할 때에 외롭고 고독하게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던 시대적인 인물이었다. 엘리야는 성령의 사람이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등장하는 첫 장면은 열왕기상 17장 1절이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임금 앞에서라도 할 말을 하던 용기 있는 선지자였다. 엘리야는 바알을 숭배하던 왕 아합 앞에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그런 말을 감히 전달할 수 있었던 담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렇다. 모세 시대나 엘리야의 시대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으로 임하신다.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셔서 변형되신 적이 있으셨다. 그 때에 산꼭대기에서 만났던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였다. 마태복음 17장과 마가복음 9장, 누가복음 9장에 골고루 나오는 내용이다. 그 내용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했다. 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였다. 그렇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무조건 “믿습니다. 믿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종교가 아니다. 돌이나 나무로 깎아서 만들거나 금이나 놋을 녹여 부어 만든 우상 앞에 절하는 우상 숭배의 종교가 아니다. 그 변화산 위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덮였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하나님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엎드려서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모세 시대에는 모세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셔서 모세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에게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혀서 엘리야를 사용하셨다. 예수 시대에는 예수의 잉태와 탄생과 물세례 현장에서의 비둘기와 같은 성령의 세례와 더불어서 예수의 평생을 성령으로 인도하셨다. 예수는 사십일 간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각색 병자들을 고치셨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각종 약한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실리셨고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셨다.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어린 아이가 가지고 나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넘는 이들을 배불리 먹게 하셨다. 예수의 평생은 성령의 충만한 출입이셨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죽으셨고 성령 안에서 부활 하셨다. 예수는 부활 후에도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선포하셨다. 예수는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택하신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 요한의 물세례처럼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시고 승천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셨다. 

우리가 그 동안 대해 온대로 엘리야 선지자의 모든 출입은 성령의 충만한 출입이었다.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게 까마귀를 동원하여 떡과 고기를 아침과 저녁으로 공급해 주셨다. 가믐이 계속되던 때에는 시돈 땅으로 피하여 그 곳에서 만난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아들과 그 어머니에게 가루 독의 가루와 기름 병의 기름이 계속하여 마르지 않는 기적을 베푸셨고 그 혜택을 엘리야도 누리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죽었던 아들도 엘리야를 통하여 살려 내셨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기도하지 비가 오지 않게 하셨고 다시 기도하니 삼년 반 만에 비가 내리게도 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평생에 그를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브엘 세바 광야에 지쳐 잠들어 누워 있던 엘리야에게 천사를 동원하셔서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해 주셨다. 새 힘을 얻은 엘리야는 사십 주야를 걸어서 호렙 산 동굴 속에서 지냈다. 하나님은 그 곳에도 찾아 가셔서 엘리야를 만나셨고 엘리야의 남은 나중 사역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그 하신 말씀들을 차근차근 다 이루셨다. 엘리야 시대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고 각종 기적을 체험하였다. 그렇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어 가셨다. 

오늘 날 우리 교회 안과 밖에 이와 같은 여호와의 말씀 운동이 성령의 운동으로 불길처럼 번져 가기를 소원한다. 금주 금요일에 있을 “커피 브레이크 소그룹 지도자 웤샵”도 그런 말씀 운동, 성령 운동의 한 증거가 될 것이다.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기는 어른 아이,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말씀 운동, 성령 운동에 붙잡힌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엘리사가 그런 인물이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었던 엘리야의 곁을 마지막 순간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모세의 곁에 여호수아처럼, 엘리사는 언제나 항상 엘리야의 곁을 지키고 떠나지 않았다. 성령의 사람을 가까이 하자. 이것이 성령 충만을 받는 길 중의 하나이다. 6절과 7절에도 보라. “두 사람이 가니라. 두 사람이 서 있더니”라는 말씀이 주는 도전이 그러하지 않나. 언제 부터인가 엘리야의 곁에는 항상 엘리사가 있었다.


성령의 사람 엘리야. 
엘리야 선지자가 떠날 순간이 다가 오자 엘리사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하였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2:9)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갑절의 성령을 원하였다. 단지 엘리야에게 평소에 늘 임하였던 하나님의 성령을 갑절 받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어떤가. 여러분은 어떤가. 혹시 자녀라면 부모에게 무엇을 갑절 받기를 원하나. 부모보다 갑절 부자로 살기를 원하나. 부모보다 갑절의 명예, 권세, 인기, 출세, 성공을 원하나. 부모라면 자녀에게 무엇을 원하나. 자녀들이 나의 대(代)보다 갑절의 재산가가 되기를 원하나. 갑절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나. 갑절로 성공하고, 갑절로 출세하고, 갑절로 권력을 누리고, 갑절로 인기를 누리고, 갑절로 잘 나가기를 원하나.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풀처럼 시들고 꽃처럼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인간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말하지 않았나. 전도서 1장이 어떻게 시작되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다. 솔로몬은 또 이렇게 말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전1:25) 전도서의 끝은 이렇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3-14)
헛된 세상에서 엘리야처럼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자. 우리가 그 동안 대한 대로 엘리야는 왕이라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한 생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성령 충만한 선지자였다. 엘리야의 시대에 엘리야는 입을 열어 하나님이 전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하였다. 그는 시돈 땅 사르밧의 과부나 그의 아들이나 아니면 이스라엘 나라의 임금 아합이나 왕비 이세벨이나 그 어느 누구이든지 모든 사람을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였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언제나 성령 안에 있었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전하곤 하였다.

엘리야는 아합 왕 당시에 왕의 부부가 앞장서고 나라의 적지 않은 백성들이 동조하면서 바알이 참 신이라고 우상을 숭배하던 타락 시대에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라고 담대하게 말하던 여호와의 사람,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적당히 세상적으로 키우고, 적당히 세상적으로 장성하고 적당히 세상적으로 시집가고 장가가고 적당히 세상적으로 살면서 아쉽고 필요하면 ‘하나님’을 찾는 정도의 신앙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은 노아 홍수 시대 이전에 세상에 가득한 모습이었다. 노아 시대에 번성하던 인간들은 사람의 외모의 아름다움만 보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었다. 그런 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안 계셨다. 성령을 부인하며 살았다. 그런 그 시대의 모습을 하나님은 한탄하셨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오늘 만 성령 충만을 생각하지 말고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의 충만함, 말씀의 충만함으로 살자.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일터에서나 밤이나 낮이나 그 어디서나 성령의 충만함을 늘 염두에 두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요즘 혼자 자주 부르는 찬송이 “내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484장)이다.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지혜의 주여 말씀으로서 언제나 내 안에 계십소서 
주는 내 아버지 나는 아들 주안에 내가 늘 함께 하네 

세상의 영광 나 안보여도 언제나 주님의 나의 기업 
주님만 내맘에 계시오니 영원한 주님 참 귀하셔라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다가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 되소서 아멘”

이 찬송가의 가사는 8세기에 아일리쉬 사람들 중에 그 누군가가 지어 부르기 시작한 찬송이다. 1200년 전의 아일리쉬 사람들의 경제적인 여건이 어떠하였겠나. 2000년 전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순교를 각오하였던 그 신앙, 그 믿음을 본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라기 4장에서 선지자 엘리야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이 땅에 보내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성령의 사람, 말씀의 사람으로 사용하셨다. 


갑절의 성령을 사모한 선지자 엘리사. 
엘리사는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 언제나 항상 엘리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이요 영의 아버지와 같던 엘리야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불 수레와 불 말 가운데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불러 올리셨다. 엘리사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엘리야를 쳐다보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왕하2:12)라고 소리쳤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아버지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아버지’하는 정도의 호칭이 아니다.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를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이미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임하여 역사하던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나 자신에게 임하기를 요청하였다. 이는 마치도 엘리사 자신이 엘리야의 양자가 된 것처럼 장남에게 나누어지는 갑절의 영적 유산의 분깃을 요청한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엘리사에게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사에게 평소에 그렇게 원하던 갑절의 영감의 은혜를 부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 장면 앞에서 큰 소리로 소리친 것이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고 말이다. 병거나 마병은 왕이 다스리는 군사력의 상징이다. 그러면 왜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 장면으로 보며 그렇게 말하였을까. 

엘리야는 이스라엘 국가의 모든 병거와 마병을 동원한 것보다 더 강력한 여호와의 기운으로 국가의 흥망성쇠에 관여한 하나님의 영의 사람이었다.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비를 멈추셨고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다시 하늘에서 비를 내리셨다.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의 집 가루 독과 기름 병의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이 계속되게 하셨다.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이라도 살려 내셨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시시 때때로 응답하셨다.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셨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셔서 제물과 제단을 불 태우셨다. 엘리사가 원한 갑절의 성령이란 단순히 엘리야를 통한 기적이 부러워서가 아니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던 선지자였다. 그런 엘리사를 하나님은 축복하셨고 엘리야의 대를 잇는 선지자로 불러 쓰셨다. 
하나님은 그 시대, 그 시대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을 찾으신다. 노아 시대의 노아, 모세 시대의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여호수아, 기드온 시대의 기드온, 사무엘 시대의 사무엘, 다윗 시대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등등 하나님은 그 시대의 성령 충만한 말씀의 사람을 찾아 쓰기를 원하신다.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리움을 받은 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처럼 기적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엘리야의 남긴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치자 강물이 이리 저리 갈라졌다. 엘리사는 유유히 그 강바닥을 건너서 여리고로 향하였다. 그 때에 맞은 편 여리고에서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를 보며 말하였다.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왕하2:15)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7절에 보면 선지자의 제자들 50명이 언급되었다. 그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를 보고 한 결 같이 말하였다.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2016년 5월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올해 계획하고 이루기를 원하는 계획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 엘리사처럼 갑절의 성령을 구하는 기도의 생활을 하자. 엘리야의 때에 성령의 하시던 역사가 갑절이나 나에게도 임하도록 기도하고 사모하자. 그런 개인, 그런 가족, 그런 교회, 그런 속회, 그런 교회학교, 그런 성가대, 그런 성도들이 모두 다 되자. 갑절의 성령, 갑절의 은혜, 갑절의 부흥과 갑절의 축복을 간증하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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